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누나니까 이렇게 불러내서 말하는 거잖아. 설사 예정이가 널 좋아한다고 해도 너희 두 사람 내가 허락 못 해.”“왜?”“네 가족 때문이지. 고모가 어떤 사람인지 나 누구보다 잘 알아. 네가 예정이 좋아하는 거 너희 엄마가 알면 계속 친절하게 예정이를 대할 것 같아? 갖은 수단으로 너희 두 사람 갈라놓을 거야. 예정이한테 더 한 짓도 꾸밀 수 있어. 고모는 상류층에서 20여 년간 지내면서 일찌감치 안하무인 격이 되었어. 넌 고모의 유일한 아들이라 고모의 희망이자 김씨 집안에서 내정된 후계자야. 너한테 기대가 엄청 클 거라고, 틀림없이 재벌 가문과 정략결혼을 맺어줄 거야. 예정이도 엄청 훌륭하지. 하지만 출신이 가장 큰 약점이야. 고모는 날 봐서 예정이를 조카처럼 예뻐하셔. 일단 네가 연루되는 날엔 누구보다 매정하게 변할 거야. 예정인 절대 고모가 바라는 신붓감이 아니야.”심효진의 말은 예리한 칼날처럼 김진우의 정곡을 찔렀다.“진우야, 네가 예정이를 좋아하는 건 걔한테 아무런 도움이 못 돼. 재앙만 안겨줄 뿐이야. 난 너의 사촌 누나야, 네가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걸 못 보겠어. 예정이도 내 단짝이야. 소중한 친구가 내 가족에게 상처받는 것도 싫어. 그러니까 네가 내려놔. 예정이는 너랑 안 어울려. 널 사랑할 리도 없고. 두 사람 알고 지낸 지 십몇 년째야. 걔는 나랑 함께 네가 커가는 걸 지켜봤단 말이야. 널 동생으로만 생각해. 누나가 어떻게 동생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겠어? 너 마음 안 접으면 이대로 가다가 결국 상처받는 건 너 자신뿐이야.”김진우의 낯빛이 더욱 창백해졌다.그의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하예정을 무척 사랑하고 엄마도 그녀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을 뿐 더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예정이는 예진 언니 집에서 나오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어. 예진 언니가 줄곧 예정이를 걱정했거든. 그래서 예정이도 언니를 안심시키느라고 전태윤 씨랑 초고속 결혼을 한 거야. 예진 언니는 아마 두 사람이 정말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줄로 알 거
심효진은 굳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물었다.“너 그럼 예정이랑 태윤 씨 갈라놓을 작정이야? 김진우, 누나는 너 얕보고 싶지 않아!”김진우는 괴로운 얼굴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그는 좀처럼 이 감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다만 하예정에게 상처 주는 일도 차마 할 수 없었다.심효진은 사촌 동생을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진우야, 누난 이미 충분히 얘기한 것 같아. 일단 마음 좀 가라앉히고 누나 가게에 가지 않도록 잘 단속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져. 시간이 다 해결해줄 거야.”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커피는 내가 살게. 이젠 가게로 돌아가야 해. 너도 얼른 회사 가. 지금 한창 배우는 단계라 누구보다 열심히 해야지. 너희 김씨 집안에 너만 있는 게 아니야. 방심하다가 네 몫까지 다 뺏기는 수가 있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심효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김진우는 자리에 앉은 채로 멍하니 넋을 놓아버렸다.애초에 하예정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는 고백할 용기가 없어 딴 사람에게 기회를 빼앗겨버렸다. 심효진이 가게로 돌아오자 우빈이가 잠에서 깼다.하예정은 공예품을 만들고 있었고 우빈은 옆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효진은 묵묵히 친구를 바라봤다.예정은 얼굴도 예쁘장한 데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전념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진우가 좋아할 만했네.’“효진아, 왜 그렇게 보고 있어? 나한테 푹 빠진 거야?”심효진이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남자면 무조건 널 좋아했을 거야. 예정이 너 엄청 매력적인 거 모르지?”“매력은 무슨, 결혼 전엔 제대로 된 남자친구도 못 사귀어봤어.”“그건 네가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잖아.”심효진이 의자를 빼내고 카운터 앞에 앉았다.“요즘 온라인 스토어 장사 잘 되나 봐. 매일 한가할 때마다 공예품 만드는 걸 보니.”“태윤 씨랑 태윤 씨 남동생이 홍보해줬거든. 회사 직원이 많다 보니 주문량도 엄청 많더라고. 그리고 소현 씨도 홍보해줬어. 그쪽 업계에는 전부 돈
