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소우희가 큰소리로 외쳤고 밖을 지키고 있던 평춘왕 관저의 호위병들이 우르르 달려왔다.이들은 검을 빼 들지는 않았지만 기세가 매우 등등했다.“무엄하도다! 감히 태자빈 마마 앞에서 뭐 하는 짓이냐! 다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냐?”진우가 언성을 높였다.달려온 호위병들은 애절한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태자빈에게 함부로 행동하면 바로 목이 잘릴 것이다.하지만 소우희의 명령을 거역해도 결과는 똑같이 처참하다.그렇게 일촉즉발의 순간, 소우연이 피식 웃으며 돌아서더니 더 이상 평춘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어차피 이 평춘왕도 좋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죽든 살든 관심이 없었다.원작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평춘왕은 많은 여인들을 겁탈했을 뿐만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소우희를 마주쳤다가 소우희에게 한눈에 반하여 소우희까지 겁탈하려고 하다가 이민수에게 맞아 그 최후가 매우 처참했다.그리고 지금, 소우연이 회남왕 저택에서 도망가지 않았기에 많은 일들이 바뀐 것이다.하지만 한 가지… 이번 생에서 평춘왕은 성공적으로 소우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다.한편.소우희는 소우연의 행동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소우연이 정말 호위병들에게 겁을 먹기라도 한 건가?’이때, 소우연이 서서히 걸음을 옮기더니 아직까지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소씨 부인 임진숙에게 다가갔다.“부인, 보셨습니까? 부인께서 어렸을 때부터 애지중지 키운 딸은 평춘왕 관저에서 발언권이 없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실권을 꽉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에 부인께서 딸을 만나지 못했던 건, 그 딸이 부인을 만나기 싫었던 겁니다!”소우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소우연,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팍!진우가 소우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무엄합니다! 태자빈 마마께 예를 갖추십시오!”휘청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진 소우희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이지윤도 없는 지금, 딱히 반항할 방법도 없었다.하지만
소우희가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을 때 소우연은 다시 한번 평춘왕을 향해 두어 걸음 다가갔다.화들짝 놀란 소우희는 소우연이 진맥이라도 할까 봐 서둘러 제지했다.“마마, 평춘왕은 지금 몸과 마음이 많이 편찮으셔서 힘든 사람입니다. 푹 쉴 수 있게 가만히 내버려두십시오.”소우연은 소우희의 말에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사실 소우희와 이지윤이 저지른 짓을 이육진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태자 저하도 신경 쓰기 싫어서 가만히 있는데 태자빈인 소우연도 당연히 이 일에 괜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어차피 소우희는 결국 벌을 받게 되어 있으니까!“우희야, 너 지금 뭐라고 한 것이냐? 그 사람은 네 오라버니야. 그런데 볼 필요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안색이 확 굳어진 임진숙은 소우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전에 평춘왕 관저에 몇 번이나 찾아왔는데 소우희는 단 한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때는 딸이 이 저택에서 괴롭힘을 당하면서 힘들게 살고 있는 건가 싶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오늘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이 저택 안의 호위병들도 소우희의 눈치를 보고 그녀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있다.소우희가 왜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이때, 소우희가 임진숙 곁에 다가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어머니, 제가 셋째 오라버니를 보살피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십니까?”“그 아이는 다리가 부러졌다. 그런데 어미로써 어찌 걱정되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찾은 의원이 한준이의 다리를 고칠 수 있는 것이냐?”소우희가 대충 얼버무렸다.“그, 그럼요. 고칠 수 있습니다.”“그래, 그럼 앞장 서거라. 난 오늘 꼭 한준이를 봐야겠다.”말을 하던 임진숙은 곁눈질로 소우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소한준의 다리가 부러진 건 분명 소우연 탓이지만 소우연은 이제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기에 그 책임을 제대로 따질 수도 없다.이내 시선을 거둔 임진숙은 소우희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왜 가만히 서있기만 하고 앞장서지 않는 거
