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윤서하 시점
수화기 너머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할머니는 괜찮으세요?”
나는 두려움과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가운데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 바로 병원으로 오셔야 합니다. 할머님께서……”
나는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곧장 사무실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기사에게 병원으로 최대한 빨리 가 달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할머니의 병실로 향했다. 하지만 침대 시트와 이불은 이미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침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안했다.
끝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우리 할머니는요?”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 계세요?”
병실을 청소하던 간호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담긴 동정 어린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윤서하 씨. 할머님께서 10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병원 안치실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 순간, 세상 전체가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다리를 움직여 간호사를 따라 안치실까지 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간호사는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안쪽에 놓인 침대 하나를 가리켰다.
할머니는 그곳에 누워 계셨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흰 천으로 덮인 채였다.
두 다리가 쉴 새 없이 떨렸다. 나는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흰 천을 걷어 내고 창백하게 질린 할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끝내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한 달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사고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을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사고 때문에 할머니는 이렇게 되셨다.
그리고 그 사고가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가족마저 내게서 앗아 갔다.
“할머니……”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온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 예전의 생기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 손이 한때 얼마나 따뜻하게 내 뺨을 어루만져 주었는지 떠올리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나는 울면서 말했다.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마지막 순간에 곁을 지켜 드리지 못한 나 자신을 원망했다.
나는 할머니 곁을 지켰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남편의 마음속에서 내 자리가 어디인지 걱정하고 있었다.
간호사가 방 안으로 들어와 내게 말했다.
“할머님께서 이걸 서하 씨에게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나는 눈물을 닦고 흐느끼며 그녀가 건네는 물건을 받아 들었다.
열쇠고리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할머니가 왜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물건이 열쇠고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할머니의 차가운 손을 느끼자 눈앞의 모든 일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뼈저리게 다가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할머니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며, 제발 내 곁으로 돌아와 달라고 중얼거리듯 애원했다.
“서하.”
등 뒤에서 강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여기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안도했다.
병원에서도 그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게다가 앞서 한서연과 함께 병원에 왔었으니, 겸사겸사 이곳에 들렀을지도 몰랐다.
한서연도 방 안에 서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내 시선은 온통 강태준에게 향해 있었다.
나는 그가 필요했다.
누군가 나를 안아 주고,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태준 씨……”
나는 울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두 팔을 뻗어 그를 꼭 끌어안았다.
눈물이 다시 차올랐고, 이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손길이 닿자 그의 몸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놓지 않았다.
그의 온기가 필요했다.
그가 필요했다.
그는 정말 내게 남은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마저 잃는 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가 나를 밀어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마주 안아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런 것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저 목 놓아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조금씩 잦아들고 나서야 나는 흐느끼며 천천히 그를 놓아주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전화해서 장례 절차를 알아볼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한서연과 함께 나가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렇게 등을 돌리고 나를 두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가지 마요.”
내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고, 간절함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제발요. 가지 말아요. 나랑 같이 있어 줘요.”
나는 애원했다.
강태준은 입을 열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날카로운 비명이 갑자기 터져 나왔고,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는 함께 몸을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한서연이 그곳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배를 감싼 채,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강태준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내 마음은 그와 함께 더 깊은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서연아, 괜찮아?”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태준 씨한테 말하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배를 감싼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강태준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태준 씨…… 저…… 임신했어요.”