하예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나 적응 안 돼요, 태윤 씨. 나한테 할 얘기 있죠?”전태윤이 대답했다.“오늘 저녁 약속 취소됐어. 우리 함께 쇼핑할래?”처음 꽃 선물을 할 땐 어쩔 바를 몰랐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먼저 나서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전태윤은 저녁에 아내와 함께 쇼핑하기로 했다.하예정은 잠시 고민한 후 대답했다.“나 이따가 우빈이 데리고 언니 퇴근 마중 가야 해요. 괜찮다면 우리 함께 가서 밥 먹고 쇼핑할래요?”“너희 언니 야근해?”“아까 문자 왔는데 출근 첫날은 야근 안 한대요. 5시 30분에 퇴근이래요.”전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그래, 좀 있다가 데리러 갈게. 우리 함께 너희 언니 회사로 가. 내가 밥 사줄게.”“좋아요.”“그래, 그럼 이만 끊을게.”“네.”전태윤은 바로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는 하예정이 달콤한 말을 하길 기다렸다.하지만 전화기 너머로 하예정이 물었다.“태윤 씨, 더 할 얘기 있어요?”“아니, 없어. 그럼 진짜 끊을게.”하예정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바로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내려놓자 옆에서 심효진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웃었다. 하예정은 그녀의 이마를 살짝 내리치며 물었다.“왜 웃어?”“예정아, 너 태윤 씨랑 제법 가까워졌는데? 태윤 씨도 너한테 무척 마음 쓰는 것 같아. 두 사람 잘해봐. 결혼식도 올려야지.”혼인신고는 했으나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고 정식으로 공개하지도 않았다. 그들과 가장 가까운 일부 사람들만 두 사람이 부부 사이란 걸 알고 있다.“차차 해나가야지 뭐.”하예정은 일부러 전태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다만 전태윤이 적극적으로 나서도 그녀는 회피하지 않았다.그녀가 먼저 마음을 주지 않는 이유는 전태윤이 진심을 몰라주고 결국 그녀만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서였다.전태윤이 먼저 다가오고 하예정도 피하지 않으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면서 사랑의 결실을 맺을 것이다.“이모.”혼자 놀다 지친 우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
전태윤은 아내와 저녁에 함께 쇼핑하자고 얘기한 이후로 기분이 한결 좋아지고 업무 효율도 높아졌다.밖에서 노크하고 그의 목소리를 들은 소정남도 그가 기분이 좋다는 걸 바로 알아챌 지경이었다.소정남은 문을 열고 혼자 들어온 게 아니라 예준하와 함께 들어왔다.예준하의 경호원들은 사무실 밖에서 대기했다.“대표님, 예 대표님 오셨습니다.”전태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빙 돌아서 앞으로 나갔다.“어서 와요, 예 대표님.”두 사람은 악수를 마친 후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좀 전에 조 비서가 그에게 예준하가 올 거라고 보고하긴 했지만 소정남과 함께 올 줄은 미처 몰랐다. 아마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듯싶었다.소정남은 예준하에게 물 한 컵 따라주었다.예준하가 물을 마신 후 전태윤이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 우리의 협력에 무슨 차질이라도 있는 건가요?”예준하와 같은 고급 파트너는 예약할 필요 없이 언제든지 전태윤을 만날 수 있다. 다만 예준하는 줄곧 소정남과 연락이 잦았는데 이번엔 바로 그의 사무실에 찾아왔기에 전태윤은 두 회사의 협력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의심됐다.예준하가 웃으며 대답했다.“전 대표님, 협력엔 아무 이상 없어요. 아주 잘 진행되고 있죠. 이번에 저희 형님과 형수님의 청첩장을 대표님께 전해드리려고 이렇게 찾아뵈었어요.”전태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예 대표께서 결혼식을 올린다고요? 만성 남씨 가문의 일은 다 해결됐나요?”“금방 끝났어요. 저희 형수님이 만성에서 돌아와 선우 대표님의 결혼식에 참석했어요. 두 사람의 결혼 날짜는 진작 정했어요. 저희 형수님의 친정 오빠 결혼식을 마치면 형수님도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그러니 이 청첩장도 이젠 드릴 때가 되었죠.”예준하는 말하면서 큰형이 부탁한 청첩장을 꺼냈다. 다른 협력 업체라면 예준성은 택배 형식으로 협력 파트너에게 청첩장을 보낼 테지만 예준하가 마침 A시에서 관성으로 왔고 관성의 지사는 그가 전부 책임지고 있으며 대부분 시간을 관성에서
“안 그래도 진작 예 대표님을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런 좋은 기회가 생겼네요.”예준하가 웃으며 말했다.“저희 형님도 전 대표님을 만나 뵙고 싶어 하세요.”다들 격식대로 인사치레를 나눴다.예준하는 형을 대신해 전태윤에게 청첩장도 드렸으니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그도 무척 바쁜 사람이니까.“전 대표님, 소 이사님, 저는 그럼 볼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녁에 시간 되시면 함께 식사나 할까요? 제가 사드리겠습니다.”소정남이 웃으며 말했다.“저는 언제든지 시간 되지만 저희 대표님께서 너무 바쁘세요.”전태윤이 말했다.“나중에 한 번 식사 대접할게요.”오늘 저녁엔 아내와 함께 데이트를 해야 한다.예준하가 웃으며 답했다.“그래요, 그럼 대표님 연락만 기다리겠습니다.”