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그 말에 여원은 잠시 숨을 멈췄다.
다시 생각하겠다고.
시헌이 자신과의 결혼을.
그는 지금까지 다섯 번이나 결혼식을 미뤘다. 그때마다 여원이 울고, 기다리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제는 세린을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결혼을 다시 생각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여원은 천천히 계약서를 덮었다.
“그래.”
그녀가 낮게 말했다.
“생각해 봐.”
시헌의 눈썹이 움직였다.
“뭐?”
“나도 생각해 볼게.”
***
시헌은 여원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재킷을 집어 들고 직원에게 말했다.
“나머지는 기존대로 진행해 주세요. 변경 사항 있으면 세린이한테 연락하시고요.”
여원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 자신의 번호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같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부님 연락처는 변경하지 않을까요?”
시헌이 먼저 대답했다.
“그대로 두세요.”
그는 휴대전화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원아, 적당히 해. 나 다음 일정 있어.”
세린도 가방을 챙겼다.
“오빠,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타.”
시헌은 세린의 가방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고, 세린은 웃으며 그의 팔을 끼었다.
“오빠, 오늘 저녁 뭐 먹을까?”
“네가 좋아하는 거.”
“그럼 파스타?”
“그래. 그걸로 하자.”
여원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오늘 저녁 여섯 시에는 시헌과 둘이 식사하기로 약속했었다. 다섯 번째 결혼 연기 이후 처음으로 그가 직접 예약한 레스토랑이었다.
여원은 그 약속을 위해 회사에 반차까지 냈다.
그런데 시헌은 세린과 저녁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시헌아.”
여원이 그를 불렀다.
시헌이 문 앞에서 돌아봤다.
“왜.”
“오늘 저녁 약속 기억해?”
그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여원은 그 짧은 침묵만으로도 대답을 알았다.
“아, 그거.”
시헌이 말했다.
“다음에 먹자. 오늘은 세린이 기분 좀 풀어 줘야겠어.”
세린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오빠, 아니야. 언니랑 약속 있었으면 나 혼자 갈게.”
그녀는 시헌의 팔을 놓는 척했지만, 시헌이 곧장 손목을 붙잡았다.
“괜찮아.”
그는 세린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네가 먼저야.”
여원은 그 말을 또렷하게 들었다.
시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세린 역시 여원을 잠깐 바라봤을 뿐, 곧 시헌의 어깨에 기대며 고맙다고 속삭였다.
여원은 입술을 다물었다.
일곱 해 동안 사랑한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먼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섯 번이나 결혼식을 미룬 끝에 다시 잡은 약속을 깨면서.
“여원아, 너는 계약서 확인한다며. 먼저 가 있어.”
시헌은 그 말을 남기고 세린과 함께 상담실을 나갔다.
복도에서 세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빠, 나 오늘 진짜 속상했는데 이제 좀 괜찮아.”
“그러니까 괜한 생각 하지 마.”
그 목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여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
직원이 돌아온 것은 십여 분 뒤였다.
“신부님, 변경 내역을 확인해 봤는데요. 말씀하신 다섯 차례의 일정 변경 기록이 모두 남아 있습니다.”
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변경은 시헌이 직접 요청했고,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세린이 신랑 측을 대신해 연락했다. 다섯 번째 역시 시헌의 요청으로 접수돼 있었다.
여원은 날짜를 하나씩 확인했다.
첫 번째 결혼식이 미뤄졌던 날에는 예식장 로비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다. 두 번째에는 예약한 신혼여행을 취소했고, 세 번째에는 양가 친척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네 번째에는 친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원아, 정말 결혼하는 거 맞아?’
다섯 번째에는 어머니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여원의 손을 잡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때 여원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시헌이는 좋은 사람이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여원은 그 말을 할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이제야 떠올렸다.
“신부님.”
직원의 부름에 여원이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더 확인하셔야 할 것 같아요.”
직원은 화면 아래쪽을 가리켰다.
“현재 행사 진행 담당자로 오세린 님이 등록돼 있습니다.”
“신부 연락처 말고도요?”
“네. 꽃 장식이나 영상, 드레스 관련 업체와 연락하는 담당자로 지정돼 있어요.”
