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별을 고하자, 그가 미쳤다

내가 이별을 고하자, 그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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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을 사랑했고, 5년을 약혼녀로 기다렸다. 하지만 한여원과 백시헌 사이에는 언제나 세 사람이 있었다. 여원과 시헌, 그리고 오세린. 다섯 번이나 미뤄진 결혼. 마침내 날짜가 잡혔지만 웨딩홀도, 드레스도, 신혼집도 모두 세린이 골랐다. 여원이 상처받을 때마다 시헌은 말했다. “세린이는 가족 같은 애야. 네가 이해해.” 그녀가 울면 시헌은 세린을 달랬고, 여원이 떠나려 하면 철없는 투정이라며 웃어넘겼다. 결국 여원은 7년의 사랑을 끝냈다. “백시헌, 우리 헤어져.” 그는 비웃었다. 그녀가 자신 없이 살 수 없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여원이 정말 떠난 순간, 다정했던 남자는 미쳐 버렸다. “내가 널 놓아준다고 한 적 있어?” 그제야 여원은 알았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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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1화

“오빠, 뒤에 지퍼 좀 올려 줘. 혼자서는 손이 안 닿아.”

한여원은 신부 대기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하얀 웨딩드레스가 보였다. 거울 앞에 선 오세린은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넘긴 채 등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뒤에 선 백시헌은 드레스 지퍼를 올리느라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가만있어. 자꾸 움직이니까 안 올라가잖아.”

“오빠 손이 차가워서 그렇지. 아, 간지러워.”

세린이 웃으며 몸을 비틀자 시헌은 그녀의 허리를 조금 더 단단히 붙잡았다. 지퍼를 끝까지 올린 뒤에도 손을 바로 떼지 않고, 어깨에 걸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됐어. 이제 돌아봐.”

세린이 거울 앞에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바닥을 쓸었고, 허리선을 따라 박힌 작은 진주들이 조명 아래에서 반짝였다.

여원은 그 진주들을 알아봤다.

지난달 드레스 숍에서 자신이 직접 골랐던 웨딩드레스였다. 수십 벌을 입어 본 끝에 선택한 옷이었고, 시헌에게 사진을 보냈을 때도 그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시헌은 세린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오빠, 나 어때?”

세린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예쁘네. 잘 어울려.”

“정말?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 좋다.”

시헌은 세린의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웃었다.

“넌 원래 이런 거 잘 어울리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원의 손에서 서류 봉투가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봉투에서 계약서 몇 장이 빠져나오자, 그제야 두 사람이 문 쪽을 돌아봤다.

“여원아? 언제 왔어?”

시헌의 목소리에는 반가움보다 뜻밖이라는 기색이 먼저 묻어났다.

세린은 거울에 비친 여원을 발견하자 환하게 웃었다.

“언니! 나 이 드레스 어때? 너무 예쁘지 않아?”

여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시헌의 손이 여전히 세린의 허리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시헌아, 손 좀 떼.”

시헌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그제야 세린의 허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드레스 지퍼 올려 준 건데 왜?”

“직원분들도 계시잖아.”

“다들 바빠서 내가 도와준 거야. 그게 뭐가 문제야?”

여원은 두 사람 뒤에 놓인 이동식 옷걸이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직원이 입혀 주다 만 듯한 드레스 커버와 장갑이 걸려 있었다.

“내가 입기로 한 드레스를 세린이가 입고 있는 것도 문제고, 네가 직접 지퍼를 올려 주는 것도 문제야.”

세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언니, 미안해. 내가 너무 예뻐서 한 번 입어 보고 싶다고 했어. 오빠는 그냥 도와준 거야.”

그녀는 드레스의 허리 부분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화낼 줄 알았으면 안 입었을 텐데.”

시헌이 곧바로 세린의 어깨를 감쌌다.

“네가 왜 미안해해. 한 번 입어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여원은 시헌을 바라봤다.

“그 드레스는 내가 결혼식 날 처음 입으려고 했던 거야.”

“그래서 지금 못 입게 됐어?”

“시헌아.”

“여원아, 네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세린이가 일부러 널 기분 나쁘게 하려고 입은 것도 아니잖아.”

세린은 고개를 숙인 채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시헌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가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자, 세린은 기다렸다는 듯 눈물을 글썽였다.

