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2화(외전 13.)외전 13.루나가 세상에 태어난 지 어느덧 90일.헬렐 호텔 기획팀은 비상이 걸렸다.사유는 단 하나.‘강루나 양의 백일 잔치’였다.한때 지옥의 군단을 지휘하던 시우는 이제 펜트하우스 거실에 대형 화이트보드를 설치하고, 달봉과 함께 백일 잔치 전략 회의를 열고 있었다.“봉봉, 다시 확인해. 당일 호텔 로비에 배치할 생화는 전부 새벽이슬을 머금은 최상급 작약이어야 한다. 루나의 피부는 소중하니까, 꽃가루 날림이 적은 품종으로 선별했나?”“대표님, 이미 네덜란드 농장 하나를 통째로 예약했습니다! 꽃가루는커녕 향기 입자까지 필터링 중입니다!”달봉은 이제 비서인지 돌잔치 플래너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그의 태블릿 PC에는 백일 잔치 초대 명단과 메뉴 리스트가 빼곡했다.“그리고 루나가 입을 백일 한복 말이야. 실크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건 당연하겠지? 아이의 몸에 닿는 거니 화학 염료는 절대 안 돼. 천연 염색으로만 진행하라고 전해.”“물론입니다! 장인께서 지금 눈이 침침해지실 정도로 정성을 쏟고 계십니다. 그런데 대표님…… 하객 명단에 ‘아스모데우스’ 님은 어쩌실 건가요? 저번에 루나 보러 오셨다가 호텔 조명을 다 깨트리셨는데…….”시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마력이 사라진 인간 시우에게 아스모데우스 같은 불청객은 이제 통제하기 힘든 변수였다.“그놈은 입구에서 모리한테 맡겨. 마녀의 인장으로 힘을 억제하라고 해. 루나의 백일 잔치에 소란을 피우는 놈은 누구든 내 손으로 직접 축출할 거니까.”그때, 안방에서 루나를 재우고 나온 서아가 거실의 풍경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화이트보드에는 ‘루나의 동선’, ‘공기 청정 구역 설정’, ‘돌잡이(아니 백일잡이) 예상 시나리오’ 등이 복잡하게 적혀 있었다.“시우야, 우리 그냥 가족끼리 조촐하게 밥 먹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이건 무슨 국제 정상회담 수준인데?”“서아, 이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야. 우리 루나가 이 험한 세상에 태어나 무사히 백일을 버텼다는 걸 증명하는 성스러운 의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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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1화(외전 12.)외전 12.펜트하우스의 거대한 통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차갑게 일렁이고 있었지만, 실내의 공기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톱모델 한서아의 출산 예정일을 앞두고, 강시우의 일상은 이미 ‘전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그는 호텔 전속 의료진 10여 명을 펜트하우스 바로 아래층에 24시간 상주시켰고, 분만실에 버금가는 최첨단 의료 장비들을 안방 옆에 비치해 두었다.“시우야, 제발…… 그만 좀 왔다 갔다 해. 바닥 닳겠다.”서아가 만삭의 배를 소중하게 감싸안으며 소파에 기대어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평소 런웨이 위에서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저 한 생명을 품은 숭고한 어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시우는 얼음물을 들이켜며 초조한 눈빛으로 서아의 안색을 살폈다.“어떻게 가만히 있어? 네 몸 안에서 새로운 영혼이 밖으로 나오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마력이 있었다면…….”시우는 자신의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한때 지옥의 유황불을 다스리고 수만 명의 영혼을 단숨에 거두어들이던 손이었다.하지만 지금 그의 손은 땀으로 젖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이제 그는 아내의 고통을 10분의 1로 줄여줄 작은 마법조차 부릴 수 없는, 그저 무력한 인간 남편일 뿐이었다.그때였다.평온하게 숨을 몰아쉬던 서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그녀가 배를 움켜쥐며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아, 시우야. 시작된 것 같아. 아까랑은 달라.”시우의 심장이 쿵, 하고 발등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그는 사색이 되어 서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봉봉! 당장 병원으로!”이미 마력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우의 목소리에는 왕의 위엄과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시우는 서아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은 채 그녀의 젖은 손을 꽉 맞잡았다.“서아, 나 봐. 내 눈 봐. 내가 여기 있잖아. 숨 크게 들이마시고.”진통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마다 서아의 비명이 거실을 메웠다.런웨이의 여왕이라 불리며 어떤 시련 앞에서도 당당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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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0화(외전 11.)외전 11.모리의 지적은 뼈아팠다.