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문성재는 이틀 만에 방법을 찾아왔다. "다음 달 입찰까지 안 기다리셔도 됩니다. 금융사 쪽이랑 따로 얘기해서 윤해원 건 포함해서 몇 건만 먼저 넘겨받는 걸로 했습니다. 묶음 정리를 빨리 하고 싶은 건 그쪽도 마찬가지라서요." "조건은요?" "그렇게까지 당기시면 값은 조금 더 쳐줘야 합니다. 입찰로 갔으면 덜 줬을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성재가 잠깐 말을 멈췄다. 수익이 안 나는 채권을, 값을 더 주고, 서둘러서 사겠다는 의뢰인이었다. 그래도 성재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일주일 뒤, 성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윤해원 건 넘어왔습니다. 오늘부로 태원에셋파트너스가 채권자입니다." 태헌은 책상 위에 펼쳐둔 서류를 덮었다. "수고했어요." "추심은 기존 일정대로 이어갑니까? 전 채권자 쪽에서 독촉을 몇 번 넣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대로 이어받으면 다음 단계가 지급명령이고요." "기존 추심은 전부 멈추세요." "독촉도요?" "네. 연락도 하지 말고, 서류도 보내지 마세요." 성재는 이번에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확인할 것만 확인했다. "채권양도 통지는요? 그건 보내야 합니다. 채권자가 바뀌었다는 건 알려야 하니까요." "그건 정상적으로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 뒤로는 그냥 들고만 계시는 겁니까?" 태헌은 잠깐 생각했다. "압류 예고 서류는 준비해 두세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멈추라고 하시면서요?" "보내지는 말고. 서류만 만들어서 저한테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채무자 연락은 제가 합니다." 통화가 끝났다. 해원의 채권은 이제 태헌이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추심을 멈춘 건 진심이었다. 다른 채권자가 해원의 회사로 서류를 보내거나 월급을 건드릴 일은 없었다. 그 권한을 가진 사람이 태헌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리고 압류 예고 서류는 해원에게 보낼 게 아니었다. 해원 앞에 놓을 서류였다. 태헌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수요일 저녁, 해원은 호텔 근처 마트에서 장바구니 두 개를 꽉 채웠다. 이번 주 저녁은 자기가 사기로 했다. 매일 밖에서 사 먹거나 룸서비스를 시키는 건 돈도 돈이지만 질렸다. 데우기만 하면 되는 반찬 몇 가지, 즉석밥, 과일, 생수. 계산대에서 봉투를 받고 나서야 들고 가기 무겁다는 걸 알았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 봉투를 내려놓았다. 냉장고를 열자 캔 두 개가 이미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해원은 반찬통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겨우 세 개를 밀어 넣고, 나머지는 포기했다. 태헌은 여덟 시가 넘어 들어왔다. 책상 위에 줄지어 놓인 반찬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게 다 뭐야." "저녁이요. 이번 주는 제가 산다고 했잖아요." "사 온다는 게 이런 뜻이었어?" "사 먹는 것도 사는 거죠." 태헌이 웃으며 재킷을 벗었다. 둘은 소파 앞 낮은 테이블에 반찬통을 펼쳐놓고 앉았다. 전자레인지가 없어서 데우지도 못한 잡채는 조금 굳어 있었다. 그래도 해원은 오랜만에 밥 같은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오늘 늦었네요." "회의가 길어졌어. 너는?" "저도 오늘 좀 피곤했어요." 해원은 젓가락으로 잡채를 뒤적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다음 달 예식 하나가 신부 어머니 쪽이 엄청 까다로워요. 이번 주에만 컨셉을 세 번 바꾸셨어요. 팀장님이 오늘 그 건을 다른 플래너한테 넘기자고 하셨거든요. 제가 너무 많이 들고 있다고." "그래서?" "제가 한다고 했죠." "왜." "처음부터 제가 맡은 거니까요. 중간에 사람 바뀌면 신부님만 더 힘들어지고.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넘기면 그 사람이 또 처음부터 시달려야 하잖아요." 해원은 말하면서도 스스로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피곤하다고 투덜대면서 그 일을 자기가 다시 가져온 셈이었다. 태헌이 해원을 보고 있다가 무심하게 말했다. "넌 예전에도 그러더니." "예전에요?" 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요?" 태헌의 젓가락이 잠깐 허공에 머물렀다. 아주 짧았다. "계약할 때도 그랬잖아." "