“오빠, 나 때문에 두 사람 싸우지 마.”

“안 싸워.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시헌은 엄지손가락으로 세린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여원은 그 손길을 바라보며 가방 끈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시헌 앞에서 울었던 날들이 떠올랐지만, 그가 저렇게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 준 기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울지 말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울어 봐야 달라지는 건 없으니 감정을 추스르라는 말을.

“세린아, 드레스 갈아입어 줘.”

여원이 말했다.

세린은 시헌의 셔츠를 붙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바로 갈아입을게.”

그러나 시헌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여원을 향해 돌아섰다.

“사과부터 해.”

여원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

“세린이 민망하게 만들었잖아. 직원들까지 다 보고 있는데 꼭 그렇게 말해야 했어?”

여원은 텅 빈 웃음을 흘렸다.

“내 드레스를 입은 사람한테 벗어 달라고 한 게 사과할 일이야?”

“말투가 문제라는 거야. 너는 왜 항상 세린이 앞에서만 그렇게 날이 서?”

그는 세린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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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오빠, 뒤에 지퍼 좀 올려 줘. 혼자서는 손이 안 닿아.”한여원은 신부 대기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반쯤 열린 문 너머로 하얀 웨딩드레스가 보였다. 거울 앞에 선 오세린은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넘긴 채 등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뒤에 선 백시헌은 드레스 지퍼를 올리느라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가만있어. 자꾸 움직이니까 안 올라가잖아.”“오빠 손이 차가워서 그렇지. 아, 간지러워.”세린이 웃으며 몸을 비틀자 시헌은 그녀의 허리를 조금 더 단단히 붙잡았다. 지퍼를 끝까지 올린 뒤에도 손을 바로 떼지 않고, 어깨에 걸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됐어. 이제 돌아봐.”세린이 거울 앞에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바닥을 쓸었고, 허리선을 따라 박힌 작은 진주들이 조명 아래에서 반짝였다.여원은 그 진주들을 알아봤다.지난달 드레스 숍에서 자신이 직접 골랐던 웨딩드레스였다. 수십 벌을 입어 본 끝에 선택한 옷이었고, 시헌에게 사진을 보냈을 때도 그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시헌은 세린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오빠, 나 어때?”세린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예쁘네. 잘 어울려.”“정말?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 좋다.”시헌은 세린의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웃었다.“넌 원래 이런 거 잘 어울리잖아.”그 말을 듣는 순간 여원의 손에서 서류 봉투가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봉투에서 계약서 몇 장이 빠져나오자, 그제야 두 사람이 문 쪽을 돌아봤다.“여원아? 언제 왔어?”시헌의 목소리에는 반가움보다 뜻밖이라는 기색이 먼저 묻어났다.세린은 거울에 비친 여원을 발견하자 환하게 웃었다.“언니! 나 이 드레스 어때? 너무 예쁘지 않아?”여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시헌의 손이 여전히 세린의 허리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시헌아, 손 좀 떼.”시헌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그제야 세린의 허리에서 손을 거두었다.“드레스 지퍼 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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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앞으로 우리 집안 사람이 될 거면 이 정도는 너그럽게 넘어갈 줄도 알아야지.”여원은 입술을 다물었다.결혼할 집안의 며느리가 되려면 참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드레스를 다른 여자가 먼저 입어도, 약혼자가 그 여자의 허리를 감싸도, 불편하다는 말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시헌은 여원이 어떤 표정으로 서 있는지 보지도 않은 채 세린에게 다정하게 말했다.“가서 갈아입어. 내가 밖에서 기다릴게.”세린은 여원을 한 번 바라본 뒤 고개를 숙였다.“언니, 정말 미안해.”그러면서도 시헌의 손을 놓기 전까지는 한참을 망설였다.***복도로 나온 시헌은 신부 대기실 문이 닫히자마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오늘은 좀 좋게 넘어가면 안 됐어?”여원은 벽에 걸린 웨딩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 속 신랑은 신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조금 전 시헌이 세린에게 했던 행동과 꼭 닮아 있었다.“네가 세린이 드레스 지퍼 올려 주는 게 당연해?”“걔가 부탁했으니까 해 준 거지.”“직원한테 부탁하면 됐잖아.”“그걸 가지고 지금까지 따질 거야?”시헌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한숨을 쉬었다. 여원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다음 일정부터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허리는 왜 감쌌어? 