마력이 있었다면 손짓 한 번으로 서아의 입덧을 멈추거나 태교 음악을 허공에 띄웠겠지만, 이제 시우는 오직 자신의 두 발과 두 손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걱정 마라, 모리. 마력 따위 없어도 내겐 서아를 향한 집념과, 그리고…… 무한한 재력이 있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서아의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지 않게 할 거다. 내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어머, 아빠 됐다고 아주 대사가 신파네. 그럼 넌 이제 밤샘 육아도 몸으로 때워야 할 텐데, 괜찮겠어? 인간 몸뚱어리 그거 생각보다 금방 고장 난다고.”모리의 독설에도 시우는 끄떡없었다.그는 이미 집무실 한편에 쌓인 명품 아기용품 상자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서아는 모델이라 감각이 예민해. 아이도 분명 엄마를 닮아 미적 감각이 뛰어날 거다. 마력으로 꾸며준 환상 따위는 필요 없어. 내 손으로 직접 조립한 아기 침대와 내가 직접 고른 유기농 면 의류만 입힐 거다.”“대표님! 제가 당장 육아 백과사전 전 권을 구매해서 요약본을 만들겠습니다! 인간 아빠로서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제가 서포트하겠습니다!”달봉이 다시 한번 충성심을 불태우며 눈물을 닦았다.모리는 툴툴거리면서도 은근슬쩍 가방에서 보석이 박힌 작은 노리개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툭 던졌다.“이거, 마력은 없어도 인간 몸에 좋은 기운이 서린 진귀한 보석이야. 서아한테 전해줘. 임신 기간 동안 마음 안정되는 데는 직방이니까.”“모리 님…… 역시 츤데레의 정석이네요.”달봉의 감탄에 모리는 다시 선글라스를 내려쓰며 차갑게 대꾸했다.“닥쳐, 봉봉. 드라이브나 가. 나 지금, 이 염장질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당 떨어져.”집무실을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시우는 다시 초음파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마력을 버리고 인간이 된 대가로 얻은 이 작은 생명.그것은 그가 지옥에서 누렸던 그 어떤 절대적인 권력보다도 무겁고 소중했다.시우는 사진 속 작은 점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내렸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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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9화(외전 10.)외전 10.톱모델 한서아의 아침은 언제나 차갑고 날카로운 자기검열로 시작되었다.그녀의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수억 원대의 계약이 오가는 정밀한 예술품이자 가장 엄격한 전장이었다.평소라면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떠 가벼운 스트레칭과 해독 주스로 몸을 깨웠을 그녀였지만, 요 며칠 사이 서아의 세계에는 기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이상해.”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서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럼증에 다시 베개 위로 쓰러졌다.머릿속에 수천 마리의 나비가 날갯짓하는 듯한 몽롱한 감각.평소 저혈압이 있긴 했지만, 이토록 전신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은 생전 처음이었다.거실에서 조찬 모임 관련 서류를 훑고 있던 시우가 침실의 미세한 공기 흐름 변화를 감지하고 번개처럼 달려왔다.“서아, 아직 안 일어난 거야? 혹시 어디 안 좋아?”시우가 침대 머리에 앉아 서아의 이마를 짚었다. 악마 특유의 서늘한 체온이 닿자, 서아는 작게 신음하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시우야, 나 좀 이상해. 몸이 내몸 같지가 않아. 자도 자도 졸음이 쏟아지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아무래도 지난주 파리 화보 촬영 때 독감이라도 옮아온 걸까?”시우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그에게 서아의 건강은 지옥의 안위보다 중요한 절대 명제였다.“열은 없는데…… 공기가 너무 희박하게 느껴지는군. 봉봉! 당장 주치의를 펜트하우스로 압송해 와! ”“시우야, 제발……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서아는 시우를 말리며 겨우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입맛을 돋우기 위해 평소 즐겨 마시던 산미 강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내렸지만, 잔을 입가에 가져가는 순간 서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평소에는 세련되게만 느껴지던 원두의 향이, 오늘따라 지독한 타는 냄새와 비릿한 금속 향처럼 코끝을 찔렀다.“우욱……!”서아는 커피잔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싱크대로 달려가 헛구역질했다.위장이 뒤집히는 듯한 강렬한 거부감.시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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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8화(외전 9.)외전 9.화려했던 헬렐 호텔의 루프탑 웨딩 파티가 끝나고, 서울의 야경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새벽.