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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7화

Author: 고성하
공민서의 얼굴에 미처 숨기지 못한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는 공석훈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꺼낼 줄은 몰랐다.

“그땐 어려서 그랬던 거죠.”

공민서는 웃으며 말했다.

“정윤재는 남자 중에서도 최상위니까 마음이 흔들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하지만 나중에 보니, 저에게 아무런 가치도 줄 수 없는 사람이더라고요. 그래서 더는 신경 쓰지 않게 됐어요. 게다가 우리 공씨 가문과 정윤재 쪽은 경쟁 관계잖아요. 제게는 공씨 가문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공석훈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거짓이 아닌 것 같아 보이자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게 바로 공씨 가문 자식다운 태도지.”

그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그의 눈빛이 다시 가라앉았다.

“예전엔 네 오빠가 가장 성숙하고 대국을 보는 줄 알았는데 내가 과대평가했나 보군. 예전부터 말했잖아. 절대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된다고. 내 말을 전혀 안 들은 거야!”

“며칠만 지나면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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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남편의 아내   제1028화

    정윤재의 손가락이 심하온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뼛속에 박아 넣으려는 것처럼 강한 힘이었다.붉은 점은 사라졌지만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그것은 환풍구를 타고 올라온 부패한 살 냄새와 뒤섞여, 척추에 들러붙은 채 조금씩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오후 2시 40분.남교 화학 공장의 윤곽은 석양에 의해 길게 늘어나고 찢겨 나가듯 드리워졌다.그 그림자는 곪아 터진 오래된 상처처럼 갈라진 대지 위에 떨어졌다.10년 전 그 누출 사고 이후 이곳은 금지구역이 되었다. 녹슨 관들은 황무지 위에 뒤엉켜 널브러져, 마치 거대한 괴수가 말라 죽은 뒤 남긴 뼈대 같았다.석양이 반응탑을 내리쳤다. 녹슨 철 표면은 암적색으로 번들거리며 반달 넘게 굳어 있는 피딱지 같았다.이곳은 폐허가 아니었다.강철로 주조된 거대한 무덤이었다.바퀴가 하얀 염분이 떠오른 마른 흙을 짓밟자 사각사각한 소리가 황량한 들판 끝까지 퍼져 나가며 불길한 속삭임처럼 들려왔다.심하온은 차 문을 밀어 열었다.오른발이 땅에 닿는 순간, 허벅지 안쪽 근육이 갑자기 수축하며 격통이 정수리까지 치솟았다.그녀는 비틀거리며 반걸음 물러서더니 본능적으로 오른손으로 차 문을 짚었다.손가락 사이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막 갈아낸 흰 붕대에 금세 붉은 피가 번져 나왔다.통증은 너무도 선명했다.수많은 가느다란 바늘이 신경을 따라 위로 파고드는 것 같은 통증에 그녀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여기서 멈춰.”심하온은 운전석을 돌아보며 말했다.정윤재의 얼굴 절반은 그림자에 묻혀 있었다.평소 냉담하던 그 눈에는 지금 거의 통제를 잃은 듯한 초조함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그는 신호 차단기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손등에는 핏줄이 불거졌고, 손가락 마디는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위치 추적은 세 겹이야. 하온아.”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낮아 거의 공기의 흐름에 붙어 흘러나오는 수준이었다.“시계에 한 겹, 목걸이에 한 겹, 발목에도 한 겹. 전자 신호가 끊기더라도 목걸이

  • 내 남편의 아내   제1027화

    문이 닫히자 침대 옆 탁자 위의 화면이 켜지며 새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잠금 비밀번호는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왼손을 뻗어 화면을 밀어 올렸다.발신자는 해외의 없는 번호였고, 시간은 20분 전이었다.[하온이는 노을을 보고 있고, 너는 바다를 보고 있어. 정윤재, 하온이가 지금 그리워하는 게 너일까, 아니면 그 지하실의 황혼일까?]심하온은 그 문장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손끝이 화면 위를 스치며 희미한 자국을 남겼다.오른손 손가락 사이가 갑자기 욱신거렸다. 상처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며, 맥박이 뛸 때마다 신경이 함께 당겨졌다.그녀는 문득 깨달았다.정윤재가 복도에서 보낸 그 6분은 작전 배치 때문이 아니라 죄책감을 삼켜내기 위한 시간이었다.정윤택은 바로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공해상 수색 구조 당시의 절망, 지하실에서 치밀하게 연출된 그 ‘따뜻함’을 이용해 정윤재라는 권력자의 껍질을 한 겹씩 벗겨내고, 끝내 그의 약점을 드러내게 만들려는 것...심하온은 화면을 끄고 천천히 몸을 눕혔다.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은 서늘하게 빛났다.죄책감은 가장 사치스러운 쓰레기다.정윤재가 그런 감정 때문에 새벽 세 시의 작전에서 단 1초라도 늦는다면... 그들은 정말로 죽는다.그녀는 그것을 들춰낼 수 없었다.정윤재는 이 죄책감을 사람을 죽이기 위한 연료로 써야 했다.그리고 그녀는, 더 더럽고 더 검은 칼을 찾아 그 그림자의 심장을 도려내야 했다.심하온은 몸을 뒤척여 이불 아래에서 소유영이 떠나기 전 몰래 쥐여준 비상 휴대전화를 꺼냈다.안에는 번호가 하나뿐이었다.[구치소, 강선우.]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배경에는 둔탁한 전자 잡음이 깔려 있었다.“심하온, 네가 전화할 줄 알고 있었어.”강선우의 쉰 목소리는 쇠창살 너머로 녹슨 경첩처럼 들려왔다. 그가 낮게 웃자 쇠사슬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뒤따랐다.“정윤택 그 미친놈이 드디어 너를 벽 끝까지 몰아붙였나 보네?”“물에 빠진 개 같은 말투는 집어치워.”심하온

