LOGIN그는 항상 그때의 행복했던 아르텐시아를 기억하며 온 힘을 다해 때를 기다렸다.
여신이 살아나길 고대했던 그 순간순간에.
그때의 모습을 온전히 돌려놓진 못하더라도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찾길 원했다.
에테르는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에게 내려졌던 여신의 힘을 그녀에게 돌려주는 것뿐이었으므로.
그렇게 그녀가 여신으로서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그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곧 사라질 거에요.}
그러니 아르텐시아는 이겨내야 했다.
에테르의 진정한 죽음에서 오는 부재를.
그는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올려 자신을 올려보는 여전히 아름다운 아르텐시아를 꼼꼼히 기억에 새겼다.
“아, 안돼! 에테르, 안돼…, 흐어엉!”
에테르의 갈라진 틈 사이로 푸른 빛이 더욱 거세게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영험함이 남아있는 이 나무에서 심장과 같은 힘이 사라진 자신의 모습을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대신 땅을 기고 자신에게 달려들어 빛을 막으려 드는 아르텐시아의 가녀린 손을 봤다.
이제는 현신하여 잡아주지 못하는 저 작고 사랑스러운 손을.
에테르는 그녀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이 한 조각을 돌려받음으로써 되돌릴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돌아가세요.}
“어딜, 돌아가라는…!”
에테르는 조금 전 희미했던 것이 무색하게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에게 대부분 빼앗겼지만, 난 많은 것을 지켜냈어요.}
그는 잠시 세계 그 자체로서 행했던 많은 이로운 일들을 떠올렸다.
지키고 아꼈으며 많은 선과 지혜를 나눴던 일들이 그의 푸른 빛과 함께 아스라이 먼 곳으로 사라졌다.
외롭게 지탱했던 세계와 세계에 살아있는 온갖 생명들, 그리고 아르텐시아가 차례대로 스쳐 사라졌다.
에테르는 심장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음을 느꼈다.
“서, 설마….”
{그리고 당신을 지켜냈어요.}
사냥꾼의 눈과 직감을 피해 뿌리 아래 깊숙이 숨겨놨던 힘.
그가 그녀에게 돌려줄 것이었다.
아르텐시아는 자신을 신황이라 불리우게 만든 그자보다 먼저 이 심장을 쟁취해야 했다.
{이 세계는 잊어요. 아르텐시아.}
당신이 사랑했던 세계를 잊고
인간을 잊고
날 잊어요.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원래의 자리로, 여신으로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자신 외의 것을 사랑하지 마.
에테르는 하지 못한 말을 저 심연까지 끌어 내려 삼켜냈다.
아르텐시아는 비로소 손바닥에 닿은 푸른 조각으로부터 방대한 힘을 느꼈다.
신비롭고 가슴이 벅찰 정도로 따스한 힘이었다.
이전에는 그녀의 것이었고 지금은 그녀가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힘이었다.
“에테르…, 날 돌려보내려는 거야?”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땅 밖으로 튀어나온 뿌리가 서서히 대지 위로 바람과 함께 바스라져 사라지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제 머리 위로 뻗어나 있는 줄기 끝자락이 가루가 되어 잿빛 하늘 위로 나부끼자 더 크게 소리쳤다.
“날 살린 이유가, 당신을 죽이는 이유가!?”
그때 습하고 더운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한번 훑고 사라졌다.
에테르는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아르텐시아는 발버둥을 치며 나무 기둥에 매달렸다.
“제, 제발! 제발…, 에테르. 사라지면 안 돼…흐으윽! 제발!”
그녀가 끌어안는 작은 힘에도 나무껍질이 갈라져 떨어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 모진 수모와 고통을 이겨낸 이유가, 그 또한 인간이 알아야 할 지혜와 시련이었기에 참았다.
세계인 에테르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었다.
이것 또한 순리요, 이후에는 당연히 에테르가 도울것이라고 확신했다.
저 멀리, 그녀를 지키지 못해 절망의 탄식을 내뱉는 에테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렇게 안심했다.
에테르는 안전할 테니까.
살아있을 테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그가, 인간인 그들에게는 아직 그가 필요할 테니까 근간을 흔들진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안심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무참히, 무참히 짓밟혔다.
“아악!!”
{사랑했어요. 아르텐시아….}
내 세계, 나의 동반자.
나의 에테르.
여신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결국 요동치는 푸른 빛이 텅 비어버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느꼈으니까.
“크흑…!”