머리카락은 왜 넘겨 줬고?”“드레스가 흘러내리니까 잡아 준 거야. 머리카락은 지퍼에 걸려 있었고.”그는 여원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너 지금 세린이 질투하는 거야?”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걔는 어릴 때부터 내가 챙겨 온 애야. 동생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해야 해?”“동생한테도 그렇게 해?”“뭘 또.”“허리 감싸고, 머리 넘겨 주고, 예쁘다고 말하는 거.”시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네가 이상하게 보니까 이상한 거야. 나는 세린이를 여자로 생각해 본 적 없어.”그 말은 너무도 단호해서 오히려 여원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헌은 자신이 세린에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손을 뻗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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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원형 테이블 중앙에는 세린이 고른 꽃 장식이 놓여 있었고, 시헌의 옆자리에는 세린의 가방이 올려져 있었다. 여원은 그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직접 끌어당겨 앉았다.담당 직원이 자료를 펼치며 밝게 웃었다.“신부님, 아까 말씀하신 꽃 장식은 이걸로 확정할까요?”직원의 시선은 세린에게 향했다.세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는 순간, 여원이 서류 위에 손을 얹었다.“잠깐만요. 신부는 저예요.”직원은 여원과 세린을 번갈아 보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오세린 님께서 신부 측 실무를 전담하신다고 전달받아서 제가 착각했습니다.”세린이 민망한 듯 웃었다.“제가 결혼 준비를 많이 도와주다 보니까요. 직원분도 헷갈리셨나 봐요.”그녀는 자연스럽게 시헌의 팔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그치, 오빠?”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아니었으면 준비도 못 했지.”여원은 두 사람의 팔을 바라봤다.조금 전 신부 대기실에서 있었던 일이 무색할 만큼 세린은 다시 시헌에게 몸을 붙이고 있었다. 시헌 역시 그녀가 기대는 것을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았다.“세린아, 팔 좀 놔.”여원이 말했다.세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놀란 듯 팔을 뗐다.“아,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랬어.”시헌은 곧장 여원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사람들 앞에서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여원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직원이 건넨 청첩장 시안을 펼쳤다.표지는 짙은 자주색이었다.지난주 자신이 고른 아이보리색 청첩장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이었다.“이건 누가 바꿨나요?”직원이 답하기도 전에 세린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골랐어. 오빠네 집안 분위기랑 잘 어울리잖아.”여원은 청첩장 안쪽을 확인했다.직접 골랐던 문구도 바뀌어 있었다.“나는 이 디자인으로 하기로 한 적 없는데.”“언니가 고른 건 너무 평범했어. 오빠가 대표인데 결혼식도 어느 정도 격식이 있어야지.”세린은 시헌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오빠도 이게 더 고급스럽다고 했잖아.”시헌은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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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시헌이 여원을 노려봤다.“한여원.”그가 낮게 이름을 불렀다.“이제 그만해.”여원은 시헌을 바라봤다.“내 결혼식이야.”“내 결혼식이기도 해.”그는 세린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린 채 말을 이었다.“그런데 넌 왜 네 마음대로만 하려고 해?”여원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자신의 결혼식을 두고 다투는 동안에도 시헌은 세린의 손을 잡고 있었다.그는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듯했다.“시헌아, 손.”시헌이 눈살을 찌푸렸다.“손이 왜?”여원은 포개진 두 사람의 손을 가리켰다.세린이 먼저 손을 뺐다.“아, 언니. 미안해. 나도 모르게…….”시헌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이제 손잡는 것도 문제야?”“응.”여원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내 약혼자가 다른 여자 손을 잡고 나한테 화내는 건 문제야.”시헌의 얼굴이 굳었다.“세린이가 다른 여자야?”그 질문에 여원은 잠시 숨을 멈췄다.시헌에게 세린은 다른 여자가 아니었다.그래서 허리를 감싸도 괜찮았고, 머리카락을 넘겨 줘도 괜찮았다. 손을 잡거나 얼굴을 만져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그에게 세린은 언제나 예외였다.“너한테는 아니겠지.”여원이 낮게 말했다.“그런데 나한테는 다른 여자야.”***식순을 확인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세린이 입장곡을 고르면 시헌은 그 곡이 좋다고 했고, 꽃 장식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 굳이 다른 견본을 보지 않았다. 여원이 의견을 내면 시헌은 이미 결정한 일을 다시 꺼낸다며 짜증을 냈다.그 와중에 세린이 물을 마시다 입가에 물방울을 묻히자, 시헌은 자연스럽게 냅킨을 집어 들었다.“가만있어.”