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2화(외전 13.)외전 13.루나가 세상에 태어난 지 어느덧 90일.헬렐 호텔 기획팀은 비상이 걸렸다.사유는 단 하나.‘강루나 양의 백일 잔치’였다.한때 지옥의 군단을 지휘하던 시우는 이제 펜트하우스 거실에 대형 화이트보드를 설치하고, 달봉과 함께 백일 잔치 전략 회의를 열고 있었다.“봉봉, 다시 확인해. 당일 호텔 로비에 배치할 생화는 전부 새벽이슬을 머금은 최상급 작약이어야 한다. 루나의 피부는 소중하니까, 꽃가루 날림이 적은 품종으로 선별했나?”“대표님, 이미 네덜란드 농장 하나를 통째로 예약했습니다! 꽃가루는커녕 향기 입자까지 필터링 중입니다!”달봉은 이제 비서인지 돌잔치 플래너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그의 태블릿 PC에는 백일 잔치 초대 명단과 메뉴 리스트가 빼곡했다.“그리고 루나가 입을 백일 한복 말이야. 실크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건 당연하겠지? 아이의 몸에 닿는 거니 화학 염료는 절대 안 돼. 천연 염색으로만 진행하라고 전해.”“물론입니다! 장인께서 지금 눈이 침침해지실 정도로 정성을 쏟고 계십니다. 그런데 대표님…… 하객 명단에 ‘아스모데우스’ 님은 어쩌실 건가요? 저번에 루나 보러 오셨다가 호텔 조명을 다 깨트리셨는데…….”시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마력이 사라진 인간 시우에게 아스모데우스 같은 불청객은 이제 통제하기 힘든 변수였다.“그놈은 입구에서 모리한테 맡겨. 마녀의 인장으로 힘을 억제하라고 해. 루나의 백일 잔치에 소란을 피우는 놈은 누구든 내 손으로 직접 축출할 거니까.”그때, 안방에서 루나를 재우고 나온 서아가 거실의 풍경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화이트보드에는 ‘루나의 동선’, ‘공기 청정 구역 설정’, ‘돌잡이(아니 백일잡이) 예상 시나리오’ 등이 복잡하게 적혀 있었다.“시우야, 우리 그냥 가족끼리 조촐하게 밥 먹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이건 무슨 국제 정상회담 수준인데?”“서아, 이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야. 우리 루나가 이 험한 세상에 태어나 무사히 백일을 버텼다는 걸 증명하는 성스러운 의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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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1화(외전 12.)외전 12.펜트하우스의 거대한 통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차갑게 일렁이고 있었지만, 실내의 공기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톱모델 한서아의 출산 예정일을 앞두고, 강시우의 일상은 이미 ‘전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그는 호텔 전속 의료진 10여 명을 펜트하우스 바로 아래층에 24시간 상주시켰고, 분만실에 버금가는 최첨단 의료 장비들을 안방 옆에 비치해 두었다.“시우야, 제발…… 그만 좀 왔다 갔다 해. 바닥 닳겠다.”서아가 만삭의 배를 소중하게 감싸안으며 소파에 기대어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평소 런웨이 위에서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저 한 생명을 품은 숭고한 어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시우는 얼음물을 들이켜며 초조한 눈빛으로 서아의 안색을 살폈다.“어떻게 가만히 있어? 네 몸 안에서 새로운 영혼이 밖으로 나오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마력이 있었다면…….”시우는 자신의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한때 지옥의 유황불을 다스리고 수만 명의 영혼을 단숨에 거두어들이던 손이었다.하지만 지금 그의 손은 땀으로 젖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이제 그는 아내의 고통을 10분의 1로 줄여줄 작은 마법조차 부릴 수 없는, 그저 무력한 인간 남편일 뿐이었다.그때였다.평온하게 숨을 몰아쉬던 서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그녀가 배를 움켜쥐며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아, 시우야. 시작된 것 같아. 아까랑은 달라.”시우의 심장이 쿵, 하고 발등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그는 사색이 되어 서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봉봉! 당장 병원으로!”이미 마력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우의 목소리에는 왕의 위엄과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시우는 서아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은 채 그녀의 젖은 손을 꽉 맞잡았다.“서아, 나 봐. 내 눈 봐. 내가 여기 있잖아. 숨 크게 들이마시고.”진통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마다 서아의 비명이 거실을 메웠다.런웨이의 여왕이라 불리며 어떤 시련 앞에서도 당당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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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0화(외전 11.)외전 11.모리의 지적은 뼈아팠다.