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ZERO'라는 분… 지금도 그쪽에서 활동하고 있습니까?"화면 너머 국제 투자사 담당자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해림의 손이 마우스 위에서 완전히 멎었다. 과거 자신이 묻어두었던 익명의 이름이, 타인의 입을 통해 현재의 자신에게 직격으로 날아든 순간이었다.하지만 해림은 아주 미세한 동요조차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표정을 갈무리했다."ZERO의 현재 활동 여부는 이 자리에서 제가 대신 답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그녀는 철저하게 사실만을 말하되, 상대가 원하는 대답은 주지 않는 방식으로 유연하게 선을 그었다."ZERO와 관련된 개인적인 답변은 이번 자료 검증과 별개의 문제니까요. 지금 우리가 확인해야 할 건, 당신들의 서버에 남아 있는 '시간'뿐입니다."담당자 역시 그 이상의 무리한 호기심을 파고들지는 않았다. 곧바로 당시 수신 기록과 초기 버전 식별 정보를 정리한 공식 자료가 제로파트너스 측으로 넘어왔다.증거 확보는 끝났다.이제 반격할 차례였다.해림은 곧바로 법무팀과 전략팀을 회의실로 소집했다. 그녀의 지시는 간단하고 명확했다."우리가 확보한 자료를 통째로 언론에 뿌리거나 감정적인 기자회견을 열지 마세요."전략 문서 전체를 무작정 대중에게 공개해 버리면 오히려 제3자 정보 유출이나 비밀 유지 의무 위반이라는 새로운 덫에 걸릴 위험이 컸다. 해림은 그런 뻔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문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부 덜어내고, 오직 '시간순서'만 공개하세요."해림이 화면 위로 세 가지 데이터를 나란히 띄웠다."첫째, 제로파트너스 내부의 초기본 생성 시점. 둘째, 국제 투자사 측의 최초 수신 시점. 그리고 셋째, 에이온 측이 주장하는 후속 버전과의 시계열 비교."누가 어떤 내용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는
해림은 전 직원의 증언으로 좁혀진 식별 정보를 바탕으로, 과거 에이온과 제로파트너스 사이의 관련 사업에 관여했던 국제 투자사의 당시 거래 담당자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다.화상 회의 화면 위로 단정한 차림의 외국계 투자 담당자가 나타났다. 그의 표정에는 반가움보다는 철저하게 계산된 거리감이 묻어 있었다."도해림 대표님. 현재 제로파트너스가 에이온 측 자료를 불법으로 반출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기사들은 저희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희 투자사는 귀사들 간의 법적 분쟁에 어느 쪽으로도 개입할 의사가 없습니다."차가운 선 긋기였다. 하지만 해림은 그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도와달라거나, 억지로 우리 편을 들어달라고 연락한 게 아닙니다."해림의 이성적인 목소리가 화면 너머로 차갑게 꽂혔다."당시 에이온과 제로파트너스, 그리고 귀사가 공유했던 프로젝트 자료와 관련해서, 오직 귀사 쪽 서버에 최종 보관된 수신 기록과 해당 버전의 식별값만 확인해 달라는 요청입니다."상대 측의 굳어 있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해림은 상대방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감정적인 호소나 무리한 법적 증언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받았고', '언제 보관했는지'에 대한 건조한 객관적 팩트 체크만을 요구했다. 빈칸을 감정이 아니라 증거로 채우려는 해림의 차가운 협상 방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잠시 후, 담당자는 화면 밖에서 당시의 투자 프로젝트 로그를 확인했다."…대표님 말씀이 맞군요."그의 목소리에 미세한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저희 측에 최초로 수신된 전략 자료의 초기 버전은, 에이온의 완성본이 아니라 제로파트너스 실무진이 작성한 형태 그대로 보관되어 있습니다."그 한마디로, 해림을 향한 거대한 공격의 전제 하나가 무너졌다.'제로파트너스가 에이온의 완성본을 나중에 몰래 훔쳐서 무단 활용했다'는 단순한 절도 프레임. 현재 분쟁 당사자가 아닌 외부 수신자의 서버에 남은 시간순서 기록까지