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전태윤과 소정남도 일어나 그를 사무실 문밖까지 배웅해주었다.“다음에 또 만나요, 전 대표님, 소 이사님.”예준하는 문 앞에 서서 두 분더러 이만 들어가 보라고 인사를 올렸다.전태윤과 소정남은 사무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예준하는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리를 떠났다.그가 떠난 후에야 소정남이 편하게 말을 놨다.“저녁에 뭐 하러 가는데? 미팅은 죄다 나한테 밀고 예 대표님 식사 약속도 거절해? 태윤아, 아무래도 난 전생에 너한테 지은 죄가 많아서 이번 생에 목숨 걸고 갚는 것 같아. 네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오잖아.”전태윤이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넌 나한테서만 가치를 발휘할 수 있어. 내가 준 무대에서만 매혹적인 춤사위를 펼칠 수 있잖아.”소정남은 싱글벙글 웃으며 사무실 문을 닫았다.“예진 씨랑 데이트하는 거지?”“그래, 데이트한다, 왜? 가서 훼방 놓으려고? 아니면 질투나 죽겠어? 너한테도 맞선자리 알아봐 줄까? 너도 초고속 결혼해!”소정남이 얼른 대답했다.“나 그 정도 눈치는 있어. 훼방을 놓다니. 비록 훼방 놓을 생각은 있지만 너의 행복을 위해서 꾹 참을게. 질투까지는... 아직 아니야. 너도 지금 썩 행복해 보이진 않아.
“나도 물론 현장엔 없었지만 사람들한테 전해 들었어. 그때 심효진 씨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했던 김 사모님은 좌불안석이 되어서 얼른 효진 씨를 밖으로 끌고 나갔대.”전태윤은 말문이 턱 막혔다.하예정은 그에게 심효진의 집에서 결혼을 엄청 다그친다고 얘기했었고 지난번엔 선보러 소이 카페까지 함께 갔었다고 했다.심효진이 도 사모님 생일 파티에서 혹시 일부러 그런 건 아닐까? 그런 짓을 벌이면 집에서 더는 그녀의 결혼을 다그치지 않을 테니까.“심효진 씨가 벌러덩 누우니 장내가 떠들썩해졌대. 이 바닥 사람들 거의 다 전해 들었을 거야.”소정남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쪽 업계 여자들 아무리 만취해도 절대 효진 씨처럼 바닥에 드러눕진 않잖아. 재벌가 출신이라 뼛속부터 고고함이 흘러넘쳐. 취한다 해도 우아하게 취하지.”전태윤이 잠시 침묵한 후 그에게 물었다.“그럼 넌 우아하게 취하는 여자가 좋아 아니면 안하무인 격에 제멋대로인 여자가 좋아?”“이 문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다만 네가 정말 선 자리를 주선하겠다면 나도 한번 심효진 씨를 만날 의향은 있어. 안목이 얼마나 높은지 꽤 궁금하네. 알지? 사전에 내 진짜 신분 밝히지 않는 거.”“나 따라 하는 거야?”“왜? 그럼 안 돼?”전태윤이 웃으며 말했다.“나야 오케이지. 그럼 오늘 밤에 와이프한테 말해서 효진 씨한테 물어보라고 할게. 효진 씨가 동의하면 두 사람 내가 주선하지. 너도 인제 그만 날 부러워하고 결혼해야지 않겠어?”소정남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그는 진짜 단 한 번도 부러워한 적이 없었다.전태윤은 중요한 서류 몇 부에 서명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정남에게 말했다.“나 퇴근해. 전씨 그룹이 망하지 않는 한 오늘 밤엔 절대 연락하지 마. 알겠어?”소정남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겨우 오후 4시인데?!’그는 전태윤을 따라가며 투덜거렸다.“태윤아, 너 시계 안 봐? 지금 4시밖에 안 됐어. 퇴근하려면 아직 한참이라고.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새벽 12시가 다 돼서야 집에 갔
하예정이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언니와 조카 우빈이었다.그러니 전태윤이 우빈을 잘 챙겨주면 점수를 더 벌 수 있다.간식거리는... 예정이가 먹보니까.꽃 선물을 썩 반가워하지 않더라도 간식을 한가득 선물하면 분명 웃음꽃이 만개할 것이다.전태윤은 왼손에 간식 봉투를 들고 오른손엔 비행기 모형의 장난감을 든 채로 가게에 들어갔다. 그 시각 하예정은 마침 조카에게 죽 한 그릇 다 먹여주었다.“이모부.”아이는 전태윤을 보더니 방긋 웃었다.하예정은 남편이 사 온 장난감을 보면서 말했다.“태윤 씨, 또 우빈이 장난감 샀어요? 효진이가 금방 새것 사줬는데...”전태윤은 간식 봉투를 그녀 앞에 내려놓고 장난감 비행기를 우빈에게 건네면서 아이를 안아 올렸다.“조카가 우빈이 한 명뿐인데 얘를 안 예뻐하면 누굴 예뻐하겠어? 효진 씨가 산 건 효진 씨가 산 거고 내가 산 건 내 마음이야.”하예정은 그릇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고개 숙여 봉투를 들여다봤다.“간식들이네요?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우빈이가 여기서 지루해할까 봐 군것질할 것 좀 샀어.”분명 그녀를 위해 산 간식이지만 정작 그녀 앞에 서니 전태윤은 또다시 우물쭈물했다. 결국 그는 우빈을 핑곗거리로 둘러댔다.“태윤 씨, 이러다 우빈이 버릇 나빠져요.”하예정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우빈이는 똑똑하고 착해서 우리가 제대로 가르치면 올바른 어린이로 클 거야. 버릇 나빠질 리 없어.”하예정이 빤히 쳐다보자 전태윤은 수줍은 듯 귓불이 서서히 빨개졌다.“태윤 씨 왜 이렇게 말이 많아졌어요?”전태윤은 말문이 막혔다.‘뭐야?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내가 말이 많다고? 할머니는 내가 말주변이 없다고 잔소리하시고, 와이프란 사람은 말 좀 몇 마디 하니 괜히 말 많다고 탓하는 거야?’이때 심효진이 화장실에서 나오며 전태윤을 보더니 반갑게 인사하고는 예정에게 말했다.“예정아, 예진 언니 퇴근할 때 되지 않았어? 우빈이도 배불리 먹었겠다, 얼른 애 데리고 태윤 씨랑 함께 예진 언니 마중하러
