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초…”전이진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남자랑 무슨 사인지만 말해 주면 돌아갈게.”여운초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14년 전에 내가 구해준 오빠야. 남매 같은 사이고, 결혼 준비 중인 여자 친구가 있어.”그녀는 괜히 전이진이 한동호에 대해 알아볼까 봐 그의 이름은 말하지 않고, 전이진이 괜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그저 남매 사이라고만 했다.“전에는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물어보긴 했어? 안 물어봤는데 내가 왜 괜히 그 사람 얘기를 하겠어?”전이진은 말문이 막혔다.그녀가 단조로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정보도 알아봤지만 무척 평범하고 심플해서 더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혹시나 더 알아보면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그런데 지금은 놀라운 걸 넘어서 충격이었다.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있는 줄 알았는데 남매 사이라니 다행이었다.“운초야, 미안해, 내가 제멋대로 오해하고 너한테 상처 준 것 같아. 진짜 미안해, 용서해 줄래?”여운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이진은 그런 여운초를 바라보며 그녀가 여전히 자신에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래도 그 남자와 어떤 사이인지 알려줬으니 전이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집안까지 데려다줄게.”여운초는 그런 그의 손을 뿌리쳤다.“아니, 집에서는 지팡이 없이도 혼자 걸을 수 있어.”지팡이 얘기가 나오자 전이진은 그제야 기억났다.여운초가 지팡이를 던졌고, 그걸 받은 그는 그대로 들고 가버렸다. 아마 차에 있을 텐데…“운초야, 네 지팡이 아직 내 차에 있어. 내일 와서 가게에 데려다줄 때 지팡도 돌려줄게.”여운초는 입술을 달싹일 뿐 거절하지 않았다.“지금 집에 혼자 있지? 그러니 내가 데려다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아주머니들도 있고, 내일 작은 고모도 올 거야.”이렇게 큰일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작은고모는 와서 그녀의 곁에 있어주려 했다그녀의 다른 두 고모는 전화를 걸어 욕설을 퍼붓거나
여운초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러자 도우미가 나무판 넘어 물었다.“아가씨, 전이진 도련님과 만나세요?”“그게 아줌마랑 무슨 상관인데요?”도우미는 당황하다가 얼마 후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전에 사모님과 작은 아가씨가 계실 때 아가씨를 싫어하셔서 사사건건 트집잡으셨잖아요. 저희도 사모님이 고용한 사람들이라 동정심이 들어도 차마 도와드릴 수 없었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아가씨에게 상처를 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고, 그저 평소에 아가씨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뿐이에요.”무시하면 상처 주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이 도우미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순 없어도,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지금 사모님과 작은 아가씨가 수사받고 계시는데, 사모님은 몰라도 아마 작은 아가씨는 몇 년 안 지나서 나올 거예요. 줄곧 아가씨를 함부로 대했는데, 작은 아가씨가 나오면 어떡해요? 전이진 도련님은 사람도 좋고, 힘 있는 집안이니까 두 분이 만나면 괜찮아요. 아가씨가 전씨 가문에 시집만 가면 작은 아가씨가 나와서 보복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잖아요.”여운초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도우미는 한참을 얘기해도 상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그때 한동호에게서 연락이 와 전이진과 무슨 일 없었냐며 걱정스레 물었다.“괜찮아요, 사과하러 온 거예요. 집안까지 데려다주고 갔어요.”그제야 마음이 놓인 한동호는 그녀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고요한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날이 밝기 바쁘게 전태윤은 휴대폰 벨소리에 잠에서 깼다.무척 짜증이 났던 그는 휴대폰을 더듬어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윽박질렀다.“무슨 일이야!”전이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형, 나야.”전태윤은 동생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전화를 끊고 싶었다.이 자식이 이른 아침부터 전화했다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형, 끊지 마. 나 지금 형 집 1층에 있는데, 형이 내려올래 내가 올라갈까? 혹시나 형수님 깨실