마력이 있었다면 손짓 한 번으로 서아의 입덧을 멈추거나 태교 음악을 허공에 띄웠겠지만, 이제 시우는 오직 자신의 두 발과 두 손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걱정 마라, 모리. 마력 따위 없어도 내겐 서아를 향한 집념과, 그리고…… 무한한 재력이 있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서아의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지 않게 할 거다. 내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어머, 아빠 됐다고 아주 대사가 신파네. 그럼 넌 이제 밤샘 육아도 몸으로 때워야 할 텐데, 괜찮겠어? 인간 몸뚱어리 그거 생각보다 금방 고장 난다고.”모리의 독설에도 시우는 끄떡없었다.그는 이미 집무실 한편에 쌓인 명품 아기용품 상자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서아는 모델이라 감각이 예민해. 아이도 분명 엄마를 닮아 미적 감각이 뛰어날 거다. 마력으로 꾸며준 환상 따위는 필요 없어. 내 손으로 직접 조립한 아기 침대와 내가 직접 고른 유기농 면 의류만 입힐 거다.”“대표님! 제가 당장 육아 백과사전 전 권을 구매해서 요약본을 만들겠습니다! 인간 아빠로서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제가 서포트하겠습니다!”달봉이 다시 한번 충성심을 불태우며 눈물을 닦았다.모리는 툴툴거리면서도 은근슬쩍 가방에서 보석이 박힌 작은 노리개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툭 던졌다.“이거, 마력은 없어도 인간 몸에 좋은 기운이 서린 진귀한 보석이야. 서아한테 전해줘. 임신 기간 동안 마음 안정되는 데는 직방이니까.”“모리 님…… 역시 츤데레의 정석이네요.”달봉의 감탄에 모리는 다시 선글라스를 내려쓰며 차갑게 대꾸했다.“닥쳐, 봉봉. 드라이브나 가. 나 지금, 이 염장질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당 떨어져.”집무실을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시우는 다시 초음파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마력을 버리고 인간이 된 대가로 얻은 이 작은 생명.그것은 그가 지옥에서 누렸던 그 어떤 절대적인 권력보다도 무겁고 소중했다.시우는 사진 속 작은 점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내렸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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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9화(외전 10.)외전 10.톱모델 한서아의 아침은 언제나 차갑고 날카로운 자기검열로 시작되었다.그녀의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수억 원대의 계약이 오가는 정밀한 예술품이자 가장 엄격한 전장이었다.평소라면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떠 가벼운 스트레칭과 해독 주스로 몸을 깨웠을 그녀였지만, 요 며칠 사이 서아의 세계에는 기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이상해.”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서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럼증에 다시 베개 위로 쓰러졌다.머릿속에 수천 마리의 나비가 날갯짓하는 듯한 몽롱한 감각.평소 저혈압이 있긴 했지만, 이토록 전신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은 생전 처음이었다.거실에서 조찬 모임 관련 서류를 훑고 있던 시우가 침실의 미세한 공기 흐름 변화를 감지하고 번개처럼 달려왔다.“서아, 아직 안 일어난 거야? 혹시 어디 안 좋아?”시우가 침대 머리에 앉아 서아의 이마를 짚었다. 악마 특유의 서늘한 체온이 닿자, 서아는 작게 신음하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시우야, 나 좀 이상해. 몸이 내몸 같지가 않아. 자도 자도 졸음이 쏟아지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아무래도 지난주 파리 화보 촬영 때 독감이라도 옮아온 걸까?”시우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그에게 서아의 건강은 지옥의 안위보다 중요한 절대 명제였다.“열은 없는데…… 공기가 너무 희박하게 느껴지는군. 봉봉! 당장 주치의를 펜트하우스로 압송해 와! ”“시우야, 제발……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서아는 시우를 말리며 겨우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입맛을 돋우기 위해 평소 즐겨 마시던 산미 강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내렸지만, 잔을 입가에 가져가는 순간 서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평소에는 세련되게만 느껴지던 원두의 향이, 오늘따라 지독한 타는 냄새와 비릿한 금속 향처럼 코끝을 찔렀다.“우욱……!”서아는 커피잔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싱크대로 달려가 헛구역질했다.위장이 뒤집히는 듯한 강렬한 거부감.시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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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8화(외전 9.)외전 9.화려했던 헬렐 호텔의 루프탑 웨딩 파티가 끝나고, 서울의 야경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새벽.