연회장의 불은 꺼졌지만, 호텔 뒷마당의 작은 벤치에는 여전히 묘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아…… 진짜 죽겠다. 대표님 결혼식인데 왜 제 수명이 깎이는 기분일까요.”달봉은 턱시도 나비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벤치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그의 눈 밑에는 평소보다 두 배는 짙어진 다크서클이 훈장처럼 내려앉아 있었다.며칠 밤을 새우며 은방울꽃 수급부터 하객 명단 확인, 심지어는 시우의 넥타이 각도까지 챙겨야 했던 비서의 고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그 옆에서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손톱을 매만지던 모리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봉봉, 엄살은. 네 주인님이 지옥의 왕좌를 버리고 인간 여자랑 계약을 갱신하는데, 그 정도 수고는 당연한 거 아냐?”“그 ‘주인님’ 모시느라 제 연애 전선은 이미 초토화됐다니까요? 모리 님, 아까 부케 못 받아서 화나신 거 제가 다 압니다. 근데 그건 바람이 분 거지 제 잘못이 아니잖아요.”달봉이 억울한 듯 항변하자, 모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사실 아까 지희에게 부케를 뺏긴 건 모리에게 꽤 큰 사건이었다.비록 여인의 사랑을 받게 해주는 악마이기는 하나, 지금은 서아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그깟 꽃다발 하나 놓친 게 자존심 상했다.“누가 화났대? 난 그냥 꽃가루 알레르기가 걱정됐을 뿐이야. 그리고 봉봉, 너 착각하지 마. 내가 부케를 받으려고 했던 건 순전히 서아의 체면을 위해서였으니까.”“아 예, 그러시겠죠. 근데 아까 부케 놓칠 때 ‘야! 내 부케!’라고 소리 지른 건 제가 아니라 환청이었나 봅니다?”달봉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모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평소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달봉을 거꾸로 매달아버렸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인간 남자 앞에서는 마력이 혀끝에서만 맴돌 뿐이었다.모리는 홧김에 옆에 놓여 있던 샴페인 병을 집어 들었다.하지만 병은 이미 비어 있었다.“치, 술도 없네. 야, 봉봉. 너 차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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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7화(외전 8.)외전 8.지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질투라기보다는, 그가 가진 상처의 깊이를 가늠해 보려는 조심스러운 탐색에 가까웠다.아스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차가운 저와는 달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죠.”그것은 과거형이었다.하지만 그 문장 안에 담긴 애정의 농도는 현재 진행형보다 훨씬 진했다.지희는 가슴 한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그 ‘따뜻한 사람’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아모 씨가 여전히 그 그림자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하지만 지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어제 루프탑에서 스스로 맹세하지 않았던가.그의 상처를 덮어주겠노라고.지희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아스가 꽉 쥐고 있던 차가운 커피잔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아까의 기습적인 스킨십과는 다른, 아주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위로였다.“아모 씨. 아까 내가 그랬죠? 잊지 않아도 된다고.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아모 씨의 마음도, 나는 존중해요. 하지만 그 추억이 아모 씨를 갉아먹게 두지는 않을 거예요.”아스가 고개를 들어 지희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아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깊고 따뜻한 신뢰만이 가득했다.“내 이상형은요, 자기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에요. 완벽해 보이려고 애쓰지만, 사실은 넥타이 하나 매는 것도 서툰, 그런 귀여운 남자요.”지희의 농담 섞인 고백에 아스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제가 그렇게 귀엽습니까?”“네, 완전요.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요. 과거의 그 사람도, 아모 씨가 이렇게 좋은 사람 만나서 다시 웃는 걸 바랄걸요? 만약 내가 그 여자였다면, 나보다 더 당신을 많이 웃게 해줄 여자가 나타나길 기도했을 것 같은데.”그 말은 아스의 심장에 박힌 가장 날카로운 가시를 더 깊이 쑤셔 넣었다.사라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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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9화. 다시 다가오는 어둠89화. 다시 다가오는 어둠단어의 매끄러운 이음새가 부끄러움에 툭툭 끊어져 나갔다.