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기에 잠식된 대공

마기에 잠식된 대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By:  유월Updated just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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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괴물이라 부르는 북부 대공 단테. 마기에 잠식된 그는 사람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가둔다. 황실에서 사람을 가르치며 성장한 엘라는 그런 그에게 묻는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보다, 어떤 사람인지부터 보면 되잖아요.” 마기를 정화하는 여자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남자. 서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함께 다른 선택을 배워가는 두 사람의 느린 상호구원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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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황태자 전하, 또 지셨습니다

“전하.”

“…….”

“황태자 전하.”

“…….”

“테오도르.”

“들려.”

풀밭에 대자로 누워 있던 소년이 마침내 대답했다.

엘라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따뜻한 봄이었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에는 연둣빛 새순이 돋았고, 황궁 정원을 가득 채운 벚나무에서는 연분홍 꽃잎이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살랑이는 바람.

부드러운 햇살.

향긋한 꽃내음.

그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가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엘라는 손에 든 목검으로 테오도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살아 계십니까?”

“죽었어.”

“말씀하셨으니 살아 계십니다.”

“방금 죽었어.”

“죽은 사람은 두 번이나 대답하지 않습니다.”

테오도르는 눈을 감은 채 입을 다물었다.

엘라는 다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쿡.

“일어나십시오.”

“싫어.”

쿡.

“일어나십시오.”

“엘라.”

쿡.

“그거 그만해.”

“일어나시면요.”

테오도르는 결국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는 황태자한테 겁도 없이 이래?”

엘라는 목검을 거두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프셨습니까?”

“아팠어.”

“죄송합니다.”

너무도 순순한 사과였다.

테오도르가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끝이야?”

“네.”

“변명은?”

“제가 찔렀는데 무슨 변명을 합니까?”

“보통은 실수였다거나,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하잖아.”

엘라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찔렀습니다.”

“…….”

“안 일어나셔서요.”

테오도르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이상한 애였다.

펠리시아 공작가의 둘째 영애.

엘라 펠리시아.

열 살.

황태자와 동갑.

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딸이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귀족 영애답지 않았다.

보통 또래의 귀족 아이들은 테오도르 앞에서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했다.

‘황태자 전하.’

‘제국의 작은 태양.’

‘미래의 황제 폐하.’

듣기만 해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그런데 엘라는 달랐다.

첫 만남에서 황태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생각보다 작으십니다.’

물론 바로 옆에 있던 펠리시아 공작이 딸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그리고 오늘.

엘라는 그 황태자를 열세 번이나 풀밭에 넘어뜨렸다.

테오도르는 저 멀리 떨어진 자신의 목검을 바라보았다.

“열세 번.”

“네.”

“열세 번이나 졌어.”

“그렇습니다.”

“조금은 위로해 줄 수도 있잖아.”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다음에는 열두 번만 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게 위로야?”

“한 번 줄었습니다.”

“엘라.”

“네.”

“넌 위로하지 마.”

엘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엘라는 정말로 자신을 비웃는 것이 아니었다.

못한 것은 못했다고 말했지만, 그보다 나아진 부분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엘라는 떨어진 목검을 주워 테오도르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괜찮았습니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처음에는 세 번 만에 검을 놓치셨습니다.”

“그걸 꼭 말해야 해?”

“하지만 마지막에는 열여섯 번이나 막으셨습니다.”

테오도르가 입을 다물었다.

엘라는 목검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어제보다 잘하셨습니다.”

잘했다.

테오도르는 그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검술 선생도.

제왕학 교수도.

궁정 예법을 가르치는 사람도.

늘 잘했다고 했다.

황태자이니 훌륭하다고.

역시 황실의 후계자답다고.

하지만 이상했다.

지금 엘라에게 들은 한마디가 그 모든 칭찬보다 더 기분 좋았다.

아마 엘라는 못했을 때 정말로 못했다고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잘했다는 말도 믿을 수 있었다.

테오도르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지.”

엘라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귀가 빨갛습니다.”

“더워서 그래.”

“봄인데요.”

“오늘은 더워.”

“아까는 춥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엘라.”

“네.”

“가끔은 모르는 척해.”

엘라는 고민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진심으로 노력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테오도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작게.

그러다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엘라도 따라 웃었다.

두 아이의 웃음이 봄날의 정원 위로 번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놀란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잘 웃지 않는 아이였다.

정확히는 사람들 앞에서 웃는 법을 너무 일찍 잊은 아이였다.

그가 웃으면 모두가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그가 인상을 쓰면 모두가 자신의 잘못을 찾았다.