[상대가 주장하는 저 자료, 제가 예전에 직접 관리했습니다.]해림은 화면 위로 떠오른 두 줄의 문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위기에 처한 옛 상사를 구하기 위해 기사처럼 나타난 극적인 구원자 같은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안도하는 대신, 가장 먼저 발신자의 신원부터 차갑게 검증했다.문자가 온 번호, 그리고 과거 제로파트너스 인사 기록망에 남아 있는 데이터. 해림은 당시 문제의 자료가 속해 있던 프로젝트 팀의 실무 관리자 명단과 지금 연락해 온 사람의 인적 사항이 일치하는지 짧고 정확하게 대조했다."본인 확인부터 하죠."해림이 먼저 선을 그었다. 전 직원의 신원과 당시 부여받았던 사내 접근 권한의 로그가 일치함을 완벽하게 확인한 직후에야, 해림은 그를 제로파트너스의 화상 회의실 화면 위로 띄웠다.화면 너머로 보이는 전 직원의 얼굴에는 과장된 적개심이나 해림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 같은 것은 묻어나지 않았다."대표님. 기사에 뜬 자료들을 봤습니다."그는 건조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먼저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 자료들의 최종적인 법적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지금 누가 대표님을 공격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제가 증명할 수 있는 건, 오직 제가 제로파트너스 실무진으로 일할 당시 저 자료들의 버전 기록을 정리하고 관리했던 과정뿐입니다."해림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이성적인 선 긋기였다.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줄 맹목적인 동조자가 아니라, 팩트를 있는 그대로 증명할 수 있는 실무자."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해림은 곧바로 상대 측이 언론에 뿌린 도난 의혹 자료의 발췌본을 화면에 띄웠다."상대는 이 문서들이 에이온 내부에서 완성된 것을 우리가 불법으로 반출해 무단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전 직원은 화면에 띄워진
"대표님 가족 중 누군가가 안전 시험을 조작했습니다."그 선언이 에이온 대표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 속에서, 강유헌의 굳은 입술이 간신히 열렸다. "가족… 누구." 충격에 휩싸인 짧은 질문이었다. 유헌의 얼굴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사람 특유의 굳은 정지가 스쳤다. 그러나 해림은 단지 그 짧은 반응만으로 그가 이 사안에 대해 사전에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까지 성급하게 단정하지 않았다."현재 남아 있는 교집합의 권한 기록만으로는, 특정 개인의 이름까지 지목할 수는 없습니다." 담당자의 대답에 유헌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이내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이 자료, 밖에 나간 건 어디까지지?"당장 증거를 지우거나 입을 막으라는 식의 범죄적 은폐 지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해림에게는, 그 질문이 사실의 내용만큼이나 그것이 외부로 번졌을 때 에이온이라는 기업에 미칠 파장부터 확인하려는 뜻으로 들렸다. 해림은 그 서늘한 우선순위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가족 중 누구인지를 억지로 추궁하며 매달리지는 않았다."이름부터 찾으려 들지 마세요." 해림의 차가운 목소리가 유헌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추가적인 훼손의 여지가 있으니, 지금 확인한 원본 로그와 접근 기록부터 확실하게 보존하세요. 그게 대표로서 당신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입니다."해림은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돌아섰다. 조작의 꼬리를 밟았으니, 에이온 내부의 철저한 증거 보존이 우선이었다.하지만 에이온 빌딩을 빠져나온 직후,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급변했다. 해림의 차가 도로에 진입하기도 전에, 조수석에 던져둔 휴대전화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제로파트너스 법무팀과 전략팀의 긴급 연
