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상수의 목소리는 유난히 뜨거웠다.
그 기적 같은 화해 이후, 상수는 조향실에 홀로 남아
아버지의 진심을 곱씹다 결국 참지 못하고 혜연에게 전화를 건 참이었다.
"혜연 씨, 자요? 아버지가... 아까 조향실에 오셨었어요. 형이랑 같이 주소를 알아내서 오셨나 봐요."
상수는 아이처럼 상기된 목소리로 낮에 있었던 일들을 쏟아냈다.
평생을 '실패한 아들' 혹은 '돌연변이' 취급을 받은 줄 오해했던 그에게,
아버지가 건넨 서툰 걱정과 작업대 위에 툭 던져두고 간 빈티지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수가 평생 갈구해온 '아버지의 인정'이라는 훈장이었다.
상수는 그 무뚝뚝한 문장들 사이에 숨겨져
"너... 정말 아니야? 네가 쓴 게 아니라고?""나 아니야! 정신 차려, 강상수! 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망치고 있는 게 누군지 똑똑히 보라고!"소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문을 향해 걸어갔다.그러다 문득 멈춰 서서 상수를 돌아보았다.그녀의 마지막 일갈은 태양보다 더 뜨겁게 상수의 정수리를 내리쳤다."오빠야말로 잘 생각해. 지금 혜연이가 힘든 게 누구 때문인지. 나? 아니. 강상수, 바로 너야.오빠가 등장하기 전에 박혜연의 삶은 아주 평화로웠어. 파도 하나 없는 잔잔함뿐이었다고.그런 애가 왜 지금 폭풍우 속에서 휘청거릴까? 잘 생각해 봐. 그 애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진짜 악마가 누군지."딸랑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소영이 사라졌다.상수는 홀로 남겨진 테이블 위에서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소영이 남기고 간 말은 상수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해일이 되어 몰아쳤다.그는 조향사로서 늘 향기의 '발원지(Note)'를 찾는 훈련을 해왔다.어떤 향료가 전체의 균형을 깨트리는지, 어떤 불순물이 순수한 에센스를 변질시키는지 찾아내는 것이 그의 업이었다.하지만 지금, 혜연을 뒤덮은 이 악취 나는 비극의 발원지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이 비수처럼 꽂혔다.상수는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사실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블루밍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서서히 생겨난 혜연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미친 듯이 도망쳤었다.혜연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발각되는 순간,그
통유리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정오의 빛은 피부를 따갑게 찌를 정도로 예리했다.점심시간의 막바지, 카페 안은 직장인들의 고조된 수다와 에스프레소 머신의 신경질적인 스팀 소리가 뒤섞여 소란스러웠으나,구석진 창가 자리만큼은 진공 상태에 놓인 듯 서늘한 정적이 감돌았다.테이블 위에는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채 식어버린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여 있었다.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눈물처럼 흘러내려 하얀 테이블 위에 볼품없는 웅덩이를 만들었다.상수는 맞은편에 앉은 소영을 무겁게 응시했다.지난 토요일, 예식장에서 포식자처럼 군림하며 하객들의 시선을 지배하던 그녀는 이제 세련된 오피스룩을 입은 차가운 도시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조향사인 상수의 예민한 후각에 소영이 뿌린 진한 머스크 향수가 공격적으로 치고 들어왔다.그것은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잔향이 아니었다.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상대의 영역을 강압적으로 침범하려는 '무기'의 냄새였다.상수는 타들어 가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먼저 입을 뗐다."소영아, 어디까지 할 거니? 네가 원하는 게 정말 이런 거야?"소영이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챙'하고 날카롭게 울렸다.그녀가 비스듬히 고개를 까딱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짙은 레드 립스틱이 발린 그녀의 입술이 경멸을 담아 비틀렸다."혜연이가 오빠보고 시키디? 가서 좀 말려달라고, 무섭다고 징징대기라도 한 거야? 그래서 점심시간에 여기까지 쪼르르 달려온 거냐고. 대단한 사랑이네, 정말.""그런 거 아니라는 거 네가
민지는 혜연의 굽은 등 위로 쏟아지는 동료들의 가시 돋친 시선들을 대신 맞고 있었다.탕비실에서 들려오는 낄낄거림, 메신저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혜연의 쪽을 힐끗거리는 눈길들.민지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10년차 공간 인터리어 전문가로 버텨온 저 여자가,단 한 줄의 익명 글로 인해 평생 쌓아온 커리어마저 '유혹의 결과'로 치부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고문이었다.'혜연아, 제발... 그렇게 숨 막히게 하지 마.'민지는 혜연의 파티션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혜연은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심지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마비시키려는 듯, 차가운 데이터의 바닷속으로 끝없이 잠영하고 있었다.그 처절한 몰두는 열정이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점심시간이 되자 직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평소라면 활기찼을 공간이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변했다.혜연은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박혜연. 밥 안 먹어? 점심시간이라고."가지 않고 버티던 민지가 결국 혜연의 의자를 강제로 돌려버렸다.혜연의 눈동자는 초점이 풀린 채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먹고 와, 민지야. 나 정말 입맛이 없어. 이거 오후 회의 전까지 다 봐야 해.""야! 박혜연!! 너 정말 이럴 거야? 죽고 싶어?"민지의 비명이 텅 빈 사무실 천장을 때리고 돌아왔다.민지는 혜연의 어깨를