“아 참.”하예정이 문득 반려동물을 떠올리며 전태윤에게 물었다.“봄이랑 애들은 어떡하죠? 함께 데려가요?”“봄이?”전태윤의 눈빛이 확 어두워졌다.‘봄이는 또 누구야?’“태윤 씨가 준 반려견 말이에요. 내가 봄이라고 이름 지어줬어요.”그제야 전태윤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강아지였네. 난 또 그새 라이벌이라도 한 명 더 생긴 줄 알았네.’“예정아, 너 불편하면 봄이 가게에 남겨둬. 내가 퇴근하고 우리 집으로 데려갈게. 내일 다시 데려오면 되잖아. 우리 집에도 반려동물 있으니 내가 잘 챙길게. 걱정하지 마.”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그럼 봄이는 가게에 둘게.”그녀는 심효진을 안으며 칭찬을 남발했다.“효진아, 나한텐 역시 네가 최고야!”심효진이 그녀를 가볍게 밀치며 웃었다.“뭘 새삼스럽게.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얼른 가봐. 태윤 씨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하예정은 그제야 시름 놓고 전태윤과 함께 나갔다.“예정아, 네 차는 여기 둬. 내일 아침 내가 바래다줄게.”전태윤은 차 문을 열고 주우빈을 차에 앉히면서 그녀에게 말했다.“그러죠 그럼.”하예정도 흔쾌히 동의했다. 어차피 그의 차는 7인승 미니밴이라 실내가 넓고 편안했다.전태윤의 차에 어린이 안전 의자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하예정은 조카를 앉고 뒷좌석에 앉았다.전태윤도 더 말리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내일 무조건 박 집사에게 분부하여 어린이 안전 의자를 설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되면 다음부터 우빈이는 단독으로 어린이 안전 의자에 앉고 하예정은 그의 곁에 앉을 수 있으니까.그들 부부는 주우빈을 데리고 곧게 노씨 그룹으로 향했다.노씨 그룹에 도착하자 마침 퇴근 시간대라 직원들로 붐볐다.몇 분 기다린 후에야 하예진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예정이 미리 마중 오겠다고 문자를 보낸 덕에 하예진은 퇴근하자마자 밖으로 나왔다.다만 아침에 강제로 다섯 바퀴 달린 탓인지 두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렸다.줄곧 운동하지 않다가 갑자기 강제로 다섯 바퀴나 달리자 하예
도아영은 전이혁이 보낸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아직 확정된 건 없어요. 왜요? 밥이라도 대접해 주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돌아가는 게 아쉬워요?”전이혁이 회답했다.[음식 대접하고 싶어서요. 아영 씨랑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요.]도아영은 물었다.[무슨 이야기를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요? 아니면 이혁 씨가 이미 그녀를 선택하셨다는 걸 확정하신 건가요? 만약 정말 여자친구가 생겼다면 저에게 그분을 소개해 주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이혁 씨의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져 줄게요.]그녀는 노력해보기도 전에 희망이 없다면 포기할 생각이었다.전씨 가문과 같은 좋은 집안은 흔치 않았지만 전이혁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전이혁은 몇 분 동안 답장이 없다가 이렇게 보내왔다.[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아직 공식적인 연인 관계는 아니라서 아영 씨에게 소개할 수는 없어요.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이따가 만나서 천천히 이야기해요.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없어요.][그럼 언제 시간 되세요? 제가 음식 대접하고 싶은데.]도아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제가 관성에 온 건 이혁 씨에게 확실한 답을 듣기 위해서였어요. 이제 대충 알 것 같으니 이틀 후면 돌아갈 거예요.]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도아영은 며칠 동안 관성에서 휴가를 즐기기로 했다.해주시로 돌아가면 다시 바쁜 업무에 파묻히면서 쉴 틈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돌아가기 전에 식사 한번 하죠.]부부는 못 되더라도 원수지간이 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둘 사이에 원수 사이로 지낼만한 일도 없지 않은가.전이혁은 이미 그녀에게 모든 걸 말해 주었다. 그가 왜 그녀에게 접근했는지, 왜 그렇게 잘해줬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말이다.그리고 도아영이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의 취향이 아니라는 점도 알려주었다.두어 달밖에 알지 못한 사이, 설령 마음이 움직였다 한들 깊은 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는가.전이혁이 도아영을
