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소우연이 기절해 있을 때, 이육진은 그녀가 입고 있는 옷과 손목, 목 부분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벌레에 물린 흔적 몇 군데 말고는 다른 상처는 없었다.이육진은 미리 결심한 게 있었다. 소우연이 정말 이민수에게 홀려 순결을 잃었다고 해도 그녀가 이육진 곁으로 돌아와서 태자빈을 계속하겠다고 하면 이육진은 전혀 상관없었다.그는 이민수와 소우연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그건 이민수가 강요한 거라고 굳게 믿었다.“저하께서는 뭘 알고 싶으신 겁니까?”소우연의 조심스러운 표정을 보며 이육진이 피식 웃었다.“알고 싶은 게 없다. 네가 여전히 나의 태자빈이 되어준다면 난 뭐든 상관없다.”흠칫하던 소우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와 이민수 그자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난 네 말을 믿어.”“전…”소우연이 입을 연 순간, 이육진은 그녀에게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 입을 뗀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나의 연이는 여전히 나에게 달콤한 입맞춤을 해주고 있지 않느냐?”소우연은 조금 전에 분명 이민수를 죽여야 한다고 말을 했는데 그에게 미련이 남아있을 리가 절대 없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민수의 아랫도리까지 잘라버렸다. 조금 전에 봤던 이민수는 옷을 가지런하게 입고 있었고 다만 그곳만 잘려 있었기에 소우연이 그만큼 단호하고 망설임 없었다는 것을 설명한다.이때, 소우연이 이육진을 보며 말했다.“이민수는 폐인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할 겁니다. 그자는 저를 오두막에 가두고 제 몸을 탐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자가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싹을 잘라버렸습니다. 부군, 혹시 제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으십니까?”솔직히 소우연의 말을 들으면서 이육진은 아랫도리가 움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민수가 예전에 소우연에게 얼마나 매정하고 잔인했는지 잘 알기에 소우연이 한 행동들도 전부 이해가 되었다.이육진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의심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복수하기 위해 시시때때로 평서왕
태자부로 돌아오자 정연 등 하인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면서도 소우연이 안전하게 돌아온 게 너무 기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태자빈을 찾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들은 앞으로 평생 지옥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간석은 이내 하인들을 불러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조금 뒤, 소우연과 이육진이 깔끔하게 목욕을 하고 나왔을 때 날은 꽤 어두워졌다.“태자 저하, 태자빈 마마,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소우연은 허리를 살짝 숙인 채 말을 하고 있는 간석을 힐끔 쳐다보았고 간석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태자빈 마마, 너무 감사합니다. 마마 덕분에 소인이 태자부로 돌아와 태자 저하를 계속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참으로 다행이구나.”소우연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육진은 언젠가 간석을 저택으로 데려왔을 것이다. 더군다나 야한 서책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은 이육진도 잘못이 있었다.어찌 됐든 이육진이 먼저 시작한 일이니까. 맨 처음 간석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사람이 이육진인 건 사실이니까.식탁 위에는 소우연이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갈비찜에 삼계탕에 여러 가지 야채들까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소우연이 밥그릇을 들던 그때, 이육진이 그녀의 손에서 그릇을 빼앗아가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많이 놀랐을 텐데 내가 먹여주겠다.”말을 하던 이육진은 익숙하게 생선 살을 발라 소우연의 입에 넣어주었다.한편, 화기애애한 두 사람의 모습에 정연 등 하인들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은 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소우연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육진의 반응을 살폈지만 이육진은 그녀에게 벌어진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우연에게 더욱 애틋해진 것 같았다.그 반응에 소우연은 이민수와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구절절 솔직하게 다 얘기했고 이육진도 그녀의 말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었다.심지어 이육진은 보다 빨리 그녀를 찾아내지
소우연은 몰래 눈을 살짝 떴다. 희미하게 보이는 이육진의 얼굴에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설레었다. 그렇게 자신의 몸을 이육진에게 온전히 맡긴 소우연은 어느새 땀이 흠뻑 젖은 채 이육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부군, 전 부군이 이렇게 좋은 분인지 정말 몰랐습니다.”그러다가 어렸을 때 우연히 만난 소년을 치료해 줬던 일이 떠올랐다.두 사람의 인연은 오래전부터 정해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전생에 이육진은 소우연이 자신을 치료해 줬던 소녀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시신을 거둬준 것이다.하지만 소우연이 모르는 게 있었다. 전생에 몸과 마음이 망가진 이육진은 황위를 쟁취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 모든 건 그저 소설을 쓴 작가의 설정이다.전생의 이육진은 생명의 은인인 이민수에게 처참하게 버려졌고, 또한 소우희에게 속아 결국 소씨 가문 저택 앞에서 결국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점점 승승장구하는 이민수와 소우희에게 더할 나위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자신의 원한에 이어 생명의 은인까지 처참한 죽음을 당하자 이육진은 목숨을 걸고 소우연을 위해 복수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사실 전생에 이육진은 분명 이민수보다 먼저 혼인을 하고 후손을 낳으면 이민수를 쉽게 이길 수 있었다.