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아.”전태윤은 아무 말 없는 그녀가 걱정돼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너 괜찮아?”‘내가 너무 심하게 기절시켰나? 바보 된 건 아니겠지?’“전태윤!”하예정은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악물며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더니 포효하는 사자처럼 전태윤에게 덮쳐들어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그리고 분노에 찬 욕설을 퍼부었다.“전태윤 이 나쁜 놈아, 너 진짜 나빠. 어떻게 날 기절시킬 수 있어?!”그녀는 뒷목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나쁜 자식, 날 사랑한다면서 기절시켜? 이건 분명 날 더 아프게 만드는 거잖아! 젠장, 이젠 당신이 하는 말 한마디도 안 믿으래. 지난 4개월 동안 네가 지어낸 거짓말 속에서 지내왔어. 너에 대한 믿음이 1도 없어!’“예정아, 예정아.”전태윤은 그녀에게 잡힌 목덜미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예정이 정말 자신을 기절시키고 도망이라도 칠까 봐 두려웠다.드디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난 전태윤은 좀 전처럼 터프하게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예정은 그의 품에 안겨 꼼짝할 수 없었다.“예정아, 널 기절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그땐 널 어떻게 남겨둘지 몰라서 그랬어. 날 떠나지 마 제발, 응? 맹세할게, 이젠 더는 널 속이지 않아! 그러니까 제발 날 떠나지 말아줘, 예정아!”전태윤은 그녀가 없는 나날을 감히 상상할 엄두가 안 났다. 그때의 전태윤은 과연 어떤 몰골을 하고 있을까?“이거 놔요, 태윤 씨! 이젠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내 앞에서 한 맹세 개나 줘버려요! 내게 수없이 맹세해놓고 번마다 속였잖아요! 내가 말했죠, 수없이 날 속이는 날엔 우리 무조건 이별이라고! 난 이렇게 거짓말에 둘러싸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아요. 어떤 게 진짜 당신인지 모르겠어요. 어느 말이 진심인지 모르겠다고요. 그러니까 날 그만 놔줘요. 안 그러면 당신 평생 용서 안 할지도 몰라! 감히 날 기절시켜? 기절을... 아파 죽겠네, 나쁜 자식. 항상 날 아프게만 하지. 당
“이게 바로 당신 성격이죠. 무릇 자기중심적이고 모든 걸 지배하는 것에 적응되었어요. 일방적이고 횡포하며 자만하고 심지어 극단적이기까지 하잖아요!”하예정의 말에 야유가 가득 담겨 있었다.전태윤의 성격이 바로 이러했다.초고속 결혼 초기에 그는 이런 모습이었다. 아무리 일반인인 척 해보아도 이미 형성된 성격이라 고칠 수 없었다.하여 부부의 감정이 무르익을 때 두 번 갈등을 빚기도 했다. 냉전을 끝낸 후 전태윤의 거만하고 일방적인 성격도 조금 호전되었다.다만 지금 또다시 본모습을 드러냈다.이런 전태윤과 함께 지내는 건 실로 힘든 일이다.게다가 하예정은 워낙 독립적인 여자다 보니 전태윤과 갈등을 빚을 때 종종 충돌이 더 커진다.전태윤은 분명 하예정의 화를 풀어주고 싶지만 잦은 실수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되어 결국 하예정의 분노만 더 커져갔다.“예정아...”전태윤은 괴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풀어주고 살며시 그녀 얼굴을 어루만지며 겨우 말을 이었다.“김진우 찾아가지 마! 내가 힘겹게 그를 관성에서 내쫓았어. 더는 널 찾아오지 못하게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김진우한테 가지 마.”“진우를 관성에서 내쫓았다고요? 혹시 효진의 고모를 찾아갔어요?”하예정이 질문하더니 곧바로 저 자신을 비웃듯이 말했다.“놀랄 게 뭐야? 당신이 내 뒤에서 한 짓들 난 전혀 모르잖아. 태윤 씨는 날 가족으로 생각하긴 했나요? 가족이라니, 내가 무슨 자격으로 당신 가족이 되겠어요? 여자는 이래요, 시댁에서는 남 취급당하고 친정에 가면 손님 취급당하죠. 내가 어찌 감히 당신 가족이 되길 바라겠어요... 당신은 나 몰래 그렇게 많은 짓을 꾸몄고 4개월씩이나 속여왔어요. 나를 아예 남남으로 본 거죠!”하예정은 말하면서 속상한 듯 눈시울이 빨개졌지만 애써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버텼다.전태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그의 가식적인 위로를 받고 싶지 않았다.“예정아, 넌 내 가족이야. 나랑 평생 함께할 아내란 말이야. 내가 미안해. 네 마음을 아프게 했어. 날 향한
하예정이 방문을 나섰다.전태윤은 감히 아무 말도 못 한 채 묵묵히 그녀를 따라갔다.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전태윤도 조심스럽게 뒤따라갔다.그녀가 밖에 나가자 전태윤도 함께 따라 나갔다.그는 어느덧 하예정의 그림자가 돼버렸다.하예정이 별장 입구에 다다라 대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전태윤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키 내놔요!”장씨 아저씨와 경호팀들, 그리고 도우미들까지 저 멀리서 따라오며 아무도 감히 선뜻 나서지 못했다.사모님이 대노하시는데 누가 감히 나서서 타이르겠는가!사모님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고 한편 그들의 도련님은 어느덧 사모님의 그림자가 돼버렸다.전태윤은 키를 꺼냈지만 하예정에게 건넨 게 아니라 한 꾸러미 키를 힘껏 밖에 내던졌다.