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꼭 백 살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이따가 신의님께서 오시면 할머니께 맥을 짚어달라고 부탁드려서 우리 처방약도 받아가요.”전태윤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감돌았다. 할머니와의 정이 각별한 탓으로 비록 모든 생명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알지만 막상 그 생각을 할 때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전씨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그들 형제는 오랫동안 슬퍼했고 지금도 모여서 할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였다.전씨 할머니는 태연하게 대답하셨다.“지금은 아무 탈 없단다. 우리 가정 의사 선생님께서 수시로 검진해 주고 지난번에도 정 선생님께서도 봐줬는데 다 괜찮대. 할머니도 건강관리 잘하고 있지. 어쨌든 내가 아직 너희들 애들 정도는 봐줄 수 있으니 그냥 증손녀만 낳아줄 생각만 하면 돼. 증손녀를 초등학교까지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면 너희 할아버지 만나러 가지 못할 것 같아. 너희 할아버지도 증손녀를 못 봤는데 나라도 대신 많이 보고 가서 증손녀가 얼마나 예쁜지 이야기해 줘야지.”전태윤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지만 하예정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할머니께서 예씨 할머니를 부러워하시지 않도록 저희가 열심히 할게요.”“그래도 너무 서두르지 마. 네 배 속의 아기는 내년에 나올 테고 첫째가 서너 살 되면 둘째를 계획하거라. 두 명이면 충분하니 더 낳을 필요 없어. 우리 가문이 아이들을 키울 능력이 있고 보모도 고용할 능력도 있지만 임신고생은 대신에 해줄 수 없잖니? 너무 많이 낳으면 몸만 망가져. 예정이는 자기 사업도 있고 앞으로 전씨 가문의 일도 도맡아야 하니 건강도 많이 챙겨야 한다. 그러니 둘만 낳아.”전씨 할머니는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지만 며느리들과 손자며느리들의 건강을 더 우선시하셨다. 딸을 낳기 위해 서너 번씩 임신고생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예전에도 며느리들이 셋째까지 낳았을 때 더는 출산을 권하지 않으셨다.또 손자를 낳을까 봐 두려운 것도 있지만 며느리들의 건강을 더 걱정하셨다.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이 두 명
“이혁이만 말을 안 듣더라. 꼬불꼬불 길을 좋아하면 모든 길을 에돌아 가게 내버려 둬. 인생 회의감 느낄 때까지 말이야. 허허!”전씨 할머니의 말끝엔 노골적인 희열이 묻어났다.‘노인 말을 안 들으면 코가 납작해진다'라는 건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대부분 손자는 말을 잘 듣는데 가끔 하나쯤은 개구쟁이가 있어야 재미가 있는 법 아닌가.전태윤과 하예정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태윤은 슬쩍 아내의 손을 잡으며 마음속으로 안도했다.‘다행히도 난 할머니의 말을 듣고 예정이를 맞이했어. 안 그랬으면 할머니께서 어떤 방식으로 나를 혼내줬을지... 휴.'운전기사와 세 사람만 차에 올라탄 타이밍을 노려 하예정이 확인하듯 물었다.“할머니. 이혁 도련님께서 좋아하는 그 여자가 바로 할머니께서 점해주신 도아영이에요?”할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흐뭇하게 웃었다.“이미 눈치챘으면서 왜 묻느냐? 하지만 입 밖에 내지는 마. 저 멍청한 놈이 내가 ‘후회하지 마라', ‘길이 험난해도 도움을 청하지 말라'고 계속 강조했는데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으니. 어휴... 저런 자식은 고생 좀 해봐야 해.”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저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태윤 씨가 분석해주니까 완전히 납득이 가더군요.”“태윤이가 가장 똑똑하네. 할머니 마음마저 꿰뚫어 보고.”전씨 할머니는 장손을 칭찬했다.“하지만 아영이가 어떻게 저 도련님이 좋아하는 여자일 수 있죠? 제가 듣기엔 성격도 전혀 다르다고 했는데. 도련님의 말에 따르면 그분은 시건방진 액션 여주인공 같대요. 반면 아영이는 완전히 교양 있는 집안의 따님이고요.”전씨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스승이 출중하니 제자도 뛰어날 수밖에. 할머니가 이리저리 뛰며 며느리들을 찾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느니라. 성격도 잘 맞아야지만 우리 전씨 가문의 인맥과 지위를 정상에 올려줄 수 있는 여인들이야. 물론 ‘쇠를 두드리려면 몽둥이가 단단해야 하듯' 우리 가문의 아이들부터 잘 자라야 하지. 능력이 없는데 유능한 친척들만 많으면 오히려 재앙이니라. 그런 사