  • 내 남편의 아내   제1026화

    그 붉은 레이저 점은 심하온의 붕대로 칭칭 감긴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 호구 위에서 가볍게 두 번 튀었다.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몸에 난 붉은 반점처럼, 심장 박동 같은 리듬을 띠고 있었다.정윤재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몸을 숙였다.그녀 다리의 상처조차 신경 쓸 겨를 없이 심하온을 병상에서 번쩍 안아 들고 품 안에 감싼 채 그대로 병실 구석으로 몸을 굴렸다. 그곳은 철근 콘크리트로 타설된 내력벽으로, 가장 단단한 사각지대였다.쾅!둔탁한 소리와 함께 창문 유리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총알이 아니었다. 무게를 더한 강철 구슬이었다.그것은 침대 옆에서 아직도 차가운 안개를 뿜고 있던 가습기를 관통했다. 플라스틱 외피가 별 가루처럼 흩어졌고, 물이 바닥으로 쏟아져 마침 허도영이 떨어뜨린 신호 탐지기 위로 흘러들었다. 곧 날카로운 합선 음이 병실 안을 찢었다.“허도영, 창문 닫고 전원 차단채!”정윤재의 목소리는 목구멍 깊숙이 눌려 있었지만, 마치 땅속을 구르는 천둥 같았다. 그는 한 손으로 심하온의 뒤통수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거친 숨 때문에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심하온은 그의 품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아직도 망막에 남아 있는 붉은 점의 잔상을 지우지 못했다. 그녀의 코끝에는 그의 체취가 스며들었다. 담배 냄새, 비에 젖은 흙냄새, 그리고 병원 소독약 특유의 차갑고 씁쓸한 향... 그의 갈비뼈가 그녀의 몸에 맞닿아 있었고, 지나치게 긴장한 근육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문밖에서는 발소리가 북소리처럼 터져 나왔다.소유영이 문을 걷어차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은색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바닥의 난장판은 보지도 않은 채, 그녀는 허리 뒤에서 단거리 신호 재머를 꺼냈다. ‘웅’ 하는 가벼운 진동음과 함께 벽 모서리에 있던 붉은 점이 즉시 사라졌다.“드론이에요.”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방탄 셔터를 재빨리 내렸다.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적막 속에서 유난히 날카롭게 울렸다.“남교의 개들이 벌써 물어뜯으러

  • 내 남편의 아내   제1025화

    그래야만 그녀는 ‘깊이 잠든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눈을 뜨고 이 세계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반쯤 감긴 눈꺼풀 틈으로 그녀는 보았다. 공민규가 문가의 조작대에서 명령어를 입력하고 있었다.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리듬이 일정하게 들려왔다.4, 7, 1, 1.어떤 집념처럼 빨랐다.그리고 그녀는 진 닥터의 공포도 보았다.쉰을 넘긴 그 남자는 약을 지을 때 손이 떨려 주사기조차 제대로 쥐지 못했다. 3분에 한 번씩 그는 무의식적으로 밀실 왼쪽 위의 눈에 띄지 않는 검은 구멍을 흘끗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카메라 렌즈 하나가 숨어 있었다. 심해처럼 깊고 어두운 렌즈였다..그는 렌즈 뒤에 있는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있었다.지하실에 갇혀 있던 며칠 동안, 심하온은 엄지와 검지 사이가 피와 살로 엉망이 되어가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심지어 그녀는 환기구를 통해 매시간 흘러들어오는 미세한 냄새까지 기억했다.희미한 유황 냄새와 시큼한 화학약품 냄새, 그것은 화학 시약 공장에만 있는 특유의 냄새였다.이 말은 곧, 공민규가 자랑하던 ‘순수한 공간’은 사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영원히 지지 않는 그 석양 역시, 외부 어딘가의 비밀 송전선에서 전력을 공급받고 있었다.“하온아.”정윤재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는 그녀가 상처를 누르는 힘을 알아차리고 동공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그는 곧바로 그녀의 왼손을 붙잡았다.처음에는 강하게 잡았지만, 손끝이 그녀의 피부에 닿는 순간 힘을 풀었다.“그만 눌러.”그의 목소리는 쉰 듯 거칠었다. 억눌린 자책감이 묻어났다.“의사가 그러는데 계속 이러면 그 손은 못 쓰게 될 거래.”“못 쓰게 되더라도 저들에게 다시 만들어지는 것보단 나아.”심하온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눈물 한 방울 없었고, 대신 타오를 듯한 선명한 각성만 남아 있었다.그녀는 허도영이 들고 있는 탐지기를 바라보았다.손끝이 화면 위 좌표 문자열을 스쳐 지나갔다.“

