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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는 됐어.”
설이 고개를 들자 지훈이 먼저 얼굴을 돌렸다. 입술은 그의 턱 아래에 닿았다가 미끄러졌다. 목에 두르려던 손까지 밀려나자 설은 어쩔 줄 모르고 베개 끝을 움켜쥐었다. 침대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남편은 입을 맞추는 것만 거절했을 뿐, 하던 일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냥, 잠깐만…….”
“왜. 어디 아파?”
설은 고개를 저었다. 아프다고 하면 그가 그만둘 것 같았다. 그만두면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더 서러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말하고 싶었는데, 지금 꺼내면 기념일을 핑계로 다정하게 대해 달라고 매달리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지훈의 흰 셔츠 소매가 뺨을 스쳤다. 커프스까지 그대로였다. 설은 저만 벗고 있는 게 새삼 견딜 수 없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그는 손목을 잡아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옷 구겨져. 가만히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가 조용해졌다. 지훈은 이불 밖으로 나가 물티슈를 뽑았다. 설이 옆으로 조금 비켜 주기도 전에 그가 몸을 닦기 시작했다. 다 쓴 것을 휴지통에 버린 뒤에야 설 쪽으로 상자를 밀었다.
“너도 쓸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훈은 벨트를 채우며 시계를 보았다. 방에 들어올 때 설이 확인한 시간에서 겨우 오 분이 지나 있었다. 식탁에는 아직 자르지 않은 케이크가 있었다.
“오늘이 배란일 맞지?”
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됐으면 좋겠네. 매달 이렇게 날짜 맞추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지훈은 피곤하다는 듯 목 뒤를 문질렀다. 설은 이불 아래에서 손가락을 폈다가 오므렸다. 지난 삼 년 동안 임신에 좋다는 말만 들으면 입에도 대지 않던 한약까지 삼켰다. 약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도 참았고, 병원 예약이 바뀔 때마다 제 일정부터 옮겼다. 오늘도 그렇게 겨우 맞춘 날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피곤한 얼굴을 하자,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나왔다.
“미안해.”
말하고 나니 서러웠다. 두 사람의 아이를 기다리는 일인데, 남편에게 시간을 내 달라고 할 때마다 자신만 무언가를 구걸하는 기분이었다.
함께 기다려 주면 안 되느냐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도 전처럼 안아 주면 안 되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훈은 대꾸 없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설은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불을 고쳐 덮었다. 더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대신 내일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제주도 가. 투자사랑 만나기로 했어.”
“갑자기?”
“지난주에… 말했었는데.”
지훈은 화면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몸 만든다고 하지 않았어? 무리하지 마.”
그 말에 잠깐 기대가 생겼다. 걱정하는 걸까 싶어 그를 보았지만, 다음 말은 달랐다.
“괜히 컨디션 망쳐 놓고 또 한 달 미루지 말고.”
설은 서류 가방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난 석 달 동안 수정한 제안서보다 병원에 제출한 기록이 더 두꺼워졌다. 그래도 내일만은 자기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훈의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어. 끝났어.”
설은 이불 위에 내려놓았던 손을 움켜쥐었다.
“지금 갈게.”
통화가 끝나자 그가 재킷을 들었다. 설은 이번에는 돌아서기 전에 붙잡았다.
“오늘 꼭 나가야 해?”
“회사 일이야.”
“잠깐만 있다 가면 안 돼? 오늘은…….”
지훈이 식탁 쪽을 보았다. 설도 따라 보았다. 상자에서 반쯤 꺼낸 케이크 위에 작은 숫자 초가 놓여 있었다. 3이었다.
그가 말했다.
“기념일이라고 일을 안 할 수는 없잖아.”
설은 그제야 알았다. 잊은 게 아니었다.