연회장의 불은 꺼졌지만, 호텔 뒷마당의 작은 벤치에는 여전히 묘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아…… 진짜 죽겠다. 대표님 결혼식인데 왜 제 수명이 깎이는 기분일까요.”달봉은 턱시도 나비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벤치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그의 눈 밑에는 평소보다 두 배는 짙어진 다크서클이 훈장처럼 내려앉아 있었다.며칠 밤을 새우며 은방울꽃 수급부터 하객 명단 확인, 심지어는 시우의 넥타이 각도까지 챙겨야 했던 비서의 고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그 옆에서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손톱을 매만지던 모리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봉봉, 엄살은. 네 주인님이 지옥의 왕좌를 버리고 인간 여자랑 계약을 갱신하는데, 그 정도 수고는 당연한 거 아냐?”“그 ‘주인님’ 모시느라 제 연애 전선은 이미 초토화됐다니까요? 모리 님, 아까 부케 못 받아서 화나신 거 제가 다 압니다. 근데 그건 바람이 분 거지 제 잘못이 아니잖아요.”달봉이 억울한 듯 항변하자, 모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사실 아까 지희에게 부케를 뺏긴 건 모리에게 꽤 큰 사건이었다.비록 여인의 사랑을 받게 해주는 악마이기는 하나, 지금은 서아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그깟 꽃다발 하나 놓친 게 자존심 상했다.“누가 화났대? 난 그냥 꽃가루 알레르기가 걱정됐을 뿐이야. 그리고 봉봉, 너 착각하지 마. 내가 부케를 받으려고 했던 건 순전히 서아의 체면을 위해서였으니까.”“아 예, 그러시겠죠. 근데 아까 부케 놓칠 때 ‘야! 내 부케!’라고 소리 지른 건 제가 아니라 환청이었나 봅니다?”달봉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모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평소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달봉을 거꾸로 매달아버렸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인간 남자 앞에서는 마력이 혀끝에서만 맴돌 뿐이었다.모리는 홧김에 옆에 놓여 있던 샴페인 병을 집어 들었다.하지만 병은 이미 비어 있었다.“치, 술도 없네. 야, 봉봉. 너 차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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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7화(외전 8.)외전 8.지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질투라기보다는, 그가 가진 상처의 깊이를 가늠해 보려는 조심스러운 탐색에 가까웠다.아스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차가운 저와는 달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죠.”그것은 과거형이었다.하지만 그 문장 안에 담긴 애정의 농도는 현재 진행형보다 훨씬 진했다.지희는 가슴 한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그 ‘따뜻한 사람’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아모 씨가 여전히 그 그림자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하지만 지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어제 루프탑에서 스스로 맹세하지 않았던가.그의 상처를 덮어주겠노라고.지희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아스가 꽉 쥐고 있던 차가운 커피잔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아까의 기습적인 스킨십과는 다른, 아주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위로였다.“아모 씨. 아까 내가 그랬죠? 잊지 않아도 된다고.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아모 씨의 마음도, 나는 존중해요. 하지만 그 추억이 아모 씨를 갉아먹게 두지는 않을 거예요.”아스가 고개를 들어 지희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아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깊고 따뜻한 신뢰만이 가득했다.“내 이상형은요, 자기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에요. 완벽해 보이려고 애쓰지만, 사실은 넥타이 하나 매는 것도 서툰, 그런 귀여운 남자요.”지희의 농담 섞인 고백에 아스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제가 그렇게 귀엽습니까?”“네, 완전요.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요. 과거의 그 사람도, 아모 씨가 이렇게 좋은 사람 만나서 다시 웃는 걸 바랄걸요? 만약 내가 그 여자였다면, 나보다 더 당신을 많이 웃게 해줄 여자가 나타나길 기도했을 것 같은데.”그 말은 아스의 심장에 박힌 가장 날카로운 가시를 더 깊이 쑤셔 넣었다.사라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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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0화. 사랑이라 포장 된 가스라이팅20화.