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네가 말 안 한다고 내가 모를 것 같으냐?]진환식은 생각할 틈도 없이 맞받아쳤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태휘의 말을 조용히 새겼다.“할아버지가 솔이를 믿는 이유는, 솔이가 고모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솔이가 강솔이라서가 아닙니다.”태휘가 정확히 짚었다.진환식은 멈칫했다.전화 너머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태휘는 거기서 멈췄다.“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끊겠습니다.”진환식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이 기간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이 결국 딸 정숙을 향한 보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강솔이라는 아이 자체를 위한 마음이라기보다는... 강솔도 이런 것들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하지만 강솔은 신경 쓰지 않았다. 따뜻한 환경에서 자란 강솔은 사랑에 굶주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품은 감정을 이성적으로 볼 수 있었다. 진환식이 주는 호의도 마찬가지였다.강솔은 JX그룹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과제서에 따르면 정식 출근은 연휴 뒤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로 한 일은 회사 인사팀장에게 전 직원의 이력서를 요청하는 것이었다.그 뒤 이틀 동안 강솔은 집에서 이력서를 읽었다.그날도 제품 매니저와 기술 총괄의 이력서를 꼼꼼히 보고 있는데, 소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강솔은 서류를 보며 전화받았다.“응.”[너 기사 뿌렸어?]소담이 물었다.강솔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잔뜩 떠올랐다.“무슨 기사?”[우리 엄마 밑에 있는 미디어 회사에 너 관련 기사 요청이 엄청 들어왔대.]소담은 기수희 곁에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파일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있었다.[네가 의뢰한 거 아니야?]“아니야.”강솔은 바로 부정했다.“내가 그런 걸 왜 해?”[네 외삼촌들이 너를 건드릴까 봐, 신분을 일부러 공개하려는 줄 알았지.]소담은 강솔과 늘 솔직하게 말하는 사이였다.“기사를 뿌려서 나한테 이득 될 게 하나도 없어.”강솔은 이런 일은 꽤 분명하게 판단했다.“기사 내용은 뭐야? 헐뜯는 쪽이야, 아
태휘가 미리 말을 해둔 덕분에, 강솔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JX그룹 대표실로 곧장 들어갔다.오림은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곧바로 나갔다. 둘이 이야기할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생각은 끝났어?”태휘가 물었다.강솔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이건... 능력 평가 과제.”태휘는 길게 말하지 않고 서류 한 부를 건넸다.“과제는 이 회사를 살리는 거고. 정상 운영이 가능하게 만들고, 순이익 20억 원을 내야 해. 직원 이탈률도 정상 범위 안에 있어야 하고.”강솔은 서류를 받아 두어 장 넘겼다.회사 조직은 갖춰져 있었고, 부서 구성도 단순했다. 전체 인원은 수십 명 정도였다. 주력 사업은 대형 병원 의료 시스템 구축이었다.강솔은 이 업계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가족으로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해, 한 번은 물러날 기회를 줄게.”태휘의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 강솔에게 닿았다. 태휘의 성정은 차갑고 평가는 박했다.“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면, 난 매년 200억 원을 그대로 줄 수 있어.”“사람을 새로 뽑아도 되나요?”강솔이 물었다.태휘의 얇은 입술이 열렸다.“가능해. 채용 관련 유의 사항은 안에 적혀 있어.”“회사 순이익이 20억 원에 도달하면 과제 완료로 보는 거죠?”강솔은 과제서를 덮었다.“맞아.”태휘가 답했다.강솔이 다시 물었다.“완료한 날, JX그룹 지분 20%를 원가로 저에게 넘기고요.”“맞아.”“좋아요.”강솔의 머릿속에는 이미 대략적인 계획이 그려지고 있었다.“그날이 오면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태휘는 오림에게 강솔을 배웅하라고 지시했다. 강솔이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휘의 무표정한 얼굴에 드물게 무거운 기색이 스쳤다.잠시 뒤.태휘는 핸드폰을 꺼내 진환식에게 전화를 걸었다.“과제 넘겼습니다.”[그래.]진환식은 태휘를 그래도 믿고 있었다.[당분간 네 아버지랑 작은아버지 쪽을 잘 지켜봐. 뒤에서 수작 부리게 두지 말고.]“규칙상 외부 요인이