하지만 이육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살려줬던 그 소녀밖에 없었다.한편, 서로에 대한 애정이 최고조에 달한 이육진과 소우연은 너무 흥분하여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으며 몸이 구름 위에 둥둥 떠있는 기분이었다.“연아, 너무 고맙다. 네가 충분히 좋은 여인이었기에 우린 서로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소우연을 품에 꼭 끌어안은 이육진의 말에 소우연도 적극적으로 호응했다.“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군이 이렇게 좋은 분인 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요?”환한 미소를 지으며 소우연의 콧등을 살짝 만지던 이육진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춘 뒤, 침대에서 일어나 밖에 있는 하인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했다.목욕물과 갈아입을 옷
인기척을 들은 정연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소우연이 물었다.“태자 저하는 궁으로 가신 것이냐?”“네, 마마.”대답을 하던 정연이 재빨리 다가가 소우연을 부축하려고 하자 소우연은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다리에 힘이 쫙 풀린 소우연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그 모습에 정연이 발그레한 표정으로 말했다.“마마, 소인이 부축해 드리는 게 나을 듯합니다.”어젯밤 본채에서 들리는 소리가 꽤 컸고 정연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곁방이 바로 본채 옆에 있었기에 적나라하게 들을 수 있었다.더군다나 목욕물을 세 번이나 준비했기에 하인들은 당연히 다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입술을 살짝 오므린 소우연은 정연의 반응에 바로 눈치챘다. 정연은 소우연보다 나이도 많고 나인에게 남녀의 합방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소우연은 조금 부끄러웠다.“저하께서 외출하시기 전에 태자빈 마마께 충분히 휴식을 취하시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육진은 회남왕 시절 때에도 단 한 번도 이른 아침에 그녀를 깨운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시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고 있기에 아침 일찍 인사를 올릴 필요도 없었다. 소우연은 이 저택에서 단 하루도 눈치를 보거나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방으로 들어온 정연이 진규가 태자빈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방으로 들어오라고 하거라.”소우연이 의자에 앉으며 말하자 정연은 바로 명심에게 눈짓을 했고 명심은 빠르게 진규를 방 안으로 들였다.방에 들어온 진규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죽을죄를 지었다고 말했고 이 말에 소우연이 얼른 대꾸했다.“그게 어찌 네 잘못이겠느냐? 내가 진우에게 소씨 부인을 소씨 가문에 모셔다드리라고 넌 내가 걸어서 저택으로 돌아올 줄은 모르고 있지 않았느냐? 그러다가 납치를 당했고 이건 절대 네 잘못이 아니다.”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소우연 본인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
’그래! 이게 다 소우연 탓이야! 다 소씨 가문 사람들 탓이야!’이민수는 소우연과 많이 닮은 아령을 보며 미간을 확 찌푸렸다. 예전에는 소우연을 닮아서 좋아했지만 이제는 그녀를 닮았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아령이 꼴도 보기 싫었다.그렇다고 자신이 당한 일을 부왕에게 얘기할 수도 없었다. 부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이민수의 처지는 더욱 곤란해질 것이다.이민수가 왕세자인 건 맞지만 이제는 남자구실을 못하는 왕세자이기에 자칫하다가 부왕에게 버림을 받을 게 뻔하다.이 저택에 아들이 이민수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니까.“세자 저하, 이 해독제를 드십시오.”이민수는 아령이 건네는 약을 살짝 거부했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리고 께름칙한 표정으로 약을 꿀꺽 삼켰다.그로부터 30분 뒤, 이민수는 사지에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와 함께 찾아온 건 하반신의 극심한 통증이었다.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아령은 바로 그에게 약을 발라주었다.시원한 고약 덕분에 그나마 조금 나은 듯했다.“역시 넌 의술을 할 줄 아는구나.”이민수가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절망적이었고 이제 그에게 삶의 유일한 의지는 증오와 복수밖에 없다.반드시 소우연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소우연에게 수많은 남자들에게 동시에 능욕당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느끼게 해줄 것이다.그리고 이육진도 똑같이 내시 신세로 만들어 그 버러지 같은 부부에게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한편, 아령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동정과 연민에 찬 눈빛으로 이민수를 쳐다보았고 이를 본 이민수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그딴 눈빛 당장 치워. 넌 날 동정할 자격 없어.”아령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민수를 이렇게 만든 건 이육진과 소우연인데 왜 아무 잘못도 없는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걸까?잠시 생각하는 아령은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민수를 위해 상처를 잘