그가 피곤해하면 교육이 부족하다는 말이 나왔고.

그가 실수하면 후계자의 자질이 거론되었다.

그런 시선 속에서 테오도르는 점점 표정을 감추는 법부터 배웠다.

그런데 지금은 풀밭에 앉아 웃고 있었다.

자신을 황태자가 아니라 그저 대련에서 진 친구로 대하는 소녀 앞에서.

정원 가장자리에 선 커다란 벚나무 아래.

두 남자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황제.

그리고 맞은편에는 그의 오랜 친구인 펠리시아 공작이 있었다.

황제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열세 번이라.”

공작의 손이 멈췄다.

“보고 계셨습니까?”

“처음부터.”

“그럼 왜 나무 뒤에 숨어 계셨습니까?”

“숨어 있다니. 황궁 정원에서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이지.”

“나무 줄기 뒤로 의자를 옮기지 않으셨습니까?”

“그늘이 좋아서.”

공작은 말없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친구.”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폐하께서 저렇게 부르실 때는 대부분 안 되는 부탁입니다.”

황제가 소리 내 웃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다.

황제가 아직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공작이 가문을 잇기 전부터.

그래서 공작은 알고 있었다.

황제가 저렇게 눈을 반짝일 때면 대개 자신에게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요즘 테오도르가 많이 웃더군.”

황제가 말했다.

공작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원으로 향했다.

엘라가 목검을 쥔 자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대로 따라 했다.

“좋은 일 아닙니까?”

“좋은 일이지.”

황제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래서 더 마음에 걸리네.”

“무엇이 말입니까?”

“내 아들이 원래 저렇게 웃는 아이였나 싶어서.”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너무 일찍 황태자가 되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황태자였으니 당연한 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 자리가 너무 무거웠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군주가 될 사람으로 평가받았고.

처음 검을 쥔 날부터 제국의 미래와 비교되었다.

“엘라는 그런 것을 모르니까요.”

공작이 말했다.

“황태자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도, 자신의 말 한마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그래서 좋은 것 같네.”

“폐하.”

“저 아이는 테오도르를 그냥 테오도르로 보는 것 같거든.”

공작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 목이 날아갈까 걱정입니다.”

“내가 있는 동안은 괜찮네.”

“그 뒤가 걱정이라는 말입니다.”

황제가 다시 웃었다.

그때 시종 하나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폐하, 점심 준비가 끝났습니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도 데려오게.”

“예.”

시종이 정원으로 향했다.

황제는 멀리 있는 두 아이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 욕심이 나는군.”

공작은 못 들은 척 찻잔을 들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시종의 말을 들은 테오도르의 표정이 굳었다.

“왜?”

“점심을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테오도르는 곧장 엘라를 바라보았다.

“오늘 몇 번 졌는지 말하지 마.”

엘라는 눈을 깜빡였다.

“왜요?”

“아버지가 물어볼 거야.”

“그러면 대답하면 되지 않습니까?”

“열세 번 졌다고?”

“네.”

“엘라.”

“거짓말은 나쁩니다.”

“거짓말하라는 게 아니야. 그냥 말하지 말라는 거지.”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그것도 비슷한 것 아닙니까?”

“전혀 달라.”

“어떻게 다릅니까?”

테오도르는 설명하려다가 포기했다.

“됐다.”

두 아이는 시종을 따라 궁으로 향했다.

정원을 가로지르던 엘라가 문득 물었다.

“많이 혼나십니까?”

“뭐가?”

“대련에서 지면요.”

테오도르는 잠시 망설였다.

“황태자는 져서는 안 된대.”

“누가 그랬습니까?”

“다들.”

“황제 폐하도요?”

“아버지는…….”

테오도르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길 때까지 다시 하라고 해.”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방법입니다.”

“내 편 좀 들어주면 안 돼?”

“전하의 편입니다.”

“어디가?”

“그래서 다시 하자는 겁니다.”

“그건 내 적이 하는 말이야.”

테오도르는 투덜거렸지만, 엘라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뭐가?”

“오늘은 지셨지만 어제보다는 나아졌으니까요.”

“그래서?”

“내일은 또 달라질 수 있잖아요.”

테오도르는 걸음을 늦췄다.

“내일도 와?”

엘라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버지가 오신다면요.”

“네 아버지가 안 오면?”

“그럼 저도 못 옵니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엘라는 그 표정을 바라보다 덧붙였다.

“하지만 오고 싶다고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테오도르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아직 전하를 열 번도 못 이겨 봤으니까요.”

“오늘 열세 번 이겼잖아!”