괴로운 신음을 삼킬 수 없던 그녀의 눈동자에 슬픔과 경멸의 색이 짙게 퍼졌다.
아르텐시아는 그 눈동자를 숨기지 않은 채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아스라이 사라지는 에테르와의 추억과 바스라지는 그의 줄기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흐읍…! 흑…”
아르텐시아는 파랗게 뜬 두 눈에서 지저분한 얼굴과 목을 타고 분노가 흘러내리는 것을 에테르의 기운이 감싸 안는 것을 느꼈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것들이 메마른 손위에 떨어져 푸른 빛으로 스며들었으니까.
그 빛은 비어버린 마음에 환희가 가득 차듯 따스하게 그녀의 온몸으로 퍼져 들었다.
작은 발이 메마른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정도로.
그것은 위대하며 방대했다.
에테르가 기어코 뿌리 깊숙이 숨겨낸 이 힘은 분명, 그녀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르텐시아는 에테르에게서 한 손을 떼어냈다.
흐르는 눈물을 거두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였다.
그녀는 에테르로부터 받은 푸른 빛이 손을 타고 흐르다가 작은 불꽃 모양을 만들며 주위를 배회하는 것을 봤다.
불꽃은 비탄에 빠진 얼굴을 타고 눈앞에서 일렁였다.
마치 그 뒤에 있는 작아진 에테르의 심장을 대변하듯이.
“……여신이 꿈속에 찾아올 때까지.” 아르텐시아는 푸른 눈동자를 더욱 빛내며 노래를 불렀다. 힘이 솟고 체력이 좋아지는 기분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황홀감에 사로잡혔다. “아르텐시아-. 아르텐시아-.” “아르텐시아-. 아르텐시아-.” 인간들이 여신의 이름을 부를 때는 이 기분에 도취되어 더욱 힘차게 현을 뜯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 느꼈던 충만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기쁨의 눈물이 아닌 울분의 눈물이. ‘아미노, 네가 나와 에테르에게서 이러한 것들을 빼앗았구나.’ 인간으로서 감히 신의 자리를 빼앗아 그것을 취하며 누렸던 것에 중독되어 갔구나. 아미노는 이렇게 순수하고 찬란한 것을 받아 놓고 행실은 지옥의 사자보다 못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구정물과 같은 놈.’ 아르텐시아는 마지막 현을 튕기며 분이 맺힌 눈을 털어냈다. 며칠 후. 마을에는 비가 내렸다. 긴 가뭄을 조금은 해소해 줄 만한 비였다. 비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꾸준히 길게 내렸다. 마을 인간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잠시 비가 멈추었을 때는 땅을 일궜다. 이제 마을에는 여신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어렵지 않게 들려왔다. “이게 다 여신님 덕분이야!” “아르텐시아!” 처음에는 말장난으로 시작된 그것은 점차 진실로 변해갔다. 그리고 곧 숭배가 될 터였다. 라리아의 텃밭에도 물기가 어려 농작물이 생기를 찾고 새파란 이파리를 드러냈다. 올리브나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리! 오늘은 비가 오니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아르텐시아는 방안에서 어둠과 같은 새카만 자국이 양손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동안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녀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라리아의 목소리에 나갈 채비를 했다. “곧 비가 잠시 그칠 거야.” “언제쯤?” 라리아가 조심스럽게 아르텐시아의 곁으로 오며 물었다. “태양이 머리 위에 있을 때.” “점심 식사를 해야할 때구나.” 그녀는 악기를 챙기는 아르텐시아를 붙
그녀는 약간 긴장한 채로 이 궁금증을 해소해 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자장가란다.” 하지만 답은 아르텐시아의 입에서 나왔다. “여신의 자장가지.” 그녀는 라리아가 긴장한 채로 자신을 보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사가 정말 좋던데!” “과연 음유시인이군!” 마을의 인간들은 음유시인이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야기를 하는 재주를 가진 음유시인이었으니까. 한참을 그녀의 음률이 담긴 한 편의 시에 대해 찬양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르텐시아는 후드 안에서 아주 오랜만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웃음은 순수해 보이면서도 기쁨보단 희열에 차 있었다. “아르텐시아-. 아르텐시아-.” 그녀는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노래를 부르면 그 음에 현을 튕겨 멜로디를 입혀줬다. 아이들은 즐거워 보였고 어른들은 그것을 보며 기쁘게 웃었다. 그리고 어느덧 어둠이 다가올 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내일을 기약하며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라리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르텐시아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다다라서 그녀는 무심코 작은 텃밭에 시선을 돌렸다. “…….” 올리브나무의 새로운 줄기가 돋아나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무사히 집으로 들어갔다. “난 저녁 식사를 준비할 테니 간단히 씻고 나오렴.” 아르텐시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라리아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잠시 의자에 앉았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는 요 며칠 자신의 일상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을 되짚었다. 심란함이 턱 밑에서 맴돌았다. 이 고민과 고뇌는 아이작이 다녀가기 전부터 함께했으나 다시 찾아온 그를 마주하며 더욱 길을 잃고 방황했다. ‘그녀를 도와라.’ 그의 눈은 회색빛이 아니었다. 라리아는 아이작의 인간의 눈을 그때 처음 봤다. 그는 이미 자신의 딸이 아닌 이방인이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그리고 가끔 오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