“어머니…”“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말거라!”임진숙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평소에 한준이가 너를 얼마나 예뻐하고 아껴줬는데 넌 어떻게 네 오라버니를 이 지경으로 대할 수 있어!”임진숙은 소우희가 너무 실망스러웠다.한편, 임진숙의 호통에 소우희는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어머니, 오라버니를 다치게 한 사람은 분명 소우연입니다. 태자 저하께서 오라버니의 다리를 부러트렸는데 어찌 소우연을 탓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되레 아무 잘못 없는 저를 나무라시는 겁니까? 그래요. 전 이제 소씨 가문에 아무 소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들 저를 만만하게 여기고 버리려는 겁니까?”“너…”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임진숙은 너무 기가 막혀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이때, 소한준이 아픈 다리를 꾹 참고 쓰러지려는 임진숙을 부축하더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았다.“내가 이 저택에 들어오고 나서 넌 나를 딱 한 번 보러 왔다. 그 뒤로 나한테 신경조차 쓰지 않은 게 사실이지 않느냐? 나의 두 다리를 치료해주기 싫은 것이냐?”“전… 오라버니, 제가 오라버니를 위해 의원을 모셔오지 않았습니까?”“그자는 의원이라고 할 수도 없어! 민간요법밖에 할 줄 모르고 심지어 지금도 어디서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야!”조금 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마당 앞에 나타나자 화들짝 놀란 의원은 큰일났다 싶어서 몰래 도망을 쳤다.이때, 누군가가 보고를 올렸다.“왕비님, 의원이 보이지 않습니다. 잡아올까요?”“잡아와! 당장 잡아와서 그자의 목을 베어라!”“네!”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 상황이 너무 창피한 소우희는 임진숙과 소한준 앞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오라버니, 전 오라버니를 일부러 모른 척한 게 아닙니다. 다만 요즘 너무 바빴을 뿐입니다.”말을 하던 소우희는 또다시 목을 박박 긁었다. 요 며칠동안 그녀는 짜증이 나지 않는 순간이 없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온몸이 가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몸을 긁던 소우희는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우
“어머니…”소우희는 화가 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우연에게 말했다.“이게 바로 마마께서 원하는 겁니까? 지금 저한테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한편, 소우연은 손톱을 만지작거릴 뿐, 확실하게 대답하지는 않았다.“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오늘 단지 소씨 부인과 함께 소 장군님을 보러 왔을 뿐입니다.”“소 장군님? 마마, 대체 어떻게 그런 호칭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이의 혈연관계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까? 어찌 이리 잔안하고 매정하십니까? 마마가 아니었다면 전 평춘왕 관저에 시집을 오지 않았을 것이고 셋째 오라버니의 다리도 부러지지 않았을 겁니다!”소우희가 이를 악물며 구구절절 얘기했지만 소우연은 그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뭐 잘못된 게 있습니까? 당신들이 먼저 저를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전 그저 살짝 반격을 가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억울하고 분합니까? 그건 대체 어느 나라 법이란 말입니까?”“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게 법이지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혼인 상대를 정해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딴 헛소리가 나옵니까?”소우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우연이 소우희를 힐끗 흘겨보았다.“목소리 큰 자가 이기는 세상이 아닙니다.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요? 애초에 저와 혼사를 맺은 상대가 누구인지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회남왕과의 혼사는 황제께서 왕비에게 하사하신 겁니다. 이 나라의 모든 백성은 황제 폐하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하지요. 당신들은 황제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황제께서 그 책임을 묻지 않으신 걸 감사하게 여기고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감히 지금 겁도 없이 개처럼 소리까지 질러요? 왕비는 정녕 무서운 게 없습니까?”“뭐라고요? 개처럼 소리를 질러요?”“길거리를 떠도는 개도 왕비보다 깨끗하고 착합니다.”