생전 처음 제 입으로 뱉어본 낯선 호칭이 혀끝을 스치자마자, 하늘은 제풀에 민망해져 칼을 쥔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귀 끝이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그 작은 읊조림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혁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남자의 눈동자가 일순간 크게 일렁였다.제 고집으로 밀어붙인 결과물이었음에도, 막상 하늘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두 글자가 주는 파괴력은 동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뚝딱거리는 연인의 목소리가 이토록 가슴 깊은 곳을 난도질하듯 간지럽힐 줄은 몰랐다.동혁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밀려오는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직하게 실소를 흘렸다.입매가 걷잡을 수 없이 호선을 그리며 무너져 내렸다.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늘의 가냘픈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렸다.“……한 번 더 들어보려다가 내가 먼저 녹을 것 같네.”동혁이 패배를 인정하듯 낮게 읊조리며, 얼굴을 드러낸 하늘의 이마 위로 제 이마를 툭 기댔다.가까워진 거리 사이로 서로의 가쁜 숨결이 엉겨 붙었다.하늘은 제 손목을 쥔 동혁의 손바닥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놀리던 장본인 역시 전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이제 만족했어요? 정말 부끄러워 죽겠어.”하늘의 앙탈 같은 부끄러움에 동혁은 귀엽다는 듯 웃었다.단단하던 그의 가슴팍이 부드럽게 들썩이며 낮고 묵직한 웃음소리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사내에서는 결재 서류의 오타 하나도 용납하지 않던 구 팀장의 서슬 퍼런 이성이, 고작 여자의 수줍은 투정 한 자락에 이토록 무력하게 허물어지고 있었다.동혁은 얼굴을 감싸 쥔 하늘의 가냘픈 손목을 살며시 쥐어 아래로 내려놓았다.“그렇게 부끄러워할 거면서 대답은 또 어떻게 참고 했습니까.”동혁이 하늘의 붉어진 뺨을 제 손가락 등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서늘한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하늘은 으스스 몸을 떨며
최신 업데이트: 2026-06-04
Chapter: 88화. 자기야 288화. 자기야 2동혁은 이제 아주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을 쉬듯, ‘자기’라는 낯선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베어 물었다.동혁의 단단한 팔에 매달리듯 팔짱을 낀 채 이끄는 대로 발을 옮기는 하늘의 뺨 위로 한층 더 진한 홍조가 번져나갔다.숨길 수 없는 열기가 귀 끝을 지나 목덜미까지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자기라니. 진짜 낯간지럽게 무슨…….’하늘은 애써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하지만 그런 새침한 생각과 달리, 얄미울 정도로 뻔뻔한 남자의 다정함이 가슴 밑바닥을 간지럽히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돌려세운 얼굴 위로, 숨기지 못한 호선이 맑게 피어올랐다.마침내 제 나이에 걸맞은 소박하고도 완전한 행복이 걸린 순간이었다.동혁은 제 팔뚝에 닿는 하늘의 미세한 떨림과, 일부러 시선을 피하면서도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는 옆얼굴을 놓치지 않았다.장난스럽게 던진 애칭이었지만, 그것이 하늘의 얼굴에서 어두운 기억을 지워내고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도하는 것은 꽤 짜릿한 일이었다.동혁은 카트를 쥔 손에 슬며시 힘을 주며, 하늘이 걷기 편하도록 제 보폭을 한 번 더 고쳐 잡았다.***조리대 위에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짙게 베어났다.마트에서 사 온 재료들이 알록달록하게 그릇을 채우고 있었고, 두 사람은 식탁에 나란히 앉아 본격적으로 김밥을 만들기 시작했다.큼직한 손으로 김발을 쥐고 제법 진지한 미간을 한 채 김밥을 단단하게 말아내는 것은 동혁의 몫이었다.하늘은 동혁이 흐트러짐 없이 잘 말아둔 김밥을 도마 위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예쁘게 썰어 하얀 접시에 차곡차곡 담아냈다.서툴지만 제법 합이 맞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일상의 한 페이지였다.하늘은 칼끝에 묻은 참기름을 쓱 닦아내며, 예쁘게 썰고 남은 못생긴 김밥 꼬투리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속 재료가 삐죽이 튀어나와 가장 간이 잘 밴 놈이었다.하늘은 그것을 동혁의 입가로 쑥 내밀며 장난스레 속삭였다.“원래 김밥은 이 끝부분이 제일
최신 업데이트: 2026-06-03
