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켁, 켁!”
물을 마시던 시아가 사레가 걸려 콜록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렇게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도윤이 처음이었다. “싫은 게 아니에요.” 배탈 나는 게 무서울 뿐이지. 도윤은 양꼬치를 뒤집으며 다시 물었다. “싫지 않은데, 배가 고픈데도 샌드위치를 안 먹을 정도라고요?” 시아는 익어가는 양꼬치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 그건 사정이 있어요. 저도 먹고 싶었어요.” 잘 익은 양꼬치 하나를 집은 도윤이 시아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시아는 금세 행복한 표정으로 양꼬치를 입에 쏙 넣었다. “크….” 그 모습을 본 도윤이 피식 웃었다. 사실 도윤은 술을 마신 날의 기억이 조금 남아 있었다. 주여와 이태, 자신까지 부축한 채 택시를 잡으러 뛰어다니던 시아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날 맞닿았던 시아의 체온이 아직도 기억났다. 그래서인지 오늘 기운 없이 축 처진 모습이 괜히 신경 쓰였다. 대신 해줄 수 있는 건 없었지만 따뜻한 밥 한 끼는 사주고 싶었다. 도윤은 양꼬치를 몇 점 더 시아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한 점 한 점 야무지게 먹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웠다. “다음번에는 먹어줄 겁니까?” “그때 봐서요?” 이럴 때는 또 알다가도 모르겠다. 마치 일부러 못돼 보이려고 하는 사람 같았다. ‘왜 저렇게 구는 거지?’ 시아는 사이다 한 잔으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배에 손을 얹고 “허….” 하고 숨을 내쉬었다. 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잘 드시는 분이 밥은 왜 안 드신 거예요?” “너무 피곤해서요…….” 시아는 뒤늦게 창피해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이제 가죠?” ‘계산은 네가 하는 거지?’ 밥을 먹자고 했지 산다고는 안 했으니 급격히 불안해졌다. 도윤은 아무렇지도 않게 카드를 내밀었다. ‘살았다.’ “잘 먹었습니다.” “택시까지 태워 보내드릴게요.” ‘딩.’ [퀘스트 성공 - 안전한 퇴근!] ‘야호!’ 시아는 속으로 환호하면서도 손사래를 쳤다. “어유, 아니에요. 밥도 얻어먹었는데요.” “저는 취한 거 다 갚은 겁니다.” 도윤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택시를 잡았다. 시아를 태워 보낸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까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던 모습이 떠올랐다. 도윤은 피식, 한 번 더 웃었다.택시 안에서 시아는 시트와 한몸이 되었다.
“살았다….” ‘딩.’ [퀘스트 성공 : 권도윤 호감 +1] 호감도를 올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사귀는 건가? 일단 패널티는 조심해야겠다는 건 몸소 깨달았다. [인생 서브남주가 최고야.] [뭔 소리야 본처가 최고지.] 손을 휘적여 창을 없앴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편하게 택시로 귀가한 시아는 뽀득뽀득 세안하고 침대에 누웠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주여의 승진 때문에 이를 갈며 잠도 못 잤는데, 요새는 퀘스트 하나만 잘 끝내도 마음 편히 잘 수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햇살이 끝내주게 눈부셨다. 행복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시아는 기지개를 펴고 할 일 없이 핸드폰을 열어 사진을 찰칵찰칵 찍었다. 마음에 드는 사진 하나를 골라 업로드하며 태그를 걸었다. [#좋은아침 #아침생얼 #직장인의토요일] 할 일을 마친 시아가 보글보글 양치를 시작했다. ‘딩.’ [퀘스트 : 여자주인공 데리고 신기백화점 가기 성공 시 - 명품백 / 실패 시 - 가지고 있는 명품백 파손] 이것은 필시 전쟁을 요청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시아의 24개월 할부 명품백은 아직 할부도 안 끝났다. 시아는 아침 댓바람부터 주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오늘 일정 어떻게 되세요?” “시아 씨? 나야 별일 없지…….” “잘됐어요. 저랑 백화점 좀 가셔야겠어요!” “지금 어디세요? 제가 갈게요!” 시아는 그 어느 날보다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택시를 불렀다.주여가 있다는 동네에 도착하자 길거리에서 오이를 파는 할머니의 오이를 무더기로 사주고 있는 주여가 보였다.