이날 점심.궁에 있던 이육진은 황제의 부름에 어서재로 향했다. 황제는 그곳에서 이육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지만 결론은 아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후손을 만들라는 것이었다.“아바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네 어마마마를 찾아가 보거라. 널 위해 괜찮은 첩실을 선별했으니 마음에 드는 상대를 골라보거라.”이육진은 난감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왜 그러는 것이냐? 이렇게 중요한 일을 서두르지 않고 뭐 하는것이냐?”황제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몸매도 건장하고 기품도 넘쳐나는 아들은 나중에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하지만 현재 가장 중요한 건 이렇게 잘난 아들이 하루 빨리 후손을 만드는 것이다.특히 저번에 태의원의 어의가 얘기한 게 있는데 이육진이 회남왕이던 시절부터 후손을 만들기 어려운 몸이라고 했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너와 태자빈의 합방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냐?”한 나라의 임금이 될 황태자에게 후손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한편, 표정이 살짝 굳은 이육진은 입장이 매우 곤란했다. 전까지는 어마마마를 통해 은근슬쩍 재촉했는데 이제는 아바마마가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아바마마, 제 얼굴과 다리를 태자빈이 고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때 첩실을 들이면 태자빈이 얼마나 상심하겠습니까?”“후손을 만드는 일은 나라의 생사와 관련된 큰일이니라. 태자빈이 그 점을 알고 있다면 어찌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서 상심을 하겠느냐? 더군다나 태자빈이 다른 여인 대신 너와 혼사를 치른 일도 내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느냐?”황제의 말에 이육진이 대꾸했다.“아바마마 말씀이 옳으십니다. 하지만 아들은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도 않았고 태자빈은 지금도 제 몸조리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이 상황에서 첩실을 들이겠다고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너…”“아바마마, 나중에 제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고 나서도
고개를 끄덕인 덕빈은 이내 기 나인에게 미리 준비했던 여인들의 초상화를 가져오라고 했다.“일단 한번 보세요. 이 어미가 태자를 위해 고심 끝에 선별한 여인들입니다. 다들 참한 여인이지요.”초상화를 힐끗 쳐다보던 이육진은 조금 전, 서재에서 황제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덕빈에게 다시 한번 읊었다.그 말에 덕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폐하와 태자는 참 많이 닮았습니다. 이 넓은 후궁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전 이 후궁의 일인자로써 황후가 아니지만 후궁 전체를 관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요. 저 덕빈 외에 폐하께는 후궁의 첩이 서너 명밖에 없습니다. 그럼 일년 내내 누가 폐하의 총애를 제일 많이 받고 있을까요?”“어마마마?”이육진은 구구절절 얘기하는 덕빈의 말이 너무도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으며 어마마마가 정확하게 무슨 뜻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덕빈은 그런 이육진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이 어미는 태자가 폐하와 똑같이 평생 한 여인만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태자가 태자빈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하긴, 태자빈이 태자의 다리도 고쳐주고 얼굴의 흉터도 지워드렸는데 태자가 당연히 태자빈에게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겠지요. 태자빈은 태자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제 은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첩을 들이는 일은 최대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이육진을 쳐다보는 덕빈의 눈에서 모성애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평생 너무 힘들고 외롭게 살았지만 자신의 아들만큼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주고 싶었다.한편, 이육진은 그런 덕빈을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예전에 그에게 첩을 들이지 못해 안달이던 덕빈은 심지어 은근슬쩍 소우연에게 이육진을 설득하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그런데 오늘은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걸까?“그만 돌아가세요.”이육진은 자신을 향해 손을 내젓는 덕빈을 보며 어마마마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가 있는 것 같았다.“어마마마, 혹 기분이 안 좋으시거나 고민이 있
”네가 나를 구했다고?”피식 웃던 이육진이 소우희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래, 어디 계속 얘기해보거라.”그는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어디까지 뻔뻔하게 굴 수 있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한편, 소우희는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육진을 보며 순간 긴장하기 시작했다.“소, 소인이 5년 전에 남강에서 태자 저하를 구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소인은 태자 저하의 생명의 은인이지요.”“그래? 그럼 옥패는 어디 있는 것이냐?”이육진은 자신의 물건을 되찾기 위해 최대한 꾹 참고 있었다.소우희는 재빨리 품에서 옥패를 꺼내 두 손으로 이육진에게 보여주었다.“태자 저하, 보십시오. 이게 바로 저하의 옥패입니다. 그때 당시 저하를 치료해 준 사람은 소인이 확실합니다.”소우희 손에 든 옥패를 힐끗 쳐다보던 이육진은 이내 고개를 돌려 간석에게 눈짓을 했고 이육진의 뜻을 바로 알아차린 간석은 소우희에게 다가갔다.흠칫하며 손을 슬쩍 피한 소우희는 미련이 남은 눈빛으로 옥패를 쳐다보았다.“아씨, 무슨 뜻입니까?”간석은 짜증이 치밀었지만 꾹 참고 억지 미소를 물었고 소우희는 이내 최대한 가여운 표정을 지으며 이육진을 쳐다보았다.“태자 저하, 소인을 믿으시는 것이지요?”“옥패를 간 태감에게 주거라.”이육진은 소우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에 소우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그동안 두렵고 겁에 질린 순간들을 너무 많이 겪었기에 소우희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이육진을 상대로 얕은수를 쓸 수는 없었다.‘이육진 이 남자가 내 말을 믿은 걸까? 아니면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건가?’냉랭하고 차가운 이육진의 표정으로 소우희는 도무지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한편, 간석은 이내 소우희의 손에서 옥패를 가져갔다.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태자 저하, 소인의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보십시오. 이 옥패는 그때 당시 저하께서 소인에게 준 옥패가 확실합니다.”이육진은 손에 끼고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