전이혁은 즉시 몸을 똑바로 세우며 대답했다.“난 후회 안 해. 알겠어.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전이혁은 전씨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길을 거절한 자신의 선택이 형제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봐, 할머니에게 혼날까 봐 더는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그분을 찾으면 물건을 돌려줘. 이런 식으로 하면 오히려 안 좋은 인상만 줄 뿐이야. 진심과 성의로 그녀에게 감동을 주어야 너희의 미래도 있을 거고 행복할 수 있어.”전태윤은 먼저 사랑의 길을 걸어온 선배의 입장에서 전이혁에게 경험을 전수해주었다.전이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 다음에 다시 찾아오면 물건을 돌려줄게. 형, 지금 시내로 돌아가는 길이야? 차 소리가 들리네.”“응, 시내로 가는 중이야.”“그럼 바쁠 텐데 이만 끊을게. 나도 회사에 가서 좀 쉬다가 오후 미팅에 참석해야 하거든.”“건강을 잘 챙겨. 건강이 제일 중요해.”전이혁은 웃으며 답했다.“알겠습니다!”통화가 끝나자 하예정이 전태윤에게 물었다.“무슨 일이래요?”“좋아하는 여자가 관성에 왔는데 이혁을 찾아왔다가 다시 떠났대. 그분의 거처를 알고 싶은데 능력이 없어 지훈 씨한테 도움을 청하려 했던 거지. 이런 사소한 일로 부탁할 일은 아니잖아. 결혼정보회사로 아나? 매번 부하들을 시켜 여자나 찾게 하고.”전태윤은 그와 하예정의 감정 문제가 있을 때도 소지훈의 인맥을 동원하지 않았었다. 오직 사업상의 문제나 다른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소지훈에게 도움을 청했을 뿐이다.여자의 소식을 찾는 이런 사소한 일을 소지훈에게 부탁하는 것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다. 소지훈이 인맥을 동원해 여자를 찾은 적은 오직 약혼자 정윤하뿐이었다.“정남이도 인맥을 낭비하며 이혁을 도와주려 하지 않을 거야. 너와 효진 씨가 도아영 씨와 친구도 되었잖아. 이혁이가 도아영 씨를 거절했는데 너희들이 이혁에게 불만이 있을 거 아니야. 정남도 아내를 아끼는 사람인데 아내가 불편해할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전이혁이 당황했다.“형!”“그 애가 너를 피하는데 찾아봤자 소용없을 거야. 차라리 그 애가 널 찾아오길 기다리는 게 좋겠다. 남의 물건을 가져간 건 돌려줘. 네가 더 무례하게 굴면 오히려 미움만 사게 돼. 사람답게 정정당당하게 행동해야지. 대장부라면 당당하게 처신해야 해. 속임수나 사기 같은 수단은 절대 쓰지 마. 이 형도 예전에 네 형수님을 속인 죄로 이혼 위기까지 갔었단다. 내 실수를 반복하지 마.”전태윤은 고의로 전이혁을 도와주지 않았다. 사랑을 쟁취하는 길이 험난하길 바랐다.전씨 할머니께서 골라주신 순탄한 길을 두고 괜히 어려운 길을 택한 전이혁에게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할머니께서 선택한 사람이 틀릴 리 없었다.전씨 할머니는 여러 번 전이혁에게 암시도 줬었지만 그가 못 알아들은 것이 문제였다.‘후회하지 않을 거냐’, ‘나중에 애태우며 다시 구애할 때 할머니를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여러 번 했건만 전이혁은 알아듣지 못했다.전태윤은 전이혁에게 도아영과 ‘여우’가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도 알려주지 않았다.전씨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전이혁이 나중에 정말 애태우며 도아영을 쫓아갈 거라고 예견했기 때문이다.전이혁이 말을 건넸다.“형, 형수님 좀 바꿔줘.”전태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예정에게 도움을 청할 계획이다. 하예정이 한마디만 하면 천하의 전태윤도 어쩔 수 없이 도울 것이다.전태윤은 빙그레 웃으며 전이혁에게 경고했다.“도아영 씨는 네 형수님의 새 친구가 됐어. 지금 두 사람의 사이가 엄청 좋아. 네 형수님이 널 도울 거 같아? 게다가 지금 효진 씨도 도아영 씨와 친해져서 정남에게 네 험담을 하고 있을 텐데.”“흠...”전태윤은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전이혁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도아영을 포기한 건 전이혁의 손실이다.가장 우스운 순간은 전이혁이 온갖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도아영과 결혼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때일 것이다.전씨 할머니의 계획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전태윤