“과장님! 저 할머니가 과장님보다 더 부자예요!” 주여를 끌고 가는데 이번엔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가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설마 하고 돌아보니 주여는 이미 리어카 뒤에 붙어 있었다. “과장님! 저희 백화점 가기로 했잖아요.” “이것만 도와주고 시아 씨 먼저 가 있어.” 아니, 과장님 오늘 안에 못 오실 것 같은데요? 리어카를 다 밀더니 이번엔 목줄을 안 한 동네 개를 보고 멈췄다. “그만!” 시아가 주여의 손을 붙잡아 택시에 끌어다 넣었다. 퀘스트가 말한 백화점 가기는 그냥 가는 수준이 아니었다. 잡아끌고 가야 했다. 망할 퀘스트. 시아는 개를 보며 ‘힝’ 하는 주여를 무시하고 신기백화점에 들어갔다. ‘딩.’ [퀘스트 성공 - 명품백 획득!] 시아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어디 떨어져 있니, 눈먼 명품백아? 누가 주는 건가?멍때리는 주여를 데리고 매장으로 가방을 보러 다니던 중 한 명품관에서 이태를 마주했다.
“어? 부장님?” [여자주인공이 있으니까 남자주인공도 있어야지.] [너는 방해하는 역할이야.] 이태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의 눈은 시아가 아닌 주여를 쳐다보고 있었다. “김 과장님, 신 대리님. 여기서 보니까 반갑네요.” 셋은 자연스럽게 커피를 마시러 자리를 옮겼다. 이태가 넥타이를 고르러 왔다고 하자 시아가 골라준다며 매장으로 돌아갔다. “과장님, 심심하면 가방이나 보고 있어요.” 주여를 멀리 보내놓고 시아는 호호거리며 넥타이를 하나하나 비교했다. 그의 목에 가져다 대며 입에발린 칭찬을 해댔다.“호호, 부장님은 뭘 해도 다 어울리세요.”
넥타이를 대느라 가까워진 시아의 손끝이 셔츠 깃을 스쳤다. 이태의 시선이 잠깐 시아에게 내려앉았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다시 주여를 향했다.
남자주인공이라 여자주인공 보는 건 알겠는데 순간 넥타이로 목을 졸라버리는 상상을 해버렸다.
상상은 상상이고, 시아는 눈웃음을 살랑살랑 지으며 넥타이 몇 개를 골라줬다. 그때 이태가 매장 직원에게 무언가 속닥였다.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주여가 보고 있던 가방을 포장했다. “같이 쇼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태가 주여에게 가방을 선물했다. ‘나는? 넥타이 내가 다 골라줬는데 나는?’ 그 순간 다른 가방 하나가 시아에게 건네졌다. “시아 씨도 넥타이 골라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나, 진짜 주네. 명품백. 심지어 블랙카드로 일시불로 긁어버리는 이태를 보며 시아는 잠시 사랑에 빠질 뻔했다. 주여는 부담스럽다며 가방을 받지 않았다. 시아는 거절하기엔 유혹이 너무 컸다. ‘퀘스트해서 정당하게 얻은 전리품이라고.’ 부장이 낙하산이라는 이야기가 사실이었나 보다. 블랙카드라니. 전철에서도 명품백을 누가 훔쳐갈세라 온몸으로 껴안았다. 집에 도착해 쇼핑백을 풀 때까지 믿기지가 않았다. 진짜…… 진짜 생겼어. 명품백, 일시불로. 이 정도면 악녀 할 만한데?의욕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시아가 명품백을 껴안았다.