“이혁 도련님을 네 가이드로 삼아서 관성 구경을 시켜줄게. 교외에도 괜찮은 관광지 몇 군데가 있으니 한번 가보는 것도 좋아.”도아영은 고개를 저었다.“이혁 씨는 저랑 말 한마디조차 나누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요. 여행은 기분 좋게 다녀야지 제가 왜 그의 차가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야 하죠? 오히려 기분만 망치겠어요. 언니 시간 있으세요? 같이 쇼핑 좀 하고 싶은데. 내일은 서원 리조트에 들러 전씨 할머니를 뵙고 싶어요.”전씨 할머니를 찾아가는 이유는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따지려는 게 아니라 전씨 가문의 유명한 어르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였다.하예정은 웃으며 답했다.“물론이지. 근데 나는 낮잠 자는 게 습관이 되어서 안 자면 오후에 힘이 없어. 푹 쉬지 못하면 두통도 오고 눈도 아파.”“그럼 언니가 낮잠에서 깬 후에 같이 가요.”“그래, 내가 일어나면 우리 서점에도 데려갈게. 효진이가 거기 있을 거야. 내 가장 친한 친구는 효진이와 소현 언니뿐이거든.”하예정은 새로운 동서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두 친구를 소개하곤 했다.“좋아요.”도아영은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는 터라 하예정이 어디로든 데려가 주기만 하면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너는 낮잠을 안 자?”“30분 정도는 자요.”“내 사무실이 크진 않아서 별도의 휴게실은 없어. 평소에는 긴 소파를 펴서 침대처럼 쓰고 낮잠에서 깨면 다시 접어서 소파로 써. 우리 둘이 자면 좀 비좁긴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도아영은 하예정을 도와 소파를 칩대로 펴주었다.“이런 접이식 소파 침대가 괜찮네요. 언니는 좀 주무세요. 저는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와서... 지금은 일도 안 하기에 밤에 일찍 자면 돼요.”하예정은 하품하며 말했다.“그럼 난 좀 잘게.”“네.”도아영은 자신이 하예정의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몇 분간 대화를 나눈 뒤 누웠다. 그녀는 도아영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는지 금방 잠이 들었다.도아영은
“언니, 그때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니가 마음에 들어서 전 대표님이 언니에게 구애하신 건가요?”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나와 태윤 씨는 깜짝 결혼했어. 누가 누구에게 구애하는 그런 것도 없이. 결혼 후에 서로 정을 키워나간 케이스지. 하지만 우리 할머니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하예정과 전태윤의 깜짝 결혼 이야기를 도아영도 조금 알고 있었다.하예정은 간단히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태윤은 완전히 전씨 할머니의 강요로 하예정과 결혼했던 것이다.더욱 놀라운 것은 전씨 할머니가 이미 일찍이 하예정을 노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더욱 황당했는데 어떤 점쟁이가 하예정과 전태윤이 한평생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점쳤을뿐더러 전태윤이 하예정과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전태윤을 가장 아끼는 전씨 할머니께서 가만히 계실리가 있겠는가! 할머니는 전태윤의 효심을 이용해 온갖 방법으로 결혼을 강요했고 덕분에 지금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가능했다.도아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전씨 할머니는 왜 저를 선택하신 걸까요?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전씨 할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제 사주를 알아내서 점을 쳐보시고 이혁 씨와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판단하신 건가요?”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전씨 할머니께 직접 여쭤보셔야 할 것 같아. 내가 알기로는 그 점쟁이는 이제 전씨 할머니를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셨어. 서로 인연이 끝났다면서. 내 생각에는 점쟁이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께서 여행 다니시며 여러 사람의 인품을 파악하시고 손자들에게 맞는 여성이라고 판단하셔야만 손자들에게 추천하시는 것 같아. 할머니는 늘 태윤 씨 형제들을 걱정하고 계시거든.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 키웠는데 정작 연애만큼은 어리숙하다고 말이야. 결혼은커녕 연애도 제대로 안 한다고 잔소리하셔. 남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알맞은 여성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할머니 손자들의 인생 대사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남의 일까지 신경 쓸