Chapter: 87화. 자기야87화. 자기야동혁의 깔끔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한마디에 하늘이 입을 벌린 채 뱉으려던 유구한 변명들이 공중으로 허망하게 흩어졌다.당황한 하늘이 동혁의 옆구리를 손가락 끝으로 콕 찌르는지도 모른 채, 동혁은 아주 자연스러운 얼굴로 아주머니가 건넨 햄 조각을 받아 하늘의 입가에 동혁은 이쑤시개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햄 조각을 하늘의 입술 근처로 슬며시 가져다 댔다.아주머니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확인한 그가,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자기야. 한 입 먹어봐.”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노골적인 애칭에 하늘의 사고회로가 순간 정지했다.깜짝 놀란 하늘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동혁을 향했다.‘자기’라는 단어가 이토록 매끄럽게 흘러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정작 동혁은 당황한 하늘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극히 태연했다.오히려 기회가 왔다는 듯 짐짓 다정한 눈빛을 가장하며,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입 크기의 햄을 쏙 집어넣었다.짭조름하고 고소한 기름진 맛이 입안에 퍼지는 동안에도 하늘은 씹는 것조차 잊은 채 붉어진 얼굴로 그를 째려보았다.“어때? 맛있어?”반말과 존댓말의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동혁의 나직한 음성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시식 코너 아주머니는 눈앞의 젊은 부부가 부려대는 닭살 돋는 애정 행각이 그저 흐뭇한지 껄껄 웃으며 흐뭇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하늘은 쏟아지는 민망함을 삼키려 서둘러 우물우물 햄을 씹었다.아주머니 앞에서 대놓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순순히 장단을 맞춰주는 것뿐이었다.“네, 네…… 맛있네요.”겨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하늘의 귀 끝이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남자의 완벽한 포커페이스 뒤에 숨겨진 짓궂은 장난기에 완전히 말려든 꼴이었다.동혁은 귀여운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얌전히 햄을 받아먹는 하늘의 부리 같은 입술을 보며 속으로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색시 입맛에 맞다니 신랑이 사줘. 이 햄을 팬에서 달달 볶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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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6화. 햄 볶듯이 행복하게86화. 햄 볶듯이 행복하게툭, 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끊어지는 감각과 함께 하늘은 눈을 번쩍 떴다.암막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정신이 맑아지기도 전에 가슴을 옥죄어오는 압박감이 먼저 찾아왔다.오늘 토요일, 사람 많은 대형 마트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출발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건만, 사방이 카트와 낯선 타인들로 가득 찬 공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명치끝이 찌릿하며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숨이 조금씩 가빠지자, 하늘은 본능적으로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며칠 전 병원에서 받아온 하얀 약 봉투가 손끝에 걸렸다.정제되지 않은 불안을 가라앉혀 줄 신경안정제.하늘은 약봉지 하나를 뜯어 손에 쥔 채 서둘러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온기 없는 방 안에 혼자 갇혀 있다가는 불안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거실로 나오자 옅은 커피 향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던 동혁이 고개를 돌렸다.단정하게 정돈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요동치던 심장 소리가 신기하게도 아주 조금씩 사그라들었다.“일어났어요?”동혁의 나직한 목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부드럽게 깼다.하늘은 제 손에 쥔 약봉지를 슬그머니 손바닥 안으로 감추며 메마른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네……. 일찍 일어나셨나 봐요.”“평소 습관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휴일인데도 눈이 번쩍 떠지더군요.”동혁이 소리 내어 가볍게 웃었다.무장해제 된 편안한 웃음이었다.하늘은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려던 하늘은 식탁 위를 보고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하얀 식탁보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상.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와 몽글몽글한 스크램블 에그가 노란 주스 잔과 함께 예쁘게 놓여 있었다.하늘이 멍하니 식탁을 바라보다 동혁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천천히 다가왔다.“장 보러 가기 전에, 속을 좀 채우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부지런하셔라…….”하늘이 결국 참지 못하고 환하게 웃어버렸다.남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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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5화. 즐거운 주말85화. 즐거운 주말“팀장님…….”‘쪽.’