도윤이도 행복하게 말했다.“대리님 오늘 같이 저녁먹어요!”시아가 아무생각없이 좋다고했다. 도윤의 입꼬리가 진정되질 않아서 주먹으로 가렸다. 그날 점심 도윤은 다른의미로 입꼬리가 아래로향하게 되었다. “주여 과장님 도윤씨랑 저녁먹기로 했는데 같이드실래요?”시아가 주여에게 같이 금요일저녁을 보내자고 권유했다. 데이트를 하려던 도윤은 실망했지만 티낼수없어서 입꼬리 처치가 매우 곤란했다. “좋아요! 부장님도 가요!”이태가 피식웃으며 도윤을 쳐다보았다. “좋습니다”도윤의 눈이 절망에빠졌다. 이태가 더욱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시아는 생각보다 커진 판에 도윤에게 살짝 미안했지만 많은게 좋은거지. “도윤아 괜찮지?”시아가 뒤늦게도 물어봤다.“좋죠!”도윤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도윤은 이미 반쯤 포기했다. 이태가 그런 도윤을 보고 소리내서 웃었다.“쿡쿡”그모습을 시아와 주여만이 신기해서 쳐다볼뿐 도윤의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오고 있었다.일을 마치고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무엇을 먹을지 정했다. “이 앞에 닭발집이 생겼다던데, 가보실래요?”주여가 신이나서 말했다. 시아도 신이나서 닭발을 외쳤다. 도윤과 이태가 서로 바라보며 눈짓으로 대화했다. “무슨일인데 그래요?”시아가 궁금해서 물었다.“저희가 사실 매운걸 잘 못먹습니다.”이태가 사무적으로 보고했다.“거기 주먹밥이랑 똥집도있어요!”눈치없이 주여가 다시 끼어들었다. 도윤과 이태는 멋쩍게 웃으며 일단 밥집으로 발을 내딛었다. 포차감성의 밥집 겸 술집인 닭발집에서 주여와 시아는 매운뼈닭발을 시켰다. 이태와 도윤을 위해 주먹밥과 똥집도 잊지않았다. 주여가 한입에 닭발을 넣고서는 매워서인지 맛있어서인지 발을 동동동 굴렀다. 시아도 웃으며 한입 뜯어먹었다. 매워서 발을 구른거였다. 재빨리 소주를 시켰다. 혀에서 불이나서 빨리 알코올로 진화해야겠다. 시아는 병뚜껑을 급하게따서 주여에게 한잔 따르고 바로 자신의 잔에 따랐다. 주여와 짠을 할 겨를도없이 둘이 동시에 소주를 입에 부었다. “캬”이
“내일이면 오신대요.”도윤이 덧붙인 뒷마디에 시아가 다시 울상을 지었다.‘딩.’[퀘스트 : 공항에 마중 나가시오성공 시 - 권이태 호감도 +2 / 실패 시 - 복도에 책상]“내일 몇 시 비행기래?”시아가 도윤에게 물었다. 도윤이 우물쭈물 저녁 비행기라고 대답했다.시아는 조용히 책상을 바라봤다.절대 지킬 거야.이태가 빠진 점심은 생각보다 허전했다. 맨날 같이 먹다 안 먹어서 그런가. 사람 난 자리는 안다더니.주여가 웃으면서 시아에게 말했다.“부장님 없는 자리 되게 크다. 그쵸.”시아가 말없이 호호 웃었다. 도윤이 그런 시아의 입에 한 숟가락 크게 밥을 넣어주며 말했다.“잘 먹어야 뼈 붙는다니까요?”일이 끝나고 아침과 마찬가지로 저녁도 도윤이 데려다주었다. 자연스레 목을 껴안고 빤히 쳐다보는데 도윤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얼른 몸을 쏙 빼버린 도윤을 보며 시아가 왜 저래, 하며 벨트를 혼자 맸다.도윤이 밖에서 혼자 손부채질을 하고 운전석으로 들어왔다.“도윤아, 너 괜찮아?”시아가 걱정스레 물었다.도윤이 앞만 보며 괜찮다고 말하고는 시동을 걸었다. 아침엔 흥얼대더니 저녁엔 라디오 볼륨을 조금 높이는 도윤이었다.시아는 담백하게 내일 봐, 하고는 문으로 쏙 사라졌다.도윤이 아쉬워서 문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서성였다. 초인종을 누를까 손을 멈칫하다가 그냥 주먹을 쥐고는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다음 날도 시아는 도윤과 함께 출근했다.“도윤아, 있잖아. 저녁에 공항에 부장님 데리러 가면 안 될까?”도윤이 시아를 쳐다보며 갸웃거렸다.“대리님이 왜요?”시아가 목까지 빨개져서 변명했다.“아니, 나를 맨날 데려다주셨는데 이번엔 우리가. 아니 내가. 아니 너까지. 잘해주셨으니까, 응?”도윤이 검지손가락으로 핸들을 툭툭 치며 고민했다.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어딘가 표정이 석연치 않았다.시아는 속도 없게 도윤이 부탁을 들어준 게 고마워서 운전하는 그의 팔뚝을 한 번 잡았다.“고마워.”도윤이 창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입을 막았다