“연속으로 열 번은 아닙니다.”

“그게 중요해?”

“중요합니다.”

테오도르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면서도 조금 전 어두워졌던 표정은 사라져 있었다.

봄 응접실에는 따뜻한 햇살이 가득했다.

황제와 공작은 이미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두 아이가 들어오자 황제가 환하게 웃었다.

“왔느냐.”

테오도르는 얌전히 허리를 숙였다.

“폐하.”

엘라도 공손하게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테오도르.”

“예.”

“오늘은 몇 번 졌느냐?”

역시 물었다.

테오도르는 엘라를 흘끗 바라보았다.

엘라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황제가 엘라에게 물었다.

“엘라가 대신 말해 보겠느냐?”

“열세 번입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엘라!”

“물어보셨습니다.”

“조금 망설이기라도 해!”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은 이마를 짚었다.

“열세 번이라.”

황제가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르는 어깨를 움츠렸다.

“처음에는 몸이 덜 풀렸고요.”

“그래.”

“중간에는 바람이 눈에 들어왔고.”

“그래.”

“마지막에는 배가 고팠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유들이구나.”

테오도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정말입니까?”

“모두 패배의 이유로는 훌륭하지.”

“…….”

“승리의 이유는 아니지만.”

테오도르는 고개를 숙였다.

엘라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처음보다 오래 버티셨습니다.”

황제가 그녀를 보았다.

“얼마나?”

“처음에는 세 번 만에 검을 놓치셨고, 마지막에는 열여섯 번 막으셨습니다.”

“그랬느냐?”

“네.”

엘라는 덧붙였다.

“오늘도 지셨지만 어제보다는 잘하셨습니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잠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잘했구나.”

테오도르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황제가 결과가 아닌 과정을 칭찬한 것은 처음이었다.

“내일은 스무 번을 막아 보거라.”

“……예.”

“그리고 엘라.”

“네, 폐하.”

“조금은 봐주면 안 되겠느냐?”

엘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왜?”

“봐주면 전하께서 얼마나 나아졌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친구가 속상해할 수 있지 않느냐?”

“속상하다고 거짓말을 해도 됩니까?”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그럼 진 것을 이겼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황제는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테오도르가 황태자라서 더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냐?”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아닙니다.”

“그러면?”

“친구라서요.”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엘라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친구라면 잘못한 것을 알려줘야 하잖아요.”

“잘못했다고 말하면 그 친구가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말할 것이냐?”

엘라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싫어하지 않게 하려고 모르는 척하면.”

엘라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다음에도 똑같이 잘못할 테니까요.”

테오도르는 말없이 엘라를 바라보았다.

엘라는 자신이 특별한 말을 했다는 생각도 없는 듯 앞에 놓인 과자를 하나 집었다.

“하지만 저도 틀릴 수 있습니다.”

황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네가?”

“네.”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엘라는 과자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잠시 오물거리던 아이가 대답했다.

“제가 잘못했으면 사과해야죠.”

“그게 끝이냐?”

“다음에는 다르게 해야 하고요.”

너무도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황제는 가만히 엘라를 바라보았다.

완벽해서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아이였다.

그것이 황제에게는 더 낯설었다.

황제 주변의 어른들은 좀처럼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약점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는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잘못한 뒤에도 다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황제가 물었다.

“엘라.”

“네, 폐하.”

“그렇다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엘라는 손에 든 과자를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좋은 사람.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유모도 좋은 사람이었다.

테오도르는…… 가끔 얄미웠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은 늘 좋을 수 있을까?

엘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꼭 좋은 사람이어야 합니까?”

황제가 뜻밖이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지?”

“사람은 계속 좋을 수 없잖아요.”

“…….”

“화낼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고.”

엘라는 테오도르가 숨겨두었던 마지막 과자를 발견해 자연스럽게 가져왔다.

“남의 과자를 훔쳐 먹을 때도 있고요.”

“그건 내 거야!”

“아직 안 드셨습니다.”

“그래도 내 거야!”

황제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냐?”

엘라는 테오도르에게 과자를 반으로 나누어 돌려주었다.

“굳이 먼저 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빨랐다.

“같이 걸어갈 사람이요.”

“같이 걸어갈 사람?”

“네.”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넘어지면 기다려 주고.”

“…….”

“그 사람이 넘어지면 제가 기다려 주고.”

엘라는 반쪽짜리 과자를 한입에 넣었다.

“길을 잘못 들면 알려 주면 되잖아요.”

황제가 물었다.

“둘 다 잘못된 길로 갔다면?”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같이 돌아오면 됩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어떻게 알지?”