문이 닫히자 침실이 갑자기 넓어졌다. 그녀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등을 밀어내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 밤이 헛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아이가 생기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결혼 전, 딸이 생기면 설을 닮았으면 좋겠다며 배에 손을 얹던 사람이니 한 번쯤은 돌아올 것 같았다.
침대 아래에 떨어진 리본을 발견한 건 물을 마시러 일어났을 때였다. 낮에 회사로 찾아온 유리가 두고 간 선물이었다.
‘언니, 오늘 꼭 열어 봐. 형부 있을 때.’
그때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뚜껑을 열자 가느다란 레이스와 끈이 손끝에 걸렸다. 속옷이었다. 그 아래 카드가 놓여 있었다.
「결혼 3주년 축하해! 형부도 가끔은 눈이 즐거워야지. 언니가 조금만 신경 써 봐!」
설은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동생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더 부끄러웠다. 혹시 지훈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했을까. 키스를 피하는 남편 앞에서 이런 것까지 입고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속옷을 접지도 못하고 상자를 닫았다.
그 시각, 유리의 아파트 현관문이 열렸다. 지훈이 들어서자 유리가 그의 재킷을 받아 바닥에 떨어뜨렸다. 설이 잡았을 때 구겨진다던 셔츠를 이번에는 그가 먼저 벗어 소파에 던졌다.
“형부, 언니 선물은 봤어?”
유리가 가운을 벌렸다. 조금 전 설이 상자에 도로 넣은 것과 같은 레이스였다.
지훈의 시선이 내려갔다.
“왜. 언니한테는 별로였어?”
그는 대답 대신 유리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아내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입맞춤은 길었다.
설은 별원 앞의 길을 따라 바다로 내려갔다.느슨하게 올린 머리에서 빠져나온 몇 가닥이 목덜미에 닿았다. 가디건을 입고도 서늘했지만 조금 더 걷고 싶었다.계단 끝에는 작은 만이 있었다.양쪽 사유지 사이로 난 길은 물가의 전망 데크에서 만났다. 아침이면 대개 비어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선착장에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남자가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설은 몇 걸음 앞에서 그를 알아보았다. 동시에 권혁도 고개를 돌렸다.짙은 바닷바람을 탄 아침 안개가 둘 사이의 거리를 가만히 채워 왔다. 설은 누군가를 잘못 본 줄 알고 다시 보았다. 권혁도 곧바로 말을 하지 않았다.“대표님?”그가 설의 이름을 불렀다. 질문이 겹치는 바람에 둘 다 뒤의 말을 놓쳤다.“어떻게 여기 계세요?”이번에는 설이 먼저 물었다.권혁은 절벽 위를 가리켰다. 소나무 사이에 긴 창을 낸 낮은 건물이 있었다. 서원의 비공개 영빈관이었다. 해외 파트너가 묵는 숙소와 소규모 회의동을 함께 둔 곳으로, 아래 선착장도 그곳에서 관리했다.지난밤 회의는 영국 쪽 참석자가 늦게 접속하면서 길어졌다. 권혁은 새벽까지 이어진 협의를 끝내고 한동안 방 안에 앉아 있었다. 할 일은 끝났는데 머릿속에서는 아직 다른 언어와 숫자가 오갔다.결국 혼자 아래로 내려왔다.설이 이 해안의 이웃이라는 것은 그도 몰랐다.“저는 위쪽 집에 있어요. 어머니가 쓰시던 곳이요.”“그 집이었습니까.”권혁은 길 너머를 보았다. 소나무 때문에 지붕 일부만 보였다. 설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름과 관계로 알고 있었지만, 그 집을 드나들던 딸의 얼굴은 알 수 없었다.지금 설에게서는 그 집의 아침이 느껴졌다. 정돈된 옷차림인데도 누군가를 만나러 나온 사람 같지 않았다. 바람에 풀린 머리카락도 그대로였다.그는 자신이 오래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시선을 바다로 옮겼다.“산책 중이셨군요.”“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저도 그랬습니다.”데크 한쪽에는 바람을 막는 유리벽과 긴 벤치가 있었다. 권혁이 그