그는 세린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린 뒤 입가를 닦아 주었다.세린은 익숙한 듯 얼굴을 들었다.“묻었어?”“응. 여기.”“고마워, 오빠.”시헌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냅킨을 접어 내려놓았다.여원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지난겨울, 여원이 독감으로 사흘을 앓았을 때 시헌은 중요한 회의가 있다며 집에 오지 않았다. 약을 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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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여원은 그의 눈을 바라봤다.“그런데 왜 나한테는 세린이한테 하는 만큼도 다정하지 않아?”시헌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러나 곧 차갑게 대답했다.“너는 내가 그렇게까지 챙기지 않아도 되잖아.”여원의 손끝이 굳었다.“넌 혼자서도 잘하니까. 세린이는 그렇지 못해.”시헌은 그 말이 당연하다는 듯 서류를 다시 펼쳤다.“이제 결혼식 얘기나 하자.”여원은 그를 바라봤다.자신이 혼자서도 잘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을 혼자 견뎌 왔는지, 시헌은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계약서 원본을 보여 주세요.”여원이 직원에게 말했다.직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두툼한 서류철을 가져왔다.여원은 가장 위에 놓인 계약서부터 펼쳤다. 처음 예약했던 날짜가 검은 선으로 지워져 있었고, 그 아래에 새로운 날짜가 적혀 있었다.그 날짜도 다시 지워져 있었다.다섯 번이나 변경된 결혼 날짜를 손끝으로 따라가자, 그때마다 혼자 예식장을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첫 번째 결혼식은 세린의 교통사고 때문에 미뤄졌다. 시헌은 병원에서 사흘을 지냈고, 여원은 혼자 예식장에 와서 계약 변경을 부탁했다.두 번째는 세린의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였다. 세 번째는 세린의 해외 일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유였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역시 세린의 사정이 먼저였다.그때마다 시헌은 여원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세린의 일이 해결되면 결혼하자고, 자신들은 언제든 결혼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냐고 말했다.여원은 그 말을 믿었다.결혼 날짜가 바뀌어도 사랑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계약서를 넘기던 손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잠깐만요. 여기 신부 연락처가 잘못돼 있어요.”직원이 노트북을 확인했다.“현재 등록된 번호 말씀하시는 거죠? 작년 11월에 변경됐습니다.”여원은 번호를 다시 읽었다.오세린의 번호였다.“누가 변경했나요?”“신랑 측 요청으로 기록돼 있습니다.”여원이 시헌을 바라봤다.“네가 바꿨어?”시헌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응.”“왜?”“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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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 말에 여원은 잠시 숨을 멈췄다.다시 생각하겠다고.시헌이 자신과의 결혼을.그는 지금까지 다섯 번이나 결혼식을 미뤘다. 그때마다 여원이 울고, 기다리고, 부탁했다.그런데 이제는 세린을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결혼을 다시 생각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여원은 천천히 계약서를 덮었다.“그래.”그녀가 낮게 말했다.“생각해 봐.”시헌의 눈썹이 움직였다.“뭐?”“나도 생각해 볼게.”***시헌은 여원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는 재킷을 집어 들고 직원에게 말했다.“나머지는 기존대로 진행해 주세요. 변경 사항 있으면 세린이한테 연락하시고요.”여원이 고개를 들었다.방금 자신의 번호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같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신부님 연락처는 변경하지 않을까요?”시헌이 먼저 대답했다.“그대로 두세요.”그는 휴대전화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여원아, 적당히 해. 나 다음 일정 있어.”세린도 가방을 챙겼다.“오빠, 나도 같이 가면 안 돼?”“타.”시헌은 세린의 가방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고, 세린은 웃으며 그의 팔을 끼었다.“오빠, 오늘 저녁 뭐 먹을까?”“네가 좋아하는 거.”“그럼 파스타?”“그래. 그걸로 하자.”여원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오늘 저녁 여섯 시에는 시헌과 둘이 식사하기로 약속했었다. 다섯 번째 결혼 연기 이후 처음으로 그가 직접 예약한 레스토랑이었다.여원은 그 약속을 위해 회사에 반차까지 냈다.그런데 시헌은 세린과 저녁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시헌아.”여원이 그를 불렀다.시헌이 문 앞에서 돌아봤다.“왜.”“오늘 저녁 약속 기억해?”그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었다.여원은 그 짧은 침묵만으로도 대답을 알았다.“아, 그거.”시헌이 말했다.“다음에 먹자. 오늘은 세린이 기분 좀 풀어 줘야겠어.”세린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오빠, 아니야. 언니랑 약속 있었으면 나 혼자 갈게.”그녀는 시헌의 팔을 놓는 척했지만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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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세린이 없이 만나자고 했잖아.”