‘별꼴이네. 제 아비를 일부러 난처하게 만드는 아들이 다 있어.’임훈은 마음속으로 지안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집에 밥해놨어요. 괜찮으시면 들어와서 간단히 드세요.”강솔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아니야.”중현은 강솔의 눈매에 남아 있는 거리감과 환영하지 않는 기색을 알아차렸다.“곧 지사에 들러야 해. 당신 천천히 먹어. 먼저 갈게.”임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밥상이 코 앞까지 왔는데도 거절하다니.중현은 임훈의 온갖 감정을 무시했다.“타.”“네.”임훈의 대답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차가 어느 정도 멀어진 뒤, 임훈은 용기를 내 말했다.“보스, 무슨 생각이십니까? 사모님이 식사하자고 하셨는데 거절하시면 호감이 깎입니다.”중현은 대답하지 않았다.먹었다면 정말로 호감이 깎였을 것이다.중현은 강솔을 알았다. 그때 강솔은 중현을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강솔이 입을 연 건 지안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둘 사이의 다툼과 갈등을 대놓고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사실은 중현의 짐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지금 강솔은 중현과 지나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억지로 이혼을 못 하게 막혔던 답답함에서는 벗어났지만, 뿌리 깊은 경계심은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다. 강솔은 서로 각자 살며 방해하지 않기를 바랐다.“더 놓고 온 거 없어?”강솔이 물었다.지안은 작은 머리를 흔들었다.“없어.”강솔은 지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지안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들추지 않았다.임훈은 차 안에서 아직도 생각에 잠겨 있었다.“지안 도련님 물건은 언제 트렁크에 들어간 겁니까? 공항에서 차를 받을 때 트렁크를 연 적도 없는데요.”“방금 열었을 때 넣었어.”중현은 전부 알고 있었다.임훈은 멍해졌다.처음에는 의아했고, 곧 놀랐으며, 이어 답답함이 밀려왔다.‘지안 도련님이 이렇게까지 도와줬는데도 보스가 움직이지 않는다니...’‘옆에 보고 있는 내 입이 다 바짝 마르네!’...그날 이후, 강솔과 중현의 삶은
“안 해.”중현의 시선은 닫힌 차창 너머로 향했다. 집 앞에서 나오는 강솔을 보며, 얇은 입술을 잠깐 다문 뒤 입을 열었다.“가자.”“여기까지 오셨는데요.”임훈은 그냥 떠나는 게 아쉬웠다.“얼굴이라도 보고 가시죠.”중현이 시선만 보냈다.임훈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차가 시동을 걸고 움직였다.차를 돌려 나가면서 임훈은 창문을 내리고 강솔에게 인사했다.강솔이 고맙다는 말도 하기 전에 차는 이미 시야에서 멀어졌다. 희미하게 보이기로는 뒷좌석에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의 사람이 앉아 있는 듯했다.“나쁜 아빠!”지안은 강솔과 함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봤다.“내가 좀 화나게 했다고, 나와서 인사도 안 해줬어.”“차에 있었어?”강솔이 물었다.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있었어.”강솔의 눈빛이 잠깐 멈췄다.지안은 곁눈질로 엄마를 봤다. 엄마가 화난 기색이 없자, 갑자기 폴짝 뛰었다.“아차!”강솔의 가슴이 철렁했다.“왜?”“J시에서 가져온 물건을 아빠 차에 두고 왔어.”지안은 몹시 다급한 얼굴로 짧은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밖으로 뛰었다.“내가 가서 가져올게.”강솔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기도 전에 지안은 이미 몇 미터나 뛰어가고 있었다.강솔은 뒤따라가며 동시에 핸드폰으로 중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는 거의 바로 받았다.[여보세요.]“지안이 물건이 차에 남아 있어. 잠깐 갓길에 세워줘.”강솔은 말하면서 앞쪽으로 계속 움직이는 검은 차를 봤다.“지안이랑 가지러 나갈게.”...한편, 중현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임훈에게 말했다.“갓길에 세워.”“알겠습니다!”임훈은 몇 초 만에 차를 세웠다.차가 멈추자 일부러 몸을 돌려 장난스럽게 물었다.“아까 사모님한테 인사 안 한 게 후회되십니까?”중현은 말이 없었다.“차 돌려서 돌아갈까요? 이유 하나 만들어서 들어가 차라도 한잔하시죠.”임훈은 중현이 아직 통화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중현의 시선이 임훈에게 닿았다. 눈빛은 서늘했다.임훈은 목을 움츠렸다.