에이온모빌리티 대표실.해림은 책상 너머에 앉은 강유헌을 향해 서류철 하나를 차갑게 내려놓았다. 아무런 예고도 없는, 지극히 건조하고 사무적인 방문이었다. 제로파트너스 대표로서 치밀하게 쌓아 올린 증거 사슬의 끝을 쥐고 에이온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온 길이었다."이게 뭐지?"유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법적으로 두 사람은 여전히 혼인 관계에 놓인 부부였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해림은 아내가 아니라 지독한 조사자로 서 있었고, 강유헌 역시 남편이 아닌 에이온의 대표로서 그녀를 상대해야만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떠한 사적인 감정이나 미련이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당신 회사 내부의 시스템 기록으로 직접 검증해야 할 마지막 권한 범위입니다."해림은 감정을 섞지 않고 자신이 끈질기게 추적해 온 뼈대만을 간결하게 요약했다.안전시험의 원자료와 보관 수치가 맞지 않는다. 그 시기에 특정 비용의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해당 비용들은 일관되게 같은 수준의 상위 승인권을 거친다.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들여다본 이상 징후는 딱 여기까지였다.유헌은 곧바로 서류철을 펼쳤다. 적어도 해림이 들고 온 자료를 허투루 넘길 태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그 건조한 서류 뭉치가 결국 자신의 가족을 향해 거대한 칼끝을 돌리게 되리라는 징후는 그의 얼굴 어디에도 없었다."그래서, 당신이 밖에서 확인하지 못하고 들고 온 게 정확히 뭡니까.""이 상위 승인권과 데이터 변경 권한을 실제로 동시에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의 범위요. 외부에서 확보한 자료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최종 검증은 에이온 내부 권한 기록을 통하는 수밖에 없어요."해림의 단호한 요구에, 곧바로 에이온 내부의 보안 및 감사 검증 담당자가 대표실로 불려 왔다. 그는
모든 돈에는 결재선이 있다.수십억의 거대한 자금이든 단돈 몇 십만 원짜리 영수증이든, 조직의 시스템을 거쳐 집행된 이상 반드시 누군가가 기안하고 누군가가 승인했다는 논리적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해림은 '이 돈을 움직일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답을 찾기 위해, 텅 빈 집무실에서 새로운 자료들을 띄웠다. 그녀는 무작정 서류의 끝을 뒤져 최종 수취인의 이름을 캐내려 들지 않았다. 에이온과 같은 거대 조직의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섣불리 이름 하나를 건져 올리려는 시도는,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 비효율적이었다.그녀의 첫 번째 단계는 '정상적인 결재 구조의 복원'이었다.해림은 에이온 연구소의 일반적인 연구 관련 비용, 시험 관련 비용, 그리고 외부 의뢰 관련 비용들이 각각 정상적으로 처리될 때 거쳐야 하는 기본적인 업무 흐름을 먼저 화면 한쪽에 띄워 기준점으로 삼았다. 연구소 실무선의 기안, 관리 부서의 검토, 그리고 상위 책임자의 최종 승인으로 이어지는 보편적인 구조.그런 다음 해림은 한지수가 의심을 품었던, 그 기묘하게 맞물려 움직인 지출 기록들을 정상 구조와 나란히 대조하기 시작했다.첫 번째 난관은 예상보다 견고했다.기록들은 한눈에 공통점을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철저하게 파편화되어 있었다.기안한 실무자도, 지출 항목의 명칭도, 심지어 비용을 처리한 날짜와 담당 부서마저도 서로 다르게 쪼개져 있었다."공통점이 안 보여."해림의 서늘한 눈매가 가늘어졌다.표면적인 데이터만 놓고 보면, 서로 전혀 연관이 없는 개별 부서들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정상적으로 지출을 결의한 것처럼 보였다. 만약 일반적인 감사 인력이 사람의 이름이나 부서명만으로 이 기록들을 쫓았다면, 여기서 추적을 멈췄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해림은 관점을 비틀었다.기안자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