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는 신의가 최근 A시에 자주 나타난다고 들어서 신의에게 조카의 눈을 보일 생각이다. 신의가 아니라 그 신의의 제자라 해도 제발 한 번만 조카의 눈을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신의 사제는 고모의 마지막 동아줄이다.오랜 시간 치료를 받으며 그녀는 사실 아주 조금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시각장애인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다시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고 병 치료에 임할 자신이 생긴다.다만 이 일은 고모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감히 알릴 수 없다.어찌 됐든 그녀는 지금 여전히 시각장애인처럼 앞이 잘 안 보이고 아예 안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앞이 안 보이는데 가게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여운초가 웃으며 답했다.“아까 들어올 때 그분들 발소리를 들었어요. 발걸음이 묵직한 게 남자 같아서 예정 씨 경호원일 거로 예상했어요.”하예정과 심효진은 서로를 마주 봤다.시각장애인은 청력이 뛰어난다더니 정말 그랬다.하예정은 경호원 두 명을 불러와 여운초의 말대로 하라고 분부했다. 그녀는 경호원이 너무 과격해서 여운초를 다치게 할까 봐 친히 당부했다.“겉보기만 거칠게 하면 돼요. 꼭 자제해요, 운초 씨 다칠라.”여운초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귀엽고 작은 얼굴이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하예정은 도련님 대신 그녀를 잘 보살피고 싶은 충동까지 생겨났다.“저희 힘 조절 잘하겠습니다.”두 경호원은 여운초를 서점 밖으로 ‘몰아냈고’ 그녀가 챙겨 온 선물 봉투도 전부 들고 나왔다.곧이어 그녀를 여씨 사모님 차 앞에 끌고 가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한 경호원이 선물 봉투를 그녀에게 내던졌고 다른 한 경호원은 ‘꺼져’라고 괴성을 질렀다!그 경호원은 쓸데없는 말이 많은 편인데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우리 사모님이 아무리 잘해주면 뭐해. 당신 때문에 사모님 차까지 망가졌어! 그럼에도 뻔뻔스럽게 찾아와 용서를 빌어? 파렴치한 것, 당장 꺼져!”두 경호원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여씨 사모님은 두 경호원이 떠난 후에야
“빼액...”자동차 경적에 여운초는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이제 곧 하교 시간이라 그런지 경적이 끊기지 않았다.그녀는 아예 무턱대고 오른쪽으로 걸어갔는데 경적이 또 울렸다.잘못 들어선 걸까?흠칫 머뭇거리던 여운초는 몸을 돌려 오던 방향대로 돌아갔다.전이진은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 여운초는 본능적으로 두어 번 몸부림쳤지만 전이진의 몸에서 나는 산뜻한 향수 냄새를 맡자 금세 동작을 멈췄다.전이진은 그녀를 차에 태우고 바닥에 널브러진 선물 봉투와 지팡이도 모조리 주워서 차에 실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떡하니 앉았다.“띠리링...”이때 전이진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일단 차를 길옆으로 몰고 나갔다. 하굣길의 학생들과 학부모를 가로막으면 안 되니까.그는 차를 세운 후에야 형수님의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저 금방 왔어요.”“네? 금방 왔다고요 도련님? 저기... 내가 이미 문제 다 해결해서 안 오셔도 될 것 같아요. 돌아가세요.”“문제를 해결했다고요?”“네, 그러니까 가서 볼일 보세요.”전이진은 어리둥절해졌다. 형수님이 불쑥 전화 와서 아주 성급한 말투로 지금 당장 서점으로 오라고 했는데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형에게 말했더니 형도 오직 그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서 빨리 가보라고 부추겼다.전이진은 결국 퇴근 시간도 채 되기 전에 급히 달려왔다.오자마자 형수님은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한다.전이진은 왠지 형수님에게 낚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생각은 이렇게 해도 감히 입밖에 내뱉을 순 없으니 그는 얌전히 대답했다.“그래요, 이미 다 해결됐다니 저 그럼 갈게요.”“네, 헛걸음하셨네요 저 때문에. 저녁에 태윤 씨랑 말해서 내일 도련님 반차 쓰게 해 줄게요. 푹 쉬어요.”전이진이 웃으며 말했다.“형수님, 주실 거면 통쾌하게 하루 휴가 주시던가요. 형한테 반차만 받다니 그게 뭐예요.”하예정도 웃으며 답했다.“알았어요. 그럼 하루 휴가 줄게요. 저녁에