전태윤은 전이진의 일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위층으로 향했다.“형...”“꺼져.”그렇게 전태윤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전이진은 투덜거렸다.“자기가 잘살고 있으니까 동생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야 뭐야.”그때, 박 집사가 꽃 한 다발을 안고 들어왔다. 이것은 전이진이 오자마자 정원에 가서 잘라 오라고 그에게 분부한 꽃다발이었다.“둘째 도련님, 큰 도련님께 한마디 들으셨죠? 시간 좀 보고 오시지 그랬어요. 지금 시간에 깨어있는 건 닭밖에 없을 겁니다.”매일 울음소리로 사람들을 깨워야 하므로 닭들은 일찍이 잠에서 깬다.“여기 도련님 분부대로 꽃다발 가져왔습니다.”박 집사는 그 꽃다발을 전이진에게 건네주었다.곧이어 꽃다발을 받아안은 전이진은 조금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집사님, 제 기억에 정원에 핀 꽃들은 아주 찬란하고 예뻤는데, 이 꽃들은 꽃송이가 왜 이렇게 작죠? 예쁘지도 않고요.”그러자 박 집사가 말했다.“사모님이 꽃송이가 크고 복잡한 것을 좋아하셔서 그것들은 도련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꽃송이가 작은 것들만 고른 거예요. 사모님이 안 좋아하시는 건 도련님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가져다드릴 수 있습니다.”‘우리 별장에 있는 꽃이 많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아서 형수님한테 도움도 청할 겸 특별히 형네 별장에 있는 걸 잘라 달라고 한건데... 비록 형수님이 도와주겠다고 승낙하긴 했지만, 급해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 말이지. 빨리 나를 도와 가서 좋은 말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게다가 나 형한테 미움까지 샀잖아.’전이진은 박 집사가 잘라준 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른 아침에 문을 연 꽃집이 없었는지라 결국 이 꽃다발을 안고 가야만 했다.하지만 큰형수님에 대해서 그는 일단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큰형수님을 더 이상 귀찮게 할 배짱이 없었으니 말이다. 만약 계속 성가시게 군다면 전태윤이 경호원에게 명령을 내려 시체 들어 올리듯 전이진을 밖에 내던질 수 있다.‘그건 너무 창피
엄마에게 아침 주러 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주우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옆에 있던 전태윤은 그 두 사람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여보, 여보 지금 매일 아이들 깨우고 학교 보내는 부모님 같아.”그러자 하예정은 왜 아직도 옷을 갈아입지 않았냐 말하려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지만, 어느새 전태윤은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왜 이렇게 빨리 일어났어요? 벌써 정장도 다 입고?”“아, 사랑에 빠진 얼간이가 시끄럽게 전화를 거는 바람에 깼어.”하예정은 그가 전이진을 말하는 것임을 눈치채고 얼른 물었다.“이렇게 이른 아침에 도련님이 전화를 걸었다고요? 무선 전파 타고 기어가서 때리지 그랬어요?”“꼴에 그래도 내 동생이니까 때리지는 않았어. 이런 작은 일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애초에 나를 비웃고 내 웃음거리를 즐기긴... 자기한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할머니인데, 그것도 모르고 말이야.”“아참, 요 며칠 할머니 못 봬서 그런지 많이 보고 싶네요.”전태윤은 주우빈을 안고 하예정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틀림없이 또 여기저기서 손자며느리를 고르셨을 거야. 한가한 걸 참지 못하는 분이시거든. 만약 한가해지시면 우리 모두 긴장 잔뜩 해야 할 걸? 우리를 엄청 괴롭히실 테니까... 할머니가 느끼시는 즐거움은 모두 우리의 고통으로 이뤄낸 거야.”“감히 할머니 앞에서 그런 말 할 수 있어요?”“...그럴 리가. 말하면 진짜 고통스러워질 거야.”“겁쟁이네요.”하예정이 피식 웃었다.“할머니 앞에서 겁쟁이라고 인정하는 건 전혀 창피하지 않아.”인제 보니 전태윤은 할머니에게 적잖이 “가르침”을 받은 것 같았다. 혼나는 것보다 겁쟁이가 되는 것을 원할 정도니 말이다.“할머니도 무책임하셔. 둘째랑 셋째한테 사진 한 장씩 던져주고 나 몰라라 하시잖아. 이진이가 누구한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서 하루가 멀다고 우리한테 달려와 귀찮게 하는 것 좀 봐. 내가 경험이 많아 보이나? 그렇다 해도 우리 둘을 걔들이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전태윤은 동생이