그는 키 뭉치를 저 멀리 버리고 텅 빈 두 손을 들어 하예정에게 보여줬다.“난 키 없어.”하예정은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당장이라도 그의 멱살을 잡고 한바탕 두들겨 패고 싶었다.하예정은 또다시 장씨 아저씨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이에 장씨 아저씨가 황급히 말했다.“사모님, 저 보실 필요 없어요. 저도 키 없어요.”있어도 사모님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저희도 키 없어요, 저희 보지 마세요, 사모님.”‘제발 저희 좀 놔주세요!’하예정도 다 알고 있다. 전태윤이 그녀를 집 밖에 내보내려 하지 않는 한 저들은 키가 있어도 그녀를 도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하예정은 높은 담벼락을 올려다보았다.문이 너무 높아 담벼락을 넘는 건 무리수였다.담벼락은 대충 봐도 2미터 높이가 되었다.별장 정원의 담벼락은 전부 그 정도로 높았다!물론 이 또한 전태윤다운 인테리어였다. 그는 남들이 훔쳐보는 걸 싫어하니까.담벼락이 높으면 외부의 감시를 차단하고 그의 사생활을 잘 보호할 수 있다.하예정은 주먹다짐을 할 줄 알지만 경공을 습득한 건 아니다. 2미터 높이가 되는 담벼락을 그녀는 도무지 뛰어넘을 수 없었다.하예정은 몸을 돌려
하예정은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밖에 나갈 수 없어 결국 방에 돌아가 문을 잠갔다. 그녀는 하예진이나 친구들한테 도움을 청하려고 휴대폰을 꺼냈지만 배터리가 다 돼서 꺼진 상태였다.“날 죽이려고 작정했네!”하예정이 방문을 잠그고 있는 동안 전태윤도 더는 그녀를 집착하지 않았다.그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도와줄 상대를 찾고 있었다.전태윤은 습관적으로 소정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소정남은 이제 막 심효진을 서점에 데려다주었다.심효진은 충전기를 꺼내 스쿠터를 충전했다.“정남 씨, 태윤 씨가 예정이를 어떻게 했는지 여쭤봐 봐요.”심효진은 전태윤이 강제적으로 하예정을 끌고 간 게 마음에 걸렸다.소정남이 알겠다며 답했다.“지금 바로 전화해서 두 사람 어떻게 됐는지 물어볼게요.”말은 이렇게 해도 소정남은 진작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는 전태윤을 너무 잘 알고 있다.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전태윤은 아마 하예정에게 버림받을 것이다.한순간의 거짓말은 짜릿해도 아내를 잃는 슬픔은 죽는 것만 못할 텐데, 아무튼 모든 게 자업자득인 것을.애초에 그가 신분을 숨기고 하예정의 성품을 지켜보겠다고 할 때 모두가 이해했다. 하지만 그 후로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었지만 전태윤은 줄곧 우유부단하고 온갖 걱정에 휩싸여 여태껏 지체했다.이러니 하예정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소정남이 전화를 걸려고 할 때 마침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심효진에게 말했다.“태윤이가 전화 왔네요.”“얼른 받아요.”심효진이 조급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대신해서 전화를 받고 싶을 지경이었다.소정남이 전화를 받자 그녀는 바짝 다가와 귀를 쫑긋 세우고 전태윤의 목소리를 들었다.“정남아, 도와줘.”전태윤이 지친 말투로 말했다.“예정이가 엄청 화났어. 나 달래지 못하겠어, 어떡해 이젠? 정남아, 나 인제 어떡하냐고? 날 떠난대, 분명 날 떠날 거야. 예정이 성격 내가 잘 알아. 날 뻥 차버려서 궁지로 몰아넣을 게 뻔해. 아까는 또 내가 전씨 그룹 도련님인
심효진이 말했다.“예정이는 태윤 씨보다 내가 더 잘 알아요. 감히 장담하는데 걔 절대 그런 짓 안 해요. 그러니까 얼른 돌아오게 놔줘요.”“효진 씨는 예정이가 아니잖아요. 효진 씨 장담 나 못 믿어요.”심효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지금 전태윤은 무슨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심효진이 아무리 떠들어봤자 소용없을 노릇이다.소정남이 재빨리 휴대폰을 가져가며 심효진을 달랬다.“효진 씨가 이해해요. 태윤이 지금 완전히 미쳤어요. 이런 감정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서툰 것도 당연해요. 효진 씨가 화내봤자 몸만 상해요.”심효진은 입을 벌렸지만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평소 전태윤은 성숙하고 듬직해 보였는데, 비록 정색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대인관계나 업무 처리가 매우 원만했는데 하예정을 감금하고 문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다니!“태윤아, 예정 씨 지금 좀 어때?”소정남이 관심하며 물었다.“네가 예정 씨를 어떻게 했냐고?”“나 아무것도 안 했어. 자꾸 나가고 싶어 하니까 문 잠그고 열쇠를 버렸어. 사다리를 찾아서 담벼락을 뛰어넘으려 하는 걸 내가 아예 사다리를 버렸어. 그리고 지금 화내며 방에 돌아가 문을 잠가버렸어. 정남아, 나 대체 어떻게 해야 해? 넌 지금 나보다 정신이 맑을 거 아니야? 네가 좀 말해봐, 나 어떻게 해야 하지? 뇌가 정지한 거 같아. 뭘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겠어. 마음만 복잡하고 자꾸 횡설수설하기만 해.”전태윤은 한번 사랑하면 깊이 사랑하는 스타일이다.하예정은 이미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가 되었다.그는 하예정을 잃는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다.왜 여태껏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 했냐고? 그녀를 잃을까 봐!예준성이 특별한 날을 골라 하예정의 기분이 좋을 때 다른 방식으로 진지하게 고백해보라고 했고 그는 곧이곧대로 실천에 옮겼다.하지만 폭풍우는 여전히 휘몰아쳤다.전태윤은 폭풍우에 쫄딱 맞았고 눈앞이 캄캄하여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다.30년 인생에서 이런 무기력함은 처음 겪어보았다.그는 항상 자신감에 차 있었