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한 걸음 더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오늘 우리 팀에 들어온 신입 사원이랑 저녁을 먹었습니다. 이름이 참 예쁘더군요. 유바다 씨라고.”순간, 하늘이 쥐고 있던 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데스크 아래로 숨긴 그녀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동혁은 그 떨림을 외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이름이 선생님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 혹시나 했습니다. 그 친구가 동생 자랑을 하도 유난스럽게 하길래 궁금했는데…….”동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하늘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직접 보니까 알겠네요. 왜 그렇게 과보호하며 아끼는지. 선생님 같은 동생이면, 저라도 누가 털끝 하나 건드리는 거 못 참을 것 같습니다.”하늘의 안색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다.동혁의 말은 위로였으나, 하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경고였다.재현이 오빠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의 공포, 그리고 오빠가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낄 무너짐.그 두 가지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오빠한테…. 제 이야기하셨나요?”하늘의 목소리가 울음 섞인 비명처럼 가늘게 갈라졌다.동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동혁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씁쓸하게 덧붙였다.“하지만 하늘 씨, 비밀은 지키는 게 아니라 사라지는 겁니다. 숲이 불타면 숨어있던 새도 날아오를 수밖에 없어요. 그전에…… 선생님이 먼저 안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하늘은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동혁은 더 이상 그녀를 몰아세우지 않고 몸을 돌렸다.동혁이 떠난 복도에는 그의 구두 소리만 길게 꼬리를 물다 사라졌다.하늘은 텅 빈 스테이션에 홀로 남겨진 채, 그가 두고 간 약국 봉투를 멍하니 응시했다.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가 마치 재현의 낮은 경고음처럼 귓전을 때렸다.소리 없는 눈물이 차올랐다.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재현은 자신을 사랑한다.그의 지독한 소유욕을 하
Zuletzt aktualisiert: 2026-04-21
Chapter: 19화. 두 남매19화. 두 남매퇴근 시간의 도심은 갈 곳을 잃은 불빛들로 어지러웠다.동혁은 평소라면 서둘러 할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향했겠지만, 오늘은 굳게 닫힌 차창 밖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옆자리에는 갓 입사한 신입 사원, 바다가 빳빳한 서류 가방을 무릎에 올린 채 앉아 있었다.“팀장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대접해야 하는데 이렇게 얻어먹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바다의 목소리에는 신입 특유의 활기와 예의가 묻어났다.동혁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짧게 답했다.“사수로서 밥 한 끼 사는 건 당연한 겁니다. 유바다 씨 일하는 게 맘에 들기도 했고.”식당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고기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다.몇 잔의 술이 오가자, 바다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그는 동혁이 묻지도 않은 가족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사실 제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놈이 제 삶의 전부나 다름없습니다. 부모님 일찍 여의고 둘이서 참 치열하게 살았거든요.”바다가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액정 속에는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하늘의 모습이 있었다.지금 병원 복도에서 보던 그늘진 얼굴과는 딴판인, 생기 넘치는 모습.동혁은 그 사진 속 하늘의 깨끗한 팔뚝과 뺨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동생이 요양병원에서 일하는데, 밤샘 근무가 많아서 얼굴 보기도 힘듭니다. 그래도 요즘은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도 하는 모양이라 마음이 좀 놓입니다. 재현이라고, 제 매제 될 놈이 아주 지극정성이거든요.”바다의 그 해맑은 웃음 뒤로 동혁은 자신이 목격한 ‘그림자 속의 남자’를 떠올렸다.바다가 ‘지독한 사랑’이라 믿고 있는 그 관계의 실체가 무엇인지, 동혁은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같은 시각, 하늘은 재현의 차 조수석에 앉아 좁은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차 안은 기괴할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다.재현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남은 한 손으로는 하늘의 손등을 연신 부드럽게 쓰다