하여 전이혁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도아영은 어제 하예정과 이야기를 나누며 잘 통하는 부분이 있어 그녀의 회사로 찾아온 것이다.“난 점심에는 보통 커피를 마시지 않아.”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도아영은 하예정의 배를 살펴보며 말했다.“지금은 커피나 진한 차는 피하는 게 좋아요. 임신 중에는 조심해야죠.”하예정은 웃으며 답했다.“알아. 커피나 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끊었어.”하예정이 오랫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도아영이 직접 커피를 내려야 했던 것이다.“성소현 씨는 오늘 안 오시나요?”도아영이 무심코 물었다.도아영이 온 지 30분이 넘었지만 성소현이 회사에 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소현 언니는 오늘 채소 시장에 갔어. 저녁이 되어야 돌아올걸.”하예정과 심효진은 둘 다 임신부였다. 그녀들 스스로 자신이 아직 힘이 넘친다고 생각했지만 성소현의 눈에는 둘 다 국보급 보물로 소중히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다.“아...”식당에 들어가 두 사람은 각자 음식을 담아 한적한 자리에 앉았다.도아영은 생선과 고기, 그리고 새우가 가득 담긴 요리들을 보며 물었다.“회사 식사는 모두 똑같나요? 등급별로 나누지 않으시는군요.”“응, 등급 같은 건 안 나누어.”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관리직이었기에 등급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여기까지 오기에는 너무 멀었지만 하예정은 그들을 위해 삼시 세끼를 제공했고 요리들도 나쁘지 않았다.그녀는 노동자들의 식사에 고기와 국물이 반드시 놓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농장에서 힘든 일을 이겨내려면 고기와 기름진 음식이 없으면 쉽게 배고프기 일쑤였다.하예정은 시골 출신이었다. 열 살 이후로는 마을을 떠났지만 그전까지는 집안일을 많이 도왔기에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하예정은 도아영을 살펴보며 물었다.“너희 회사 식당은 등급별로 나누어?”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여러 개의 식당이 있어요. 직급에 따라 다른 식당에서 식사해요. 물론 메뉴도 다르지만 보통 직
“할머니께서는 저의 선택을 존중하신다고 하셨지만 후회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이혁은 명해은에게 먼저 국물을 떠드렸고 또 전현민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다시 국물을 한 그릇 떠드리며 말했다.“저는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비록 이전에는 도아영과 꿈속의 여자 ‘여우'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우'와 함께할 때 특별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우'와의 만남을 간절히 기대했고 만나서 싸운다고 해도 그 순간이 기다려지기만 했다. 이런 기대감은 도아영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다.그가 도아영에게 접근한 건 순전히 전씨 할머니께서 선택해주신 사람이기 때문이다.결국 감정은 억지로 할 수 없는 법, 억지로 따온 열매는 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명해은이 입을 열었다.“그래. 후회하지나 말고.”명해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어머님이 널 이렇게 쉽게 놔두실 리가 없지. 넌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구나!'전이혁은 그가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전씨 할머니께서는 확신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명해은이 전씨 할머니를 잘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현민은 아들로서 명해은보다 그의 어머니를 더 잘 알았다.전현민 부부는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웃었다.그리고는 전이혁과 도아영에 관한 화제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식사하면서 명해은은 계속 전이혁에게 반찬을 얹어주었다.“엄마, 제가 방금 돌아오자마자 바비큐를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요. 이렇게 많이는 못 먹겠어요.”자기 그릇에 산처럼 쌓인 반찬을 보며 전이혁이 말했다.“엄마, 아빠께도 좀 드리세요. 안 그러면 또 제가 아빠의 아내 관심을 뺏었다고 투덜대실 거예요.”말이 떨어지자 전현민도 전이혁의 그릇에 반찬을 얹어주셨다.“평일엔 바쁘게 일하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 했겠다. 살도 많이 빠졌네. 많이 먹어.”전이혁은 웃으며 말했다.“아빠, 아까는 밥 한 그릇과 나물 한 접시만 주신다고 하셨잖아요.”“그건 화나서 한 말이지,”전이혁도 부모님께 반찬을