“태윤아, 일단 나부터 진정해야겠어. 내가 생각을 마치면 그때 다시 연락할게. 단 너 절대 예정 씨 다치게 하는 일 없어야 해! 안 그러면 너희 두 사람 정말 이별할지도 몰라.”소정남은 전태윤의 말을 듣고 울화가 차올라 얼른 전화를 끊고 싶었다. 일단 저 자신부터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효진 앞에서 험한 말을 하는 나쁜 이미지를 남기지 말아야 했으니까.전태윤의 처참한 처지를 보고 있자니 소정남은 애초에 심효진을 속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대하고 절대 전태윤처럼 거짓말을 숨 쉬듯이 내뱉지 않기를 너무 잘한 듯싶었다.소정남은 전태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꺼버렸다.“왜 그냥 끊어요? 나 태윤 씨 더 설득해보려 했단 말이에요. 계속 저렇게 나가면 예정이가 점점 더 크게 화낼 거예요. 나중에 한 맺힐까 두려워요.”소정남이 말했다.“효진 씨가 제대로 듣지 못해서 그래요. 나 진짜 한심해서 미쳐버리겠어요. 태윤이 때문에 내가 다 돌아버리겠다고요. 일단 진정 좀 해야겠어요. 효진 씨, 난 왜 하필 이렇게 감정에 서툰 상사를 만나게 된 걸까요? 나 너무 가여워!”소정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줄곧 전태윤을 도와 어떤 문제든 해결했지만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하지만 감정 문제로 도움을 청했을 때 소정남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가장 큰 문제는 전태윤이 일방적으로 살아온 게 습관이 되었는데 겨우 호전됐다가 지금 또다시 완전히 드러나고 말았다.“단언컨대 두 사람 갈등이 몇 개월은 지속할 거예요. 그 사이에 절대 원래처럼 돌아가지 못할 거예요.”심효진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내가 아는 예정이는 분명 이혼 얘기를 꺼낼 거예요. 하지만 걔는 절대 이 문제를 회피할 사람이 아니에요. 이건 내가 장담해요. 예정이는 반드시 태윤 씨랑 마주 앉아 이혼 문제를 논의할 거예요.”어쩌면 하예정은 지금 이미 이혼합의서를 작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심효진의 말을 들은 소정남이 대답했다.“효진 씨, 부디 예정 씨를 잘 타일러요. 예정 씨가
“잃는 게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제 드디어 거짓말을 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돼서 그런 거예요.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생긴 거죠. 다만 지금 잠시 두려움에 휩싸여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 같아요.”심효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우리는 당사자가 아니라서 이해가 되지만 절대 예정의 서러움과 분노를 체감할 수 없어요. 아무튼 난 예정이를 설득하지 않을 거예요. 설득한다고 해도 나중에 다시 할래요. 지금은 애가 서러워 죽을 지경인데 내가 왜 태윤 씨를 도와야 하죠? 그러면 예정이만 더 속상할 거라고요! 남편한테 감쪽같이 속은 건 예정인데 우리가 화풀이해주지 못할뿐더러 태윤 씨를 용서하게 설득하라고요? 그런 일은 나 절대 못 해요. 정말이지 능력만 된다면 내가 대신 태윤 씨를 한바탕 두들겨 패고 싶다니까요. 성기현 대표님은 어떤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아마 사촌오빠로서 태윤 씨를 두들겨 패고 싶을 걸요. 그럼 나도 화가 조금은 풀릴 것 같아요.”소정남은 말을 잇지 못했다.전태윤은 본인 노력으로 너무 많은 사람을 건드렸다.“어머, 소현 씨 어떡해요? 이틀 뒤에 돌아온다고 했는데 오자마자 예정의 남편이 전씨 그룹 도련님이란 걸 알게 되면 과연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어요! 한때 미치도록 좋아했던 도련님이 정작 예정이랑 초고속 결혼을 한 남편이라니, 이게 말이 돼요?”심효진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거렸다.“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래? 소설 속 전개가 현실에서 일어나다니. 이래서 소설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는 거였네.”소정남이 재빨리 물었다.“대체 어느 소설에서 이런 전개가 나오나요? 남자 주인공은 결국 어떻게 여자 주인공의 용서를 구했대요? 태윤이한테 추천해서 배우라고 해야겠어요.”심효진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재소설이라 작가가 아직 거기까지 쓰지 못해서 나도 결말은 몰라요. 여자 주인공이 과연 어떻게 남자 주인공을 용서했을까요?”소정남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막막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날 봐도 소용없어요. 내가 쓴 것도 아닌데 답안을 얻을
