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규야, 이자의 손발을 부러트리고 혓바닥을 뽑아서 소씨 가문 저택 앞에 버리거라. 그러고도 이자가 문제를 더 일으킬 수 있는지 내 한번 지켜보겠다.”“아닙니다, 아닙니다! 태자 저하, 소인에게 그러시면 안 됩니다.”“내가 왜 너에게 이러면 안 되는 것이냐?”이육진의 물음에 머릿속이 하얘진 소우희는 그 어떤 이유도, 핑계도 떠오르지 않아서 결국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어찌, 어찌 생명의 은인한테 이러시는 겁니까?”“나를 구해준 사람은 연이다. 너 같은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 때문에 오늘 내 눈과 귀가 더럽혀졌으니 너에게 반드시 벌을 줘야겠다. 우리 연이가 너만 보면 기분이 안 좋거든.”“저하! 지금 소우연 때문에 소인을 죽이려고 하시는 겁니까?”“아니! 네 목숨은 연이에게 달렸다. 연이는 네가 고통과 절망 속에서 굴욕적으로 살아가길 바라는데 내가 어찌 연이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느냐?”이육진은 끝까지 역겹고 뻔뻔한 소우희와 더 이상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다.홱 돌아선 이육진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곁에 서있던 진규가 소우희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높이 치켜들더니 소우희의 손목을 향해 힘껏 내리꽂았다.그렇게 손과 발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소우희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그녀는 바닥에 축 늘어진 채 얼굴이 허옇게 질려버렸다.이를 힐끗 쳐다보던 이육진은 고개를 돌려 진규에게 말했다.“혹시 모르니까 저자의 손발에 있는 힘줄까지 다 잘라버리거라.”소우연이 이육진의 부러진 다리를 고칠 수 있다면 소우희의 손발을 고칠 수 있는 의원이 있을 수도 있기에 반드시 그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 버려야 한다.이육진은 절대 소우희에게 그 어떤 자비도 베풀고 싶지 않았다.한편, 이육진의 명령에 진규를 또다시 검을 치켜 들었고 소우희의 비명소리와 함께 바닥 여기저기에 피가 마구 튀었다.그렇게 소우희의 두 손과 두 다리는 철저히 망가졌고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되었다.“저하, 이자가 기절했습니다.”진규의 말에 이육진은 간석을 쳐다보며
“악!”비명소리가 태자부에 울려 퍼졌다. 소우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고 화들짝 놀란 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정연은 입을 가린 채 헐레벌떡 달려온 명심 등 하인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얼른! 얼른 이걸 치우라고 하여라!”정연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 공포와 역겨움이 한데 섞여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한편, 의자에 앉아있던 소우연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탁자 모서리를 잡은 채 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바닥에는 새빨간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껍질이 전부 벗겨진 고양이의 시체가 누워있었다.소우연도 크게 놀랐지만 그래도 냉정함과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바로 이때, 누군가가 방안으로 빠르게 뛰어들어왔다.갑자기 나타난 이육진이 소우연을 품에 꼭 끌어안은 모습을 보자 정연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편, 명심과 나머지 시녀들은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 너도나도 토하기 바빴다.그리고 간석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정연은 덜덜 떨면서 간석에게 말했다.“태감님, 얼른 저 고양이 시체부터 치워주십시오!”휘청거리며 일어난 정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힐끔 쳐다본 간석은 바닥에 널브러진 고양이 시체와 피가 줄줄 흐르는 고양이의 껍질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아니,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누가 이런 짓을 한 겁니까?”“이, 이민수 그자가 보낸 겁니다.”간석은 빠르게 다가가 맨손으로 고양이 시체를 선물함에 넣은 뒤, 밖으로 가지고 나가려고 했다.“잠깐만.”정신을 번쩍 차린 소우연이 간석을 불러 세웠다.“태자빈 마마…”“좋은 곳에 잘 묻어두거라.”소우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들고양이는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다.“네.”간석이 선물함을 챙겨 방을 나섰고 정연은 시녀들을 불러 바닥에 흐른 핏자국을 빠르게 지운 뒤, 방 안에 향초 여러 개를 피웠다.한편, 이육진은 안색이 창백한 소우연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연아, 내 이민수 그자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어차피
소우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참 후에야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왜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 태자 저하이신 걸 잊으신 거예요?”“그럼 난 마땅히 관용을 베풀어야 했느냐?”소우연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전생에 그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원래의 책 속에서 이민수와 소우희는 언제나 남의 피와 눈물을 밟고 올라 정상에 선 인물들이었다. 관용과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감사해요, 부군.”소우희는 소우연의 가슴속 깊은 응어리였다. 이육진이 이번에 행한 일은 그녀를 대신해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준 셈이었다. 그녀가 직접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었다.“너와 나는 한 몸이다.”소우연이 전에 들려준 이야기나 꿈과는 상관없이, 평서왕 이남진과 그의 세자 이민수는 이미 5년 전에 이육진을 공격했던 이들이었다. 단지 확실한 증거가 없었을 뿐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적대 관계였다. 한 사람이 살려면 다른 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어찌 손을 놓고 자비를 베풀겠는가.한편 진규는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싸고 얼굴을 가린 채, 소우희를 마차에 태워 그녀를 그대로 소 씨 가문 대문 앞에 내던졌다. 문 앞을 지키던 호위들은 이 광경에 크게 놀랐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여인은 가문의 둘째 아씨 소우희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어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 보고했다.“나리, 누군가가 문 앞에 다친 여인을 던져놓고 갔는데… 둘째 아씨와 많이 닮았습니다.”“뭐라 했느냐?!”막 차를 마시려던 소홍범은 깜짝 놀라 찻잔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서재에 함께 있던 소현우와 소현준도 충격을 받았다.“우희가 돌아왔다고?”우림은 주저하며 다시 답했다.“틀림없이 둘째 아씨 같습니다만…”소홍범은 급히 밖으로 나갔고, 뒤따르던 두 아들 또한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대문 앞에는 이미 행인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소홍범은 황급히 다가가 바닥