저녁 무렵, 학부모들이 자녀들 하교 마중을 나왔다. 그 시간대를 바삐 돌아친 후 하예정은 언니네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심효진은 소정남과 함께 데이트해서 저녁에 서점 문을 닫았다.하예정은 과일 두 팩을 사서 언니네로 들고 갔다.두 자매는 예전처럼 사이가 좋았다. 하예정이 전씨 일가 사모님이 됐다고 다른 변화가 생긴 건 아니다.하예정은 언니네 월셋집 열쇠가 있어 바로 문 열고 들어갔는데 안에 여자아이가, 아니, 정확히 말해서 주우빈인데 우빈이가 글쎄 예쁜 원피스를 입고 방 안에서 신나게 뛰어다녔다.“우빈아?”하예정이 안으로 들어오며 조카를 향해 활짝 웃었다.“왜 치마 입었어?”“이모.”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제 치마를 자랑했다.“이모, 내가 입은 치마 예뻐요?”하예정은 과일 두 팩을 식탁에 올려놓고 조카를 번쩍 들어 올렸다.“예쁘지. 우빈이 치마 입으니까 공주님 같네. 하지만 우빈이는 남자아이라서 치마 입으면 안 돼요.”“나도 알아요. 남자아이는 힘든 일을 해야 해서 치마 입으면 불편해요. 여자아이는 가벼운 일을 해서 치마 입을 수 있어요. 남녀차별이란 뜻이죠.”녀석은 기억력이 좋아서 전태윤이 했던 말을 다 기억하고 있다.이때 하예진이 주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음식을 다 만들어놓고 동생이 와서 밥 먹기만을 기다렸다.“입고 나가진 않을 거래. 그냥 집에서 한번 입어보는 거래. 이 치마가 너무 예쁘다면서.”하예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한사코 입어보겠다고 해서 결국 갈아입혔더니 저렇게 방안을 돌아다니면서 신이 난 거야. 어린 녀석도 예쁜 건 안다니까. 효진이는 왜 같이 안 왔어?”하예정은 조카를 안고 다가오며 언니가 만든 음식을 쭉 훑어보았는데 그녀가 좋아하는 해산물이 있었다.“효진이는 데이트하러 나갔어. 정남 씨랑 한창 열애 중이라 둘이 데이트하러 나가면 태윤 씨도 밤늦게까지 야근하고 돌아온다니까.”“제부는 대기업 대표라 안 그래도 일이 많고 시간이 금이야. 너한테 그 많은 시간을 퍼부은 것도 소중히 여겨. 너희 부부만 평생 알콩달
노동명은 1조 원 자산가라 물건 살 때 가장 좋은 거로, 가장 비싼 거로 산다. 가격을 흥정하지 않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하예진은 끝내 속마음을 말하지 않았다.노동명의 소비 습관이 어떻든 그녀와 상관없으니까, 그녀는 단지 노동명의 세입자일 뿐이다.“이모, 난 언제쯤 여동생 생겨요?”주우빈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하예정은 웃으며 조카에게 음식을 집어줬다.“이모도 몰라. 임신했다 해도 남동생이면 어떡해?”그녀는 전에 전태윤과도 토론한 적이 있다. 전씨 일가는 왜 죄다 아들만 낳는 것인지, 집안 풍수가 딸을 낳기 불리한 풍수인지 심각하게 의논해 보았다.우빈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이모, 난 여동생 원해요. 남동생 싫어요.”“남동생은 왜 싫어?”“남동생이면 나처럼 치마 못 입잖아요.”하예정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하예진이 소식하고 고기도 안 먹자 그녀는 언니에게 잔소리해 댔다.“언니, 매일 꼭두새벽에 나갔다가 날이 어두워져서야 집에 오는데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밥은 든든하게 챙겨 먹어야지. 이젠 다이어트 그만해.”“저녁엔 최대한 고기를 안 먹어. 이따가 나가서 달리기도 해야 해. 폭식하면 몇 바퀴 더 달아야 하거든.”이혼 전과 비기면 하예진은 살이 엄청 많이 빠졌지만 하예정처럼 늘 모델 몸매를 유지하는 사람과 비하면 그녀는 여전히 뚱뚱했다.하예정은 언니의 고집을 못 꺾고 결국 포기했다.“난 이렇게 먹는 데 습관 됐어. 다이어트 영양사가 준 식단대로 밥 먹고 매일 운동량도 충분해. 오랜 시간 견지해서 겨우 지금의 효과를 얻었는데 중도 포기하면 안 되지.”하예진은 동생의 몸매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봤다.“난 앞으로도 쭉 체중 관리할 거야. 너처럼 표준적인 모델 몸매를 유지할래. 더는 폭식해서 백 킬로 뚱보로 돌아가지 않아.”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어떻게 폭식으로 백 킬로까지 찍었는지 참 한심할 따름이었다.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종일 귀찮게 굴고 부부 사이도 점점 안 좋아져 기분이 상하고 입맛이 없어야 할 텐데 그녀는 여전히
전태윤을 본 우빈이는 신나서 바로 그에게 안기려 했다. 전태윤은 손에 든 물건을 얼른 내려놓고 아이를 안았다.하예정은 허리 숙여 그가 사 온 과일 두 팩과 우유 한 박스를 들어주며 물었다.“왜 왔어요? 약속 있다고 했잖아요? 나도 과일 두 팩 사 왔는데 태윤 씨도 사 왔네요. 심지어 우리 둘 똑같은 과일로 사 온 거 알아요?”전태윤은 우빈이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부부가 마음이 통해서 그런 거지. 바이어가 잠시 일이 생겨 못 오니 오늘 밤 일정도 취소됐어. 그래서 얼른 처형네 댁에 와서 밥 한 끼 얻어먹으려고 했지.”사랑하는 아내가 처형네 집에 있다고 한다.이게 바로 하예정에게 경호원을 붙인 좋은 점이다. 평소 굳이 그녀에게 행적을 묻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자유를 줄 수 있으면서도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을 때면 전화 한 통에 바로 찾을 수 있다.“처형.”전태윤은 하예진에게 인사했다.하예진은 제부가 온 걸 보더니 수저를 내려놓고 얼른 마중 갔다. 동생이 물건을 한가득 들고 들어오자 하예진이 말했다.“두 사람은 앞으로 우리 집 올 때 뭐 자꾸 사 오지 말아요. 내가 다 알아서 사니까. 이따가 갈 때 과일 두 팩 가져가요. 나랑 우빈이는 이렇게 많이 못 먹어요.”“예정이도 사 올 줄은 몰랐어요.”전태윤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하예진은 속으로 사랑의 힘이 참 대단하다고 한탄했다.제부는 처형인 하예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깍듯이 대하긴 했지만 줄곧 차가운 태도였는데 이젠 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다.사랑으로 못 녹일 건 아무것도 없나 보다.“우리 막 저녁 먹고 있었어요. 손 씻고 와서 함께 먹어요.”하예진은 주방에 들어가 전태윤의 수저도 챙겨 왔고 맛있는 음식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하예정은 말문이 막혔다.전태윤만 오면 자신은 마치 주워온 동생처럼 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다.자리에 앉은 지 2분도 안 돼 초인종이 또 울렸다.주우빈은 또다시 문 열러 갔다. 이번엔 머리를 써서 작은 걸상을 들고 갔고 어른들은
