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태헌의 손은 허리에 그대로 있었다.
“왜.”해원은 그 얼굴을 봤다.넥타이가 반쯤 풀려 있었다.자기가 그렇게 만들었다.웃음이 났다.“아무것도 아닙니다.”“그런 얼굴 아닌데.”“무슨 얼굴인데요.”“좋아하는 얼굴.”해원이 다시 넥타이를 잡았다.“그걸 굳이 말씀하셔야 합니까?”“맞잖아.”해원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입술을 맞췄다.태헌이 웃는 기척이 입술 사이에서 났다.두 번째 키스는 오래 가지 않았다.태헌이 해원의 허리를 감은 채 일어섰다.해원도 같이 일어났다.등 뒤로 소파가 멀어졌다.태헌의 손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해원은 한 걸음 밀렸명우는 그 대답을 한동안 아무 데에도 놓지 못했다.없습니다.목소리는 낮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변명도, 덧붙이는 말도 없었다. 명우가 물은 그대로, 정확히 그만큼의 대답이었다.명우는 아들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 모서리가 보였다. 내일 오전에 봐야 할 보고서였다. 오늘 저녁만 해도 그게 이 방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그럼."명우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그럼 상견례 날은. 그럼 결혼식 날은. 그럼 저녁마다 같은 식탁에서 해원이에게 반찬을 건네던 손은.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것을 물어도 같은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처음부터 없었다고. 명우가 이 집에 만들었다고 믿었던 것이, 아들에게는 한 번도 그런 모양이었던 적이 없었다고.명우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지를 수도 없었다. 식탁에서 아들에게 쏟아냈던 분노가 이번에는 목에 걸린 채 내려가지도, 올라오지도 않았다. '없습니다'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헌은 그 말을 숨긴 채 매일 이 집에서 살았다. 명우는 그 얼굴을 보고도 아무것도 몰랐다."내가."명우는 책상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서 있을 힘이 갑자기 빠졌다."내가 너를 안다고 생각했다."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말이 없는 건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속을 안 보여주는 것도.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는 놈이라고.”명우는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었다.서재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웃음 같은 숨이 새어 나왔다. 웃음은 아니었다.서재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벽시계 초침이 몇 바퀴를 도는 동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헌은 문 앞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슨
식탁 위에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명우는 수경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대신 식탁을 내려다봤다. 식어버린 국그릇과 손대지 않은 반찬 접시들. 그 사이 어딘가를 한참 보고 있었다. 해원은 명우가 무언가를 정리하려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무엇부터 정리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수경도, 태헌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해원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아직 식탁 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태헌 씨 혼자 한 일이 아니에요. 그 말을 꺼낸 순간에는 숨이 트였는데, 지금은 그 말 때문에 오히려 숨이 막혔다.한참 뒤 명우가 고개를 들었다. 해원을 봤다."오늘은 돌아가."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차갑지도 않았다. 다만 피곤했다.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려고 하자 명우가 먼저 말을 이었다."지금은 더 못 듣겠다."그 말에 해원은 입을 다물었다. 내쫓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명우는 지금 이 식탁 위에 올라온 것들을 한꺼번에 다 들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들의 거짓말, 아내의 침묵, 그리고 아들 편에 서서 끼어든 해원까지."……네."해원은 의자를 뒤로 밀었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해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동안 명우가 태헌을 봤다."태헌이 너는 남아."해원의 걸음이 멈췄다.어제 해원 집 복도, 엘리베이터 앞이 떠올랐다. 엄마는 복도 끝의 태헌을 보며 너만 와, 라고 했다. 그날은 해원이 엄마를 따라갔고 태헌이 남았다. 오늘은 해원이 이 집을 나가고, 태헌이 남는다.해원은 맞은편을 봤다.태헌은 의자에 앉은 채 해원을 보고 있었다. 명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해원과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명우는 태헌을 보고 있었다. 방금 들은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 맞춰보는 얼굴이었다. 만나고 있다. 해원이와. 그 두 문장이 이어 붙는 모양을 명우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식탁 위에서는 국그릇의 김만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해원은 명우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바뀌는 순간을 봤다. 소리를 지르기 직전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표정이 한 겹씩 지워지는 쪽이었다. 조금 전까지 반찬을 덜어주며 웃던 사람이, 회사 회의실에서나 지을 것 같은 얼굴로 아들을 보고 있었다."언제부터야."질문은 해원이 아니라 태헌에게 향해 있었다. 명우는 해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태헌은 바로 대답했다."상견례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명우의 손이 식탁 위에서 멈췄다."상견례 전."명우가 그 말을 되풀이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해원은 명우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알 수 있었다. 수경이 어제 차 안에서 떠올렸던 것과 같은 장면이었다. 식당의 긴 테이블,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리. 그리고 자기 아들이 해원에게 손을 내밀며 했던 말.처음 뵙겠습니다.명우는 그 장면을 수경보다 짧게 떠올렸다. 길게 곱씹지 않았다. 다만 태헌을 보는 눈빛이 한 번 더 식었다."그 자리에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구나."태헌은 부정하지 않았다."……네.""둘이."명우는 그 한마디만 하고 말을 멈췄다. 해원을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해원은 그 말이 자신에게도 떨어졌다는 걸 알았다."그 뒤로는."명우가 다시 물었다."우리가 결혼한 뒤에도."태헌은 잠깐 옆자리를 봤다. 수경이 아니라 해원 쪽이었다. 해원은 그 시선을 받았다. 태헌이 다시