“앞으로 나도 약속을 지킬 거야.”시후는 매우 진지했다.“입 밖으로 낸 말은 반드시 지키겠다.”중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 지안을 깨워 아침을 먹이려 했다.시후가 세 걸음을 두 걸음처럼 빠르게 따라붙었다.“못 믿겠냐?”중현의 태도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네가 좋으면 됐어.”“진심이라니까!”“뭐가 진심인데?”지안이 졸린 눈으로 문을 열었다. 동그란 눈에는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었다.“밥 먹자.”중현이 말했다.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시후는 지안을 보고, 다시 중현을 봤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줄줄이 이어졌다.‘지안이는 엄마가 키우기로 한 거 아니었나?’‘왜 여기 있지? 중현이 중간에 마음을 바꿔 아이를 데려온 건가?’‘그런데 빼앗아 온 거라면 아이가 저렇게 얌전할 리도 없잖아.’두 부자는 시후의 의문을 신경 쓰지 않았다.아침 식탁에 앉자, 중현이 차분하게 말했다.“밥 먹고 H시로 돌아가.”지안의 손이 멈췄다.“내일 해외 출장이 있어서 널 데리고 있을 수 없어.”중현은 적당한 이유를 하나 댔다.“돌아가면 엄마랑 외할머니 말씀 잘 듣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지안은 중현을 몇 번이나 빤히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네.”“내일 네가 해외 출장 가는 걸 나는 왜 모르지?”시후가 끼어들었다.“HS그룹 기밀이라서.”중현의 말은 여전히 사람을 찌르는 재주가 있었다.“외부인에게 알려줄 수는 없지.”시후는 말문이 막혔다.또 차가운 반응이었다.아침 식사 후 중현은 강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안이 돌아갈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내가 사람을 시켜 집까지 보낼게. 공항에 마중 나올 필요는 없어.]강솔은 마침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지안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묻고 싶었지만, 굳이 물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중현은 채팅창에 상대가 메시지를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뜨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중현은 한 줄을 더 보냈다.[집
중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강 비서를 지나쳐 밖으로 향했다.강 비서도 막지는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중현의 등을 보며 협박하듯 말했다.“대표님이 뛰러 가시면 제가 사모님에게 전화하겠습니다. 이혼 후 대표님이 자기 몸을 얼마나 혹사하는지 전부 알리겠습니다.”중현의 발걸음이 멈췄다.강 비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상사를 협박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강 비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느 날 정말 자기 목숨을 갉아 먹을 것 같았다.“그렇게 한가해?”중현의 얼굴에서는 희로애락을 읽을 수 없었다.“네.”강 비서는 겉으로는 전문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가슴안에서는 긴장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대표님께서 제 일을 전부 끝내셔서, 요즘 할 일이 없습니다.”중현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박감은 줄어들지 않았다.“좋아.”강 비서는 더 불안해졌다.‘좋다는 게 무슨 뜻이지?’“회사는 빈둥거리는 사람에게 월급을 그냥 주지 않아.”중현이 느릿하게 말했다.“할 일이 없다면 그 몇 사람과 같이 사고 친 부분을 수습해. 연휴 끝나면 내가 확인하지.”“그건 그 직원들 책임 아닙니까?”강 비서는 이런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 비서도 책임자 역할을 제대로 못 했으니 너도 책임이 있어.”중현이 말했다.강 비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저 갑자기 한가하지 않습니다.”중현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압박감은 여전했다.“한가하지 않아도 조용히 지켜봐. 하도현이 요즘 자주 움직여. 빈틈을 제대로 파고들게 두지 마.”“알겠습니다.”강 비서는 이를 악물고 중현의 지시를 받아들였다.“응.”중현은 짧게 답하고 몸을 돌렸다.뛰기 시작하기도 전에, 강 비서가 갑자기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댔다.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여보세요, 사모님.”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현이 강 비서의 핸드폰을 빼앗았다.통화 화면이 아닌 것을 확인한 중현의 검은 눈이 유난히 험악해졌다.강 비서는 등골이 서늘했지만 그래도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