핸드폰을 탁자에 올려놓고 전태윤은 하예정에게 말했다.“할머니가 점점 뻔뻔해지시네.”본래 그는 “늙을수록 더욱 교활해지나 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또 할머니의 귀에 들어가 자신이 혼날까 봐 결국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할머니는 그저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만 할 뿐, 아들을 낳는 것까지는 책임지지 않으세요.”하예정도 피식 조롱하며 한마디 했다.할머니는 손자를 도와 손주며느리를 고르는 일만 할 뿐이지 어떻게 손자의 모든 일에 관여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렇게 많은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게다가 집에는 아직 장가를 가지 못한 손자가 여러 명이나 더 있지 않은가.할머니가 이렇게 손주며느리를 고르신다는 것을 알고, 넷째부터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손주들은 요즘 벌벌 떨며 다들 긴장하고 있다.매일 할머니가 어떤 아내감을 골라줄까 추측하며 말이다.그래서 그들은 달콤한 말로 최근 매일 할머니를 달래 즐거워하게 만들고 있었다. 급히 결혼시키지 않게, 자신을 몇 년 더 혼자 있게 내버려두도록 말이다.아무튼 계속 혼자 있고 싶어 손주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할머니를 구슬렸다.아침을 먹은 후, 하예정은 쉬지도 못한 채 바로 언니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어야 했다.주우빈은 수업하러 가야 했고 강일구는 이미 그녀를 데려다줄 준비를 마쳤다.“이모, 오늘은 수업하기 싫어요. 엄마 보러 가고 싶어요.”녀석은 며칠 동안 수업을 받더니 다시 농땡이를 치려 했다.이윽고 하예정의 손에 이끌려 집에서 나선 주우빈은 강일구가 있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려 이모를 꼭 감싸안았다.그러자 하예정이 몸을 웅크린 채 조카에게 말했다.“우빈아, 무슨 일을 할 때든지 다른 곳에 정신을 팔면 안 돼. 꼭 끝까지 해내야지. 우빈이 무술 잘 배워서 엄마랑 이모 잘 보호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우빈이가 끝까지 버티지 않으면 무술을 배울 수 없고 엄마를 보호할 수도 없어. 우빈아,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결정한 뒤로는 꼭 진지하게 하고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돼.”주우빈은 그 작은 입을 앙다물더니
주우빈이 수업을 들으러 간 후에야 하예정은 전태윤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봄이 와 길거리에 꽃잎이 흩날리자, 그녀는 가는 길에 전태윤에게 차를 세우라 했다. 가게로 들어가 꽃 한 다발을 사기 위해서 말이다.하지만 여운초는 가게에 없었다.“사장님 혹시 배달하러 가셨나요?”하예정이 직원에게 물었다.“사장님은 아침 일찍 물건 사러 가셨어요. 대략 10시쯤에나 돌아올 겁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무슨 중요한 일로 저희 사장님을 찾아오셨어요? 사장님 돌아오면 사모님께 전화하라고 할까요?”“네, 운초 씨 돌아오면 나한테 전화 좀 해달라고 말해줘요.”직원은 하예정의 요구에 응한 뒤 그녀를 가게 밖으로 배웅했다.꽃다발을 안고 차에 오른 하예정은 차 문을 닫으며 전태윤에게 말했다.“운초 씨 가게에 없어요. 아침 일찍 물건 들이러 가서 10시쯤에 돌아온대요. 태윤 씨가 이진 도련님한테 말해줄래요? 저 10시에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요. 효진이가 있어야 내가 올 수 있어요.”“상관하지 마. 이진이도 알아서 하겠지. 이틀 동안이나 휴가를 줬는데도 자기 일 하나 잘 처리하지 못하니... 일 처리 능력이 심히 의심되는군.”“제가 잘 말해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따지자면 제가 이진 도련님 형수인 게 잘못이죠.”전태윤에게 친동생이 여덟 명이나 있다는 것이 떠오르자 하예정은 이렇게 생각했다.‘만약 한 명씩 다 나한테 와서 도움을 청한다면 결혼컨설팅 회사를 차려도 문제없을 것 같은데? 어휴, 내가 형수인 탓이지, 뭐.’전태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차를 몰아 아내를 병원으로 데려갔다.곧이어 부부는 병원에서 노동명과 마주쳤다.그는 한 손에 꽃다발을, 한 손에 보온도시락을 들고 있어 딱 봐도 하예진을 위해 준비한 것으로 보였다.하예정 부부는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기에, 노동명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전태윤이 하예정에게 말했다.“동명이 정말 요령이 튼 것 같아. 저 거친 남자가 처형한테 밥까지 나르고 있으니