여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시헌이가 승인한 건가요?”
“언제까지 이럴 건데? 양가 부모님은 어떻게 할 거야? 청첩장도 이미 돌렸는데 네 마음이 바뀌었다고 다 취소할 수는 없잖아.”여원은 부모님께 직접 말씀드릴 생각이며, 시헌의 어머니에게도 예의를 갖춰 자신의 결정을 전하겠다고 대답했다.시헌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네가 우리 집안을 얼마나 곤란하게 만드는지 알아?”“내가 결혼하기 싫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누가 결혼하기 싫다는 걸 이해 못 한대? 그런데 네가 왜 이러는지 납득이 안 되잖아.”시헌은 한동안 여원의 얼굴을 살피다가 세린과의 연락을 줄이고 여원이 싫어하는 행동도 하지 않겠다며 그만 화를 풀라고 말했다.일곱 해 동안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내는 시헌의 얼굴에는 미안함보다 거래를 제안하는 사람의 조급함이 먼저 드러나 있었다.“그렇게 하면 돌아올 거야?”여원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세린이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잖아.”시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그럼 대체 뭘 원하는데?”“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네가 나를 놓아줬으면 좋겠어.”시헌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한참 만에 자신은 여원을 놓아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말에 여원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네가 못 놓겠다고 해도 나는 떠날 거야.”여원이 돌아서자 시헌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며 낮게 경고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시헌은 닫히는 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그날 저녁, 여원은 부모님께 약혼을 끝냈다고 말씀드렸다.어머니는 처음에 결혼식 날짜를 또 미루겠다는 이야기로 알아들었다. 여원이 이번에는 정말 결혼하지 않겠다고 설명하자 수화기 너머가 한동안 조용해졌다.“여원아, 무슨 일이 있었니?”그 한마디에 여원은 목이 메었다.그동안 그녀는 시헌의 잘못을 부모님께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결혼식이 미뤄질 때마다 회사 사정 때문이라고 둘러댔고, 세린의 존재도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가까운 동생 정도로만 설명했
세린의 웃음이 잠깐 굳었지만, 곧 고개를 숙이며 자신은 여원이 나중에 후회할까 봐 걱정될 뿐이라고 말했다.여원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계약서 사본을 요청했다. 담당자가 서류철을 펼치는 동안 세린은 테이블 아래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고, 여원은 누구에게 연락하는지 묻지 않은 채 계약 조건을 확인했다.***계약서에는 백시헌과 한여원의 이름이 공동 예약자로 적혀 있었다. 여원은 서명란과 연락처 변경 이력을 살펴보다가 신부 측 연락처가 세린의 번호로 바뀐 기록을 발견했다.“이 연락처는 언제 변경됐나요?”담당자가 기록을 확인하는 동안 세린은 의자에 앉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지난번 예식 일정 조정 때 신랑 측 요청으로 변경된 것으로 확인됩니다.”“제 동의를 확인하셨나요?”담당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당시 시헌이 여원과 상의했다고 설명했으며, 정확한 처리 경위는 다시 확인해 보겠다고 답했다.여원은 해당 기록의 사본을 요청했다. 그러자 세린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다급하게 끼어들었다.“언니, 그건 내가 연락을 대신 받으려고 한 거야. 오빠가 언니 회사 일 방해하면 안 된다고 해서.”“그럼 나한테 먼저 물었어야지.”“그렇게 큰일인 줄 몰랐어. 내가 도와주려고 한 건데 언니가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네.”세린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담당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금세 눈가를 붉혔다. 마치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선의가 오해받아 상처 입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표정이었다.여원은 그 모습을 더 지켜보지 않고 계약서로 시선을 돌렸다.“오늘 제 취소 의사를 정식으로 기록해 주세요. 앞으로 추가 발주나 변경이 필요하다면 제 동의를 받았다고 처리하지 말아 주시고요.”담당자는 계약의 최종 해지와 위약금은 약관에 따라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설명했고, 여원은 그 절차를 이해했다며 오늘 이후 발생하는 추가 비용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남겨 달라고 요청했다.여원이 차분하게 필요한 내용을 확인하는 동안 세린은 더 이상 끼어들지 못했다