갑자기 거리를 좁혀온 동혁의 입술이 하늘의 달아오른 입술 위로 짧고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서늘한 향수 냄새와 함께 뜨거운 온기가 부딪쳤다.“팀장님 금지라고 했을 텐데요.”동혁이 하늘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사내에서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오직 제 연인 앞에서만 무장해제 되는 어여쁜 웃음이었다.남자가 이토록 예쁘게 웃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의 호선 그린 입매가 저녁 조명 아래서 눈부시게 빛났다.“바, 밥 먹다 말고 진짜 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밥이나 먹어요.”하늘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기려 허둥지둥 숟가락을 쥐고 국물을 크게 떠 넣었다.뜨거운 국물 때문인지, 방금 전의 입맞춤 때문인지 두 뺨이 새빨간 장미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귀 끝까지 붉어진 채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은 하늘을 보며, 동혁은 흐뭇한 눈길로 다시 수저를 들었다.“토요일에 같이 장 보러 가요.”동혁이 물컵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못을 박았다.단순히 흘러가는 말이 아닌, 주말의 일정을 확실하게 고정해 두겠다는 다정한 통보였다.세상 밖으로 나가 적응하겠다던 하늘의 조금 전 결심을, 그는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고 곧장 현실의 계획으로 실행에 옮겨준 것이다.“네!”하늘이 기다렸다는 듯 활기차게 대답했다.붉게 물들었던 두 뺨에는 여전히 부끄러운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만큼은 주방의 정적을 단숨에 깨뜨릴 정도로 싱그럽고 청량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일부러 숟가락으로 밥알을 꾹꾹 누르며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냈다.오빠라는 거대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첫걸음이 구동혁이라는 남자와 함께라는 사실이, 두려움보다는 기분 좋은 설렘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동혁은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다시피 한 하늘의 정수리를 보며 가볍게 콧노래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저렇게까지 정직하게 반응해 주니, 앞으로 다가올 주말이 벌써 길게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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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4화.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프러포즈84화.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프러포즈어둠이 밀려든 거실에는 낮게 맞물리는 숨소리와 옷가지가 스치는 서글픈 마찰음만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동혁의 입술은 하늘의 도발을 집어삼키듯 집요했고,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은 손길에는 빈틈이 없었다.밀어낼 생각도 없으면서 동혁의 단단한 어깨를 유영하듯 쥐고 있던 하늘의 손가락 끝이 점차 잘게 떨려왔다.얼마나 숨을 나눴을까.입술이 떨어지는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노골적으로 얽혔다.하늘은 붉게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며, 제 목덜미를 받치고 있는 동혁의 손등 위로 뺨을 살며시 기댔다.“……반응이 너무 정직하신 거 아니에요?”하늘이 자극적인 장난기를 거두고 조금은 물기 어린 음성으로 속삭였다.동혁은 엄지손가락으로 하늘의 젖은 입술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그의 시선은 하늘의 얼굴을 지나 거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종이 쇼핑백으로 향했다.유바다가 밤새 피를 말려가며 개어놓았을 동생의 흔적들.동혁은 그것이 하늘에게 줄 안도감과 슬픔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정직하지 않으면 잡아두질 못하니까.”동혁이 하늘의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며 밀착했던 몸을 한 걸음 물리 시켰다.남자의 품이 떨어져 나가자 차가운 거실 공기가 그새를 메웠다.동혁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지며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저녁은 먹었습니까.”“아직요. 팀장님 기다리느라.”“구동혁입니다.”동혁이 냉장고 문을 열며 낮게 정정했다.“집에서까지 그 딱딱한 직함으로 불리고 싶진 않군요. 입을 맞추고 싶을 때 부르는 치트키라면서, 방금은 도발치고 너무 진지했습니다.”하늘은 소파에 멍하니 앉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냉철하기로 소문난 남자가 제 호칭 하나에 이토록 예민하게 구는 모양새가 제법 비현실적이면서도 기분이 좋았다.하늘은 소파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조리대 위에 늘어놓는 동혁의 등판을 가만히 응시했다.완벽하게 재단된 와이셔츠 위로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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