하예진은 아무 말 없었고 하예정이 입을 열었다.“두 분 우빈이 키워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데려갔다가 아이가 적응 못 하고 울면 어떡해요? 아이 보고 싶으면 매일 낮에 이리로 보러 와요. 함께 놀다 가시면 되잖아요.”주경진이 뻔뻔스럽게 말했다.“예정 씨, 우리가 우빈이 키워본 적 없어서 지금이라도 보상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두 노인네가 집에서 할 일도 없고 마침 예진이를 도와서 우빈이를 돌보면 예진이도 가게 일에 전념할 수 있잖아요.”그는 또 품에 안긴 어린 녀석에게 물었다.“우빈아,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갈래?”아이가 되물었다.“엄마도 가요?”주경진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엄마는 못 가. 그렇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우빈의 아빠 있어. 우빈아, 우리랑 함께 집에 돌아가자. 그럼 너희 엄마도 이렇게 힘들지 않을 거야.”주우빈은 몸부림치며 바닥에 내려와 식탁 앞으로 달려가더니 제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나 밥 먹을래요. 엄마 안 가면 나도 안 가요. 난 엄마 옆에 있을래요!”“...”“다들 식사는 하고 오셨겠죠? 따로 음식 준비 안 할게요. 소파에 앉아서 TV 좀 보세요. 우리 밥 다 먹고 다시 얘기해요.”하예진은 전 시부모님께 각자 온수 한 잔 따른 후 TV도 켜주고 식탁에 돌아가 동생네 부부랑 함께 저녁을 먹었다.주경진이 아첨하듯 웃으며 말했다.“그래, 우린 TV 보고 있을게. 맛있게들 먹어.”노부부는 식탁에 놓인 과일 네 팩을 보더니 하예정 부부가 사 온 걸 바로 알아챘다.김은희는 군침이 돌아 나지막이 말했다.“예정이가 전부터 제 언니한테 먹을 것들을 자주 사주더니 이젠 돈이 생겨서 사 오는 과일도 급이 달라졌네요.”전부 비싼 과일들이었다.주서인이 보면 바로 두세 팩 챙겨서 집으로 가져가려고 할 것이다.전에 하예정이 언니네 집에 과일을 사가면 주서인이 올 때마다 하예진 몰래 과일을 엄청 많이 챙겨갔다.주형인은 그런 누나가 도둑과 다름없다고 했다. 친정에 오면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전부 채가니까.전에는 친누나라
김은희의 말로는 본인들이 고향 집으로 돌아가면 아들은 완전히 서현주에게 통제될 거라고 한다.게다가 두 사람은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다. 서현주는 신혼집 장식을 마친 후에 결혼식을 올려야 면이 선다고 했다.지금 월세방에 지내면서 결혼식을 올리면 친정 식구들이 와도 지낼 곳이 없다.주경진 부부가 우빈이를 돌보면 지루하지도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정을 쌓아갈 수 있다.어쨌거나 우빈이는 주씨 가문의 대를 이을 유일한 후대이고 서현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하예진은 채식만 먹어 곧장 저녁을 다 먹었다. 그녀는 전 시부모님이 나지막이 얘기 나누는 걸 보더니 가까이 다가가 동생네 부부가 사 온 과일 네 팩을 들어서 주방으로 가져갔다.몇 분 후.그녀는 과일 그릇에 과일 한 종류만 담아서 나왔고 나머지 과일은 씻지도 않았다.하예정과 성소현이 조카 우빈에게 사 온 간식거리도 몇 움큼 집어서 과일 그릇에 담고는 두 분 앞에 놓인 탁자에 내려놓았다.“예진아, 가게 장사 잘되지?”김은희는 스스럼없이 과일을 먹으며 하예진에게 물었다.“그럭저럭요.”“너도 평소에 바쁘면 우빈이 돌볼 시간 없잖아. 그냥 아이는 우리가 데려갈게. 우리가 그래도 우빈의 친할아버지, 할머니잖니. 설마 우빈이 해치기라도 하겠어? 우리도 꼭 우빈이 잘 보살필 테니까 걱정들 말아.”하예진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형인 씨한테도 이미 말했어요. 우빈이만 원한다면 데려가서 며칠 지낼 수 있지만 아이가 원치 않으면 더 강요하지 말라고요. 나랑 애 아빠가 이혼한 후 다들 우빈이 보러 왔을 때 나 단 한 번도 가로막은 적 없어요. 지금처럼 지내는 게 안 좋나요?”금방 이혼했을 때 하예진은 전 시댁과 아예 연락을 끊고 싶었지만 김은희가 수소문하고 뒤를 밟아서 그녀의 현재 거처를 알아냈다. 게다가 더 어이없는 건 전 시댁 식구들이 후회된다며 하루가 멀다 하게 그녀를 찾아왔다.“방금 우빈이도 말했듯이 안 가겠다잖아요.”하예진은 아들이 주씨네 집안에 들어가 지내는 걸