지하철의 육중한 금속음이 멀어지고, 혜연은 텅 빈 회사 로비 한복판에 섰다.시계는 이미 9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평소라면 인사고과를 걱정하며 사색이 되었을 시간이었지만,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자신의 구두 소리를 들으며 혜연이 느낀 감정은 기묘하게도 '안도'였다.수백 명의 직원이 출근 카드를 찍기 위해 파도처럼 밀려드는 8시 50분의 그 숨 막히는 응시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엘리베이터 안에서 어깨를 맞댄 채 누군가 등 뒤에서 "저 여자가 그 블라인드 주인공이야?"라고 수군거리는 환청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늦어버린 시각이 오히려 혜연에게는 세상으로부터 허락받은 짧은 유배지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가를 가리기 위해 평소보다 서너 배는 더 두껍게 덧바른 파운데이션이 조명 아래서 푸석하게 들떠 있었다.혜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빳빳하게 다려진 재킷 깃을 바로 세웠다.비틀거리는 영혼을 간신히 가둬둔 이 회색 정장은 오늘 그녀가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전투용 갑옷이었다.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혜연은 마치 물속으로 잠수하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평소라면 활기찼을 키보드 타건 소리가 그녀의 발소리에 맞춰 아주 미세하게 잦아들었다.그것은 완벽한 정적이 아니었다.오히려 평소보다 더 낮은 데시벨로 속삭이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의미 없는 헛기침 소리가 뒤섞인 불쾌한 소음의 숲이었다.파티션 너머로 몇몇 고개가 솟아올랐다가, 혜연과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바닥으로 꺼졌다.&nb
혜연은 소름이 돋았다.그날 식장 로비, 자신을 에워싸고 비난하던 그 무리 중 누군가가 나를 죽이기 위해 이 글을 썼다.아니면 그 자리에 있던 '우리' 중 누군가가 혜연의 회사 동료에게 이 모든 것을 생중계하며 글을 사주했거나.댓글들은 더 가관이었다. 사실이라는 뼈대 위에 악의라는 살점이 붙어 괴물 같은 소문으로 변해 있었다.ㄴ 와, 평소에도 조향사랑 유난 떤다 싶더니 결국 상간녀 프레임?ㄴ 동네 엄마들끼리 20년 지기라는데 딸이 저러면 부모는 무슨 죄냐 진짜.ㄴ 저 여자 담당 프로젝트도 다 다시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님? 유혹해서 딴 거 아냐?ㄴ 일 좀 잘한다고 유세 떨더니. 결국 그 실력이 그 실력이 아닌거네.추악했다.혜연은 휴대폰을 바닥으로 던지듯 내려놓았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맺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같은 시각, 상수의 방.상수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혜연을 선도리에서 데려온 뒤, 그는 그녀를 지켜냈다는 안도감에 젖어 있었지만 조향사 특유의 예민한 직관이 자꾸만 신경을 긁어댔다.서랍 속에 넣어둔, 간직했던 그 '식어버린 날달걀 두 알'이 환상처럼 눈앞을 어른거렸다.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재현이었다."너 알고 있었어?"재현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밤 늦게 너무나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연락 온 민지.그녀가 미친 듯이 쏟아낸 말들 그리고 그녀에게 받은 무언가를 재현이 휴대폰 화면을 상수의 코앞에 들이밀었다.&nbs
선도리에서의 밤은 비현실적일 만큼 투명했다.갯벌 끝에 닿아있던 상수의 온기, 어깨를 감싸 쥐던 그의 단단한 손등 위로 쏟아지던 별빛들.혜연은 침대 머리맡까지 차오른 일요일 밤의 어둠 속에서 그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씩 꺼내어 핥았다.그것은 치명적인 상처 위에 덧바르는 연고이자, 내일이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서 붙들 수 있는 유일한 밧줄이었다.'내가 당신의 세상이 되어줄게요.'그 밤, 상수가 읊조렸던 맹세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혜연은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잠시나마 얻어진 안락.그 위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수면의 기운이 혜연을 잠식하려던 찰나였다.하지만 정적은 이내 변질되었다.방 안의 공기가 서서히 눅눅해지더니, 잊으려 애썼던 기억들이 벽지의 무늬처럼 기어 나와 혜연의 시야를 가로막았다.결혼식장의 로비.5월의 찬란한 태양 아래에서 펼쳐졌던 그 처절한 처형대.경은의 그 차갑고도 사무적인 미소가 떠올랐다."연애하느라 바쁠 텐데 굳이 또 오고 그래."배려를 가장한 그 예리한 칼날이 혜연의 가슴을 다시 한번 베어냈다.뒤이어 소영의 비릿한 비웃음이 이명처럼 울렸다.포식자의 여유로 자신을 훑어내리던 그 오만한 눈동자.그리고 무엇보다 아프게 박힌 것은 선혜의 일갈이었다.'너희 어머니 시장도 못 다니신다더라. 그건 아니?'선혜의 목소리는 엄마가 휘둘렀던 손바닥보다 더 매섭게 혜연의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