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 빚이요?”해원은 태헌을 똑바로 봤다.“아니면 저요?”태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평소 같으면 그 잠깐의 침묵이 별것 아니었을 것이다. 생각하고 있거나, 말을 고르거나.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해원은 기다렸다.먼저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태헌이 입을 열었다.“둘 다였어.”해원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적어도 하나를 고를 거라고.“둘 다요?”“응.”“무슨 뜻이에요?”태헌이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네 상황을 알게 됐고, 그냥 두고 싶지 않았어.”“빚 때문에요.”“그것도 있고.”“또요?”“너도 신경 쓰였어.”해원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신경 쓰였다.너무 범위가 넓은 말이었다.걱정됐다는 뜻으로도 쓸 수 있었고, 마음에 걸렸다는 뜻으로도 쓸 수 있었다. 사람을 궁금해했다는 뜻도 됐다.어느 쪽으로든 빠져나갈 수 있는 말.“제가 곧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계셨잖아요.”“알고 있었어.”“그리고 제 채권을 사셨고요.”“응.”“제가 그 채권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도 알고 계시죠.”“알아.”해원이 테이블 위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화면에는 아직 문성재가 보낸 자료가 떠 있었다.윤해원 건 우선 확보 부탁드립니다.다시 봐도 자기 이름이었다.태헌이 고른 이름.
화면을 열어 태헌에게 건넸다.태헌이 받아 들었다.처음 몇 줄을 읽을 때까지는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첨부된 이미지를 여는 순간 눈이 멈췄다.해원은 그 얼굴을 보고 있었다.“아는 자료예요?”태헌이 화면을 한 번 더 내렸다.“응.”“문성재라는 사람도 아세요?”“알아.”역시 망설임이 없었다.해원은 손가락을 맞물렸다가 풀었다.“그 사람이 이 거래 실무를 맡았대요.”태헌이 휴대전화를 내려놨다.“맞아.”해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짓말이라고 해주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다.그런데 이렇게 전부 바로 인정할 줄도 몰랐다.해원이 화면을 다시 자기 쪽으로 돌렸다.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었다.[윤해원 건 우선 확보 부탁드립니다.]“이거.”태헌이 봤다.“직접 지시하신 거예요?”“응.”“제 채권을요?”“응.”해원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닫혔다.태헌은 변명하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어제는 그냥 제 채권을 인수했던 일이 기사 소재가 됐다고 하셨잖아요.”“그래.”“이건 그거랑 다르잖아요.”태헌의 시선이 해원에게 왔다.해원이 화면을 들어 보였다.“넘어온 걸 산 게 아니잖아요.”말을 하다 보니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제 이름을 먼저 찍으셨잖아요.”태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해원이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해원은 행사장 좌석 배치도를 보다가 모니터 한쪽에 띄워둔 메신저를 확인했다.“이 테이블 하나 빼도 되겠는데.”옆자리에서 다연이 고개를 내밀었다.“어디?”“여기. 열두 명 앉히겠다고 굳이 동선 막을 필요 없어.”“클라이언트가 싫어할걸.”“그럼 열두 명을 여기 앉혀서 화장실 갈 때마다 의자 세 개씩 빼게 하든가.”다연이 화면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그건 또 싫다고 하겠지.”“그러니까.”해원은 수정안을 저장했다.책상 위 개인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모르는 번호였다.[윤해원 씨 맞으시죠.]해원은 화면만 한번 보고 휴대전화를 엎어놨다.이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급한 연락이면 다시 오겠지 싶었다.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번 더 진동이 왔다.이번에는 문장이 길었다.[차태헌 본부장이 윤해원 씨 채권을 직접 지정해서 인수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해원의 손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다시 읽었다.차태헌.채권.어제 들었던 이야기였다.태헌이 자신의 채권을 인수했던 일이 기사 소재가 됐다고 했다.해원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메시지를 한 번 더 봤다.곧이어 이미지 하나가 도착했다.무시하려던 손이 이번에는 휴대전화로 갔다.화면을 눌렀다.문서라기보다는 누군가 주고받은 업무 기록을 캡처한 것에 가까웠다.몇 줄 되지도 않았다.해원은 위에서부터 천천히
