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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식이 시작되기 삼십 분 전, 차유림은 남편이 자신의 그림에 붉은 리본을 묶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갤러리 중앙 전시실이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조명 아래, 오래된 호두나무 액자에 담긴 《푸른 정원》이 걸려 있었다. 액자 오른쪽 아래에는 유림만 알아볼 수 있는 작은 흠집이 있었다.
결혼하기 전, 그녀가 몇 년 동안 모은 돈으로 구입한 그림이었다.
“여보, 저 그림은 왜 여기 있어?”
강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직원에게 리본을 조금 더 높이라고 지시한 뒤 액자 아래 놓인 설명문을 확인했다.
유림이 가까이 다가갔다.
**《푸른 정원》 — 강도혁 컬렉션.**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소장자 이름이 잘못됐어.”
“뭐가?”
“내 그림이잖아.”
그제야 도혁이 돌아보았다. 그는 아내의 얼굴보다 손목시계를 먼저 확인했다.
“오늘 행사에 쓰려고 가져왔어.”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집에 걸어 두는 것보다 여기 전시하는 게 낫잖아.”
“전시하는 것과 소장자를 바꾸는 건 다른 문제야.”
도혁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유림아, 오늘만큼은 좀 협조해 주면 안 되겠어?”
유림은 설명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림을 처음 발견했던 날이 떠올랐다. 오래된 개인 소장품 목록에서 작품의 존재를 확인하고, 작가의 유족에게 연락해 관련 자료를 구했던 시간. 소유 이력과 복원 기록을 대조하느라 몇 달을 보냈다.
그림을 구입한 뒤에도 제대로 된 액자를 맞추기 위해 여러 작업실을 돌아다녔다.
도혁은 그 모든 과정을 알고 있었다.
결혼하고 처음 맞은 겨울, 직접 그림을 거실에 걸어 주기도 했다.
*당신이 아끼는 거니까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 걸자.*
그때의 남편은 적어도 그녀가 그 그림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었다.
“설명문은 고쳐 줘. 소장자는 차유림이라고.”
도혁은 대답 대신 전시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한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오빠!”
백나경이었다.
몸에 꼭 맞는 금빛 드레스가 조명 아래 반짝였다. 그녀는 직원에게 꽃다발을 맡기자마자 도혁에게 다가갔다.
“저 안 늦었죠?”
“시간 맞춰 왔네.”
도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유림은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넥타이를 골라 줄 때만 해도 남편은 그녀에게 웃어 주지 않았다. 식탁에서 개관식 준비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피곤하다며 대화를 끊었다.
그런 남자가 나경 앞에서는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나경은 도혁의 넥타이를 만져 매듭을 바로잡았다.
“오빠, 제가 골라 드린 넥타이는요?”
“오늘은 이게 낫겠다 싶어서.”
“다음에는 꼭 제가 고른 거 하세요.”
두 사람의 손길과 대화가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유림이 없는 곳에서 오래전부터 이런 시간을 보내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유림 언니.”
나경이 그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죠? 그런데 얼굴이 너무 안 좋으세요.”
“잠을 좀 못 잤어.”
“그러게요. 이제 언니도 좀 쉬셔야죠.”
나경의 시선이 《푸른 정원》으로 옮겨 갔다.
그녀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어머, 오빠. 정말 가져오셨네요?”
유림의 눈썹이 움직였다.
“나경 씨도 이 그림 알아?”
“그럼요. 제가 얼마나 갖고 싶어 했는데요.”
나경은 그림 앞에 다가가 액자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쓸었다.
“제 대표실에 걸면 정말 예쁠 것 같아요.”
“대표실?”
유림이 되묻자 도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경이가 오늘부터 공동대표야.”
잠시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
“오늘 공식 발표할 거야.”
“나는 처음 듣는데.”
“당신한테까지 경영 문제를 일일이 보고해야 해?”
그는 사소한 일로 시간을 빼앗긴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다.
나경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언니, 오빠가 말씀 안 하셨어요? 전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그녀의 입술이 살짝 내려갔다.
“제가 괜히 난처하게 만들었네요.”
유림은 나경을 보지 않았다.