백시헌은 결혼식을 취소하지 않았다.한여원이 약혼반지를 돌려준 지 사흘째 되던 아침, 그녀의 휴대전화로 예식장 예약 확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결혼을 준비하던 시절이라면 몇 번이고 들여다봤을 문장이었지만, 이제는 화면에 나란히 적힌 두 사람의 이름조차 낯설게 느껴졌다.[백시헌·한여원 고객님, 예정된 예식의 최종 진행 여부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여원은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메시지를 확인한 뒤 곧바로 웨딩플래너에게 연락했다. 담당자는 신랑 측에서 예식 진행을 재확인했으며, 남은 비용도 예정대로 정산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설명했다.“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수화기 너머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담당자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신랑님께서는 두 분 사이에 잠깐 다툼이 있었을 뿐이라고 하셨어요. 예식 준비를 중단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셨고요.”“다툼이 아니라 약혼이 끝났습니다. 제 동의 없이 준비를 계속하지 말아 주세요.”담당자는 공동 예약으로 등록된 계약이라 최종 해지와 비용 정산에 관한 절차를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여원은 취소 규정과 계약서 사본, 현재까지 발주된 항목의 내역을 요청한 뒤 직접 방문하겠다고 알렸다.통화를 마치고 나자 지하철 창에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다섯 번이나 결혼식 날짜가 바뀌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먼저 취소를 말하지 않았다. 시헌이 기다려 달라고 하면 기다렸고, 세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속상한 마음을 삼켰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여원은 시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예식장에 결혼식 진행하겠다고 했어?][당연하지. 결혼식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우리 약혼은 끝났어.][네가 화났다고 결혼까지 취소할 수는 없어. 양가 부모님도 생각해야지.]여원은 마지막 메시지를 읽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결혼을 결정할 때는 자신의 동의가 필요했으면서, 끝내는 일에는 왜 시헌의 허락까지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예식장 상담실에 들어선 여원은 자신보다 먼저
“일곱 해 만난 사이를 이런 걸로 끝내겠다는 거야?”“이런 일들이 일곱 해 동안 쌓였어.”시헌은 한동안 여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었다.“너 지금 나 겁주려고 이러는 거지?”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내가 세린이랑 연락 끊고 네 비위 맞춰 주길 바라는 거잖아.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될 것 같아?”그는 반지 상자를 손끝으로 밀어 여원 쪽으로 돌려놓았다.“반지 다시 껴. 유치하게 굴지 말고.”여원은 상자를 집지 않았다.시헌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한여원.”그가 낮게 이름을 불렀다.“내가 지금 좋게 말할 때 그만해.”여원은 그의 눈을 바라봤다.“나도 좋게 말하고 있어.”“너 지금 나한테 이별 통보하는 거야?”“응.”시헌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허락할 것 같아?”여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별하는 데 네 허락이 필요해?”그 말에 시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그는 식탁 위 반지 상자를 집어 들더니 여원의 손을 붙잡았다.“손 줘.”여원은 손을 빼려 했지만 시헌이 놓아주지 않았다.“반지 끼라고.”“놓아.”“네가 지금 감정적으로 이러는 거잖아. 며칠 지나면 후회할 일 만들지 마.”시헌은 반지를 꺼내 여원의 손가락에 끼우려 했다. 여원이 손을 움켜쥐자 그는 더 세게 붙잡았고, 그 순간 그녀의 손목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아프니까 놓으라고.”그제야 시헌의 손이 멈췄다.여원은 손을 빼내 반지를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끝내자, 시헌아.”그녀는 떨리는 손을 식탁 아래로 내렸다.“나는 이제 네 약혼녀로 살고 싶지 않아.”시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여원을 바라봤다.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는 오세린의 이름이 떠 있었다.시헌은 반사적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원은 그 손을 바라봤다.이별을 통보받은 순간에도 그는 세린의 전화를 먼저 확인하고 있었다.“받아.”여원이 말했다.시헌이 고개를 들었다.“뭐?”“세린이 전화잖아. 받아야지.”시헌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다가 다시