끊겼던 자리로 손이 다시 왔다.해원은 이번에는 처음부터 태헌을 봤다.무엇을 하는지보다 언제 또 멈출지가 먼저 신경 쓰였다.그게 더 약이 올랐다.하지만, 조금 전까지 그렇게 숨이 막혔는데도 몸은 금방 다시 따라갔다. 허리가 저절로 꺽이고, 벌어진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태헌은 서두르지 않았다.해원의 눈이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손길보다 그의 손목을 자꾸 보게 됐다.이번에도 빠질까 봐.해원의 손이 태헌의 바지를 움켜쥐었다.손끝에 힘이 들어갔다.이제 조금만 더.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무것도 없었다.“하…….”해원이 숨을 삼켰다.몸은 아직 그대로 긴장해 있는데 자극만 사라져 있었다.태헌은 그 얼굴을 보고 있었다.너무 멀쩡한 얼굴이었다.해원이 노려보려다 실패했다. 숨부터 골라야 했다.“진짜…….”말끝도 흐려졌다.태헌은 대꾸하지 않았다.잠깐 뒤 다시 손이 닿았다.이번에는 해원이 먼저 움찔했다.젖은 소리가 가까이서 났다.얼굴을 소파 쪽으로 묻으려 하자 태헌이 턱을 잡아 돌렸다.억지로 세운 것도 아니었다.그냥 피하지 못하게 했다.해원은 결국 그를 봤다.입술이 벌어졌다.숨인지 소리인지 모를 것이 새었다.태헌의 엄지가 아랫입술을 눌렀다가 지나갔다.해원의 몸이 크게 떨렸다.그리고 또.사라졌다. 이번에는 욕이 나올 뻔했다.해원의
허리가 쑥 당겨졌다.해원의 무릎이 태헌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왔다.테이블 위에는 먹다 남은 그릇들이 그대로였다. 어수선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태헌은 올려다봤고, 해원은 내려다봤다.말은 필요 없었다.이미 서로가 뭘 원하는지 아는 얼굴이었다.태헌의 손이 허리를 타고 내려가 티셔츠 밑단을 쥐었다. 망설임 없이 걷어 올렸다.해원이 순순히 팔을 들었다.옷감이 머리 위로 벗겨졌다. 서늘한 공기가 등줄기를 먼저 훑었다.브래지어 끈이 어깨를 벗어나자 태헌이 그것마저 끌어내렸다.숨결이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태헌은 해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지이익. 짧게 지퍼가 내려갔다.해원이 발을 빼는 사이 바지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얇은 팬티 한 장만 남았다.태헌은 허리를 잡아 그대로 자기 무릎 위에 엎었다.해원의 배가 태헌의 허벅지 위에 눌렸다.한 손으로 소파를 짚었다. 상체가 아래로 기울고 엉덩이가 자연스럽게 들렸다.태헌의 손바닥이 허리 위에 묵직하게 얹혔다.자세가 고정됐다.팬티 가장자리를 조금 끌어내렸다.다 벗기지도 않았다.손이 닿을 자리만 드러났다.공기를 가르는 감각이 먼저 왔다.짜악!짧고 매서운 소리와 함께 해원의 상체가 앞으로 꺾였다.“으……!”숨이 먼저 터졌다.태헌은 금세 붉은 자국이 올라오는 엉덩이를 내려다봤다.짜악!반대쪽.해원의 손톱이 소파 가죽을 긁었다.
오전 열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태헌은 결재 서류를 넘기다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홍보팀 직원이 들어왔다.“기자 쪽에서 연락 왔습니다.”태헌이 펜을 내려놨다.“네.”“현 자료로는 기사 진행하지 않겠다고 합니다.”태헌의 손이 멈췄다.“이유는요?”“저희가 전달한 거래 자료까지 확인했습니다. 윤해원 씨 채권을 특정해서 인수한 건 맞지만, 거래 자체를 문제 삼을 만한 정황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직원이 잠깐 말을 골랐다.“그리고 당시 본부장님이 윤해원 씨와 가족이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부분도 확인하지 못했고요.”태헌은 등을 의자에 기댔다.며칠 동안 계속 붙어 있던 문장이었다.사전에 알고 있었습니까.이번에는 그 질문에 답할 자료가 기자 쪽에 없었다.“윤해원 씨 이름은요?”“현 건으로는 기사화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태헌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다만 추가 자료가 들어오면 다시 확인하겠다는 말은 있었습니다.”“그건 당연하겠죠.”직원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무팀장이 들어왔다.손에는 문성재 쪽 검토 자료가 들려 있었다.“이쪽은 어떻게 할까요?”태헌이 서류 표지를 한번 봤다.“전부 제외해 주세요.”“기존 검토 건도요?”“네.”“앞으로 들어오는 건도 같은 기준으로 보면 됩니까?”“그렇게 해주세요.”법무팀장이 서류를 접었다.“알겠습니다.”법무팀장이 나가려다 문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