노동명은 하예정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다.‘역시 전태윤의 마누라답군. 이 부부는 일을 보는 거나 말하는 거나 거의 똑같이 행동하네.’“예정 씨, 저는 예진 씨가 재혼하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노동명이 매우 진지하게 말하자 하예정도 더 이상 뭐라고 말하기 어려웠다.다른 이유를 떠나 노동명이라는 사람을 봤을 때 하예정 역시 그가 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으니 말이다.세 사람은 함께 입원실 건물로 들어갔고 얼마 안 지나 하예진의 병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또 이른 아침부터 병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주형인을 보았다.이번에는 김은희와 주서인 없이 주형인 혼자 왔고 그 역시 손에 꽃다발과 보온도시락을 들고 있었다.이것은 부모님이 주형인에게 이렇게 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주형인을 보자 하예정은 다소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할머니 할아버지가 저 사람을 막지 않았다고?’그래도 이번에는 김은희와 주서인이 오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주형인은 하나의 모순체와 같아 비교적 쉽게 쫓아낼 수 있었다.“어이, 거기 주씨. 또 우리 예진 누나 쉬는 거 방해하지 말고 얼른 꺼져!”하지철이 하예정 등 사람들을 지나쳐 먼저 주형인의 곁으로 달려갔다.그러고는 한 손으로 주형인의 손에 들려있던 꽃다발을 빼앗아 땅에 던져놓았고 발을 들어 잔인하게 밟기 시작했다.뒤이어 나머지 보온도시락마저 빼앗으려 하자 주형인이 절대 안 뺏기겠다는 듯 고집스레 안았고 하지철은 어떻게든 빼앗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전씨 가문 경호원들은 바로 옆에서 이 “연극”을 보고 있었다.“지철아.”어느새 다가온 하예정이 자신의 사촌 동생을 불렀다.“예정 누나, 왔구나. 이 자식 너무 괘씸해. 제 부모님을 이용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막고 혼자 빠져나왔어. 내가 차를 몰고 끝까지 쫓아오기는 했지만 결국 못 따라잡았고... 아니나 다를까 또 여기로 예진 누나 방해하러 온 거 있지?”하지철은 이렇게 말하며 주형인의 집중력이 흐려진 틈을 타 마침내 보온도시락을
전태윤이 경호원에게 눈짓하자 경호원이 바로 전태윤의 뜻을 알아차렸다. 노동명이 마지막으로 병실로 들어섰다. 주형인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꽃다발과 보온병을 들고 있는 노동명을 발견했다. ‘저건 분명 하예진을 꼬시려는 거잖아.’주형인의 마음이 순간 질투로 씁쓸해졌다. “예진아, 예진아...”주형인이 겨우 두 번 불렀을 뿐인데 하지철이 그의 입을 틀어막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 하지철은 젊은 데다 깡패들과 잠깐 어울리고 다녔었기에 행동이 굉장히 거칠었다. 게다가 주형인에게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으니 사무실에 앉아있기만 하는 주형인 같은 사람은 정말이지 이제 갓 열여덟 살이 된 청년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주형인은 하지철에게 입을 틀어막힌 채 멀리 끌려가서야 하지철이 그를 놓아주었다. “날 숨 막혀 줄게 할 셈이야?”주형인이 하지철에게 욕설을 지껄였다. “이게 위아래도 없이. 엄연히 말하면 넌 날 형부라고 불러야 해.”“쳇. 형부? 우리 형부가 될 자격이 있기는 해? 양심도 없지. 우리 누나와 이혼한 지도 6개월이 넘었고 다른 사람과 재혼한 지도 몇 개월이 지났어. 그러고도 나더러 형부라고 부르라고? 퉤.”혈기 왕성한 하지철은 주형인의 한마디에 몇 번이나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다 하지철은 정말로 침을 튀겼다. 얼굴에 침을 맞은 주형인은 비위가 상해 토하고 싶어졌다. 그는 얼른 종이를 꺼내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았다. “이 하씨 놈들아, 너희들 평소엔 분명 하예진 자매에게 신경도 쓰지 않더니 요즘은 무슨 신세라도 진 거야? 너희들 셋은 왜 우리 가족에게 이러는 거야.”하지철이 콧방귀 뀌며 말했다. “내가 예진 누나를 돕지 당신들을 돕겠어? 아무리 신경 쓰지 않아도 결국은 가족이야. 당신은 남이고. 우리끼리 아무리 피 터지게 싸워도 결국 같은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주형인 씨, 경고하는데 또 우리 예진 누나에게 찝쩍거렸다간 내 손으로 죽여버릴 줄 알아. 내가 당신 택시 운전도 못하게 만들어 버릴 거야.”주형인은 하지철에게 몇 마디 욕을 내
