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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의 잔상 #2

Author: 1727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2 17:49:00

회의가 끝나고 팀장님이 먼저 나간 뒤, 넓은 회의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혜연이 도망치듯 노트북을 챙겨 일어나려 할 때, 상수가 의자를 드르륵 끌어 혜연의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쌉싸름한 시트러스 향과 묵직한 우디 향이 뒤섞여 혜연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혜연 씨, 오늘 유독 도면이랑 싸우시는 것 같네요. 미간에 주름이 아주 깊게 파였어요. 

제 보고가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아니면... 주말의 여운이 아직 남으셨나?”

​“...강상수 씨,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우리 엄마가 당신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수사 시작했다고요. 

엄마들 계모임 날짜가 이번 주 금요일이에요. 조만간 소영이네 엄마한테 전화 한 통 가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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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낙원의 균열, 무너진 관찰자 #2

    소영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감이 전신을 덮쳤다.20년 동안 제 옆에서 제 연애 상담을 들어주던 친구가, 지금은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상수의 손을 잡고 있었다.상수는 혜연을 세워두고 그녀의 목도리를 정성스럽게 고쳐 매주었다.차가운 밤바람에 혜연이 추울까 봐 자신의 코트 깃을 세워 그녀를 감싸 안기도 했다.상수는 혜연의 뺨을 어루만지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소영은 그 광경을 보며 자신의 온 세상이 불타 없어지는 환각을 보았다.상수가 혜연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작업실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은, 소영에게 그 어떤 칼날보다 예리하게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8년의 세월이 단 한 번의 눈맞춤에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두 사람이 들어간 문이 굳게 닫히자, 소영은 버티고 서 있을 힘을 잃었다.그녀는 골목 한복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차가운 아스팔트의 냉기가 코트 너머로 스며들었지만,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아아아아...!"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참으려 했지만, 짐승 같은 통곡이 터져 나왔다.소영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바닥을 긁었다.단순히 상수를 잃었다는 상실감만은 아니었다.20년이라는 세월이, 그 우정이라는 이름의 시간이 통째로 부정당했다는 모멸감이 그녀를 덮쳤다.'박혜연... 너였어? 정말 너였던 거야?'혜연

  •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낙원의 균열, 무너진 관찰자 #1

    밤강물 위로 부서지는 가로등 불빛이 꼭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듯했다.상수는 혜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천천히 강변을 걸었다.조금 전까지 작업실 근처에서 느꼈던 소영의 서늘한 기운은 이곳까지 닿지 못하는 듯했다.상수의 품은 따뜻했고, 그가 내뱉는 숨결은 혜연의 귓가를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혜연 씨, 조금 전엔 정말 놀랐죠? 형이랑 민지 씨가 잘 해결했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상수의 다정한 음성에 혜연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들어찬 돌덩이는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민지가 전해준 소영의 마지막 인사. '곧 혜연이한테 찾아간다고 전해줄래요?' 그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을 때렸지만,혜연은 지금 제 어깨를 감싸는 상수의 온기에 매달렸다.상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혜연을 마주 보았다.그는 혜연의 두 손을 꼭 잡고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좁은 주머니 안에서 서로의 손가락이 얽혔다.상수의 체온이 혜연의 차가운 손등을 덮어올 때, 혜연은 잠시나마 소영이라는 존재를 지워낼 수 있었다."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게 누구든... 난 상관없어요. 나한테는 혜연 씨가 내 전부고, 내 유일한 안식처니까. 내가 혜연 씨 지킬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상수의 고백은 이성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열기는 델 듯이 뜨거웠다.혜연은 상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상수의 심장 박동이 규칙적으로 전해져 왔다.이 남자는 정말 나를 위

  •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침범당한 낙원 #2

    하지만 재현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소영의 말을 공격으로 받아치지 않고, 오히려 안타까움이 서린 오빠의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소영아,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네가 지금 과거의 일들을 꺼내며 아파하는 마음은 이해해.나도 너를 친동생처럼 아꼈고, 우리가 나눈 시간들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어.하지만 소영아, 그 시간들은 네가 상수의 연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축복이었어. 이젠 난 너희가 좋은 관계이길 축복하지 않아.하지만 윤소영이라는 사람이 부디 더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기를 축복할 게"재현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그 안에 담긴 선은 단호했다."상수는 이미 너와의 관계를 다 정리했어.그건 누구의 조종 때문이 아니라, 상수 스스로 내린 결정이야.상수는 이제 너를 잊었어.그건 너를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네가 없는 삶에서 자기만의 평온을 찾았다는 뜻이야. 소영아, 제발... 더 추해지지 마."'더 추해지지 마.'그 짧은 문장은 소영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재현은 소영을 상수의 인생과 상관없는 완벽한 외부자로 규정해버렸다.이제 더 이상 상수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소영의 자리는 없음을, 재현은 이성적인 언어로 못 박았다.소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입가에는 기묘하게 뒤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그녀는 민지를 빤히 바라보며 아주 나직하고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민지 씨, 혜연이는 잘 지내