의원은 급히 소우희의 몸을 치료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민간에서도 이름난 의원들이 찾아와 그녀를 살펴보았지만, 결국 모든 의원들의 결론은 하나였다.그렇게 소우희는 서서히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희야…!”임진숙은 가슴을 치며 죽을 듯이 울부짖었다.“희야…!”그때 밖에서 소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으로 들어섰다.늙은 나인이 소 노부인의 몸을 부축하고 있었다. 소우희는 이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상에 누워 있었지만,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진흙덩이처럼 축 늘어진 몸을 보자 소 노부인의 눈은 크게 흔들렸다.“이게 어찌된 일이냐?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소 노부인의 분노 어린 외침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홍범아, 반드시 우희의 원수를 갚아줘야 한다.”소홍범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은 무력함으로 가득했다.지금 소우희는 평춘왕을 살해하고 도망친 혐의를 받고 있는 몸이었다.“분명 태자 짓이야! 그 요망한 소우연 짓이 틀림없어! 그 애가 나타난 이후로 우리 집안이 꼬이기 시작했어. 한준이는 다리를 잃고, 우희는 이렇게 살아도 산 게 아닌 꼴이 되고 말았어!”임진숙은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침상 위에서 그 말을 들은 소우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바로 소우연이 그랬어요! 소우연과 이육진, 그 두 사람이 절 이렇게 만들었어요…’특히 이육진이 가장 증오스러웠다.그자는 어쩌면 그토록 잔인할 수가 있는가? 자신을 구더기처럼 움직이지도 못하는 꼴로 만들다니!“보세요! 우희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소우연이야, 그 악독한 소우연이 우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라고요!”임진숙은 격하게 흐느꼈다.“그만해라! 소우연은 태자빈이다. 태자빈을 건드렸으니 이런 꼴이 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소홍범이 날카롭게 꾸짖자 임진숙은 흐느끼며 입을 다물었다.소현우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아버님, 과거 우리가 소우연에게 잘못한 건 맞습니다만, 어찌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습니까?”그의 시선이 다시 비
소 노부인은 머리를 주무르고 다리를 문질렀다. 그녀는 오랫동안 소우희를 원망하고 있었다. 소우희가 모든 사람을 속였기 때문이었다.그녀의 두통은 이제 더 이상 치료 약이 없었고,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살아가며 자신이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만 같았다. 자신은 죽어도 좋았지만, 소씨 가문은 계속 이어져야 했다.노부인은 울먹이며 소홍범을 불렀다.“홍범아, 잠시 밖으로 나오너라. 내 긴히 너한테 할 말이 있어.”소홍범은 잠시 망설였다. 어머니가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소현우와 소현준에게 별채에 있는 소한준을 불러 서재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임진숙은 침상 옆에서 힘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떨리는 두 손으로 소우희를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댈 곳이 없었다.“어미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절대 용서치 않을 거야.”임진숙의 마음은 온통 증오로 가득했다. 이전에는 단지 소우연이 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셋째 아들을 망가뜨리고, 또 그녀가 가장 아끼는 막내딸마저 이렇게 만들어놓았다. 그 증오는 이미 극에 달한 상태였다.소우희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오늘은 아령이 가져다준 약도 먹지 못한 탓에 온몸이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근질거렸다.너무나 가렵고 고통스러웠다.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사지마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입에서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누군가 머리카락을 긁어주고, 등이며 가슴이며 허벅지까지 긁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칠 듯이 근질거려 그녀는 작게 신음 소리를 냈다.임진숙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희야, 왜 그러니?”하지만 묻고 나서야 딸이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한 채 나인을 돌아보며 물었다.“얘가 무얼 원하는 게냐?”나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소녀도 모르겠습니다, 마님.”“손도 다리도 부러지고 혀까지 잘렸으니… 틀림없이 소우연 그 계집
