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때 첫 번째 코스 요리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정갈하게 담긴 음식들을 본 지원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밝아졌다.“우와…… 맛있겠다.”
작게 감탄하며 자기 앞접시를 바라보는 얼굴.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태겸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태겸은 잠시 말없이 지원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은 대체로 비슷했다.
늘 완벽했고, 늘 계산적이었으며, 늘 자신을 의식했다. 그런데 서지원은 이상하리만큼 꾸밈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진심으로 기분 좋아하고, 팀원들 말에 잘 웃고, 사소한 분위기에도 행복해했다.그 자연스러운 온도가 자꾸만 마음에 밟혔다.
“많이 드세요.
오늘은 편하게 식사하시고요. 몇 달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태겸이 낮게 한마디를 얹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분위기가 조금씩 편안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지원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을 들어 팀원들의 잔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조심조심 물을 따르느라 지원의 신경이 온통 잔에 쏠려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지원의 의자 옆,
비어 있는 자리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숄더백이 묵직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앞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평소 가방에 이것저것 넣는 게 많아 지퍼를 잠그지 않고 열어둔 채 다니던 버릇이 화근이었다. 오늘 밸루아 브리핑 자료들과 태블릿 PC까지 꽉꽉 들어차 앞으로 쏠린 가방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질 듯 위태롭게 넘어가고 있었다.“어! 차장님!”
마침 그 빈자리 옆에 앉아 있던 팀의 막내 규리가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앞으로 스르륵 넘어지려던 가방을 양손으로 턱 붙잡아 세운 규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휴,
다행이다! 쏟아질 뻔했어요.”“아,
고마워 규리야. 아…… 쏟아졌으면 대참사야, 든 게 너무 많아서.”지원이 민망한 듯 싱긋 웃으며 물병을 내려놓았다.
규리는 가방을 똑바로 세워주려다,
활짝 열려 있는 가방 안쪽에 있는 투명한 유리병 하나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어? 차장님,
향수 거의 다 쓰셨다고 하더니 정말 완전 조금 남았는데요?”규리가 신기한 듯 열린 가방 속의 향수병을 보며 말하자,
지원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응,
맞아. 아까 보니까 일주일도 못 쓰겠더라고, ㅎㅎ. 생각난 김에 오늘 새 거 하나 사서 가야겠다.”두 사람의 소소한 대화를 듣고 있던 태겸의 귀가 순간 쫑긋했다.
태겸의 자리에서는 가방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아 어떤 향수병인지 전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사적인 호기심이 이 명백한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이때다 싶어,
태겸은 아주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어조로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그 향수,
혹시 밸루아 겁니까?”“네?”
지원이 '나한테 묻는 건가?' 싶은 얼굴로 큰 눈을 더 크고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니,
제품이 저희 건가 해서.”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덧붙인 태겸이 물컵을 들어 올렸다.
괜히 목만 축이듯 물을 넘겼다.지원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아,
뭐…… 아까 수정안 설명해 주실 때… 향이….”말끝을 흐리던 태겸이 갑자기 크흠,
헛기침을 하더니 자세를 당당하게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완벽한 비즈니스용 꽃미소를 장착하며 도도하게 표정을 지어 보였다.“제가 모르면 되겠습니까?”
'나 윤태겸이야' 하는 오만한 아우라를 풍기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렇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향수예요.”지원은 아까 회의장에서 태겸에게 시안 설명해 주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아무 의심 없이 대답했다.
'오, 짙게 뿌리지 않았는데도 잘 아시네. 하긴 사장이나 다름없는 총괄이사인데 모르는 게 이상한가' 하는 생각뿐이었다.태겸의 시선이 천천히 지원에게로 향했다.
“좋아하는 향수라니,
그거 영광이네요.”지원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유,
영광이라뇨. ㅎㅎ”그때 규리가 나서서 이야기를 받았다.
“차장님 그거 되게 오래 썼다 그랬지 않아요?”
“응,
맞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받았던 향수 선물이었는데 그때부터 계속 썼으니까.”“……고등학교 때요?”
태겸이 괜히 왼손으로 물수건을 한번 만지면서 자연스레 물었다.
“네.”
지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백화점에 갔다가 우연히 선물 받게 됐는데,
그때부터 계속 이것만 써요.”싱긋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모먼트 팀의 남자 팀원 한 명이 지원에게 질문을 던졌다.“차장님 부잣집 따님이셨나 보다.
고등학생이 이런 브랜드 향수를 다 알고.”지원이 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전혀 그런 건 아니고. 이런 고가의 향수를 내가 그 나이에 알 리가 없어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으니까, 점원분이 학생이 쓰기에 가장 호불호 없는 라인을 추천해 주셨어. P라인으로. 그리고 그냥 '5'는 내가 좋아하는 숫자라서 골랐어. 그런데 시향해 보니까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그걸로 구매하고, 아껴 썼고, 그 이후에도 계속 그것만 쓰게 된 거지.”태겸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
그래서였구나.그 향이 그렇게 자연스러웠던 이유가.
억지로 꾸며낸 향이 아니라,
오랜 시간 한 사람의 체온에 스며들어 익숙해진 냄새였기에 그랬던 거였다.그 향이 서지원에게서 더 달콤하고 말랑거리는 느낌의 잔향으로 왜 이상하게 계속 기억에 남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저 남직원이 갑자기 질문할 때는 살짝 짜증이 났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주 나이스한 질문이었다.태겸의 입가가 아주 느리게 조금 더 올라갔다.
