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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빌었더니, 계약이 시작됐다
사랑을 빌었더니, 계약이 시작됐다
작가: 소담결

1화

작가: 소담결
last update 게시일: 2026-03-03 19:23:22

“신이 저주스럽다.”

입 밖으로 비명이 새어 나간 순간, 서아는 스스로도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 너머로 비릿한 알코올 향이 훅 끼쳤다.

“…미쳤네, 나.”

텅 빈 골목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길고양이가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소리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내뱉은 말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에 ‘닿은’ 것 같은 서늘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깜빡, 깜빡.

머리 위 전등이 임종을 앞둔 환자처럼 가쁘게 명멸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빛이 골목의 그림자를 비정상적으로 늘어뜨렸다.

서아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겨우 지탱하며 벽을 짚었다.

억지로 끌려간 회식 자리에서 꾸역꾸역 들이부은 소주가 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더 괴롭히는 건 숙취가 아니었다.

내일, 그리고 그 모레.

시지프스의 형벌마냥 반복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루할 일상이었다.

“하… 진짜.”

짧은 한숨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와, 방금 그거 꽤 마음에 드는데?”

그 순간, 서아의 등 바로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전율이 일었다. 서아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술기운에 무뎌졌던 감각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뭐야.”

서아는 녹슨 기계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밤의 어둠을 그대로 오려다 붙여놓은 것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조차 빨아들이는 칠흑 같은 머리칼, 그리고 비현실적일 만큼 창백한 피부.

무엇보다 서아의 시선을 묶어버린 것은 인간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서늘하고 어긋난 눈동자였다.

“신을 저주하는 인간이라니.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수집품이거든.”

남자가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서아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공포보다 먼저 치민 것은 불쾌감이었다.

‘미친놈인가. 요즘 도를 아십니까는 야근도 하나.’

“관심 없으니까 가던 길 가세요. 경찰 부르기 전에.”

무심하게 뱉어낸 서아가 다시 몸을 돌려 발을 뗐다.

하지만 남자의 존재감은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꿈치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쉽네. 큰맘 먹고 영업 나온 건데.”

남자가 한 발짝 다가왔다.

찰나의 순간, 주변의 온도가 영하로 곤두박질쳤다.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가 얼음 파편처럼 날카로웠다.

서아의 발걸음이 자석에 이끌리듯 멈췄다.

“네 소원, 들어줄 수 있어.”

“…뭐?”

“말 그대로야.”

남자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우아하면서도 기괴했다.

“돈, 명예, 복수. 네가 그 좁은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서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릿한 조소가 입술 사이로 흘렀다.

“사기 치지 마요. 아저씨 같은 사람 많이 봤으니까.”

“사기가 아닌데.”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며 기이한 빛을 냈다.

“대신 조건이 있지.”

“…조건?”

“네 영혼. 그건 내가 가져간다.”

골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 진짜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아저씨, 내 영혼? 이미 회사에 팔아넘긴 지 오래거든요? 가져갈 게 없어서 사양할게요. 이미 내 인생은 지옥이니까.”

서아는 다시 몸을 돌렸다.

이번에야말로 이 기괴한 대화를 끝낼 작정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더 탐나는데.”

그녀의 발걸음이 다시 멈췄다.

“뭐…?”

“지옥 같은 인생을 사는 인간이, 벼랑 끝에서 어떤 소원을 뱉어낼지.”

남자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머리로는 무시하고 지나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그런 소릴 해.”

“몰라.”

남자가 어느새 서아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에게선 향수 냄새도, 사람의 체취도 아닌, 서늘한 숲의 냄새가 났다.

“그래서 궁금해. 네가 이 비참함을 대가로 무엇을 살지.”

잠깐의 정적 속에서 서아는 남자의 눈을 노려보았다.

오기가 치밀었다.

미친놈이라면 제대로 미친 소리로 받아쳐 주고 싶었다.

당황하는 기색이라도 보고 싶었다.

서아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주 가파르게 올라갔다.

“좋아. 거래해.”

남자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이제야 말이 통하네.”

남자가 허리를 숙여 서아의 시선 높이를 맞췄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 서아는 도망치지 않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혹은 기이할 정도로 느리게 뛰었다.

“말해봐. 뭘 원해?”

서아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나를.”

마지막 단어가 나오기 전, 골목의 공기가 멈춘 듯 고요해졌다.

“사랑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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