엘라는 이번에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의 반대가 꼭 나쁜 사람입니까?”

황제가 처음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엘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오래 봐야죠.”

응접실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테오도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엘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황제는 두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좋은 신하.

좋은 군주.

좋은 황태자비.

앞으로 테오도르의 곁에는 수많은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들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은 그런 이름으로 먼저 불리는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황제의 시선이 엘라에게 머물렀다.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말해 주고.

나아지면 알아봐 주며.

자신도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

혼자 앞서가거나 뒤에서 따르기보다.

그저 옆에서 함께 걸을 사람.

황제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친구.”

펠리시아 공작의 눈빛이 즉시 경계로 물들었다.

“안 됩니다.”

“아직 말하지 않았네.”

“이제 말씀하시겠지요.”

황제는 웃으며 엘라를 바라보았다.

“자네 딸을 한 달만 빌려주게.”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엘라가 즉시 끼어들었다.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하구나. 그러면 부탁하마.”

“무엇을요?”

“내일부터 테오도르와 함께 수업을 받아 보겠느냐?”

테오도르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엘라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검술 수업입니까?”

“제왕학과 역사, 정치와 예법 수업까지 전부.”

엘라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아침에 일찍 시작합니까?”

“해가 뜨기 전에.”

“숙제도 있습니까?”

“아주 많지.”

엘라는 천천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공작은 팔짱을 낀 채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황태자 교육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은 결코 가벼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이미 기대에 찬 얼굴로 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하자.”

“전하께서 수업 중에 주무시면요?”

“안 잘게.”

“어제도 그러셨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말했어?”

“시종장님이요.”

“그 사람은 왜 그런 것까지 말해?”

엘라는 잠시 고민했다.

“제가 깨워도 됩니까?”

“어떻게?”

“옆구리를 찌르면 됩니다.”

테오도르의 표정이 굳었다.

“손으로?”

엘라는 목검을 들어 보였다.

“이걸로요.”

“아버지, 다시 생각해 보세요.”

테오도르가 황제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이미 웃고 있었다.

그날.

황제는 어린 엘라를 아들의 첫 번째 친구이자 수업 동무로 받아들였다.

그 선택이 훗날 제국과 북부의 운명까지 바꾸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황태자의 첫 번째 합동 수업에서.

엘라는 황실 최고의 노교수에게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로.