“사실 오늘 소개팅이 있어요.”“어머! 어디서요?”주여가 이태를 힐끔 보고는 작게 대답했다.“한국호텔이요.”시아가 어머어머, 거기 진짜 좋은 호텔인데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먹잇감을 잡은 맹수처럼 주여를 바라봤다.큰 수확을 얻은 시아는 식사 시간을 무사히 보냈다.문제는 이태였다.이태를 어떻게 뿌리치느냐가 관건이었다.‘악녀짓을 좀 해야 되는데 오늘만 혼자 가도 될까요?’개소리였다.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시아의 머리가 더욱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여가 유유히 사라지고 시아에게 이태가 다가왔다.“오늘 혼자 가면 안 돼요?”“네, 안 됩니다.”시아가 주먹을 쥐고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어디 들렀다가 가도 돼요?”“그건 괜찮습니다.”시아가 절뚝이며 부장의 차에 올랐다. 한국호텔로 가달라고 부탁했다.그대로 집으로 갈지 호텔에 들러줄지는 이제 순전히 이태의 마음에 달렸다.의외의 장소를 들은 이태는 눈을 한 번 치켜떴다가 내리더니 그대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꽉 막힌 차들을 헤치고 도심 한복판에 있는 한국호텔에 들어섰다. 이태가 익숙한 듯 차를 맡기고는 시아를 받쳐 들어 내려줬다.시아가 한국호텔을 올려다보고는 이태에게 말했다.“여기부턴 진짜 저 혼자 가야 돼요.”이태가 얼굴을 찌푸렸다.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저런단 말인가.이태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팔짱을 꼈다.시아는 그게 승낙의 의미인 줄 알고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던 시아의 눈에 주여와 웬 멸치 같은 게 보였다.‘웩. 과장님 저런 스타일 좋아해?’시아가 절뚝이며 주여에게 다가갔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다리 이렇게 만들고 남자 만나는 거야?”어색하게 대사를 읊었다.주여가 잔뜩 놀라 굳은 채 시아를 쳐다봤다.“대리님…….”“무슨 낯으로 소개팅을 하러 와?”주여가 당황해서 무슨 소리냐며 정신 차리라고 말했다. 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나는 이런지도 모르고! 너를 정말……
다행히 이태는 시아를 받아낼 수 있었다. 가슴에 시아의 머리를 밀착시키고 자신의 등이 바닥을 향하게 떨어져 내렸다.다 식은 라면 국물이 사방팔방 튀어 하얀 와이셔츠를 물들였다. 크게 들린 쿵 소리에 시아가 놀라 또다시 벌떡 일어났다.“악!”너무 무리를 했는지 다리에 통증이 일었다. 시아는 이태의 가슴 위에서 아파서 데굴데굴 굴렀다.“괜찮습니까?”이태가 살짝 몸을 일으켜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아파요! 잠시만! 잠시만요.”시아가 이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며 말했다. 이태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등을 토닥이며 귓가에 쉿 소리를 들려주었다. 어릴 때 제 엄마가 자주 해줬던 행동이었다.한참을 멈춰 있던 두 사람은 시아의 통증이 가라앉고 나서야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죄송해요.”시아가 이태의 엉망이 된 옷을 바라봤다.“이거 지금 빨리 빨아봐요. 벗어봐요.”시아가 다급하게 이태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뭔 놈의 단추는 이렇게 많은지. 이태가 당황해서 단추를 푸는 시아를 말렸다.“신시아 씨! 이거 무슨 의미입니까?”반쯤 풀려버린 단추. 그 위에 올라타 있는 시아. 누가 봐도 시아가 이태를 덮치는 그림이었다.“빨래하려는 의민데요.”아랑곳하지 않고 시아는 괴물 같은 속도로 나머지 단추를 다 풀었다. 옷을 들고 절뚝이며 재빨리 개수대로 가 퐁퐁으로 1차 애벌빨래를 했다. 세탁망에 넣어 세탁기를 돌리고 뒤를 돌아보니 벗고 계신 부장님이 있었다.‘몸 좋네.’입을 만한 옷이 없어 이불로 부장을 돌돌 말아버렸다. 이태는 자신이 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시아가 한 번 사고를 쳐서 이번엔 절대 져주지 않았다. 이태를 억지로 눕혀 한숨 자고 있으라고 한 뒤 힘겹게 뒷정리를 시작했다.느릿느릿 마치고 이태를 돌아보니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시아는 발을 끌고 다가가 이태를 쳐다보았다.남자 주인공이라더니 얼굴이랑 몸에 축복을 받고 태어났구나.속눈썹이 시아보다 긴 듯했다. 그의 코를 보았다.‘아침에 닿을 뻔했지…….’그리고 입술도 자