태헌은 조사 업체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윤해원의 채권이 지금 어디에 있고, 언제 어디로 넘어가는지.답은 이틀 만에 왔다.해원의 보증채권은 아직 원래 대출을 내준 금융사가 가지고 있었다. 회수를 포기한 다른 부실채권들과 함께 묶음으로 매각될 예정이었다. 입찰은 다음 달 초. 어느 회사가 가져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보고서 끝에는 짧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매각 후 새 채권자는 독촉 및 법적 회수 절차 즉시 진행 가능.태헌은 그 문장을 오래 봤다.채권 매입 회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잘 알았다. 싸게 사서, 받아낼 수 있는 만큼 받아낸다. 독촉을 시작하고, 지급명령과 압류 절차를 밟고, 결국 급여나 계좌까지 건드릴 수 있었다. 이런 묶음 채권을 사는 회사들은 대부분 그렇게 했다. 그게 그 회사들의 일이었다.모르는 회사의 누군가가 해원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들고 그녀에게 돈을 갚으라고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기한을 정하고, 독촉하고, 그녀의 월급과 집에 손을 대는 장면.싫었다.이유를 따져보면 이상한 감정이었다. 해원을 직접 본 건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그녀는 그를 하객 한 명으로 지나쳤다. 말이라고는 식사는 이층이라는 안내 한 마디를 들은 게 전부였다. 그런 여자의 채권을 누가 가져가든 태헌이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게다가 아버지가 만나는 여자의 딸이었다. 이대로 가면 동생이 될 여자였다. 손대면 안 되는 이유로는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예식장 비상계단에서 느꼈던 게 무엇인지 태헌은 이제 정확히 알았다.해원이 아버지가 만나는 여자의 딸이라는 사실은 그의 관심을 꺾지 않았다. 반대였다. 언젠가 가족들 앞에서 동생이라고 불러야 할 여자, 손대면 안 되는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더 원했다.태헌은 그 욕망이 비뚤어졌다는 것도 알았다.
일요일 오전, 해원이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해원은 이불 속에서 휴대전화를 찾아 시간을 봤다. 열 시 반이었다. 알람 없이 이렇게 늦게까지 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금요일 퇴근길에 집에 들러 주말 동안 입을 옷을 몇 벌 챙겨 왔다. 가방에 넣어둔 채 꺼내지도 않았는데, 일어나서 옷장을 여니 그 옷들이 태헌의 셔츠 옆에 걸려 있었다. 언제 걸었는지 몰랐다. 해원은 옷장 문을 잡은 채 잠깐 그걸 보다가 니트 하나를 꺼내 입었다.예전 같으면 일요일 이 시간쯤엔 엄마 집에 갈 준비를 했을 것이다. 점심을 같이 먹고, 오후에는 소파에서 엄마랑 텔레비전을 보다가 저녁까지 얻어먹고 돌아오는 날이었다.이번 주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해원은 자기 집에도 가지 않았다. 갈 수 있었다. 오피스텔은 그대로 있었고, 거기서 하루 종일 누워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금요일 밤에도, 토요일 밤에도 해원은 이 방에 남았다. 태헌이 있는 데 있고 싶었다. 그게 이유의 전부였다.카드키 신호음이 나고 문이 열렸다. 태헌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깼네.""어디 갔다 왔어요?""프런트."태헌이 커피 하나를 해원에게 건넸다."일주일 연장했어."해원은 그 말에 먼저 안심했다. 오늘이 이 방의 마지막 날이라는 걸 아침에 눈뜨자마자 떠올렸었다. 그러고 나서 바로 협탁 위의 지갑으로 손이 갔다."이번 주는 제가 반 낼게요.""됐어.""제 옷도 여기 있는데요.""옷 몇 벌 걸었다고 방값을 내?""거의 매일 오잖아요."공짜로 묵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태헌에게 뭔가를 받는 것도 이제는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도 거의 매일 쓰는 방인데 그걸 전부