“그림은?”
도혁이 말했다.
“취임 선물로 줄 거야.”
유림은 남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내 그림을?”
“당신도 알잖아. 나경이가 개관 준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그래서 내 그림을 준다고?”
두려웠다.그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하지만 두렵다는 이유로 또다시 이름을 빼앗긴다면, 앞으로 남편이 무엇을 요구하든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유림은 눈을 떴다.“생각하고 하는 말이야.”도혁이 잠시 침묵했다.“나중에 후회하지 마.”유림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후회할 일은 이미 충분히 했어.”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나경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유림을 바라보았다.“정말 안 하시게요?”유림은 서류철을 나경 쪽으로 밀었다.“작성자를 바로잡으면 검토할게. 아니면 다른 감정사를 찾아.”나경이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언니,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그녀는 서류철을 거칠게 집어 들고 감정실을 나갔다.문이 닫히자 유림은 그제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손끝이 차가웠고 무릎에도 힘이 풀렸다.그녀는 책상 모서리를 붙잡고 한동안 서 있었다.방금 한 말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두려워서 다시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그렇지만 유림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지 않았다.이번만큼은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지키고 싶었다.***퇴근 시간이 지난 뒤에도 유림은 감정실에 남아 관련 자료를 정리했다.《푸른 정원》의 최초 감정 초안부터 개관식에서 나경이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는 영상, 보고서 변경 승인 메일과 문서관리 시스템의 수정 이력까지 하나씩 확인했다.감정실에서 이름표가 철거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도 따로 정리했고, 집에서 있었던 일은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 두었다.자료를 살필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남편과 함께 일하며 쌓아 온 시간이 몇 장의 서류로 줄어든 것 같았다.하지만 적어도 그 서류에는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 보여 주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유림은 개인적으로 보유한 원본과 업무상 열람한 기록을 구분해 목록을 작성했다. 회사 내부 자료를 임의로 외부에 넘기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상담에 필요한 자료의 범위를 먼저 확인하기로 했다.그리고 오래전 윤혜주에게 소개받았던 변호사의 연락처를 찾았다.미술품 복원 일을
그녀가 며칠만 더 필요하다고 하면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 기다렸다.그 모든 과정이 끝나자 남편은 완성된 보고서만 가져갔다.그리고 작성자의 이름을 바꿨다.유림은 모니터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자신이 지워진 것은 감정실 문에 붙어 있던 이름표만이 아니었다.남편은 그녀가 일해 온 시간까지 다른 여자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유림은 화면에 표시된 승인 내역을 다시 읽었다.그 순간 안방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당신은 원래 강하잖아.*남편은 그녀가 강해서 참는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유림은 강해서 참은 것이 아니었다.무너지면 어머니까지 흔들릴까 봐, 자신이 지켜 온 삶이 한꺼번에 무너질까 봐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다.그녀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분명해졌다.남편의 기분도, 이 집의 평화도 아니었다.어머니의 치료를 이어 갈 방법과 자신의 이름으로 해 온 일이었다.***오후가 되자 나경이 서류철을 들고 감정실로 들어왔다.“언니, 이것 좀 봐 주세요.”유림이 컴퓨터에서 눈을 떼자 나경은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새로운 작품의 감정 보고서였다.작품 사진과 소장 이력, 상태 조사표가 첨부되어 있었지만 실제 감정 의견은 아직 작성되지 않은 상태였다.유림은 첫 장을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보고서 작성자란에는 이미 백나경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이게 뭐야?”나경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내일 거래처에 보낼 자료예요. 언니가 감정만 마무리해 주시면 돼요.”유림은 보고서 첫 장을 다시 확인했다.“작성자는 당신으로 돼 있는데?”“제가 책임자니까요.”“그럼 당신이 감정해야지.”나경은 웃었다.“언니가 전문가잖아요.”유림은 서류철을 덮었다.“전문가가 작성한 보고서라면 전문가 이름이 들어가야 해.”그제야 나경의 웃음이 사라졌다.“언니, 아직도 그런 걸 따지세요?”“그런 게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문제야.”나경은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