신 대리가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리며 기막혀했다.“이따 퇴근할 때는 제가 태워드리겠습니다.”이태는 또다시 자기 할 말만 하고 부장실로 들어가버렸다.도윤이 부들대며 사내 메신저로 톡을 보냈다.‘이태 형! 뭐 하는 짓이야!’옆에 숫자가 많았다.숫자가 많다?실수로 단체 톡방에 올렸다.회사가 일순 웅성대기 시작했다.“권도윤…. 너 뭐 하는 짓이야?”시아가 어이없다는 듯 도윤을 바라봤다.도윤이 머리카락을 잡고 소리 없이 절규했다.‘난 죽었다.’도윤의 톡 밑으로 대답이 붙기 시작했다.‘형? 권이태, 권도윤?’‘우와.’‘낙하산?’그날 하루 종일 시아를 태워주는 권이태보다 권도윤의 형 권이태가 회사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렸다. 메신저와 복도에서는 하루 종일 권 씨 형제의 이름이 들려왔다.점심시간에 모인 이태가 이를 악물었다.“권도윤….”“미안….”도윤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부장이 신입을 낙하산으로 꽂아준 것 아니냐는 말부터 회사 이사장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별의별 이야기가 다 돌고 있었다.“됐다. 이미 벌어진 일.”이태가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넘겼다. 도윤만이 한없이 땅굴을 파고 있었다.주여가 눈치를 보며 도윤을 위로했다.“그래도 진짜 낙하산은 아니잖아.”도윤이 주여를 보는 눈빛에 원망을 가득 담았다.주여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아니지 않은 게 아닌 거야? 미안.”주변의 웅성거림이 한층 커졌다.시아는 이 상황이 불편해 또 식사를 하다 말았다. 이태가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 했다.“조금 더 드시죠.”시아가 자신에게 한 말인가 싶어 이태를 쳐다보았다.“잘 먹어야 뼈가 빨리 붙습니다.”시아가 아… 네, 하고는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깨작거렸다.오늘 시아를 챙길 정신이 없던 도윤은 넋이 나간 채 시아처럼 음식을 깨작였다. 그 모습을 본 이태가 말했다.“다 먹었으면 일어나라.”도윤이 더욱 풀이 죽어 하던 젓가락질마저 멈췄다.“왜 애를 잡고 그래요?”난데없이 시아가 빽 소리쳤다. 숟가락에 밥을 퍼 도윤에게 먹여줬다
의사가 깁스를 해주며 말했다.시아는 응급처치를 받고 깁스를 한 채 병원에서 나왔다. 한쪽에서 수발을 들고 있는 권도윤을 끼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짐도 챙겨야 했고, 퇴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반차를 쓰기에는 너무 아까웠다.도윤은 알아서 택시를 잡고 뛰어다니며 시아가 최소한의 동선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날아다녔다.시아는 전진만 하면 됐다.회사에 돌아가 제일 먼저 마주친 사람은 주여 과장이었다.“대리님, 괜찮아요?”“아뇨. 골절이요.”시아는 짜증이 나 조금 차갑게 대꾸했다.자리에 앉고 나니 이태 부장이 다가왔다.‘잠시만. 나 아까 욕한 것 같은데?’시아는 모르는 척 눈을 피했다.“뼈는 처치 잘 받으셨습니까?”“네. 아하하. 아까 제가 너무 아파서 그만….”이태가 피식 웃었다.“아, ‘이 새끼야악’이요?”“죄송합니다.”시아는 당황해 바로 사과했다.“아닙니다. 끝나고 기다리시죠.”“네….”죄인은 할 말이 없었다.퇴근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삼십 분쯤 앉아 있었나.도윤이 차로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시아는 좋았다. 도윤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해줄 기세였다.시아는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이태에게 향했다. 끝나고 기다리라더니 나타나지 않아 결국 직접 찾으러 가야 했다.‘USB에 관한 걸 물어보면 어떻게 하지.’불안했지만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똑똑.’“네.”“부장님, 저 가도 될까요?”이태가 문을 열며 대답했다.“아뇨. 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시아가 당황해서 손사레를 쳤다.“저는 도윤 씨가 데려다준다고 해서 괜찮습니다.”이태의 눈이 복도 끝에서 기다리는 권도윤을 훑었다.“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엔 제가 데리러 가겠습니다.”시아가 이것도 거절하려고 손을 올렸다.“제 책임도 있으니까 데리러 가겠습니다. 이만.”이태가 문을 닫아버렸다.시아는 어안이 벙벙해져 '이것들이 왜 이러나' 하며 다시 도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도윤이 핸드백을 들고 목발을 시아에게 건넸다. 엘리베이터 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