  • 내 남편의 아내   제1024화

    허도영의 손에 들린 탐지기 화면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마치 곧 멎어버릴 심장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 같았다.끊임없이 뛰어오르는 경위도 숫자들이 심하온의 눈앞에서 천천히 겹쳐지더니, 결국 차가운 묘비 하나로 응고되었다.그곳은 임민정이 그해 추락했던 위치였다.“무슨 소리야?”정윤재의 목소리는 목 깊은 곳에서 억지로 짜낸 듯 극도로 낮게 가라앉았다. 폭풍이 닥치기 직전의 정적이 흘렀다.허도영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대표님... 좌표는 틀림없어요. 지하실 안의 그 신호원들은 복원되는 순간 원격 명령이 발동됐어요. 이제 그것들은 발신기가 아니라 임 여사님이 사고를 당했던 그 바다를 가리키는 표지판이에요.”심하온은 병상에 앉아 있었다. 정윤재처럼 분노하지도 않았고,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왼손으로 붕대가 여러 겹 감긴 오른손을 살며시 눌렀다.두꺼운 솜 붕대 너머로, 엄지와 검지 사이의 깊게 팬 상처를 힘껏 눌렀다.통증은 아주 선명했다.그 한 번의 압박으로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따뜻한 피가 천천히 스며 나왔다.심장을 따라 흐르듯 욱신거리는, 뼛속을 찌르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그 고통이 원래 조금 흐려져 있던 그녀의 눈빛을 단숨에 방금 숫돌에 간 칼날처럼 날카롭게 바꾸었다.“내가 그 순간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거야.”그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그 침착함은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극심한 통증이 전류처럼 뇌를 관통하며 오히려 사고는 더 빨라졌다.이 병실은 이미 평범한 병실이 아니라 그녀가 직접 구축한 논리의 공방이 되었다. 지하실에서 공민규가 ‘다정함’으로 포장해 놓았던 파편들이, 마치 현상된 필름처럼 하나씩 그녀의 의식 속에 배열되기 시작했다.[기억의 역추적.]그것은 지하실에서의 어느 ‘점심 식사’였다.빛은 가짜였다. 고출력 광대역 조명이 만들어낸 영원한 석양이었다.공민규는 백옥 같은 도자기 그릇을 들고 있었는데, 은수저가 그릇

  • 내 남편의 아내   제1023화

    이건 사랑이 아니다.시체 더미 위에 장미를 심어 놓고 그 꽃에 피가 묻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그는 그녀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관한 모든 세부사항을 이용해 ‘안전’과 ‘다정함’을 정확하게 주입했다. 그렇게 조금씩 그녀의 경계심을 깎아내리며,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스스로가 구원받고 있다고 착각하게 했다.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식사가 실험이었다. 그녀의 생리적 한계를 시험하고, 그녀의 심리적 방어선을 시험하고, 언젠가 그녀가 기꺼이 그가 설계한 감옥 안으로 걸어 들어올지를 시험하는...소유영은 차로 돌아가 마침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둠 속에서 담뱃불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그녀가 꽉 다문 턱선을 비췄다.그녀는 ‘대성 화학’의 법인 당세혁의 서류를 찾아냈다.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당세혁의 주민등록은 3년 전에 ‘사망’ 처리되며 말소된 상태였다.그는 임민정의 비밀 변호사였다. 그리고 심하온이 병상에서 죽기 살기로 추적하려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흩어져 있던 모든 단서가 순식간에 피 묻은 쇠사슬처럼 하나로 엮였다.공민규는 주모자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누군가에 의해 무대 앞으로 밀려 나온, 사랑에 미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진짜 바둑판의 주인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그는 공민규의 손을 빌려 심하온을 하나의 실험체로 만들고 있었다.‘극진한 사랑을 받는 것’과 ‘완전히 감금되는 것’ 사이의 틈에서, 그녀가 어머니의 전철을 밟을지를 관찰하기 위해 절망 속에서 자신을 파괴하게 될지를 실험하고 있었다.“짐승 같은 놈.”그녀는 담배를 짓이겨 끄고 차 문을 열었다.“이 중계 기지를 봉쇄해.”그녀는 빗속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감시 카메라 하드디스크 전부 뜯어내. 양서윤이 물건을 가져간 모든 동선을, 센티미터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아내.”“소유영 씨, 여긴 서구역 세력권입니다. 무리하게 움직이면 상대를 자극할 수....”“자극해?”그녀는 비웃었다.“가서 전해. 오늘 밤 소유영이 직접 움직인다고. 누가 감히 막으면 그놈 가족 전부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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