교실 전체를 조용하게 만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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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 또 지셨습니다
“전하.”“…….”“황태자 전하.”“…….”“테오도르.”“들려.”풀밭에 대자로 누워 있던 소년이 마침내 대답했다.엘라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따뜻한 봄이었다.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에는 연둣빛 새순이 돋았고, 황궁 정원을 가득 채운 벚나무에서는 연분홍 꽃잎이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살랑이는 바람.부드러운 햇살.향긋한 꽃내음.그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제국의 유일한 황태자가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엘라는 손에 든 목검으로 테오도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살아 계십니까?”“죽었어.”“말씀하셨으니 살아 계십니다.”“방금 죽었어.”“죽은 사람은 두 번이나 대답하지 않습니다.”테오도르는 눈을 감은 채 입을 다물었다.엘라는 다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쿡.“일어나십시오.”“싫어.”쿡.“일어나십시오.”“엘라.”쿡.“그거 그만해.”“일어나시면요.”테오도르는 결국 벌떡 몸을 일으켰다.“너는 황태자한테 겁도 없이 이래?”엘라는 목검을 거두며 고개를 갸웃했다.“아프셨습니까?”“아팠어.”“죄송합니다.”너무도 순순한 사과였다.테오도르가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끝이야?”“네.”“변명은?”“제가 찔렀는데 무슨 변명을 합니까?”“보통은 실수였다거나,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하잖아.”엘라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일부러 찔렀습니다.”“…….”“안 일어나셔서요.”테오도르는 입을 다물었다.역시 이상한 애였다.펠리시아 공작가의 둘째 영애.엘라 펠리시아.열 살.황태자와 동갑.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딸이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귀족 영애답지 않았다.보통 또래의 귀족 아이들은 테오도르 앞에서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했다.‘황태자 전하.’‘제국의 작은 태양.’‘미래의 황제 폐하.’듣기만 해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그런데 엘라는 달랐다.첫 만남에서 황태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생각보다 작으십니다.’물론 바로 옆에 있던 펠리시아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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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엘라의 대답이 떨어진 순간.교실 안이 조용해졌다.창밖에서는 아침 햇살이 황궁의 첨탑 위로 막 번지고 있었다. 높은 창문을 통과한 빛이 길게 바닥을 가로질렀고, 잘 닦인 책상 위에는 새 교재와 잉크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황태자 전용 교실.본래라면 테오도르 혼자 수업을 받는 곳이었다.하지만 오늘부터는 자리가 하나 늘었다.테오도르의 바로 옆.펠리시아 공작가의 둘째 영애를 위한 자리였다.엘라는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어깨는 펴져 있었고, 두 손은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마치 방금 교실 전체를 얼어붙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맞은편에 선 노교수가 천천히 안경을 고쳐 썼다.“공녀.”“네, 교수님.”“방금 뭐라고 했습니까?”“모르겠다고 했습니다.”“…….”노교수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그의 이름은 에드먼드 베르디안.황실 제왕학 교수이자 제국 아카데미의 전임 학장이었다.황제의 교육을 맡았고.지금은 황태자 테오도르를 가르치고 있었다.황실 최고의 학자.까다롭고 엄격하며, 모르는 문제를 내는 것보다 모른다는 답을 더 싫어한다는 소문이 있는 사람이었다.테오도르는 옆자리에서 조용히 엘라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엘라가 고개를 돌렸다.테오도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뭐라도 말해.”“모르는데요.”“생각나는 걸 말하면 되잖아.”“생각나는 게 없습니다.”“그럼 아버지가 말한 거라도.”“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비슷한 거라도!”“조용히 하십시오.”“너 때문에 내가 더 떨리잖아.”“왜 전하께서 떨립니까?”두 사람의 속삭임이 생각보다 멀리 퍼졌다.에드먼드 교수가 손에 든 지휘봉으로 책상을 두드렸다.탁.“두 분.”테오도르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엘라는 교수에게 시선을 돌렸다.“죄송합니다.”“공녀.”“네.”“내가 무엇을 물었는지 기억합니까?”“황제가 반드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물으셨습니다.”“그런데 모른다고 답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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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잘못 봤습니다
“전하께서 하셨습니까?”엘라의 목소리가 교실 안을 또렷하게 울렸다.테오도르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멈췄다.“뭘?”“제 책이요.”“네 책이 왜?”엘라는 대답 대신 책상 위를 가리켰다.새것처럼 반듯했던 역사 교재의 표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푸른 잉크가 물에 번진 것처럼 얼룩져 있었고, 아래쪽 모서리는 길게 찢겨 있었다.어제 처음 받은 책이었다.엘라는 저녁 내내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읽었다. 아직 모르는 이름이 많아 작은 종이에 따로 적어 두기까지 했다.그런 책이 망가져 있었다.테오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이게 왜 이래?”“저도 묻고 있습니다.”“내가 어떻게 알아?”“전하께서 먼저 오셨잖아요.”교실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창가에 서 있던 시종이 두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직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라 에드먼드 교수는 오지 않은 상태였다.