“엄마 계실 때 라엘은 태성 눈치 보면서 돈 받는 회사 아니었어요.”명준이 주위를 확인했다. 복도 저편에 직원이 있었다.“목소리 낮춰.”“아버지가 오래 무릎 꿇고 사셨다고, 저까지 그게 편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그녀는 승강기에 탔다.설은 층수가 바뀌는 숫자를 보았다. 속이 시원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아파할 곳을 정확히 찔렀다는 사실만 남았다. 그 사람을 다치게 해야 잠깐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지쳤다.차에 올라 목적지를 입력하지 않았다. 회사 주차장을 빠져나와 한동안 익숙한 길을 달렸다.집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차선을 바꿨다.바다가 있는 쪽이었다.***서울을 벗어나자 건물이 낮아졌다. 해안도로에 접어들었을 때는 오후의 빛이 길게 기울어 있었다.별원으로 향하는 길은 마지막에 좁아졌다. 오래된 소나무 사이로 돌담이 이어졌고, 그 너머로 바다를 마주한 낮은 집이 보였다.어머니가 생전에 별도로 마련한 개인 기금으로 사 두었던 곳이었다. 설이 어렸을 때 이곳에 오면 어머니는 도착한 날의 저녁 약속을 잡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방에 짐을 두고, 하루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문을 열어 준 사람은 오정섭이었다.“오셨네요.”그는 차 안에 짐이 많은지부터 살폈다. 설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지도, 미리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방은 늘 쓰시던 데로 준비할까요?”“네. 오늘 자고 가려고요.”“그럼 준비하겠습니다. 해 지면 금방 추워져요.”현관 안쪽에서 윤복희가 나왔다. 정섭의 아내였다. 어머니가 이 집을 마련했을 때부터 두 사람이 함께 지켰다. 설이 학교 가방을 메던 때에도, 결혼을 앞두고 잠깐 들렀을 때에도 같은 부엌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밥은 먹었어요?”그 질문에 설은 오늘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생각해야 했다.“제대로는 못 먹었어요.”“잘됐네. 바지락 빼 놓은 거 있어요. 국수 삶으면 돼.”복희는 남편에게 테라스 문부터 닫으라고 했다. 바람 들어오면 국수가 금방 식는다는 이유였다.설은 이
회의실에는 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설의 자리는 맞은편이었다. 계약서와 펜까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설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야기를 나눈 듯 찻잔이 반쯤 비어 있었다.“앉아라. 오래 걸릴 일 아니다.”이명준은 딸보다 계약서를 먼저 보았다.설은 앉아서 첫 장부터 읽었다. 태성이 가져갈 권리는 넓었고, 라엘에 남을 몫은 작았다. 자신의 개인 특허는 아직 확보되지 않은 권리로 적혀 있었다.“서원에는 아버지가 중단하라고 하셨어요?”“회사에서 결정했다.”“저한테는 말씀도 안 하시고요.”“회사 일을 언제부터 네 허락받고 했니.”명준은 펜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그동안 애쓴 건 안다. 그래서 네가 계속 개발 맡게 해 놨어. 태성이 판로도 열어 준다니까 네 입장에서도 나쁠 것 없어.”차혜경이 말을 받았다.“밖에서 투자받느라 번거롭게 다닐 필요 없잖니. 집안끼리 도우면 될 일을.”설은 서원과 협의하며 고쳤던 예산표를 떠올렸다. 출시를 미루기로 한 뒤에도 권혁은 날짜보다 제품을 먼저 보겠다고 했다.여기서는 이미 날짜와 돈, 자신이 할 일까지 정해져 있었다.