소씨 가문을 돌봐주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었다.그저 더 이상 소우연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살아, 소씨 가문이 그나마 숨이라도 붙어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소홍범은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하겠습니다.”“그래.”소 노부인은 이제야 안심한 듯 보였지만, 곧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소홍범을 내보냈다.“어서 가서 아이들과 의논하거라.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네, 아들이 바로 가겠습니다.”소홍범은 예를 갖추고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서재 문 앞에 하인이 서 있었으나, 방 안에는 아들들이 보이지 않았다.“다들 어디 간 것이냐?”하인이 당황하며 답했다.“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요.”모른다고?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소홍범이 찾으러 나가려던 참에, 소현우가 소한준을 등에 업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셋째가 우희를 보고 싶다 하여 조금 늦었습니다.”소홍범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 이야기하자.”형의 등에 업힌 소한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소우희를 뼛속까지 미워했다. 거짓으로 모든 사람을 속이고, 결국 자신이 다리를 잃게 만든 사람이 그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자신보다 더 비참한 꼴이 된 것을 보니,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어느새 그의 증오는 소우연과 태자 이육진을 향해 있었다.그렇게 서재에 부자 넷이 모이게 되었다.한동안 침묵이 방 안을 짓누르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결국 소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소우연이 우희를 저렇게 잔혹하게 짓밟았으니, 언젠가는 우리도 같은 꼴이 될 겁니다. 소우연 그 여자는 애초에 정이란 게 없는 여자예요. 그리고 이육진은 예전의 그 태자가 아닙니다. 다리를 다친 이후 성정이 난폭해져서, 세간에서 그를 염라대왕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소홍범은 긴장한 얼굴로 밖을 흘끔거렸다. 누가 이 말을 듣지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집안이고 밖을 지키는 사람도 믿을 만했
세 아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신신당부를 한 뒤 소홍범은 소현우에게 소한준을 업고 돌아가라 지시했다.그리고 남아 있던 소현준을 향해 말했다.“둘째야, 이 집안에서 가장 냉정한 사람이 너뿐이다. 네가 나서서 우희한테 이런 짓을 한 자가 누구인지 한번 알아보거라.”소현준은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아버님께서 조금 전 태자부를 건드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조사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소우희는 현재 평춘왕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몸입니다. 그런 아이를 장군부에 데리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위험합니다.”소홍범은 말문이 막혔다.소현준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굳이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필시 그들의 짓일 테니까요. 이 상황에서 소씨 가문을 지키려면 소우희를 내치는 편이 현명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을 테니까요.”“우희가 평춘왕을 죽였다고? 그럴 리가 없다.”“왜 그럴 리가 없습니까? 제가 어머니를 모셨던 나인을 불러 직접 물어봤습니다. 나인의 말에 따르면, 우희는 평춘왕부에서 제멋대로 권세를 휘둘렀답니다. 호위병들도 그 아이의 지시를 따랐다 하니, 우희는 결코 순진한 사람이 아닙니다.”소현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그런 우희를 여전히 감싸고 계신다면, 소우연이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소현준은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순 없었지만, 늘 소우연이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깊은 원한을 느끼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소우연이었다면, 소우희와 형제들 그리고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았을까?당연히 미웠을 것이다!자신의 공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가고, 원치 않는 혼인을 강요받았다면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아버님, 소우연은 결코 이 상황에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소우희를 내치는 겁니다. 차라리 밖에서 의원을 찾아 치료시키더라도, 더는 가문에서 보호하지 않는 편이 현명합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소우희의 죄가 결코 가볍지
소우연 집안이 모조리 멸문당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이민수는 고개를 돌려 무릎 꿇고 있는 아령을 바라보았다.이제 그녀는 예전처럼 소우연을 흉내 낸 화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그저 의지할 곳 없는 가엾은 아이처럼 보였다.자신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불쌍한 존재 같았다.불쌍하다니.아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예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오늘 아령이 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그는 눈빛을 바짝 세우며 경계하듯 그녀를 노려보았다.“너 소우연을 많이 미워하는구나. 소씨 집안 사람들도. 그들이 멸문당하길 바라는 거냐?"아령은 숨이 턱 막힌 듯 입을 벌린 채 말이 나오지 않았다.한참을 머뭇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저는… 그저… 그들 때문에 세자 저하께서 이런 고초를 겪으신 것 같아서요. 그들이 저하를 망쳐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아령은 마치 비에 젖은 병아리처럼 몸을 한껏 낮추며,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이민수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려 했다.역시나 그녀의 그 약한 태도는 이민수의 눈빛을 조금 누그러뜨렸다.그녀를 바라보며 이민수는 생각했다.이유가 무엇이든 소씨 집안은 죽어 마땅했다.소우희가 천명을 타고났다는 말이 없었더라면, 어릴 적 소우연이 복성이라며 자신과 정혼하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소씨 집안은 다 죽어야 마땅했다.그중에서도 이육진과 소우연은 반드시…“세자 저하… 그럼 저는…”아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민수는 한참을 침묵하다 낮게 말했다.“가 보거라.”“예.”아령은 조용히 숨을 돌리며 자리를 물러났다.이민수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그의 내면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정신은 극도로 일그러지고 있었다.어릴 적부터 곁을 지켜오던 환관 상평조차 자신과 닮았다는 이유로 무참히 죽였다.지금은 아령이 치료해주고 있기에 그나마 몇 날 며칠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그다음은?아령은 알고 있었다.이대로는 끝장이라는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