테오도르는 엘라의 책을 집어 들었다.“젖었네.”“보면 압니다.”“그리고 찢어졌어.”“그것도 압니다.”“엘라.”“네.”“나한테 화났어?”“조금요.”“왜 나한테?”엘라는 테오도르의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작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뚜껑은 열려 있었고, 안에는 푸른색 잉크가 절반쯤 남아 있었다.어제 테오도르가 새로 받았다며 자랑했던 잉크였다.엘라의 책에 번진 얼룩과 같은 색이었다.“전하의 잉크잖아요.”테오도르도 유리병을 바라보았다.“색이 같다고 내가 했다는 뜻은 아니야.”“교실에 먼저 오셨고요.”“그건 맞지만.”“어제 제 책을 빌려 달라고도 하셨습니다.”“안 빌려줬잖아.”“그래서 화나셨습니까?”테오도르의 얼굴이 굳었다.“뭐?”“말로 안 되니까 책을 망가뜨리신 겁니까?”“내가 왜 그런 짓을 해?”“전하께서는 가끔 화가 나시면 물건을 던지십니다.”“목검을 한 번 던졌어.”“두 번입니다.”“그건 대련하다가 놓친 거야!”“두 번째는 일부러 던지셨습니다.”“네가 열세 번째로 날 넘어뜨렸잖아!”“그러니까 화가 나면 물건을 던지시는 게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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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열일곱.”엘라는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손바닥에 흙과 잔디가 묻어 있었다.무릎도 조금 따끔거렸다.하지만 그녀는 곧장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주웠다.“다시 하겠습니다.”맞은편에 서 있던 기사가 난처한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테오도르는 훈련장 가장자리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그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다 말고 물었다.“엘라.”“네.”“뭘 다시 해?”“대련을요.”“방금 졌잖아.”“그러니까 다시 해야 합니다.”테오도르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열일곱 번이나 졌는데?”“열세 번 진 전하도 다시 하셨습니다.”“그건 네가 억지로 시켜서 그런 거야.”“그래도 하셨잖아요.”“나는 황태자니까.”“저도 공녀입니다.”“그게 무슨 상관인데?”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자신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었다.다만 황태자가 졌다고 다시 해야 한다면 공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목검을 고쳐 잡았다.“준비됐습니다.”맞은편의 기사가 다시 한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기사는 아직 젊었다.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를 짧게 잘랐고, 눈매는 선해 보였다.이름은 레온 하르트.황궁 제1기사단 소속의 정식 기사였다.실력이 뛰어나면서도 어린 견습 기사들을 잘 가르쳐, 오늘 엘라와 테오도르의 훈련을 맡게 되었다.문제는.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엘라가 훨씬 끈질기다는 것이었다.“공녀님.”레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아직 검을 들 수 있습니다.”“그건 보입니다.”“그럼 계속하겠습니다.”“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리고 계십니다.”엘라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분명 똑바로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릎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즉시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이제 안 떨립니다.”레온은 한숨을 삼켰다.“안 떨리는 척하시는 겁니다.”“아닙니다.”“방금 오른쪽 무릎이 세 번 흔들렸습니다.”“바람 때문입니다.”벤치에 앉아 있던 테오도르가 소리 내 웃었다.엘라가 그를 돌아보았다.“왜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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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가도 괜찮습니다
“검을 드십시오.”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견습생.”엘라가 다시 불렀다.“들리지 않습니까?”소년은 들고 있던 목검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정확히는 검을 든 것이 아니라, 가슴 앞에 방패처럼 붙잡고 있었다.목검 끝은 바닥을 향했고.작은 두 손은 하얗게 질릴 만큼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엘라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황궁 기사단의 보조 훈련장.정식 기사들이 사용하는 넓은 훈련장과 달리, 이곳에는 아직 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어린 견습생들이 모여 있었다.누군가는 목검을 휘두르고.누군가는 짝을 지어 발을 움직였으며.한쪽에서는 넘어지며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 가운데.엘라 앞에 선 소년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이름이 무엇입니까?”소년은 한참 뒤에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노아입니다.”“노아.”“……네.”“아까부터 왜 검을 들지 않습니까?”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엘라는 그의 자세를 살폈다.발을 잘못 디딘 것도 아니었다.다친 곳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목검은 다른 견습생들이 쓰는 것과 같은 크기였다.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뿐이었다.“사용법을 모르십니까?”노아가 아주 조금 고개를 저었다.“배웠습니다.”“그런데 왜 안 합니까?”“…….”“모르면 다시 물어봐도 됩니다.”엘라는 어제 레온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일을 떠올렸다.자신도 처음에는 부끄러웠다.그래도 묻고 나니 배울 수 있었다.노아에게도 같은 방법을 알려 주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검을 어떻게 잡는지 모르겠으면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압니다.”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빨랐다.엘라는 눈을 깜빡였다.“알면서 하지 않는 겁니까?”노아의 어깨가 움찔했다.“……네.”“왜요?”소년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엘라는 잠시 기다렸다.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놀림 훈련을 하던 테오도르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오늘 엘라는 손바닥의 상처 때문에 검을 들지 않기로 약속했다.그래서 레온은 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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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말해 주지 않겠습니다