*** “저 이는 누구시오?” “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는 음유시인이라는 자들 있잖소.” “그런데 말을 안 하잖아?” 며칠 전부터 이 더럽고 허름한 마을에 음유시인이 나타났다. 그는 깔끔하지만 낡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마을 중앙에 있는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다짜고짜 악기의 현을 뜯기 시작했었다. 처음 마을에 모습을 드러낸 날, 음유시인은 가볍게 연주만 했다. 마을을 지나다니는 모두가 보았으나,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마을을 떠났다. 어둠이 몰려와 각자 집으로 돌아간 마을의 인간들은 작은 나무 의자를 회상하며 그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돈도 빵도, 마음도. “어라, 저 이가 또 왔네.” 하지만 음유시인은 다음 날 아침에도 마을의 중앙에 나타났다. 낡은 현을 튕겨내는 그의 가녀린 손이 빵 한 조각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이 같았다. ♩♪♬ “저런, 저 가는 손가락 좀 보게.” “저러니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거겠지.” 곧 죽겠구나. 마을의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중이 떠중이가 돌아다니다가 이 끝까지 떠밀려 왔구나, 하고. 송장 치우기 싫었던 어른들은 일찌감치 그에게서 관심을 껐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우와! 이런 소리 처음 들어봐!” “이건 무슨 악기에요?” 어깨너머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대충 알아들은 아이들이 음유시인에게 몰려들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닌다는 신비한 음유시인이 튕겨내는 멜로디는 아이들의 몇 안 되는 인생 중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낡았지만 소리가 맑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괜히 가슴이 울리고 두 손을 맞잡게 하는 힘에 매료되어 갔다. 그렇게 음유시인이 나타난지 둘째 날이 지나 셋째 날이 되었다. 음유시인은 여전히 마을 중앙에 나타났다. 머리 위에 태양 빛이 만연한 시간이었다. 작은 나무 의자에 자리를 잡은 그의 옆에는 얇은 천으로 덮인 바구니가 하나 놓였다. 아이들이 모여들어 그의 앞에 자리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기억을 읽으셔도 좋습니다.” 아이작은 신력도 신성력도 가지지 못했던 인간이었다. 정말 우연과 운명이 겹쳐져 세계의 흐름과 같은 에테르의 힘을 갖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필연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아르텐시아는 모르는 일이었다. 해서, 아이작은 에테르의 힘을 일부나마 사용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이후에는 쓰지 않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 지금의 아르텐시아라면 분명 믿음 이전에 날 선 비난을 던질 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아이작의 예상과 달랐다. 아르텐시아는 잠시 침묵하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잡아챘다. “아, 아르텐시아?” 또 무례하게 여신의 이름을 부른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아르텐시아는 한참을 그와 눈을 마주쳤다. 무언가를 찾는 듯이.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인상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현자의 눈. 에테르가 세상을 보게 했던 그 눈 안에 약하지만 분명한 신비한 빛이 숨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여 얼핏 보면 회색빛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저 빛은 분명…. “…에테르와 눈으로 이어져 그 힘이 일부 전해졌구나.” 에테르였다. “많지는 않습니다….” 거짓말.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에테르의 형상을 일시적이나마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었다. 결코 적지 않고 작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300년이상을 그는 에테르의 눈으로 살았다. 아르텐시아는 순간 명치께가 조여오고 숨이 막혀와 급하게 떨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운 에테르의 힘을 끌어안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만큼 그가 숨긴 에테르의 힘은 그 의미가 강력했다. 