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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아빠 땅에도 내 이름

Penulis: 루니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7-15 09:55:33

“그 돈 거절하면, 네 아버지 땅부터 위험해져.”

이연희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병원 앞 벤치에 앉은 채 최무겸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감았다. 복숭아밭은 아버지 이재문이 평생 허리 굽혀 일군 땅이었다. 어릴 적 연희가 나무에 이름표를 달겠다고 떼쓰면 재문은 가장 낮은 가지를 골라 끈부터 묶어 줬다. 그런 밭을 무겸은 통장 잔액처럼 말하고 있었다.

“땅? 지금 우리 아빠 땅으로 날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 아니라 손실 안내야. 네가 합의하면 아무 일도 없어.”

“와, 서비스 좋네. 애 지워 주고 집까지 날려 주는 패키지야?”

“연희야. 말 예쁘게 해. 네 아버지까지 고생시키고 싶진 않잖아.”

“내 아빠 이름 네 입에 올리지 마. 그리고 너, 방금 말한 거 다 남았어.”

무겸은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 예전에는 그 웃음 뒤로 반드시 장난스러운 입맞춤이 따라왔다. 이제 연희는 똑같은 웃음 끝에서 남의 집을 무너뜨리는 소리를 들었다.

통화를 끝낸 연희는 박도율에게 녹음과 송금 내역을 보냈다. 별도 계좌에 옮겨 둔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손에 쥐면 더러워질까 두려웠던 거액이 이제는 아버지를 겨누는 칼자루처럼 보였다. 도율은 먼저 부동산 등기사항을 확인해 보자고 했다. 연희는 아버지가 오래전에 적어 준 과수원 지번을 입력했다. 오래된 토지 면적과 소유자 이름 아래 낯선 담보권 설정 내역이 나타났다.

채권자 쪽에는 세강의료재단 이름이, 채무 관련 서류에는 재문의 이름이 연결돼 있었다. 설정일은 연희가 병원에서 수술받기 전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수확기를 앞두고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딸에게 매일 복숭아 사진을 보내 줬다. ‘올해는 네가 좋아하는 단 놈이 많다.’ 그 문자를 읽으며 웃던 날, 누군가는 아버지 땅을 빚 문서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게 말이 돼요? 아빠는 병원에서 돈 빌릴 일이 없어요.”

“등기만으로 계약 과정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원본과 담보 설정 서류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놈이 먼저 알고 협박했다는 건요?”

“그 말과 시간은 확보했습니다. 이제 누가 신청했고 누가 서명했는지 봅시다.”

연희는 당장 집으로 내려갔다. 마당에는 물을 뿌린 흙냄새가 진했고, 재문은 선별한 복숭아를 종이로 하나씩 감싸고 있었다. 그의 손톱 밑에는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흙이 남아 있었다. 연희가 등기 화면을 내밀자 아버지는 안경부터 찾아 썼다.

“아빠, 혹시 세강 쪽에서 돈 빌렸어?”

“내가 거기서 돈을 왜 빌려?”

“그럼 이건 뭐야? 우리 밭에 담보가 걸렸어.”

재문은 화면을 한참 보더니 포장하던 복숭아를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눌린 종이 자국이 과일 껍질에 희미하게 남았다. 평생 비가 오면 가지부터 살피던 사람이 처음으로 딸의 휴대폰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애가 창고에서 나왔다. 연희가 설명을 시작하기도 전에 재문이 먼저 말했다.

연희는 학창 시절 체험학습 동의서를 떠올렸다. 재문은 담임에게 갈 버스 번호까지 확인하고서야 이름을 적던 사람이었다. 장마에 창고 지붕이 날아가도 빚부터 내지 않고 내년 수확을 계산했다. 그런 아버지가 딸에게 한마디도 없이 과수원을 저당 잡혔을 리 없었다.

“나 돈 안 빌렸다. 네 엄마한테도 말 안 하고 그런 짓 할 사람이냐?”

“알아, 아빠. 그래서 확인하려고 온 거야.”

“알면 얼굴 그렇게 하지 마. 네 잘못으로 돌릴 놈 있으면 데려와. 나도 입 있고 손 있다.”

정애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식탁을 가리켰다. 셋은 마당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피해 안으로 옮겨 앉았다. 도율이 보낸 안내에 따라 등기 발급본과 지급 관련 통지서를 나란히 놓고 날짜를 맞췄다. 재문은 그동안 재단 사람과 돈 거래를 한 적 없다고 거듭 확인했다. 연희는 대답마다 시간을 적었다. 수술 동의서처럼 이번에도 누군가 가족의 이름을 먼저 써 두었을지 몰랐다.

정애는 문서 모서리가 젖지 않도록 물컵부터 치웠다. 그러더니 연희가 가져온 청첩장을 보고 턱을 굳혔다.

“병원에서 네 애 빼앗더니 이제 우리가 먹고사는 밭도 달래? 그 집안 사람들은 남의 것 아니면 손에 잡히는 게 없나 보다.”

연희는 대답하지 못하고 날짜 옆에 굵은 선을 그었다. 이번엔 집까지 잃으면서 참을 생각은 없었다.

“원본 계약서, 인감증명 제출 기록, 인감 사용 경위. 세 가지 다 요구할 거야.”

“내가 같이 간다.”

“아빠 혼자 내보낼 생각 없어. 이번엔 아무도 우리 대신 사인 못 하게 할 거야.”

이튿날 도율을 통해 확인한 담보계약 사본에는 채무자 이재문, 연대보증인 이연희가 적혀 있었다. 연희는 자기 이름 아래의 서명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한 번도 그런 계약에 동의한 적 없었다. 그런데 서류 위의 자신은 마치 기꺼이 아버지 땅을 내놓은 딸처럼 꾸며져 있었다.

재문은 서류를 잡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연희가 걱정스러워 손목을 잡자 아버지는 오히려 딸 손을 감쌌다.

“내 땅은 내가 지켜. 넌 네 애 일부터 놓지 마.”

연희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 마지막 장을 넘겼다. 보증인 서명 옆에는 아버지의 붉은 인영이 선명했다. 재문이 오래 보관해 온 다른 계약서의 인영과 나란히 맞춰 보던 도율의 손끝이 멈췄다. 둥근 테두리 한쪽의 작은 흠집까지 같은 자리에 있었다.

“연희 씨. 이건 가짜 도장을 대충 판 흔적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종이를 당겨 들었다. 똑같이 패인 테두리를 알아본 순간,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담보계약서에 찍힌 것은 재문의 진짜 인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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