Zuletzt aktualisiert: 2026-04-21
Chapter: 18화. 세상 좁은 인연18화. 세상 좁은 인연식품 개발팀 회의실의 공기는 신입 사원들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동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 위에 놓인 세 개의 인사 기록 카드를 훑었다.서류 더미를 넘기던 그의 손가락이 유독 한 장의 서류 위에서 멈췄다.‘유바다.’흔치 않은 이름이었다.그 글자를 읽는 순간, 소독약 냄새 진동하는 병원 복도에서 보았던 한 여자의 얼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새벽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도망치듯 멀어지던 그녀, 하늘.바다와 하늘.지독하게도 잘 어울리는 연상 작용이었다.“유바다 씨.”동혁이 고개를 들었다.다부진 체격에 눈매가 선하면서도 어딘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청년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동혁은 그가 입고 있는 빳빳한 정장보다, 자신을 응시하는 그 눈동자 속에서 묘한 기시감을 읽어냈다.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과 닮은, 그 단단한 시선.“혹시, 여동생이 있습니까?”뜬금없는 질문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됐다.바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네.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동혁의 가슴 한구석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매끄러운 이음새였다.할머니를 돌보며 자신의 상처를 ‘푸른 꽃’이라 자조하던 그 여자가, 눈앞의 이 청년이 그토록 아끼는 동생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머릿속을 스쳤다.하지만 동혁은 이내 감정을 억누르며 시선을 기록 카드로 돌렸다.세상에 이름 비슷한 남매야 흔하디흔했다.그런 드라마틱한 인연이 현실에서 그리 쉽게 맺어질 리 없다고 자신을 다독였다.아니, 어쩌면 그 인연이 사실일까 봐 겁이 났는지도 몰랐다.만약 하늘이 이 청년의 동생이라면, 그녀의 몸에 피었던 그 멍들은 이 오빠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으니까.“유바다 씨 사수는 제가 직접 맡도록 하죠.”동혁의 목소리가 회의실 정적을 깼다.팀원들 사이에서 의외라는 듯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팀장이 신입의 사수를 자처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팀장님이 직접요? 유바다
Zuletzt aktualisiert: 2026-04-20
Chapter: 17화. 날갯짓을 시작하는 새17화. 날갯짓을 시작하는 새벽을 타고 무너져 내린 하늘의 귓가로 재현의 가벼운 발소리가 멀어졌다.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재현의 손가락이 머물다 간 뺨 위에는 오물처럼 끈적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닦아냈다.하늘은 비틀거리며 다시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왔다.동혁이 두고 간 하얀 봉투가 여전히 데스크 위에 놓여 있었다.그 안의 연고와 소독약들은 마치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낙인 같았다.하늘은 그것들을 낚아채 쓰레기통 깊숙한 곳으로 처박았다.도와달라는 외침이 어떤 피바람을 몰고 오는지 방금 확인했다.재현이 웃으며 살의를 내비칠 때마다, 하늘의 세계는 한 뼘씩 더 좁아지는 새장이 되었다.퇴근 시간이 되자 하늘의 몸은 기계적으로 반응했다.병원 로비를 빠져나가는 발걸음에는 생기가 없었다.정문 앞,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웅웅거리며 낮은 진동을 내뱉는 검은 차가 보였다.하늘이 뒷좌석 문을 열려 하자, 재현이 조수석 문을 직접 열어주며 화사하게 웃었다.“누나, 뒤에 앉으면 내가 기사 같잖아. 옆에 앉아.”재현의 목소리에는 어젯밤의 서늘함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그는 안전벨트까지 직접 채워주며 하늘의 코끝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오늘 누나 좋아하는 파스타 재료 사놨어. 집에서 내가 해줄게.”재현은 운전대를 잡은 채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차 안은 재현이 미리 뿌려둔 은은한 방향제 냄새로 가득했다.불과 몇 시간 전, 병원 문밖에서 머리채를 휘어잡던 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하지만 하늘은 알고 있었다.재현이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을 때마다, 그 손아귀에 힘이 조금씩 실리고 있다는 것을.“그 남자 말이야.”재현이 신호 대기 중에 툭 던졌다. 하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냥 보호자라며. 근데 왜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누나를 봐? 기분 나쁘게.”“재현아, 그건…….”“됐어. 누나가 예뻐서 그런 거겠지. 내가 이해해야지, 뭐.”재현은 하늘의 손을
Zuletzt aktualisiert: 2026-04-20