윤서하 시점와인이 드레스에 흠뻑 스며드는 순간, 나는 충격과 믿기지 않는다는 감정에 휩싸였다.어떻게 저렇게까지 비열할 수 있지?하지만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일그러진 그녀들의 얼굴을 바라보자, 내 입가에는 저절로 비웃음이 번졌다.그녀들은 내가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리고, 어쩌면 눈물까지 흘릴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보인 반응은 그녀들이 만들어 낸 이 혼란을 오히려 즐기는 모습이었다.나는 주변 여자들이 건네는 휴지를 거절하고, 강유진과 한서연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마주했다.절대로 그녀들에게 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앞으로도.오늘은 내게 주어진 순간이자 특별한 날이었다. 그 어떤 것도, 심지어 내 드레스에 쏟아진 와인 한 잔조차 이 모든 것을 망치게 두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겉으로는 침착한 척하고 있어도 내 안에서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화가 난 건 그녀들이 나를 망치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감히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어떻게 감히 오늘을 망치려 들 수 있지? 내가 그토록 애써서 맞이한 이 순간을 어떻게 망칠 수 있느냔 말이다.그 순간, 주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배경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그녀들은 내 반응을 원했고, 결국 원하는 것을 얻었다. 하지만 내가 보여 준 건 감정을 터뜨리는 모습이 아니라, 어떤 폭발보다도 더 강한 침착하고 단호한 저항이었다.나는 강유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당장 나한테 사과해. 안 그러면 후회하게 될 거야.”강유진과 한서연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강유진 시점저 여자는 윤서하 따위보다 훨씬 나았다!오빠가 윤서하가 아니라 차라리 한서연과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보고 들었어, 얘야. 걱정하지 마. 내가 네 편이야.”한서연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나는 한결 진정할 수 있었다.예전에도 우리는 그 비천한 여자를 무너뜨리려고 함께 계략을 꾸민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 우리는 그 여자를 완전히 끝장낼 생각이었다.“아! 나 정말 저 빌어먹을 여자 때문에 미쳐 버리겠어! 대체 왜 우리 인생에 끼어든 거야? 대체 어떤 남자가 저 여자와 잠자리까지 해 주길래 저런 사치품을 살 돈까지 생기는 건지 모르겠네!”“그 드레스 말인데, 자기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선물로 받은 것도 아닌 것 같아.”“그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생각해 봐. 강태준과 헤어진 지 겨우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서이현의 드레스를 어떻게 감당하겠어? 설마 정말 서이현이 선물해 줬다고 믿는 건 아니지?”한서연의 말은 정말 일리가 있었다.강태준은 그녀에게 단 한 푼도 남겨 주지 않았다. 내가 아는 윤서하라면 그렇게 비싼 디자이너 드레스를 살 형편도 되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서이현에게 드레스를 빌렸을지도 몰랐다.“분명 파티에서 돈 많은 남자를 꼬실 생각으로 어떻게든 드레스를 빌렸을 거야. 서이현은 가끔 거지들에게도 옷을 선뜻 내줄 만큼 후한 사람으로 유명하잖아…….”우리는 윤서하가 예전부터 돈 많은 남
강유진 시점윤서하가 휴대전화를 꺼내 인스타그램을 열고, 서이현의 공식 계정에 들어가 프로필을 누르는 모습이 보였다.서이현이 최근 올린 게시물에는 그녀가 새 드레스를 제작하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내가 경악한 건, 영상 속 드레스가 바로 윤서하가 지금 입고 있는 그 드레스였다는 사실이었다.우리 주변에 모여 있던 여자들은 영상을 보자마자 감탄을 터뜨렸다. 이내 여기저기서 여러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와! 서이현에게 직접 드레스를 맞추다니, 정말 운이 좋네요!”“그녀의 부티크에서 예약 한 번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어요?”“저도 이번 행사에 입을 드레스를 디자인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대기 명단에만 올랐어요.”서이현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윤서하를 보고 있자니,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내 안의 분노도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감히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특권을 저렇게 뽐내다니!그녀의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자 내 안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화풀이하고 싶은 본능적인 충동까지 치밀어 올랐다.그녀의 그 잘난 듯한 거만한 미소는 마치 내 눈앞에서 붉은 천을 흔드는 것처럼 나를 자극했다.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 끝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그녀의 흠잡을 데 없는 피부에 손톱을 박아 넣고, 그 잘난 척하는 가면을 찢어 버리는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생각은 꺼지지 않는 불길처럼 내 머릿속을 집어삼켰다.머릿속에는 점점 더 잔혹해지는 폭력적인 상상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그 예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모습, 그리고 자신도 결국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현실 앞에서 그녀의 오만함이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광경을 본다면 얼마나 통쾌할까.당장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충동이 나를 거의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몰아붙였다. 마치 본능이 내 안의 분노를 모조리 그녀에게 쏟아부으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