“이 금액에는 동의 못 합니다.”“네가 돈 넣었니?”아버지의 말이 곧바로 돌아왔다.“회사 시설 쓰고 직원들 데리고 개발했어. 네 이름 붙었다고 전부 네 것은 아니야.”설은 개인 특허가 적힌 페이지를 펼쳐 놓았다. 명준은 그것을 보고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그러니까 네 동의가 필요한 부분만 하자는 거잖아.”시어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사업 얘기만 하다 끝낼 수는 없겠구나. 유리 일도 알아야 할 테니.”“아이 가졌다.”짧은 말이었다. 잠시 뒤 날씨 이야기를 덧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평탄했다.명준은 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지훈이 아이란다. 병원에서 확인했고.”“놀랐겠지만 지금은 애부터 조심해야 해. 유리는 내가 따로 지내게 했어.”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함께 병원에 가던 남편과 동생을 봤을 때보다, 지금 이 방의 광경이 더 낯설었다. 아버지는
“설이가 태성에 협력 중단을 통보했다면서요.”차혜경은 이명준의 집무실에 들어와 앉자마자 말했다.“개인적인 감정을 회사 일에 섞으면 안 되는데, 요즘 그 애가 좀 예민합니다.”명준은 비서에게 문을 닫게 했다. 딸이 왜 그런 통보를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태성 측 사람이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부터 수습해야 했다.차혜경은 서류 봉투를 탁자에 놓았다.“그보다 먼저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명준은 유리의 이름이 적힌 병원 자료를 읽었다.한동안 종이 넘기는 소리도 없었다.“이걸 왜 저한테 이제 말씀하십니까?”“저도 며칠 전에 알았습니다. 유리가 직접 찾아왔어요.”“그 아이가 혼자 얼마나 불안했으면…….”“그러게요. 언니 남편 아이를 가졌는데 찾아갈 데가 마땅치 않았겠죠.”명준은 입을 다물었다.차혜경은 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저희가 거처를 마련했고 비용도 대고 있습니다. 당장은 밖에 알려지지 않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유리를 숨겨 두겠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그럼 공개할까요?”짧은 질문이었다.공개되는 순간 작은딸은 언니의 가정을 깨뜨린 여자가 됐다. 명준이 오래전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딸이라는 사실까지 다시 따라붙을 것이다.그는 그 시선이 무엇인지 알았다.설의 외가가 자신을 사위로 받아들였을 때, 주변에서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명준은 그 말이 싫었다. 아내보다 더 오래 회사에 남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자기 몫을 증명했다고 여겼다.그 과정에 다른 여자와 아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늘 사생활로 덮었다.이번에도 그렇게 덮을 수 있어야 했다.“아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태성의 아이로 키울 겁니다.”차혜경은 ‘유리의 아이’라고 하지 않았다.“지훈이 집으로 데려가면 돼요. 설이가 키우고.”명준은 그녀를 보았다.“큰애한테 작은애 아이를 맡기자는 겁니까?”“아이를 남의 집으로 보낼 수는 없잖아요. 설이는 아이를 원했고요.”“그 애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그래서 아버님을 뵈