그때 부엌 문이 열렸다.“언니, 여기 계셨네요.”나경이었다.유림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자 나경은 싱크대 옆에 놓인 컵을 집어 들었다.“물 좀 마시려고요.”물을 따르던 나경은 유림을 흘끗 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어머니가 언니한테 많이 화나셨어요.”“알아.”“언니가 조금만 참으시면 되는데.”유림은 식탁을 닦던 행주를 내려놓았다.“내가 예민해서 당신이 이 집에 들어왔어?”나경의 미소가 옅어졌다.“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속상해요.”“그럼 나가.”“네?”“남의 집 안방에서 자는 게 불편하면 나가면 되잖아.”나경의 얼굴이 굳었다.잠시 유림을 바라보던 그녀는 부엌 문 쪽을 확인한 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언니는 아직도 모르시네요.”“뭘?”나경은 목소리를 낮췄다.“오빠가 저한테 그랬어요. 언니는 결국 아무 데도 못 간다고.”유림은 행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왜?”나경이 웃었다.“어머니 병원비 때문이죠.”유림은 순간 숨을 들이마시지 못했다.도혁이 어머니의 재활치료 지원을 언급했던 밤이 떠올랐다.그 말을 나경에게까지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남편은 아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내연녀와 공유했고, 나경은 그것을 무기처럼 사용하고 있었다.“오빠가 언니를 얼마나 잘 아는데요. 조금만 버티면 결국 조용해질 거라고 하셨어요.”유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경은 승리를 확신한 사람처럼 웃었다.“그러니까 우리 서로 불편하게 만들지 말아요.”나경은 물컵을 들고 부엌을 나갔다.유림은 싱크대 가장자리를 붙잡았다.손끝에 힘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더 잔인한 것이 있었다.그는 그녀가 어머니를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하고 있었다.유림은 고개를 숙였다.어머니가 재활치료를 받으며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치료가 잘된 날에는 딸에게 보여 주겠다며 혼자 숟가락을 들려고 했고, 유림은 그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기뻐했다.그 시간을 지키기 위
명숙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유림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그럼 어쩌라는 거니? 나경이가 갈 데가 없다잖아.”“제 안방에서 지내고 있어요.”“방이 한두 개니?”유림이 입술을 다무는 사이, 명숙은 나경에게 반찬을 건네며 다정하게 말했다.“넌 많이 먹어. 얼굴이 반쪽이 됐다.”“감사해요, 어머니.”그 호칭에 유림의 눈길이 멈췄다.나경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웃었다.“아, 제가 이렇게 불러도 되죠?”명숙은 손을 내저었다.“편하게 불러.”유림은 식탁 가장자리를 붙잡았다.“어머니.”“왜?”“저 사람은 도혁이 내연녀예요.”순간 식탁에 정적이 내려앉았다.나경은 고개를 숙였지만 명숙은 오히려 유림을 노려보았다.“아침부터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사실이에요.”“남자가 밖에서 마음 둘 곳 좀 찾았다고 그렇게 난리를 쳐야겠니?”유림은 귀를 의심했다.“뭐라고 하셨어요?”명숙은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네가 남편 마음을 못 잡은 것도 생각해야지. 맨날 그림만 붙들고 있으니 도혁이가 얼마나 외로웠겠어.”유림은 식탁 위에 놓인 물컵을 바라보았다.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차마 잡을 수 없었다. 손끝이 떨려 컵을 제대로 쥘 자신조차 없었다.나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니, 언니한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명숙은 기다렸다는 듯 나경의 손등을 토닥였다.“넌 가만히 있어. 네가 무슨 잘못이니.”유림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이미 많은 이야기가 오간 듯했다.그녀만 모르는 사이 이 집에는 새로운 질서가 생겨 있었고, 그 안에서 유림은 남편을 외롭게 만든 아내가 되어 있었다.명숙이 턱으로 부엌을 가리켰다.“가서 죽 좀 끓여 와. 나경이가 속이 안 좋다잖아.”유림은 움직이지 않았다.“못 하겠어요.”명숙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뭐?”“나경 씨 밥까지 제가 차릴 이유는 없어요.”명숙은 의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집에서 먹고사는 사람이 말대꾸는.”