아버지가 그 이름을 처음 꺼낸 건 평범한 수요일 저녁이었다.본저 식탁에는 둘뿐이었다. 차명우는 국을 몇 숟갈 뜨다가 수저를 내려놓고,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 말했다."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다."태헌은 젓가락을 든 채 아버지를 봤다."한수경 씨라고. 다음에 한번 소개하마."그게 전부였다. 어디서 만났는지도, 어떤 사람인지도 덧붙이지 않았다. 명우는 다시 국을 떴다.태헌은 그 짧은 말투에서 오히려 무게를 읽었다. 아버지는 가벼운 일을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십 년 넘게 혼자였던 사람이, 아들 앞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진지하다는 뜻이었다."네. 그러세요."태헌은 그렇게만 대답했다.다음 날 아침, 태헌은 늘 쓰던 외부 업체에 메일을 보냈다. 한수경. 기본 인적 사항과 가족관계 확인.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생활에 새로 깊이 들어오는 사람이면 태헌은 기본적인 확인은 해두는 편이었다. 태원그룹 회장 곁에 서는 사람이었다. 문제가 생긴 뒤에 아는 것보다 생기기 전에 아는 편이 나았다. 아버지는 이런 일을 싫어했으니 말하지 않았다. 태헌에게는 그저 업무의 연장이었다.보고서는 일주일 뒤에 왔다.한수경. 오십 대 중반. 이혼 후 혼자 지내 왔고, 작은 공예 갤러리 '온재'를 운영한다. 수경 본인 명의의 눈에 띄는 채무나 소송도 없었다. 차명우와 만난 지는 반년 남짓. 태헌은 그 부분을 읽으며 조금 놀랐다. 아버지가 반년이나 말하지 않고 있었다는 게 더 의외였다.가족관계 항목에는 딸 하나가 있었다.윤해원. 스물여덟. 웨딩플래너. 근무처 라비엘 프라이빗. 오피스텔에서 혼자 거주.이름 옆에는 회사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작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정장
태헌은 해원이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오지 않았다. 대신 셔츠 앞을 쥔 해원의 손목을 잡았다."기다리라고 했는데.""기다렸잖아요.""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해원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태헌이 해원을 돌려세웠다. 등이 벽에 닿았다. 조금 전 직원 목소리를 들으며 숨을 참고 서 있던, 현관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벽이었다.태헌의 손이 셔츠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풀었다. 하나를 풀 때마다 손등이 맨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해원은 고개를 숙여 그 손을 보려다가 턱이 잡혀 다시 들렸다."나 봐."해원은 태헌을 봤다. 마지막 단추가 풀리자 셔츠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태헌은 그걸 벗기지 않았다. 어깨 아래로 끌어내려 팔꿈치에 걸쳐두었다. 소매가 팔에 엉켜서 해원은 손을 마음대로 들 수가 없었다.태헌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쇄골을 지나 가슴께로 내려가는 동안 해원은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한쪽 가슴을 입에 머금자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태헌의 팔이 허리를 받쳐 올렸다."아까는 잘 참더라.""……네.""이제는 참지 마."허벅지 안쪽으로 손이 파고들었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큰 소리라서 스스로 놀랐다. 옆방에 들릴지도 몰랐다. 입술을 깨물자 태헌이 엄지로 그 입술을 눌러 벌렸다."참지 말라고 했어."손가락이 더 깊이 움직였다. 해원은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벽 너머에 누가 있었을 때는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는데, 지금은 소리가 멋대로 흘러나왔다. 팔꿈치에 걸린 셔츠 때문에 그를 붙잡을 수도 없어서 해원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매달리듯 버텼다.다리가 떨리기 시작하자 태헌이 손을 뺐다. 해원이 원망하듯 올려다봤다."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