전씨 할머니는 묵묵히 전이혁을 바라보았다.이미 모든 말을 털어놓은 전이혁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전부 입 밖으로 내뱉었다.오늘 본가에 온 것도 전씨 할머니에게 확실하게 말하러 온 것이다. 그는 형들처럼 전씨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전이혁에게는 그가 원하는 여자가 있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전씨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의 말도 일리가 있구나. 오래 끌기보다 단칼에 정리하는 게 낫지. 아영 씨도 너에 대한 감정이 아직 깊지 않을 테니 확실히 설명해 주고 마음을 접게 하는 게 좋겠다. 아영 씨의 시간을 더 뺏지 말고.”전씨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이혁아, 정말 아영 씨를 고려하지 않을 거냐? 할머니의 안목을 전혀 믿지 못하겠어?”전이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할머니, 저는 할머니의 안목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여자예요. 그런데 저는 그녀에게 설레는 느낌이 없어요. 아영 씨와 결혼한다 해도 예의만 차리며 형식적으로 살뿐 진정한 부부간의 정은 없을 거예요. 아영 씨도 똑똑한 사람이라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강제적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 것 같아요.”전씨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할머니도 이제는 네 연애사에 간섭하지 않겠어. 원하는 대로 해 봐. 하지만 단 한 가지! 인품이 좋은 여자를 데려와. 아주 뛰어나지 않아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어야 해. 우리 전씨 가문의 이름을 망치지 말고. 만약 인품이 나쁜데도 네가 고집부린다면 난 억지로 막지는 않겠다. 대신 나와 인연을 끊고 전씨 가문에서 나가.”전씨 할머니는 쥐 한 마리가 천 냥 술을 썩히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다.전씨 가문의 좋은 명성은 몇 대에 걸쳐, 그리고 전씨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평생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것이다.전이혁 하나 때문에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약속했다.“전씨 할머니, 걱정하
“할머니는 제 마음속에서 저의 부모님보다도 더 중요하거든요. 백 세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증손녀도 안으실 거 아니에요. 우리 형제가 아홉이나 되는데 앞으로 아홉 며느리가 생기면 그중 한 명이 꼭 증손녀를 낳아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증손녀를 안고 키우시면서 나중에 좋은 신랑을 골라주시기까지 하셔야 하는걸요.”전씨 할머니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나도 하느님께 500년 수명을 더 빌고 싶지만 그게 될 일이니? 현실을 직시해야지. 나는 증손녀가 태어나는 걸 보기만 해도 만족해. 증손녀가 시집갈 때까지 살겠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지.”전씨 할머니의 건강은 아직 좋으시지만 이미 여든이 넘으신 데다 증손녀가 언제 태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어쩌면 막내인 전이율이 결혼할 때까지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어이구, 농담이야. 아까 내가 말했듯이 인품이 좋고 가치관이 바르면 내가 정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고. 그럼 꿈속의 그녀가 누군지는 아느냐?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네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전이혁은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했다.“제가 너무 무능해서 알아낸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정남 형에게 부탁해 그녀를 조사해보라고 했는데 이런 일은 신경 쓰기 싫다고 하더군요. 만약 태윤 형이 부탁한다면 무슨 일이든 도와주겠지만 제가 부탁하는 건 싫다고 하더라고요.”“정남이가 네 형의 친구이지 네 친구가 아니잖아.”전씨 할머니는 소정남이 전이혁의 부탁을 거부한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정남은 전이혁에게 빚진 것도 없지 않는가.전이혁은 전씨 그룹 본사에서 일하지도 않고 소정남과도 동료 사이도, 친구 사이도 아니었다. 소정남이 원하면 도와주고 원하지 않으면 안 도와줘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그런 일까지 정남에게 부탁하려고?”전씨 할머니가 다시 물었다.전이혁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는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라 결국은 바베큐만 먹었다.“2, 3개월 정도의 시간을 더 주겠다. 그때 가서도 여전히 도아