하예정 부부도 식사를 마치고 전태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예정아, 우빈이 데리고 나가서 앉아있어. 내가 설거지할게.”집에서도 그가 설거지해서 하예정은 이미 습관 됐다. 전태윤은 그녀와 우빈이를 소파에 앉아있으라고 했고 하예정도 고분고분하게 우빈이를 안고 언니 곁으로 다가갔다.자리에 앉자마자 세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언니랑 언니네 전 시부모가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언니, 다들 왜 이렇게 날 봐요? 내 얼굴에 밥풀이라도 묻었어요?”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을 어루만졌지만 밥풀은 없었다.“예정 씨, 지금 설마 전태윤 씨한테 설거지를 맡긴 거예요?”김은희가 물었다.“남자가 밖에서 종일 일하느라 힘들 텐데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돼서 제 남편을 잘 보살펴줘야 가족이 화목하고 집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도 생기죠.”하예정은 그제야 세 사람이 왜 자신을 그렇게 쳐다본 건지 알아챘다.“우리 언니도 전에 당신들 아들을 정성껏 돌봐줬는데 가족의 화목함이라곤 못 느꼈나 봐요? 밖에서 여자나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것도 싫어했잖아요.”김은희는 목이 멨다.하예정은 우빈이를 옆에 앉히고는 아이를 교육하기 시작했다.“우빈아, 넌 앞으로 꼭 이모부 따라 배워야 해. 그래야만 훌륭한 남자가 될 수 있어.”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우리 남편 할머니는 남편한테 집안일을 시켜야 한댔어요. 집은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곳인데 왜 아내가 모든 집안일을 책임져야 하죠? 아내는 공짜 가정부가 되어서 온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라도 있어요? 우리 부부는 함께 집안일해요. 어느 한 명 양반으로 지내는 게 아니라.”“...”주형인의 부모는 말문이 막혔다.명색이 전씨 그룹 대표인 전태윤이 설거지를 하고 집안일을 하다니.여자의 입장에서 하예정은 정말 행복하기 그지없고 질투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한참 후 김은희가 주우빈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우빈아, 할머니 안아줄까?”“싫어요.”주우빈은 머리를 홱 돌리며 거부하더니 이모의 다리에 기어 올라가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
“저는 앞으로 큰아가씨의 평가에 근거해서 요리 방법을 조정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모든 요리를 큰아가씨께서 만족해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졸업할 수 있겠네요.”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큰아가씨께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걸요.”‘평생 선우민아 씨를 위해 요리해 드리는 건 기쁜 일이지.'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전창빈은 꾹 참았다.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설령 전창빈이 선우민아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선우민아가 가업을 운영한다는 건 그녀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강한 강한 여성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상대이다.전호영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하예정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고 고현의 마음을 얻었다.강진은 그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전창빈 씨, 오늘 오후 내내 바쁘셨는데 일찍 쉬세요. 내일 아침 큰아가씨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일찍 아침을 드시는 분은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입니다. 민기 도련님은 학교에 가야 해서 일찍 식사하시고 큰아가씨는 매일 민기 도련님을 학교에 데려다주신 후 회사에 가시니까 두 분은 늘 함께 식사하시는 편이에요. 하여 아침 7시쯤이면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아침은 9시 이후에 준비하시면 돼요.”전창빈이 말을 건넸다.“그 시간대면 아침과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거네요.”“어르신과 사모님은 그렇죠. 점심 무렵에 일어나셨다가 식사 후에는 외출하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세요. 때로는 안 오시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미리 알려드릴게요. 안 오시는 날은 창빈 씨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자신의 배만 채우시면 돼요.”여기에서는 사실상 선우민아 자매만 아침을 먹는 셈이다.“큰아