소우연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그렇다고 한들 우리가 어찌할 수 있겠느냐?”소우희가 훌쩍거리며 대꾸했다.“그러게 말입니다. 소우연은 이제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습니다! 어머니, 저를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전 사실 이 저택에서 외롭고 힘들게 지내고 있습니다. 왕야께서 앓아 눕고 세자 저하는 계모인 저에게 태도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임진숙은 그런 소우희를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렸을 때부터 귀하게 키운 딸을 조금 전 알게 된 진실들로 무작정 미워하고 원망할 수는 없었다.유일하게 안타까운 건 소우희가 소우연보다 훌륭하게 크지 못했다는 점이다.임진숙은 이내 손으로 소우희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면서 소한준에게 말했다.“아무래도 내가 다시 가서 빌어보아야겠다.”“소우연에게 빈다고요? 뭘 빌겠다는 말씀이십니까?”“네 오라버니가 지내는 이곳은…”임진숙은 가구 하나 없는 방 안을 쓱 훑어보고는 다시 소한준에게 시선이 꽂혔다.“네 오라버니를 계속 평춘왕 관저에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느냐?”“전…”임진숙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네 의술은 전부 가짜이지 않느냐?”소한준을 이곳에 둘 바에는 차라리 장군 관저로 데리고 가서 좋은 의원을 찾아 다리를 치료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한편, 소우희는 임진숙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임진숙은 고개를 돌려 소한준을 쳐다보았다. 그의 몸에서 분노와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억지로 참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소우희에게 꽂혀 있었다.‘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어!’이 순간까지도 소한준은 소우희가 도대체 왜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를 이렇게 괴롭게 만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만약 소한준이 형들의 말을 듣고 소우희의 본모습을 일찍 알아봤더라면 두 다리도 부러지지 않았을 것이다.생각할수록 후회가 막심한 소한준은 자신의 뺨을 미친듯이 때렸다.“한준아, 한준아… 이러지 말거라.”임진숙이 다급하게 말리자 소한준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말했다.“어머니, 제가 소우연에게 미안한 짓을
입술을 오므리고 있던 소우희는 잔뜩 화가 난 소한준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때, 임진숙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는 소한준 곁으로 다가왔다.“한준아, 걱정하지 말거라. 이 어미가 널 위해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의원을 모셔올게. 꼭 네 다리를 고쳐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전장을 누비는 장군에게 다리가 부러진다는 건 그의 목숨을 앗아간 거나 마찬가지다. 이육진은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이런 사람이 나중에 황위를 물려받으면 그야말로 폭군이 될 것이다.상황이 복잡해졌지만 일단 현재 가장 급선무는 소한준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이 일이 우희 탓만은 아니야. 그렇다고 너희 남매가 원수 사이로 지낼 수는 없지 않으냐?"“어머니! 어떻게 아직도 소우희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소한준은 극심한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소우희가 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소우희를 도와 소우연을 납치했겠습니까? 그럼 제 다리도 부러질 리가 없었겠지요.”임진숙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마음이 너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한편, 소한준의 말에 소우희가 엉엉 울면서 대꾸했다.“전 소우연과 이육진이 그렇게 잔인할 줄 몰랐습니다. 오라버니의 다리를 부러트릴 줄 정말 몰랐습니다. 소우연이야말로 우리들 중에서 가장 악하고 잔인한 사람입니다.”남매가 싸우는 소리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임진숙은 탁자를 확 내리치며 큰소리로 외쳤다.“둘 다 조용히 하거라! 네가 이 저택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으면 네 오라버니에게 편히 지낼 곳 하나는 마련해 줬어야지! 그리고 네가 많이 바쁘다면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네 오라버니를 잘 보살폈어야지! 이 어미가 지금 당장 돌아가서 방법을 생각해 보마. 소우연에게 가서 무릎 꿇고 빌어야 한다고 해도 태자 저하께 한준이를 장군 관저로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허락을 받을 것이다!”이곳 환경은 행군이나 전쟁 때와 조건이 거의 똑같았다. 소한준은 속으로 화도 나고 원망도 차올랐지만 아무것도 할