“오빠들은 아내도 못 얻고 언니들은 시집도 못 가니 스승님들로서 참 실패한 기분이겠네요. 가르친 제자들이 이 모양이니 말하기도 창피하시죠?”어르신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민지영은 서둘러 성소현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효진 언니, 우리 빨리 나가요. 결혼 얘기만 나오면 저는 정말 죽을 것 같다니까요. 저 겨우 스물여섯인데... 서른여섯도 마흔여섯도 아니잖아요. 매일 재촉하시는 건 너무하죠. 스승님들도 독신이시면서 왜 저만 재촉하시는 거예요?”성소현은 웃으며 함께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익숙해지면 돼요.”성소현과 민지영이 나가자 어르신들도 산책하러 나가겠다고 말하면서 이경혜 부부의 동행을 사양했다.이경혜는 성기현과 예준하에게 부탁해 함께 나가서 바람을 쐬고 오라고 했다.예준하는 예씨 가문의 다섯째 도련님으로서 예씨 가문과 김청산이 인척 관계도 있어 대화가 잘 통할 것이다.한편, 관성 호텔.전이혁은 배불리 먹고 의자에 기대어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오늘은 왜 안 왔어? 호텔에서 기다렸는데.”“내가 네 형수님이랑 리조트로 왔거든. 방금 할머니랑 식사 마치고 시내로 돌아갈 참이야. 무슨 일 있어?”전태윤이 대답하며 물었다.“소 대표님께 연락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 그래. 아니면 정남 형께 부탁해 주면 안 돼?”전태윤이 대답했다.“네가 직접 정남에게 말해도 될 텐데. 지훈 씨는 연말에야 돌아올 거야. 지금 소씨 가문의 사업은 정남이가 잠시 맡고 있으니 그에게 말해도 돼.”소지훈은 가족과 함께 연성에서 지내고 있다. 곧 돌아온다는 말은 있었지만 아직이었다.소지훈과 정윤하는 열애 중이라 첫사랑의 맛을 본 소지훈은 정윤하와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어했다.곧 방학이면 정윤하의 정합 도장도 바빠질 것이다. 방학이 다가오면 학부모들이 학생들을 도장에 보내 무술을 익히게 할 것이고 정윤하도 자연스레 도장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전이혁이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정남 형이 나를 무시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 정남 형이 형이랑 가장 친하고
“우리 윤주 언니는 결혼했잖아요.”“근데 너는 아직 싱글 아니냐?”민지영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돈을 많이 벌어서 제 노후를 책임지면 되죠. 일이 진짜 바빴어요. 게다가 마음이 흔들리는 남자도 없고... 너무 훌륭한 남자는 저 같은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을걸요.”말이 끝나자 공은호는 민지영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꾸짖었다.“네가 번 돈은 다 어디 썼나? 옷도 제대로 못 사 입고 이렇게 허름하게 입고 스승 앞에 나타나다니. 나에게 용돈 타 먹으려는 건가?”성소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민지영 씨의 옷이 겉보기에는 소박해도 다 브랜드 제품이에요. 옷 한 벌 값이 싸지 않은걸요.”“그렇죠! 그렇죠! 효진 언니는 눈썰미가 있으시네요. 우리 여자애들 옷은 스승님들께서 이해 못 하신다니까요. 스승님들은 사모님도 찾지도 않으셔서 영원히 이해 못 하시거든요.”그러자 어르신들은 민지영을 때리려고 시늉했다.민지영은 급히 머리를 감싸 쥐고 도망 다니면서 모두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우리 같은 노인들에게 아내를 찾으라고 재촉하다니. 너희는 결혼을 재촉하기만 하면 오히려 역으로 사모님을 얻어 달라고 조르는구나.”공은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다섯 노인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젊었을 때 마음이 설레는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누구도 마음속의 연인과 함께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들의 운명이 외로이 늙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그 뒤로 그들은 많은 제자를 거두었고 그 제자들은 여러 업계의 거물로 성장했다.가장 뛰어난 제자는 그들의 후계자가 되었기에 그들의 삶은 그리 외롭지 않았다.결혼을 재촉하는 쪽이 오히려 재촉당하는 상황에서 이경혜를 비롯한 사람들은 참다못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얼른 저리 가. 내 앞에서 종종거리지 말고. 애초에 너를 부르지 말 걸 그랬다.”공은호는 또 민지영을 꾸짖었다.성소현이 적절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제가 민지영 씨랑 산책하러 나갈게요. 방금 배불리 먹었는데 산책하면서 소화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