동생 선우정아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지금은 네가 전창빈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 매일 여기 와서 식사해. 전창빈 씨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져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거 아니야.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너희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실 거야. 혹은 전창빈 씨에게 우리 지역에서 사업을 하게 하고 여기서 집을 사도록 하든가.”선우정아는 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선우민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선우정아는 앞으로는 감히 그 집에 밥 먹으러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선우민아가 자꾸 자신이 전창빈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전창빈은 미래의 아내는 지금 미래 처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전이혁은 강진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은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전창빈 씨, 이제 우리는 동료가 되었군요. 오래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선우씨 가문의 여러 집안이 같은 대저택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안마다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선우민아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었기에 강진 역시 1년 정도는 함께 일할 사람을 원했다.요리사와 친해지기도 전에 퇴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전창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집사님과 오래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요리들을 더 연구해서 큰아가씨께서 제 요리만 먹고 싶어 하도록 해야겠네요.”“큰아가씨께서 창빈 씨 요리만 고집하게 만들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요리 대회에 나가면 ‘요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요.”선우민아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창빈은 웃으며 말했다.“‘요리의 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저는 단지 제 요리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죠.”전창빈은 그가 고용한 요리사들에게는 항상 조언을 해주곤 한다. 본인이 잘 배워야 현재 이끌고 있는 요리사들도
선우민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런 사업을 가진 사람을 네가 정말 좋아한다면 작은아버지와 숙모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다만 전창빈 씨가 관성 사람이라 우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네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걸 아쉬워할 수도 있을 거야.”선우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언니!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 없단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분이 언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 일곱 명 중 언니가 맏이라 당연히 언니가 먼저 시집가야죠. 제가 언니를 앞지를 순 없잖아요.”착각인지 정말 본 건지, 선우정아는 전창빈이 선우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전창빈은 사실 정말로 선우민아를 위해 온 거였다.아니, 정확히는 선우민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선우정아는 생각했다. 선우민아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게다가 사촌 자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 나는 당분간 시집갈 생각 없어. 만약 고려한다 해도 이 지역의 사람일 거야. 생각해봐, 민기와 민수는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애들이 커서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 이 20년 동안 우리 자매는 계속 회사를 떠받쳐야 해. 만약 우리가 먼 곳으로 시집가면, 누가 회사를 이끌겠어? 셋째와 넷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지켜봐야 할 거야 아니야.”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도 이제 성인이 되어 사업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대한 가업을 떠받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하여 선우민아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 해도 A시의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래야 시집가서도 친정 회사를 계속 관리할 수 있으니까.앞으로 선우민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