Chapter: 16화. 좁아진 새장16화. 좁아진 새장간호사스테이션의 백색광이 유독 시리게 쏟아지는 새벽이었다.고요를 짓누르던 적막 위로 불쑥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소스라치게 놀란 하늘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평소보다 더 깊게 가라앉은 눈을 한 동혁이 서 있었다.그는 아무 말 없이 흰 비닐봉지 하나를 데스크 위로 밀어 놓았다.봉투 사이로 비치는 연고의 실루엣이 하늘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낱낱이 파헤쳐진 치부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처럼, 하늘의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타들어 갈 듯 달아올랐다.“이러시지 않으셔도…….”뒷걸음질 치는 하늘의 목소리가 젖은 종이처럼 힘없이 찢어졌다.하지만 동혁은 물러서지 않았다.오히려 가운 너머 감춰진 그녀의 팔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꼭 바르세요. 그리고, 신고하십시오.”“네?”“폭력을 당하고도 침묵하는 게 정답은 아닙니다. 선생님이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에요.”하늘은 마른침을 삼켰다.목구멍이 바짝 말라붙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재현의 손길이 닿았던 뺨과 팔뚝이 다시금 욱신거리는 환상통에 휩싸였다.“그건 제가…… 제가 잘못을 해서 그런 거예요. 그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잘못했다고 해서 폭력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설령 진짜로 죽을죄를 지었다고 해도요.”동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단단한 무게감이 스테이션의 공기를 흔들었다.그는 잠시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자신의 묵직한 과거 한 조각을 꺼내놓았다.“저도 가정폭력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 지옥 같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때 저를 지켜준 건, 지금 저기 누워계신 할머니였어요. 할머니가 제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지금과는 전혀 다른 괴물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동혁의 시선이 하늘의 떨리는 눈동자에 멈췄다.“선생님 곁에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기꺼이 방패가 되어줄 사람이요.”동혁의 질문에 하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오빠, 바다의 얼굴이었다.늘 자신을 과보호하며 세상의 풍파로부터 막아주려 애쓰
Zuletzt aktualisiert: 2026-04-19
Chapter: 15화. 멍든 나날의 시작15화. 멍든 나날의 시작재현은 초를 다투며 하늘의 일상을 난도질했다.오피스텔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재현의 손길은 거칠어졌다.그는 하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거울 앞으로 끌고 가 그녀의 초라한 안색을 직시하게 했다.“이것 봐. 나랑 있을 때는 죽을상인데, 그 새끼 앞에서는 입꼬리가 실룩거리네? 누나, 내가 우스워? 내가 군대에서 썩는 동안 저런 놈이랑 시시덕거리려고 기다린 거야?”‘짝—!’거실의 정적을 깨는 파열음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하늘은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며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소리를 내면 매질이 더 길어진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재현은 쓰러진 하늘의 위로 올라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짐승처럼 헐떡였다.“아파? 아파야지. 그래야 딴 놈 생각을 안 하지.”재현은 하늘의 몸에 새겨진 푸른 멍울들 위에 기괴할 정도로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소유권을 확인하는 낙인을 찍듯, 그의 손톱이 하늘의 하얀 살결을 파고들었다.하늘은 천장을 바라보며 감각을 마비시키려 애썼다.지옥은 더 이상 멀리 있지 않았다.동혁이 건네는 다정한 위로가 선명해질수록, 재현이 휘두르는 폭력의 강도는 정비례하며 높아졌다.하늘은 이제 동혁의 친절이 두려워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럴수록 재현은 “왜 그 새끼를 피하느냐, 차라리 당당하게 만나지 그러냐?”라며 역정을 내며 다시 손을 올렸다.탈출구가 없는 원형의 감옥 안에서 하늘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재현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마다 그녀의 영혼은 한 뼘씩 깎여 나갔고, 이제 그녀의 눈동자엔 생기 대신 깊은 절망의 늪만이 고여 있었다.한여름의 열기가 병원 유리창을 달굴 때도 하늘은 꿋꿋하게 긴팔 카디건을 여몄다.실내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다는 핑계는 이제 동료들 사이에서도 의아함을 자아냈지만,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재현은 영악했다.그는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은밀한 곳, 옷가지로 충분히 은닉할 수 있는 부위만을 골라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탈의실에서조차 누군가와 마주칠까 봐 퇴근
Zuletzt aktualisiert: 2026-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