유리는 거실 사진을 세 번 찍었다.첫 번째에는 창밖의 낮은 산이 너무 많이 나왔다. 두 번째에는 아직 뜯지 않은 상자가 찍혔다. 마지막 사진에는 대리석 탁자와 꽃, 소파 끝에 걸친 자신의 실크 잠옷 소매만 남았다.「당분간은 푹 쉬기로. 새로운 시작.」누구의 집인지 쓰지 않아도 댓글은 원하는 방향으로 달렸다.좋은 소식 있느냐는 질문에는 하트만 눌렀다. 결혼하는 것이냐는 질문도 지우지 않았다.“유리 아가씨, 점심 준비됐습니다.”유리는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아가씨 말고 다른 호칭 없어요?”직원은 식기를 놓고 물러났다. 알아들었다는 대답은 없었다.그날 오후, 유리는 거실 커튼을 바꾸겠다고 했다. 직원은 샘플을 가져오는 대신 관리 담당자에게 문의하겠다고 했다. 저녁이 되자 가구와 시설은 그대로 사용해 달라는 답이 돌아왔다.다음 날에는 친구 둘을 부르려 했다.“성함과 방문 시간을 알려 주시면 사모님께 확인받겠습니다.”“내 친구가 오는데 왜 허락을 받아요?”“방문객은 미리 보고드리도록 돼 있습니다.”유리는 친구에게 날짜를 다시 잡자고 보냈다. 괜히 설명이 길어지면 이 좋은 집이 자기 집이 아니라는 것부터 들킬 것 같았다.사흘째 아침, 회사에 가겠다고 하자 기사가 병원 예약을 확인했다.“병원 말고 회사요.”“사모님께서는 당분간 자택에서 업무 보시는 것으로 알고 계십니다.”“누가 그래요? 나 휴가 안 냈는데.”관리 담당자가 회사와 이미 얘기가 됐다고 했다. 필요한 일은 메일로 받아도 된다는 설명까지 붙었다.유리는 노트북을 열었다. 내일 회의가 달력에서 사라져 있었다. 담당자에게 물으니 몸조리 잘하라는 답이 왔다.보낼 업무는 없었다.지훈에게 건 전화도 받지 않았다. 메시지에는 한참 뒤 짧은 답만 왔다.「회의 중이야.」퇴근하고 오느냐고 물은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유리는 식탁 위에 놓인 두 사람 몫의 식기를 치우라고 했다.“앞으로 한 벌만 놓아요.”직원이 접시를 들어 올리는 동안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 라엘뷰티와 서원금융
“검사 결과는 다 통과했습니다.”생산매니저가 보고서를 펼쳤다. 연구개발실장은 그 옆에 승인 견본과 첫 생산품을 놓았다.설은 두 제품을 차례로 발랐다.펴지는 순간의 차이는 작았다. 몇 번 더 문지르면 거의 같아졌지만, 처음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달랐다. 향도 마찬가지였다. 승인 견본에는 없던 끝향이 희미하게 남았다.“한 통만 이래요?”연구개발실장이 출고 번호가 다른 제품들을 내놓았다.“생산량을 올린 구간에서 비슷한 편차가 있습니다.”설은 세 번째 용기까지 확인했다.한쪽에서 출시 일정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공장은 이미 다음 업체 생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보 일정도 잡혔고, 외부에 보낸 안내도 있었다.“일반 소비자가 구분할 정도는 아니에요.”해외사업부와 함께 일하던 직원이 말했다.“저희가 설명 안 하면 모릅니다. 안전한 제품인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설명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문제예요?”“팀장님, 모든 걸 그렇게 따지면 출시 못 합니다. 조금씩 넘어가면서 하는 거죠.”설은 손등에 남은 크림을 닦았다.예전에도 넘어가자는 말에는 이상하게 자신이 포기할 것만 붙었다.결혼 전 청첩장에 어머니 이름을 넣고 싶었을 때도 그랬다. 지훈은 설이 왜 마음에 걸리는지 묻지 않았다. 새어머니도 참석하는데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고 했다.결혼하는 건 우리 둘이잖아. 이런 것까지 다 네 뜻대로 할 수는 없어.설은 그 말을 믿고 한발 물러났다. 둘의 결혼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 뒤에도 둘을 위한 양보는 대개 설의 몫이었다.“일정은 제가 설명할게요.”“비용도 제가 확인하고요. 대신 이 제품은 출고하지 마세요.”생산매니저가 물었다.“전량 보류입니까?”“폐기요. 승인 견본과 다른 걸 같은 제품으로 팔지는 않겠습니다.”“차라리 할인 구성으로 돌리면…….”“그 방법도 검토하지 마세요. 가격을 낮춘다고 제가 확인한 차이가 없어지지는 않으니까요.”설은 보고서의 적합 판정 옆에 출고 불가 사유를 적었다. 서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