명해은은 선물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이 녀석이 혼자 올 줄은 몰랐어요. 어머님께서 이혁이가 점심 먹으러 온다고 하시길래 아영 씨도 따라서 온줄 알았거든요. 어제 함께 저녁도 먹고 술도 마셨으니 오늘은 데려올 줄 알았는데.”명해은은 전이혁이 준 선물도 이제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미래의 며느리인 도아영이 와야 기쁠 것 같았다.전이혁이 입을 열었다.“지금 바로 나갈게요. 회사로 돌아갈게요.”그는 일어서서 떠나는 척했다.전현민이 다시 말했다.“네 엄마가 이미 반찬을 더 준비하라고 했는데 우리 집의 강아지도 다 먹지 못할 텐데 네가 도와서 다 먹고 가.”즉, 집에서 기르는 개가 밥을 다 먹을 수만 있다면 전이혁에게 밥을 주지도 않겠다는 의미였다.여자친구를 데려오지 못하는 아들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집안이란 말인가.“밥 드세요.”명해은은 남편과 아들을 식탁으로 불렀다.전이혁은 일어나 명해은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정말 밥 안 주실 줄 알았어요... 저는 이제 우리 집 개보다도 못한 존재네요.”“이번은 봐줄게. 다음에 도아영 씨가 오면 꼭 데리고 와서 식사해. 네 아빠와 나도 한번 보게. 길에서 마주쳐도 누군지 모를 텐데 우리도 한 번 좀 만나보자고.”“엄마, 저는 아영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명해은이 눈을 부릅떴다.“할머니께서 골라주셨는데 안 좋아한다고? 안 좋아하면서 지난 몇 달 동안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네 형은 두세 달 만에 운초의 마음을 움직였는데.”여운초는 당시 그녀가 시각장애인이어서 전이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계속 거절했지만 사실은 이미 마음이 움직인 상태였다.전이혁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저랑 형은 달라요. 형도 3개월 만에 형수님을 꼬시지는 못했거든요.”명해은도 앉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가 안 좋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할머니께서 골라주신 사람인데 아무리 못해도 그 정도는 아닐걸. 너무 까다롭게 여자를 고르지는 마. 너도 거울 좀 봐. 넌 너희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도 아
명해은의 친정집도 재벌 가문으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보석 액세서리들과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다.전씨 가문에 시집올 때 그녀의 부모님과 형님, 형수님이 준비해 주신 보석들은 보석 가게를 열어도 될 만큼 많았는데 그것이 그녀의 혼수품이었다. 지금도 그 보석들은 그녀의 보석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전이진이 여운초와 결혼한 뒤로 명해은은 수많은 소장품 보석들을 며느리에게 선물했다.전이혁이 대답했다.“저는 아직 아내가 없잖아요. 새로 나온 보석 액세서리들을 보고 너무 예뻐서 한 세트 사 왔어요.”“전씨 할머니께도 사드렸지?”전이혁은 빨간색 선물 상자를 명해은에게 건네며 말했다.“할머니께서 액세서리들을 선물하지 말라고 하셔서 꽃다발만 사드렸어요. 근데 또 산 아래 꽃밭에 꽃이 많은데 왜 돈을 쓰냐면서 꾸지람 하신 거 있죠.”명해은은 상자를 건네받으며 웃었다.“겉으로는 싫다고 하시지만 속으로는 매우 기쁘셨을 거야. 꽃다발을 네게 돌려주지 않으신 건 마음에 드셨다는 뜻일 거고. 오늘 산 아래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으실 거다.”수십 년 동안 전씨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명해은은 시어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명해은은 다시 아들 뒤를 살피다가 차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차에 아무도 없니? 너 혼자 왔어? 할머니께서 네가 식사하러 온다고 하시길래 엄마는 네가 귀한 손님을 데려올 줄 알았는데.”“제가 혼자 왔어요.”전이혁은 모른 척했지만 속으로는 전씨 할머니가 이미 도아영이 관성에 온 일을 명해은에게 알려주었을 것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라면 명해은 부부가 아들들의 인생사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 부모님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기에 조바심을 내도 소용없었을 뿐이다. 하여 전씨 할머니께서 나서서 형제들의 인생사를 걱정해주실 수밖에 없었다.명해은은 아들을 노려보며 나무랐다.“도아영 씨가 온 거 아니었어? 너희들 어제저녁 함께 식사도 하고 밤도 같이 보냈잖아. 근데 데려오지도 않고 말이야. 엄마는 할머니께서 너에게 골