“겁쟁이가 어떻게 기사가 돼?”훈련장에 웃음소리가 번졌다.크지 않은 웃음이었다.몇몇 아이가 입을 가린 채 킥킥거렸고, 누군가는 못 들은 척 목검만 만지작거렸다.하지만 노아에게는 충분히 큰 소리였다.바닥에 놓인 목검을 향해 뻗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손끝과 손잡이 사이.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의 거리를 남겨둔 채였다.“검도 못 잡잖아.”말한 아이의 이름은 세드릭이었다.황궁 근위대 부단장의 조카.노아보다 한 살 많았고, 견습 기사들 사이에서는 검을 제법 잘 다루는 편이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노아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최근 노아가 훈련장 한쪽에서 검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지자, 그 모습이 답답했던 모양이었다.“매일 와서 구경만 하고.”세드릭은 손에 든 목검을 빙글 돌렸다.“말이나 돌보려면 마구간지기가 되면 되잖아.”노아의 손이 천천히 거두어졌다.소년은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얼굴은 창백했고, 굳게 다문 입술만 조금 떨렸다.훈련장 가장자리에서 책을 읽던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바로 옆에 앉아 있던 테오도르도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방금 뭐라고 했어?”테오도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이들의 웃음이 순식간에 멎었다.세드릭의 얼굴도 굳었다.“저, 전하.”테오도르가 앞으로 걸어갔다.“다시 말해 봐.”“그게…….”“노아한테 뭐라고 했냐고.”세드릭은 입술을 달싹였다.조금 전까지의 기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황태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그것만으로도 아이에게는 충분한 압박이었다.“겁쟁이라고 했습니다.”테오도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사과해.”“하지만 전하.”“지금.”세드릭은 곧바로 노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미안해.”빠른 사과였다.그러나 노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신발 끝만 바라보았다.테오도르가 미간을 찌푸렸다.“제대로 해.”“미안하다고 했습니다.”“그게 사과야?”“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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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에 도착한 겨울
“아무도 나가서는 안 됩니다.”시종장의 단호한 목소리가 황궁 동쪽 별궁에 울렸다.복도를 오가던 시종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창문을 닦던 하녀도.꽃병을 옮기던 시녀도.간식 쟁반을 들고 있던 어린 시종도.모두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엘라도 교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한 손에는 역사 교재를.다른 손에는 아직 먹지 못한 작은 사과를 들고 있었다.“무슨 일입니까?”엘라가 물었다.옆에서 나오던 테오도르가 먼저 대답했다.“또 누가 사고 쳤나 봐.”엘라가 그를 바라보았다.“왜 저를 보십니까?”“안 봤어.”“방금 보셨습니다.”“그냥 옆을 본 거야.”“제가 옆에 있었습니다.”“그러니까 옆을 본 거지.”엘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사고를 친 적이 여러 번 있었으므로 완전히 억울한 의심은 아니었다.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아직은.“두 분께서는 교실로 돌아가 주십시오.”시종장이 빠르게 다가왔다.평소에도 엄격한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표정이 굳어 있었다.테오도르가 물었다.“무슨 일인데?”“확인 중입니다.”“그러니까 뭘 확인해?”“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테오도르의 눈썹이 올라갔다.시종장이 저런 말을 할 때마다, 대개 자신과 아주 밀접한 일이었다.“내 별궁에서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해놓고?”“곧 해결하겠습니다.”“뭐가 없어졌어?”시종장은 잠시 침묵했다.그 짧은 망설임만으로도 테오도르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말해.”어린아이의 목소리였지만 황태자의 명령이었다.시종장은 결국 허리를 숙였다.“전령조 한 마리가 사라졌습니다.”“전령조요?”엘라가 물었다.“편지를 나르는 새 말입니까?”“그렇습니다.”“창문으로 날아간 것 아닙니까?”“날아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시종장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오늘 새벽 북부에서 도착한 전령조입니다.”북부.엘라는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니었다.제왕학 수업에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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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것은 이상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검은 점은 사라졌다. 엘라는 손바닥을 펴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와 똑같은 손. 며칠 전 훈련하다 까진 자국과. 목검을 오래 잡아 생긴 작은 굳은살만 남아 있었다. 엘라는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리고 다시 폈다. “뭐 해?” 옆에서 테오도르가 물었다. “확인하고 있습니다.” “뭘?” “손을요.” “손이 어디 갔다 왔어?” “아닙니다.” 엘라는 다시 한번 손끝을 살폈다. 정말 없었다. 검은 점. 분명히 본 것 같았다. 