그러자 그가 물었다. “평춘왕은?”소우희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때 임진숙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볍게 누르며 소우희 대신 대답했다.“네가 아직 몰랐구나. 평춘왕의 병세가 심각해 네 동생 혼자서 왕부를 떠받들고 있단다.”“병세가 심각하다고요?”“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더구나.” 임진숙은 짐작하는 말투였으나 소우희의 말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소한준은 비웃듯 웃으며, 소우희를 향해 독화살 같은 눈빛을 쏘았다.“소우희, 내가 처음 왔을 때 너는 뭐라 했지? 왕부에서 네가 힘도 없고 입지도 없으니 폐가에서 지내라며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었지. 실상은 내가 귀찮고 성가셔서겠지. 내가 다쳤으니 곁에 두면 네가 의술 못 쓰는 게 들통날까 두렵고, 밤마다 아픈 내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 네 잠을 방해할까 두려워서였겠지!”소우희가 억울한 듯 말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그런 게 아니에요.”“다시는 날 오라버니라 부르지 마라! 정말 후회가 된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 우연이에게 그리 모질게 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후회도 소용없구나.”“저는…”소우희는 화가 치밀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과거 어머니도, 오라버니도, 아버지와 다른 오라버니들도 전부 다 자신만 좋아하지 않았던가.어째서 소우연이 태자빈이 된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달라졌단 말인가?‘두고 보십시오. 제가 훗날 태후가 되는 날, 여러분들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요!’“그만해라. 이제 네 오라버니는 누가 돌봐준단 말이냐?” 임진숙이 물었다.소우희가 손짓으로 아무 하인이나 불렀다.“앞으로 네가 오라버니를 잘 보살펴라. 만일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네 목숨은 없을 줄 알 거라.”하인은 부들부들 떨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소인이 정성껏 모시겠습니다.”모든 것을 처리한 뒤, 임진숙은 그제야 안심하고 떠났다.소우희는 이미 소한준의 증오와 혐오 어린 눈빛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고, 더 이상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랬던 거군요.”이지윤은 소우희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위로했지만, 방 안에 널린 지저분한 파편들을 보고는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소우희의 성정이 이토록 괴팍할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고 그 개만도 못한 자식 말이에요,”“소우연이 왔을 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어요! 세자 저하, 이제 저 인간을 살려두면 안 됩니다!”소우희는 눈물을 닦으며 침상 위에서 증오의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보는 평춘왕 이종대를 가리켰다.“오늘 소우연이 이런 꼴을 보고 틀림없이 의심했을 겁니다. 만약 태자와 상의하여 사람을 보내 조사하기라도 하면, 우린 끝장이에요!”이지윤 역시 마음이 몹시 다급해졌으나, 얼굴에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소우희를 바라봤다.‘이 여자… 교양이라곤 없고, 양심마저 결여되어 있구나. 정녕 하늘이 내린 ‘봉황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맞을까?’‘이런 사람이 과연 태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오늘 평춘왕부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도 심각했다. 소우희의 말대로, 소우연이 태자부로 돌아가면… 소우연은 오늘 일을 태자에게 이야기할 것이 분명했다.그렇게 된다면 평춘왕이 죽기 전이든 후든 간에, 그들은 반드시 이 사건을 빌미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다.그는 지금껏 숨어 살며 어렵사리 목숨을 유지해왔다.그런데 이 귀한 인생을 고작 소우희 같은 여인 하나 때문에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이런 생각을 하며, 이지윤은 소우희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혔다.“개 같은 것들…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종대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바로 그 개 같은 놈이 아니 덥니까? 그때 왕비마마를, 또 첩실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이지윤이 차갑게 비웃었다.그는 다시 소우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분들에게 인간 이하의 고통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아버지께서 당하는 모든 건 당연한 대가입니다.”소우희가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세자. 저 사람은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