아르텐시아는 진정하기 위해 손안의 에테르 조각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아이작은 묵묵히 그것을 지켜봤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숲을 흔드는 바람만이 그들의 사이를 오갔다. 그녀는 다시 차갑게 죽은 눈으로 돌아와 말했다. “아미노도 알고 있는 것인가.” 그 눈에는 의심과 경계의 빛이 서렸다. “모릅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르텐시아님…!” “하!” 아이작은 내심 부활한 여신과의 재회를 기대했었다. 진실을 고하고 용서를 빌어 자비를 바라길 고대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태풍 앞에 얇은 유리창과 같았다. “살고 싶은 것이냐?” 아이작의 세상이 돌았다. 탄생하여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여신이 땅에 묻힐 때였고 지금이 두 번째였다. “아미노의 편에 서서 나와 에테르를 능멸할 때는 언제고, 살고 싶은 것이구나.” “아닙니다, 아니에요!” 기어코 터져나오지 못한 억울함이 주체를 알 수 없는 원망으로 가슴을 찔렀다. 아르텐시아에게 자신은 한낱 어리석고 멍청한 살인자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에테르여, 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저, 에테르가 말했던 ‘언젠가 필요한 기억’의 언젠가가 지금 이 순간일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지혜를 나누는 에테르의 눈이 지혜를 얻지 못해 길을 잃고 있었다. “이제 그대들은 내게 필요 없다.” 아르텐시아는 아이작을 뒤로하고 제대를 마주했다. “나와 에테르에게 필요 없는 존재야.” 그녀는 물기가 남아있는 제대 위를 눈으로 쓰다듬고 그곳에서 비켜섰다. 도통 움직일 마음이 없어 보이는 아이작을 내버려 두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이작이 혹시라도 다른 현자들에게 알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아미노에게만은 전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으니까. 그의 눈동자에서 아미노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읽기란 아주 쉬웠다. 아르텐시아는 이유를 알아내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아이작의 목소리가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았다. “제가… 돕겠습니다.” “필요 없다.” 아르텐시아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매몰차게 걸었다. “돕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필요, 없다.” “지금은 부족하지 않으십니까!” 아이작은 어느새 차분해진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이곳에 오신 이유도, 시시를 찾아 가시려는 이유도.” 넓은 공간에 울려 퍼지던 작은 발소리가 멈췄다. “신력을…, 힘이 필요하
아르텐시아를 그것을 마치 창에서 뽑아낸 칼날처럼 손에 쥐었다. “이해와 자비를 베풀 여신이 없으니 용서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같잖은 짓은 그만두어라. “그저, 기다리세요.” 아이작. “여신이 그대들의 목을 취하기 위해 몰고 올 죽음을.” 이 세계와 함께 저물기를 기다려라. “지금 죽이지 못하는 이 한이 심연과 함께 찾아올 테니.” 그때, 나 또한 에테르를 끌어안고 심연의 바다에 같이 뛰어들리라. 아르텐시아는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며 생명의 샘이 마를 때까지 고통의 공포에 절여지는 형벌을 내릴 날을 고대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의 이 혼란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고난일 뿐이다. 그녀는 그리 쉽게도 생각했다. 그때, 땅에 떨어져 마구 밟힌 꽃잎처럼 늘어져 있던 아이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엔 이미 심연이 다가와 있었으나 그녀를 올려 보는 눈동자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현자를, 인간을 다 죽일 생각이십니까.” 에테르가 부재인 지금, 현자마저 사라진다면 세상은 망조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하면 혼란과 절망이 땅 위로 솟아나 인간들은 원망과 절망 속에서 멸망을 맞이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작의 눈동자가 애처롭게 떨리며 대답 없는 아르텐시아를 올려다봤다. “혹여… 시시에게 가시는 길입니까.” 그녀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전 터를 옮아 매던 스산한 바람이 순식간에 태양 빛과 함께 어우러져 사라졌다. 다시 제대에는 태양 빛이 내려앉았다. 아르텐시아가 휘두를 수 있는 힘의 끝이었다. “시시에게 내리셨던 힘을 거두러 가시는군요….” 이곳은 동쪽으로 향하는 길의 입구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그리고 동쪽에는 시시의 숲이 있었다. 역시 아이작이 유추하지 못할 리 없었다. 현자의 눈 아이작. 그래서 그는 아르텐시아가 마주하기 부담스러운 자였다. 이전에는 영민하고 총명하여 에테르와 여신의 선택을 받았으나 그것으로 인해 그녀는 난감한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었으니까. 아르텐시아는 끝내 그 무엇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