도아영은 그 선물이 전이혁이 선물인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잠시 생각하던 전이혁은 결국 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 하기로 했다.만약 도아영에게 선물이 자신이 준 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아영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집착할 수도 있을 테니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할머니, 집에 가서 식사 안 하실 거예요?”전이혁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전씨 할머니가 대답했다.“너무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러. 조금 있다가 가서 흰죽 한 그릇 먹을 거야.”고기 요리를 많이 먹으면 간단한 죽에 김치를 곁들이는 게 좋았다.“넌 집에 가서 네 부모님과 식사하렴.”“네.”전씨 할머니가 집에 가길 원하지 않자 전이혁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다른 어르신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셨고 굶을 염려도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꽃 구경하자고 전화해서 친구들을 불러야겠다.”전씨 할머니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어르신들이 이쪽으로 오는 모습을 확인한 전이혁은 그제야 정자에서 나왔다.곧 차 앞에 도착한 전이혁은 차에 올라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떠난 뒤로 전씨 할머니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속삭이는 것을.“이 자식아! 너는 할머니를 이길 수 없어. 나중에 네가 할머니에게 매달릴 날이 올 거야.”이렇게 해야 드라마가 재미있어지는 법. 노년의 삶에 약간의 즐거움을 더할 수 있으니 말이다.나이가 들면 할 일이 없어진다. 손자들이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전씨 할머니는 손자들을 놀려먹으며 즐기면 그만이었다.명해은은 별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이혁의 차가 보였고 그가 아직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명해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아들이 다 큰 뒤로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자 명해은 부부는 아들들이 집에 와서 식사라도 함께하는 걸 간절히 바랐다. 며칠이라도 집에서 머물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하지만 아들들이 모두 바쁜 사람들인
전씨 할머니는 묵묵히 전이혁을 바라보았다.이미 모든 말을 털어놓은 전이혁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전부 입 밖으로 내뱉었다.오늘 본가에 온 것도 전씨 할머니에게 확실하게 말하러 온 것이다. 그는 형들처럼 전씨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전이혁에게는 그가 원하는 여자가 있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전씨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의 말도 일리가 있구나. 오래 끌기보다 단칼에 정리하는 게 낫지. 아영 씨도 너에 대한 감정이 아직 깊지 않을 테니 확실히 설명해 주고 마음을 접게 하는 게 좋겠다. 아영 씨의 시간을 더 뺏지 말고.”전씨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이혁아, 정말 아영 씨를 고려하지 않을 거냐? 할머니의 안목을 전혀 믿지 못하겠어?”전이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할머니, 저는 할머니의 안목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여자예요. 그런데 저는 그녀에게 설레는 느낌이 없어요. 아영 씨와 결혼한다 해도 예의만 차리며 형식적으로 살뿐 진정한 부부간의 정은 없을 거예요. 아영 씨도 똑똑한 사람이라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강제적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 것 같아요.”전씨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할머니도 이제는 네 연애사에 간섭하지 않겠어. 원하는 대로 해 봐. 하지만 단 한 가지! 인품이 좋은 여자를 데려와. 아주 뛰어나지 않아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어야 해. 우리 전씨 가문의 이름을 망치지 말고. 만약 인품이 나쁜데도 네가 고집부린다면 난 억지로 막지는 않겠다. 대신 나와 인연을 끊고 전씨 가문에서 나가.”전씨 할머니는 쥐 한 마리가 천 냥 술을 썩히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다.전씨 가문의 좋은 명성은 몇 대에 걸쳐, 그리고 전씨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평생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것이다.전이혁 하나 때문에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약속했다.“전씨 할머니, 걱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