  •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침범당한 낙원 #1

    주말의 오후는 비현실적일 만큼 평화로웠다.상수의 작업실이 위치한 한적한 골목은 따스한 햇살 아래 낮잠을 자는 고양이처럼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담벼락을 타고 올라간 넝쿨장미들이 유독 붉게 피어난 그 길 위로, 경쾌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민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재현 씨, 오늘 데이트 코스 정말 완벽했어요. 혜연이한테 자랑하면 아마 부러워서 잠도 못 잘걸요?걔 요새 하도 작업실에만 박혀 있어서 광합성이 좀 필요하거든요."민지는 상수의 형 재현의 팔짱을 꽉 낀 채 환하게 웃었다.두 사람은 최근 부쩍 가까워진 사이였다.민지는 혜연이 상수와 함께 작업실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상수는 밀린 조향 작업을 하고, 혜연은 그 곁에서 책을 읽거나 소소한 도움을 주며 주말을 보내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그럼 우리, 마지막으로 상수 작업실에 들러서 간식이나 좀 넣어주고 갈까요? 혜연이 얼굴도 좀 보고요. 재현 씨가 동생 응원도 좀 해주고요."민지의 제안에 재현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재현 역시 동생 상수가 혜연을 만나며 비로소 정서적 안정을 찾은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했다.두 사람은 근처 유명 베이커리에서 산 갓 구운 빵 봉투를 흔들며 작업실 골목으로 접어들었다.고소한 버터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지극히 일상적이고도 행복한 순간이었다.하지만 작업실 건물 입구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민지의 걸음이 발작적으로 우뚝 멈춰 섰다."어...? 저기.

  •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허락된 빛, 짙어진 그림자 #2

    혜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상수는 의아한 듯 차의 속도를 늦추며 그녀를 보았다."뭐가요? 오늘 우리 아버지한테 너무 잘해줘서 내가 더 고마운데.""나는... 상수 씨를 우리 부모님께 인사시켜 드리지 못하고 있잖아요.상수의 아버님은 저를 저렇게 축복해주시는데, 저는 상수 씨를 우리 집 문턱조차 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그게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서요."혜연의 고백에 상수는 차를 잠시 갓길에 세웠다.그는 벨트를 풀고 몸을 돌려 혜연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괜찮아요, 혜연 씨. 혜연 씨 마음이 준비된다면 나는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어요.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잖아요.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혜연 씨가 느끼는 그 부담감, 내가 다 이해해요.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요. 천천히 가요, 우리."상수의 위로는 다정했고 진심이었다.하지만 그 다정함이 오히려 혜연의 가슴을 난도질했다.상수는 '준비'가 되면 된다고 했지만, 혜연은 알고 있었다.그 준비라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혜연은 눈을 감았다.자신이 어려서부터 살았던 그 집의 풍경을 떠올렸다.마당 한편에 탐스럽게 피어있던 수국,그리고 그 아래 평상에서 부모님과 함께 웃으며 수박을 깨 먹던 소영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

  •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허락된 빛, 짙어진 그림자 #1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상수의 목소리는 유난히 뜨거웠다.그 기적 같은 화해 이후, 상수는 조향실에 홀로 남아아버지의 진심을 곱씹다 결국 참지 못하고 혜연에게 전화를 건 참이었다."혜연 씨, 자요? 아버지가... 아까 조향실에 오셨었어요. 형이랑 같이 주소를 알아내서 오셨나 봐요."상수는 아이처럼 상기된 목소리로 낮에 있었던 일들을 쏟아냈다.평생을 '실패한 아들' 혹은 '돌연변이' 취급을 받은 줄 오해했던 그에게,아버지가 건넨 서툰 걱정과 작업대 위에 툭 던져두고 간 빈티지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었다.그것은 상수가 평생 갈구해온 '아버지의 인정'이라는 훈장이었다.상수는 그 무뚝뚝한 문장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인정의 무게를 설명하며 몇 번이나 목이 메었다.혜연은 침대에 기대앉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상수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그가 조향사로서 성공했음에도 왜 늘 한구석이 허전해 보였는지 알기에 그녀의 마음도 함께 벅차올랐다.한참을 신나서 이야기하던 상수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저기, 혜연 씨... 혹시 괜찮으면 우리 아버지 한번 만나러 갈래요?아버지가 혜연 씨를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나를 이렇게 사람 구실 하게 만든 여자가 누구냐고...아, 물론 불편하면 안 그래도 돼요. 내가 잘 말씀드릴게요."상수의 배려 섞인 제안에 혜연은 망설이지 않았다.아니, 망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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