한여원은 카페 유리문 너머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손에 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약속 시간보다 십오 분 늦게 나타난 백시헌은 오세린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세린은 그의 팔 안쪽에 바짝 붙어 걸으며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시헌은 여원을 발견하고도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세린이 코트를 벗기 편하도록 한쪽 어깨를 잡아 주고 의자를 빼 준 뒤, 그녀의 목에 감긴 머플러까지 풀어 주었다. 세린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웃는 동안 여원은 맞은편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세린이도 할 말이 있다잖아. 어제 일 때문에 밤새 잠도 못 잤대.”시헌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여원이 자신을 따로 만나자고 한 이유보다 세린이 밤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설명하는 일이 먼저인 듯했다.“나는 너하고 얘기하러 나온 거야. 세린이에게 할 말이 있었으면 따로 연락했겠지.”“알아. 그런데 세린이 앞에서 못 할 얘기가 뭐가 있어?”그는 여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메뉴판을 세린 쪽으로 돌렸다. 세린이 따뜻한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고르자 직원에게 시럽을 빼 달라고 덧붙였고, 그녀가 손이 차갑다며 손바닥을 비비자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아직도 차갑네. 장갑 끼고 다니라니까.”“오빠가 맨날 손 잡아 주잖아.”세린이 장난스럽게 웃자 시헌도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여원은 한참 뒤에야 자신의 주문을 묻는 직원에게 따뜻한 차를 부탁했다. 시헌은 그제야 그녀를 돌아봤지만, 이미 세린의 손을 놓은 뒤였다.“어제 일은 네가 사과하면 끝날 문제야. 세린이가 웨딩드레스 한 번 입어 봤다고 그렇게까지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잖아.”여원은 찻잔을 받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어제 드레스 지퍼를 올려 주던 시헌의 손과 세린의 허리를 감싸던 모습이 떠올랐지만, 지금 그 일을 다시 설명해 봐야 같은 말만 돌아올 것이 뻔했다.“나는 사과하지 않을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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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그 집은 내가 살 집이야. 적어도 출입카드를 누구에게 줄지는 나한테 먼저 물었어야 하지 않아?”시헌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나도 살 집이야. 내가 세린이한테 부탁한 게 그렇게 잘못됐어? 네가 바빠서 신경 못 쓰는 동안 걔가 대신 챙겨 준 건데,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세린은 휴대전화를 꺼내 신혼집 사진을 보여 주었다. 거실 바닥에 앉아 웃고 있는 그녀의 뒤로 시헌의 재킷이 소파에 걸려 있었고, 테이블에는 배달 음식 용기 두 개가 놓여 있었다.“어제 오빠랑 가서 가구 배치도 봤어. 생각보다 거실이 넓더라.”사진을 넘기던 세린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다음 사진에는 시헌이 그녀의 뒤에 바짝 서서 커튼 길이를 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시헌의 팔이 세린의 어깨 너머로 뻗어 있었고, 세린은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이건 오빠가 커튼 달아 보다가 찍힌 거야. 내가 줄자를 잘못 잡아서 오빠가 도와줬어.”여원은 사진 속 두 사람의 거리보다 자신이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집에서 그들이 이미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카드 줘. 집 정리는 내가 직접 할게.”세린이 카드를 내밀려 하자 시헌이 먼저 봉투를 집어 들었다.“그건 세린이가 가지고 있어.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여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내가 직접 하겠다잖아.”“언제 할 건데? 네가 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미뤄 놓은 게 얼마나 많은데.”시헌은 봉투를 세린의 가방 위에 올려놓았다.“집은 세린이가 마무리할 거야. 괜히 네 고집 때문에 일정 꼬이게 하지 마.”여원은 자신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시헌은 지금 그녀가 집을 꾸밀 권리를 빼앗겼다는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신혼집은 자신이 소유한 공간이었고, 세린은 그 공간을 대신 관리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정작 그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할 여원만 결정에서 빠져 있었다.***주말 저녁, 시헌의 본가 식당에는 긴 테이블이 차려져 있었다.여원이 도착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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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괜찮아. 내가 조심했어야 했는데.”시헌은 세린의 손등을 엄지로 천천히 문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여원에게 시선을 돌렸다.“여원아, 세린이가 이렇게까지 양보하는데 이제 됐지?”