홀로 방에 갇힌 하예정은 뭘 하고 있을까?그녀는 방에서 펜과 종이를 찾더니 소파에 앉아 열심히 이혼합의서를 작성했다.결혼 후 부부는 따로 집을 구매하지 않아 딱히 재산분할을 할 게 없었다.전태윤은 전에 이혼하게 되면 발렌시아 아파트와 SUV를 하예정에게 주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하예정은 전혀 갖고 싶지 않았다.그건 전부 전태윤이 그녀를 속이려고 일부러 구한 집이니까!차도 갖고 싶지 않았다.하예정이 지금 몰고 다니는 차는 전태윤이 사준 차이기에 이혼할 때 일전 한 푼 빚지지 않고 모조리 돌려줄 것이다.그와 재산분할을 하지 않고 그에게 4개월 청춘을 손해 본 배상금도 받지 않을 것이다. 각자 명의 하의 재산은 각자 가져갈 것이니 서로 빚진 것도 없다. 전태윤이 이혼 서류에 사인만 해주면 된다.한편 전태윤이 도리어 그녀에게 청춘 손해배상금을 물으라면 그녀도 조금은 줄 의향이 있다. 어쨌거나 상대는 전씨 그룹 도련님인데 초라한 자신과 함께 살아줬으니 고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예정은 당연히 그에게 배상금을 조금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하면 그녀도 거부할 것이다.그녀의 능력 범위 내에서만 돈을 줄 수 있다.“똑똑.”이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예정아, 나 문 좀 열어줄 수 있어?”상대는 다름 아닌 전태윤이었다.하예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지금 전태윤의 얼굴만 봐도 분노가 차오르니까.“예정아, 방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안 갑갑해? 나와서 나랑 함께 정원 산책해. 우리 집 앞마당에 꽃이 엄청 많이 피었어. 내려와서 예쁜 꽃구경 하자. 널 위해 일부러 사람들을 시켜서 가꾼 거야.”하예정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예정아, 배고프지? 내가 사람들 시켜서 너 좋아하는 요리를 많이 만들어오라고 했으니 문만 조금 열면 감칠맛 나는 음식 향이 퍼질 거야. 너도 분명 배고플 거잖아.”전태윤은 또 맛있는 음식들로 그녀가 문을 열게끔 달래보았다.방안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그가 계속 말했다.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
“저는 앞으로 큰아가씨의 평가에 근거해서 요리 방법을 조정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모든 요리를 큰아가씨께서 만족해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졸업할 수 있겠네요.”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큰아가씨께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걸요.”‘평생 선우민아 씨를 위해 요리해 드리는 건 기쁜 일이지.'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전창빈은 꾹 참았다.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설령 전창빈이 선우민아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선우민아가 가업을 운영한다는 건 그녀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강한 강한 여성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상대이다.전호영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하예정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고 고현의 마음을 얻었다.강진은 그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전창빈 씨, 오늘 오후 내내 바쁘셨는데 일찍 쉬세요. 내일 아침 큰아가씨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일찍 아침을 드시는 분은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입니다. 민기 도련님은 학교에 가야 해서 일찍 식사하시고 큰아가씨는 매일 민기 도련님을 학교에 데려다주신 후 회사에 가시니까 두 분은 늘 함께 식사하시는 편이에요. 하여 아침 7시쯤이면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아침은 9시 이후에 준비하시면 돼요.”전창빈이 말을 건넸다.“그 시간대면 아침과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거네요.”“어르신과 사모님은 그렇죠. 점심 무렵에 일어나셨다가 식사 후에는 외출하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세요. 때로는 안 오시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미리 알려드릴게요. 안 오시는 날은 창빈 씨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자신의 배만 채우시면 돼요.”여기에서는 사실상 선우민아 자매만 아침을 먹는 셈이다.“큰아