여원은 그를 바라봤다.“지금 나한테 나가라고 했어?”“싸울 거면 나가라는 거야.”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이 집에 들어오기도 전에 분위기 망치지 말고.”여원은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봤다.집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시헌은 자신에게 나가라고 말했다.세린은 익숙하게 주방 서랍을 열어 칼을 꺼냈다. 어느 서랍에 무엇이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손놀림이었다.“오빠, 양파는 내가 썰게.”“손 다치니까 내가 해.”시헌은 세린의 손에서 칼을 받아 들고 그녀를 자기 옆으로 물렸다. 세린은 그의 팔에 몸을 기댄 채 냉장고 안을 들여다봤다.여원은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둘이 참 잘 어울린다.”시헌이 고개를 들었다.“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그냥 보이는 대로 말한 거야.”세린은 황급히 시헌에게서 떨어졌다.“언니, 그런 뜻 아니야. 우리는 그냥…….”“알아.”여원은 세린의 말을 끊었다.“가족 같은 사이라는 거.”그 말을 들은 시헌은 오히려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면서 왜 그래?”여원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집 안을 한 번 둘러본 뒤 현관으로 향했다.시헌은 붙잡지 않았다.“문 잘 닫고 가.”그 말이 마지막이었다.***여원은 그날 밤 약혼반지를 빼 보았다.오랫동안 끼고 있던 반지라 손가락에 희미한 자국이 남았다. 그녀는 반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보다가 작은 상자에 넣었다.일곱 해의 연애와 다섯 해의 약혼이 반지 하나로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함께한 시간이 너무 길었고, 그동안 포기한 것도 많았다.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더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시헌이 세린에게서 손을 떼기를 기다려야 할까.자신의 생일을 기억해 주기를 기다려야 할까.아니면 신혼집에 자신의 실내화 하나 놓일 자리가 생기기를 기다려야 할까.여원은 반지 상자를 닫았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시헌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저녁 일곱 시. 우리 집으로 와. 꼭 할 말이
“나를 혼자 두고 간 게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라, 세린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아.”시헌의 표정이 굳었다.“너 정말 변했다.”그는 여원의 어깨 너머로 집 안을 들여다보다가 식탁 위에 놓인 작은 케이크 상자를 발견했다. 반쯤 먹다 남은 케이크 옆에는 짧게 타다 꺼진 초가 있었다.잠시 그의 시선이 멈췄다.그러나 시헌은 케이크에 대해 묻지 않았다.“세린이한테 오늘 중으로 사과해. 그럼 나도 어제 일은 더 얘기 안 할게.”여원은 그를 바라봤다.“네가 내 생일을 망쳐 놓고, 나더러 세린이한테 사과하라고?”“망쳤다는 말 좀 그만해.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시헌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네가 이렇게 나오면 결혼하고도 힘들어. 내 주변 사람들까지 다 네 눈치 보게 할 거야?”여원은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오늘은 가 줘.”시헌이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나 쫓아내는 거야?”“응. 나 혼자 있고 싶어.”그는 여원이 문을 열어 주자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세린이한테 사과하기 전까지는 나도 연락 안 해.”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시헌은 그녀가 붙잡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문턱 앞에서 잠시 기다렸지만, 여원이 고개를 들지 않자 거칠게 몸을 돌렸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여원은 식탁으로 돌아가 케이크 상자를 덮었다.***사흘 뒤, 여원은 신혼집에 직접 가 보기로 했다.출입카드는 여전히 세린에게 있었지만, 시헌에게서 받은 공동 계약 관련 서류가 있었기에 관리사무소에 방문 절차를 문의할 수 있었다. 필요한 확인을 마친 뒤 안내받은 방법으로 집에 들어섰을 때, 여원은 현관에서부터 낯선 향기를 맡았다.달콤한 꽃향기가 거실 전체에 퍼져 있었다.현관 신발장에는 분홍색 실내화가 놓여 있었고, 거실 소파에는 세린이 평소 가지고 다니던 담요와 비슷한 연보라색 담요가 접혀 있었다.여원은 거실 한가운데 멈춰 섰다.자신이 고른 아이보리색 커튼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짙은 회색 커튼이 달려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