그런데도 전이혁은 휴지로 할머니의 자리를 닦았다. 그러나 전이혁 자신은 의자에 앉을 거라서 굳이 의자를 닦지 않았다.“할머니는 정말 수재이신 것 같아요. 수재는 집 밖을 안 나가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잖아요.”할머니는 전이혁을 흘겨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만 아부하고, 어서 말해봐. 도아영 씨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건데?”“아영 씨 괜찮은 사람이에요. 전 나쁘다고 한 적 없어요. 저도 좋아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아영 씨와 감정을 쌓아보려고 노력도 했는데 전 안 생기고 아영 씨만 강정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먼 길까지 절 찾아와서 따지더라고요.”“아영 씨는 제가 자기 가지고 논 거 아니냐고 하는데, 저도 억울해요. 저도 아영 씨 좋아해 보려고 진심으로 노력했지만,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걸 어떡해요.”전이혁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쉬지 않고 계속 바비큐를 먹고 있었다.“할머니가 점찍은 사람이라 능력도 좋고 조건도 잘 맞고, 여러모로 저랑 잘 어울린다는 거 알아요. 저도 아영 씨를 싫어하지 않고요. 하지만 함께 있으면 뭔가 찌릿한 느낌이 부족해요. 이미 봐온 시간도 꽤 되고, 이제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전 아영 씨를 사랑할 수 없어요.”“물론 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영 씨와 결혼해서 평생 서로 존중하며 지낼 수는 있을 거예요.”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런데?”전이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뗐다.“할머니도 아시잖아요. 제 꿈속에 자꾸 어떤 여자가 나타나 저와 얽힌다는 사실을요. 사실, 현실에서 진짜로 그 여자를 만났어요.”“나도 알고 있어.”전이혁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정말 할머니를 속일 수 없다니까. 제가 그 여자의 물건을 가지고 간 것도 아시잖아요.”“네가 그 물건 가져간 거 인정하면서 왜 아직도 안 돌려줘? 그 여자가 회사까지 찾아가서 네 둘째 형에게 물어봤었다며. 너 없다는 거 알고 나서야 돌아갔다고 하더라.”이 일은 할머니뿐만 아니라 전씨 가문 온 가
전날 밤잠을 설쳐 속이 불편했던 전이혁은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비닐봉지에 먹을 것들을 담고 나서야 할머니의 뒤를 따랐다.“할머니, 여기 구운 닭 다리요.”전이혁은 할머니에게 닭 다리 하나를 건넨 뒤, 고개를 돌려 테이블 앞에 앉아 입가가 번지르르할 정도로 맛있게 먹고 있는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더니 할머니에게 물었다.“할머니, 그런데 저 여자아이는 누구예요? 엄청 복스럽게 먹고 있네요.”“소령이라고, 그 애 부모가 여기 꽃밭 관리자야. 난 그 애가 참 마음에 들어.”전이혁은 할머니가 구운 생선 꼬치를 먹으면서 말했다.“할머니는 여자아이면 다 좋아하잖아요. 예씨 가문에 갔을 때도 그 집안에 유일한 증손녀를 데려오고 싶어 하셨잖아요.”할머니는 아쉬운 듯 말했다.“우리는 예씨 가문과 조건도 비슷하고 가풍도 똑같이 좋은 집안이라 지연이가 우리 집에서 살더라도 나쁠 게 없을 텐데, 아쉽게도 그 집 식구들이 허락하지 않더구나. 예준성은 내가 정말 딸을 데려가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나를 경계했는지 몰라. 내가 가면 할 일도 없는지, 맨날 집에 붙어서 나를 감시하는 거야.”“그거야 지연이가 예씨 가문의 유일한 증손녀이니 당연히 아까워하죠. 제가 예준성이라도 할머니가 딸 훔쳐 갈까 봐 감시했을 거예요. 하하하.”전이혁은 눈앞에 그려지는 그 장면을 상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손자인 전이혁이 보기에도 할머니는 진심으로 손녀 아니면 증손녀를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그는 가끔 자기 부모에게 시험관 아기라도 시도해서 넷째는 꼭 딸을 낳으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돌아오는 건 부모의 매질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부모는 이제 손주 볼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그들 형제 셋이 각자 노력해서 딸 한 명쯤은 낳아 보라고 독려하곤 했었다.“할머니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자, 이제 말해 봐.”할머니가 물었다.전이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죠. 그냥 할머니 보러 오면 안 돼요? 꼭 할머니한테 무슨 할 얘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