동생 선우정아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지금은 네가 전창빈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 매일 여기 와서 식사해. 전창빈 씨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져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거 아니야.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너희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실 거야. 혹은 전창빈 씨에게 우리 지역에서 사업을 하게 하고 여기서 집을 사도록 하든가.”선우정아는 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선우민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선우정아는 앞으로는 감히 그 집에 밥 먹으러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선우민아가 자꾸 자신이 전창빈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전창빈은 미래의 아내는 지금 미래 처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전이혁은 강진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은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전창빈 씨, 이제 우리는 동료가 되었군요. 오래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선우씨 가문의 여러 집안이 같은 대저택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안마다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선우민아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었기에 강진 역시 1년 정도는 함께 일할 사람을 원했다.요리사와 친해지기도 전에 퇴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전창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집사님과 오래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요리들을 더 연구해서 큰아가씨께서 제 요리만 먹고 싶어 하도록 해야겠네요.”“큰아가씨께서 창빈 씨 요리만 고집하게 만들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요리 대회에 나가면 ‘요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요.”선우민아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창빈은 웃으며 말했다.“‘요리의 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저는 단지 제 요리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죠.”전창빈은 그가 고용한 요리사들에게는 항상 조언을 해주곤 한다. 본인이 잘 배워야 현재 이끌고 있는 요리사들도
선우민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런 사업을 가진 사람을 네가 정말 좋아한다면 작은아버지와 숙모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다만 전창빈 씨가 관성 사람이라 우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네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걸 아쉬워할 수도 있을 거야.”선우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언니!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 없단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분이 언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 일곱 명 중 언니가 맏이라 당연히 언니가 먼저 시집가야죠. 제가 언니를 앞지를 순 없잖아요.”착각인지 정말 본 건지, 선우정아는 전창빈이 선우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전창빈은 사실 정말로 선우민아를 위해 온 거였다.아니, 정확히는 선우민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선우정아는 생각했다. 선우민아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게다가 사촌 자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 나는 당분간 시집갈 생각 없어. 만약 고려한다 해도 이 지역의 사람일 거야. 생각해봐, 민기와 민수는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애들이 커서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 이 20년 동안 우리 자매는 계속 회사를 떠받쳐야 해. 만약 우리가 먼 곳으로 시집가면, 누가 회사를 이끌겠어? 셋째와 넷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지켜봐야 할 거야 아니야.”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도 이제 성인이 되어 사업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대한 가업을 떠받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하여 선우민아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 해도 A시의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래야 시집가서도 친정 회사를 계속 관리할 수 있으니까.앞으로 선우민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