그림도 빼앗기고, 보고서에서 이름도 지워졌다.이제는 침실까지 빼앗겼는데, 자신은 블라우스 단추 하나를 걱정하고 있었다.유림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그때 열린 문틈으로 나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침대가 너무 딱딱한데요?”“바꿔 줄게.”“정말요?”“당신이 편해야지.”유림은 손바닥 위의 단추를 움켜쥐었다.*당신이 편해야지.*남편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했던 때가 언제였을까.어머니의 재활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녀온 날에도 도혁은 집안일이 밀렸다는 말부터 했고, 밤새 감정 보고서를 작성한 다음 날에는 왜 아침 식사를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그녀가 아프다고 말하면 남편은 피곤하다는 얼굴을 했고, 힘들다고 하면 다들 그렇게 산다고 했다.그런 남자가 나경에게는 침대까지 바꿔 주겠다고 했다.유림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잠시 뒤 도혁이 들어왔다.“짐은 다 옮겼어?”“아직.”“오늘 안에 정리해.”유림은 블라우스를 접어 서랍에 넣다가 남편을 돌아보았다.“내가 왜 이 방으로 옮겨야 하는지 설명해 봐.”도혁은 벽에 기대선 채 눈살을 찌푸렸다.“또 시작이야?”“내 집이기도 하잖아.”“명의는 내 거야.”유림의 손이 멈췄다.도혁은 그녀의 얼굴이 굳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내가 산 집이고, 내가 유지하는 집이야. 당신은 그동안 여기서 편하게 살았잖아.”“당신 갤러리에서 일한 건?”“그 대가로 생활비도 쓰고, 어머니 치료비도 지원받았지.”유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내가 감정한 작품으로 당신이 얼마나 벌었는지 알아?”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서 이제 돈 계산까지 하겠다는 거야?”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침대 위에 놓인 가방을 가리켰다.“나경이 불편하게 하지 마. 지금 예민한 상태야.”“나는?”도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왔다.“나는 안 불편할 것 같아?”남편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짧게 대답했다.“당신은 원래 강하잖아.”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유림은 닫힌 문을
현관에 선 유림은 신발을 벗다 말고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분명 닫아 두었던 안방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가구를 옮기는 소리까지 들렸다.“오빠, 이쪽에 두면 안 돼요?”백나경이었다.유림은 벗어 놓은 신발을 정리할 생각도 못 한 채 복도를 걸었다.안방 문 앞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 두 개가 놓여 있었으며, 침대에는 처음 보는 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화장대 위에 늘어서 있던 유림의 화장품은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그 자리를 낯선 향수와 화장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그 한가운데서 나경은 유림의 실크 잠옷을 손에 들고 있었다.“이건 어디에 넣어요?”도혁이 옷장을 가리켰다.“안 쓰는 방에 갖다 놔.”유림은 문턱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지금 뭐 하는 거야?”그제야 돌아본 도혁은 놀라기는커녕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왔어?”나경도 잠옷을 든 채 웃었다.“언니,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유림은 대답하지 못했다.눈앞의 광경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남편의 내연녀가 자신의 침실에 들어와 있었고, 남편은 그 여자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아내의 물건을 치우고 있었다.“저 짐은 뭐야?”“나경이가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야.”“여기서?”“집에 문제가 좀 생겼대. 빈방도 많잖아.”유림은 침대 위에 펼쳐진 새 이불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왜 안방에 짐을 풀고 있어?”도혁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당신이 쓰던 방이 넓잖아. 나경이가 당분간 쓰면 돼.”그제야 유림은 남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했다.“내가 쓰던 방?”“당신은 옆방으로 옮겨.”나경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언니, 제가 원한 건 아니에요. 오빠가 여기 쓰라고 하셔서…….”그러면서도 그녀는 유림의 잠옷을 내려놓지 않았다.유림은 손을 내밀었다.“그거 줘.”“네?”“내 잠옷.”나경은 잠시 도혁의 눈치를 살피더니 잠옷을 건넸다.유림이 받아 든 실크에서는 낯선 향수 냄새가 났다.결혼기념일에 도혁이 선물했던 잠옷이었다. 그날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