여원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견디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결국 시헌의 옆자리는 잠시 비워졌지만, 식사가 시작되자 세린은 자연스럽게 그곳에 앉아 그의 접시에 갈비를 덜어 주었다.“오빠, 이건 뼈 발라 놨어.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시헌은 세린이 건넨 고기를 받아먹으며 자신의 접시에서 가장 부드러운 한 점을 골라 그녀의 그릇에 올려놓았다.여원은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일곱 해를 만나는 동안 시헌은 그녀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 주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여원이 음식을 먹다가 손을 데었을 때도 조심하라고 말했을 뿐이었다.그런데 세린에게는 손등을 부딪친 것만으로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친 곳을 살폈다.식사를 마친 뒤 여원이 물을 마시러 주방에 들어갔을 때, 시헌과 세린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오빠, 나 아까 진짜 민망했어. 언니가 그렇게까지 할 줄 몰랐거든.”“신경 쓰지 마. 여원이가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래.”“그래도 내가 오빠 옆에 앉으면 안 되는 건가 봐.”시헌은 잠시 말이 없었다.이어서 세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오빠는 내가 옆에 앉는 게 싫어?”“그럴 리가.”시헌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네가 옆에 있는 게 익숙한데.”여원은 주방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시헌은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는 얼굴로 세린을 바라보고 있었다.***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헌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신호에 걸리자 차를 멈췄다.“오늘 어머니 앞에서 한 행동은 사과드려.”여원은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었다.“네 옆에 앉고 싶다고 한 게 사과할 일이야?”“자리 하나 가지고 집안 분위기를 망쳤잖아. 어머니가 세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면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내가 난처해져.”시헌은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두드렸다.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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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무슨 일인데?”“세린이가 지금 상태가 안 좋아.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진다고 해서 병원에 데려가는 중이야.”여원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린이 정말 아픈 것이라면 병원에 가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시헌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다급함이 가득하면서도, 자신과의 약속을 취소하는 데 대한 미안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어느 병원이야? 나도 갈게.”“오지 마. 세린이가 너 보면 더 불안해할 것 같아.”그때 전화기 너머로 세린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나 때문에 언니 생일 망치면 어떡해…….”시헌은 곧바로 목소리를 낮췄다.“그런 생각 하지 마. 지금은 네 몸이 먼저야.”여원은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시헌아, 오늘 내 생일이야.”“알아. 그런데 생일은 내년에도 있잖아. 지금 세린이가 이렇게 힘든데 네 생일만 챙길 수는 없잖아.”그 말에 여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시헌은 그녀의 침묵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나중에 연락할게.”통화가 끊겼다.여원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레스토랑 유리창에는 자신의 얼굴이 비쳤고, 맞은편에는 시헌을 위해 비워 둔 의자가 놓여 있었다.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손님, 동행분은 조금 더 기다리실까요?”여원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주문할게요.”그녀는 두 사람이 함께 먹으려고 골라 두었던 코스 대신 가장 간단한 식사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왔을 때는 이미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그대로 자리를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생일 저녁을 또다시 혼자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시헌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세린이 진정됐어. 이제 괜찮아.]여원은 그 문장을 읽고 답장을 쓰지 않았다.잠시 뒤 세린의 SNS 알림이 떴다.병원 침대 위에 놓인 손 두 개가 찍힌 사진이었다. 한 손에는 수액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고, 그 위로 시헌의 손이 포개져 있었다.사진 아래에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오늘도 오빠가 옆에 있어 줬다.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사람.*여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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