본가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일곱 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해원은 택시에서 내려 대문 앞에 섰다. 몇 번이나 와본 집이었다. 결혼식 뒤에도 몇 번 이 집에서 식사했다. 그때마다 크게 긴장한 적은 없었다. 엄마가 사는 집이었고, 엄마가 편해 보이는 집이었다.해원은 초인종을 눌렀다.잠시 뒤 문이 열렸다. 집안일을 봐주는 직원이 해원을 알아보고 반갑게 고개를 숙였다."오셨어요.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네. 안녕하세요."인사는 평소처럼 나왔다. 그런데 신발을 벗는 동안 손이 조금 느려졌다. 현관 한쪽에 태헌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제 해원의 집 현관에 있던 그 구두였다.거실로 들어서자 명우가 소파에서 일어났다."왔구나. 들어와, 들어와."명우는 해원 쪽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 얼굴에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제 통화할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퇴근하고 바로 온 거야? 배고프겠다.""조금요.""잘됐네. 오늘 음식 신경 좀 쓰라고 했어. 너 좋아하는 것도 해두라고 했고."명우는 그 말을 하며 식탁 쪽을 가리켰다. 자랑하는 말투였다. 해원은 그쪽을 봤다. 식탁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가운데 놓인 접시 몇 개 사이로, 예전에 이 집에서 맛있다고 한 번 말했던 반찬이 보였다. 명우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해원의 목을 조였다."감사합니다.""감사는 무슨. 앉아. 여보, 해원이 왔어."명우가 부엌 쪽을 향해 말했다.수경은 부엌 입구에서 직원과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해원과 눈이 마주친 건 아주 잠깐이었다.
태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해원은 바닥에 앉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 지금 이럴 때냐고 할 수도 있었고, 괜찮다고 달래며 도로 소파 위로 끌어올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해원은 아마 순순히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해원이 원한 게 아니었다.태헌이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해원을 내려다보는 눈이 조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걱정하던 얼굴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 위로 익숙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손."해원은 두 손을 그의 무릎 위에 올렸다. 태헌은 그 손을 잡지 않고 손바닥이 위로 오게 뒤집어 놓기만 했다. 차가운 손끝이 그대로 드러났다."차네."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헌도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의 엄지가 해원의 손바닥 가운데를 천천히 눌렀다가 떼어냈다. 한 번, 또 한 번. 해원은 그 손가락이 닿는 자리만 봤다. 그러다 보니 차 안에서 엄마 얼굴을 보던 감각이 조금씩 흐려졌다."고개 들어."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태헌은 해원의 턱을 손가락 두 개로 받쳐 조금 더 올렸다. 그 상태로 눈을 맞췄다. 해원은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울었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태헌의 손이 턱을 놓지 않았다."보고 있어."해원은 보고 있었다.숨이 조금씩 느려졌다. 오늘 하루 종일 무엇을 봐야 할지, 누구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누구의 얼굴을 피해야 할지 해원이 정해야 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볼 곳은 하나였고, 그걸 정한 건 태헌이었다. 그 단순함이 이상할 만큼 몸을 풀어놓았다.태헌의 손이 턱에서 뺨으로 옮겨갔다. 눈가에 남은 자국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달래는 손길은 아니었다. 자기 것을 확인하는 손이었다."이리 와."해원은 무릎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의 다리 사이,
수경이 집 현관문을 열었을 때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명우는 소파에 기대 앉아 주말 뉴스를 보고 있다가 수경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벌써 왔어? 저녁까지 있다 온다며.""응. 그냥."수경은 신발을 벗으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지 않게 나와서 오히려 스스로 놀랐다."해원이는? 잘 있고?"명우는 별 뜻 없이 물었다. 해원의 집에 다녀오는 날이면 늘 하던 질문이었다. 수경은 거실로 들어가다 잠깐 멈췄다."응. 잠깐 보고 왔어.""가져갔던 건 줬어?""줬어."명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수경은 가방을 식탁 의자에 걸어두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거실에 남아 명우 옆에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결혼하고 나서 명우에게 무언가를 숨긴 건 처음이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해원을 보고 온 것도, 쇼핑백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들만 골라 말하는 게 이렇게 쉽다는 게 이상했다. 수경은 정수기 앞에 서서 컵에 물을 받았다가 마시지도 않고 내려놓았다.그때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태헌이었다. 방에서 나와 부엌 쪽으로 오다가 수경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복도와 부엌 사이, 몇 걸음 떨어진 자리였다.수경은 그를 봤다. 태헌도 수경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아까 복도에서 "지금은 네 얘기 듣고 싶지 않아"라고 한 게 수경 자신이었다. 태헌은 그 말을 지키고 있었다.거실에서 명우의 목소리가 들렸다."태헌아, 너 저녁 먹을 거야?""아직 생각 없습니다."태헌이 거실 쪽으로 대답했다.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수경은 그게 더 견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