윤서하 시점강재훈과 함께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의 팀이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소한 부분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서 완벽하게 준비해 놓았다.행사장에는 설렘과 기대감이 가득했고, 사람들 사이로 뜨거운 활기가 넘쳐흘렀다.행사장 자체도 하나의 건축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현대적인 세련미와 변치 않는 고전적인 매력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었다.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짝이는 전구 장식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 빛은 공간 전체를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감싸고 있었다.홀 안은 부드러운 황금빛 조명으로 가득했고, 은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나는 시선을 돌려 홀 곳곳을 둘러보며 주변의 정교한 장식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구석구석에는 풍성한 꽃장식이 놓여 있었고, 화사한 색감이 우아한 공간에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테이블에는 고급스러운 식탁보가 깔려 있었고, 반짝이는 크리스털 식기가 놓여 있었다.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은 그야말로 호화로웠다.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로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나는 평생 이런 곳에 와 본 적이 없었다. 강태준 역시 내가 이런 파티에 함께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회사에서 주최하는 행사 외에는 나를 이런 자리에 데려온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런 행사들은 외부 사업가들과 인맥을 쌓기 위한 자리라기보다는 팀워크를 다지는 모임에 가까웠다.그런데 오늘은 강재훈의 안내를 받으며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저, 저…… 세상에!”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내가 더는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을 알아챈 강재훈이 내 손을 잡았다.“곧 익숙해질 거야.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면 돼.”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서이현이 나를 위해 디자인해 준 아름다운 드레스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드레스의 원단은 내 몸을 따라 우아하게 흘러내
윤서하 시점강재훈이 나를 파티에 초대했다.사실 별로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지금이야말로 내 일과 커리어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어느 정도는 그의 말이 맞았다.요즘은 강태준이 내게 했던 모든 일을 잊기 위해 무언가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좀 더 이기적으로 굴면서 나 자신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 때인지도 몰랐다.마음 한구석에서는 집에 틀어박혀 내 인생을 뒤흔들었던 일들을 곱씹고 싶기도 했다.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제 나는 자유로워졌다.처음부터 끝까지 이 관계에서 애쓴 건 나 혼자였다.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내게 돌아온 건 무엇이었을까?거짓말과 배신, 부당한 대우, 그리고 빼앗긴 자유뿐이었다.아버지를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나는 지금까지 어떤 남자 곁에서도 마음 편히 안전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강태준도 그랬고, 이제는 아버지마저 그랬다.앞으로 오빠들과는 어떻게 지내게 될지 모르겠다.지금 내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남자는 강재훈뿐이었다.할아버지와 그 사람만이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파티를 준비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귀찮았다. 게다가 강재훈의 말로는 상당히 큰 행사라고 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기업인들이 모두 참석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파티에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 순간 머릿속에 서이현이 떠올랐다. 디자이너인 그녀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우리는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그 후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솔직히 나는 그녀의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정말 멋진 친구였다.그녀에게는 몇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그토록 완벽하게 숨겨 왔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나를 제외하면, 그녀가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서이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게 무척 불편하다며, 그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가장
강재훈 시점서하는 정말 훌륭한 여자다. 그녀는 여왕처럼 대접해 줄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다.우리 사이에 열세 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나는 그게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어쨌든 예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대로 가족들을 찾아가야 했다.나는 차 열쇠를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어젯밤 강태준과 그의 내연녀가 일으킨 불편한 일들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서하가 나를 믿고 있다는 걸 안다. 내가 강태준을 찾아가 그에게 주제를 깨닫게 해 주더라도 서하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저택에 들어서자 거실에 앉아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서미경과 강유진이 눈에 들어왔다.모녀는 여러 차례 서하에게 못되게 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대화하는 걸 좀처럼 달가워하지 않았다. 마주칠 때마다 어떻게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무슨 일로 나를 찾았나?”나는 별다른 반가움 없이 물었다.“네! 사실 태준이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재훈 씨뿐이라고 생각해요.”“설득하라고? 무슨 일인데?”“태준이가 서연이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잖아요!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아무리 조언해도 듣지를 않아요.”나는 그 자리에 서서 모녀의 표정을 지켜보았다.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그들은 언제나 한서연을 좋아했고, 서하는 짐승처럼 취급했다.내가 막 대답하려던 순간, 강태준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나는 곧바로 그에게 성큼 다가가 서재로 끌고 갔다.강태준은 당황한 듯했지만 저항하지는 않았다.“재훈 삼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강태준이 곧바로 따져 물었다.“잘 들어, 철없는 녀석아! 내 말 똑똑히 듣고 당장 서하와 이혼해.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네게 무슨 일이 생기든 나도 책임질 생각 없어!”나는 경고했다.“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강태준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소리쳤다.“난 협박 같은 거 안 해. 말한 건 반드시 실행에 옮길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