설응의 전령통에서 보았던 검은 얼룩처럼. 아주 작았지만. 금빛 신성력 사이에 검은 점 하나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잘못 본 걸까. 온실이 어두워서. 차가운 곳에 오래 있어서 눈이 피곤했던 걸지도 모른다. “엘라.” “네.” “아까부터 이상해.” 테오도르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 엘라는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확실하지 않은 일이었다. 괜히 말했다가 사람들을 걱정시키는 건 아닐까. 특히 아버지가 알게 되면. 당장 신관 열 명은 불러올 것이다. 황제까지 알면 더 귀찮아질지도 몰랐다. 별일 아닐 수도 있잖아. 엘라는 손을 주먹 쥐었다. 하지만.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지는. 아직 몰랐다. 그걸 혼자 정해버리는 것도 이상했다. 엘라는 천천히 손을 다시 폈다. “전하.” “응.” “아까 제 손에서 이상한 것을 봤습니다.” 테오도르의 표정이 바로 진지해졌다. “뭘?” “검은 점이요.” “검은 점?” “신성력을 썼을 때 아주 잠깐 보였습니다.” 테오도르의 시선이 엘라의 손으로 향했다. “지금은?” “없습니다.” “아팠어?” “아닙니다.”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것도 아닙니다.” 테오도르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더니 곧바로 말했다. “아버지한테 가자.” 엘라는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왜?” “조금 더 지켜봐도 될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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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알려주지 않는 선생님
그 질문을 수첩에 남긴 뒤. 며칠이 더 지났다. 도와준다는 건 대체 뭘까. 엘라는 아직 그 문장에 답을 적지 못했다. 사실. 답을 찾으려고 적은 질문도 아니었다. 그저. 언젠가 다시 생각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남겨둔 것이었다. 검은 점은 그 뒤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마다 손을 확인하고. 신성력을 조금 사용한 뒤 기록하고. 이상 반응이 있는지 살폈다. 오늘 아침 기록도 같았다. 신성력 이상 없음. 검은 점 없음. 엘라는 수첩을 덮었다. 없으니까 다행이었다. 하지만. 없다고 해서 전에 본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냥 계속 보기로 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그리고 황궁에 도착한 순간. 엘라는 알게 됐다. 오늘은 검은 점보다 훨씬 귀찮은 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 “제가요?” 엘라는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에드먼드 교수는 아주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저 아이들을 가르칩니까?” “정확히는 도와주는 겁니다.” 엘라의 표정이 묘해졌다. 도와준다. 며칠 전에 수첩에 적어둔 말이었다. 그런데. “같은 말 아닙니까?” “무엇과요?” “가르치는 것과 도와주는 것.” “공녀는 같다고 생각합니까?” “…….” 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또 질문이었다. “교수님.” “왜요?” “제가 물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다시 물으십니까?” “공녀가 먼저 생각해볼 수 있으니까요.” “답을 모르니까 물어본 겁니다.” “그럼 오늘 확인해보십시오.” 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답을 안 알려주시는군요.” “오늘 수업과 잘 맞습니다.” “교수님께만요.”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 테오도르가 피식 웃었다. “또 시작됐네.” 엘라가 그를 바라봤다. “전하께서는 안 하십니까?” “나는 관찰자래.” “왜요?” “황태자 교육의 일부.” “그 말이면 다 됩니까?” “요즘 꽤 편해.” “남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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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방법이 모두에게 맞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제가 수업을 맡습니까?”엘라는 교실 앞에 서서 에드먼드 교수를 바라보았다.교수는 평소처럼 책을 펼친 채 대답했다.“절반만.”“절반이요?”“문제를 내는 것은 제가 합니다.”“그럼 저는요?”“아이들이 해결하도록 돕는 겁니다.”엘라는 잠시 생각했다.“지난번과 비슷하군요.”“비슷하지만 다릅니다.”“어떻게요?”“오늘은 아이들마다 다른 문제가 주어질 테니까요.”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교실 안에는 지난번보다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노아.세드릭.에런.그리고 새로 들어온 아이들까지.총 여덟 명.테오도르는 맨 뒤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이번에도 관찰자였다.정확히는 황태자 교육의 일부라는 이유로 빠져나가지 못한 상태였다.그는 턱을 괴며 작게 중얼거렸다.“또 엘라가 선생이네.”엘라가 뒤를 돌아보았다.“전하께서도 학생입니다.”“나는 황태자야.”“그 말로 빠져나갈 수 있는 수업은 없는 것 같습니다.”에드먼드 교수가 지휘봉으로 책상을 두드렸다.“두 분.”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교수는 아이들 앞에 여덟 개의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오늘의 수업은 간단합니다.”아이들의 시선이 상자로 향했다.“각자 한 개씩 선택하십시오.”세드릭이 가장 먼저 상자를 집었다.노아는 조금 뒤에.에런은 모두가 고른 뒤 남은 것을 조심스럽게 가져갔다.엘라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교수가 말했다.“상자를 열어보십시오.”딸깍.아이들이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서로 다른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세드릭의 상자에는 짧은 밧줄.노아의 상자에는 작은 나침반.에런에게는 여러 크기의 나무 조각.한 영애에게는 빈 유리병.다른 아이에게는 작은 종.테오도르가 눈썹을 찌푸렸다.“이걸로 뭘 하라는 겁니까?”교수가 칠판에 문장을 적었다.자신의 물건을 이용해 정원 반대편의 깃발에 도착할 것.아이들이 창밖을 바라보았다.별궁 뒤편 정원.그 끝에 붉은 깃발 하나가 꽂혀 있었다.하지만 그 사이에는 작은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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