“훗.”
짧은 웃음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
도하가 미간을 꿈틀했고, 박석민 팀장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
주문을 마친 뒤 태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잠시 실례하겠습니다.”“아, 네.”태겸이 화장실 쪽으로 향하고, 지원은 혼자 창가 자리에 남았다.창밖 풍경은 여전히 좋았다.흐린 하늘 아래로 펼쳐진 초여름의 녹음. 과하게 꾸미지 않았는데도 묘하게 기분이 편안해지는 풍경이었다.지원은 무심코 휴대폰을 꺼냈다.찰칵.창밖 풍경도 찍고.찰칵.정겨운 메뉴판도 찍었다.‘여기 진짜 괜찮다.’나중에 친구들이랑 한 번 더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사진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마음에 듭니까?”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들자 어느새 태겸이 돌아와 있었다.“아, 네.”지원이 활짝 웃었다.“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좋아요.”태겸은 자리에 앉으며 손에 남은 물기를 가볍게 털었다.그 순간이었다.지원의 시선이 그의 소매 끝에 멈췄다.화사한 민트색 니트의 잔털 위로 작은 물방울 몇 개가 맺혀 있었다.“어?”지원이 무심코 말했다.태겸이 시선을 내렸다.“네?”지원은 별생각 없이 테이블 위의 냅킨을 한 장 뽑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이사님, 잠시만요.”“……”태겸이 반응하기도 전에 지원의 손이 그의 소매 끝으로 향했다.꾹. 꾹.냅킨이 니트 위의 물방울을 조심스럽게 흡수했다.“니트에 물 튀었어요.”지원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이런 거 자국 남으면 은근히 신경 쓰이잖아요.”태겸은 순간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던 오랜 습관이었다.누군가가 이렇게 거리낌 없이 자기 몸이나 옷에 손을 대는 일 자체가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하지만 몸을 물리려던 움직임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지원에게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 정말 순수하게, 그냥 물이 묻어 있으니 닦아준 것뿐이었다.태겸은 결국 그대로 굳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물방울을 닦아주는 지원의 얼굴에 꽂혔다.잠시 후, 지원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됐네요.”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의자
검은 세단은 도심을 벗어나 조금 한적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지원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했던 방향과 달랐다.솔직히 말하면 호텔 레스토랑이나 회원제 다이닝 같은 곳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차는 번화가를 지나 조금 더 조용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태겸의 차가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지원은 창밖을 바라봤다.“…어?”예상과 전혀 달랐다.크지 않은 건물, 1층 전체를 사용하는 식당이었다.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나무와 돌이 적절히 섞인 인테리어가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무엇보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이 좋았다. 과하게 꾸미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예쁘다…”지원의 솔직한 감탄에 태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마음에 듭니까?”“네.”지원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했던 곳이랑 달라서 더 좋은 것 같아요.”태겸은 대답 대신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시 지원의 팔꿈치 아래를 받쳤다.“조심.”“아, 네. 감사합니다.”두 사람은 나란히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맑게 울렸다.딸랑.카운터 쪽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순간 환하게 웃는 얼굴.“오랜만이네요, 이사님.”태겸이 피식 웃었다.“형. 또.”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이사님을 이사님이라 부르는데 뭐가.”“듣기 싫습니다.”“그럼 자주 와.”지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처음 보는 태겸의 표정이었다. 딱딱한 비즈니스 미소가 아니라 정말 편안한 얼굴.그 모습을 보며 지원도 괜히 따라 웃었다.그때 남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향했다.“안녕하세요.”지원이 먼저 꾸벅 인사했다.“서지원이라고 합니다.”남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반갑습니다.”시원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부드러운 인상인데 이상하게 눈에 띄는 분위기가 있었다.“구자언입니다. 여기 주인입니다.”“아, 네 안녕하세요~.”지원은 순
지원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게 말려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그때, 태겸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갑시다.”“아…….”“배고픕니다.”그 덤덤하고도 인간적인 한마디에, 지원은 멍하던 표정을 갈무리했다.그리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보였다.“아, 배고프셨구나.”“네.”“그럼 빨리 가야겠네요.”태겸은 별말 없이 지원의 보폭을 맞췄다.지원이 조금 느려지면 같이 속도를 줄였고, 지원의 발목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팔꿈치를 받쳐 준 손에 은근한 힘이 더해졌다.강하게 잡지도, 억지로 끌지도 않았다.그저 그녀가 절대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든든하게.VIP룸 문을 열고 나오는 두 사람에게 멀찍이 대기하고 있던 지점장과 백화점 직원들이 서둘러 다가왔다.태겸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향해 담백하게 고개를 숙였다.“가보겠습니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저도 너무 감사했습니다.”지원이 옆에서 함께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지점장과 직원들이 일제히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안녕히 가십시오, 이사님.”인사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일반 고객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VIP 전용 통로로 이동했다.두 사람만을 태운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사방이 고요해지며 다시금 밀도 높은 정적이 찾아왔다.태겸은 엘리베이터에 탄 후에도 여전히 지원의 팔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다.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뭉근한 감각이 전해져 오자, 지원은 귓가가 조금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괜히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정작 태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덤덤하고 고요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층수 표시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두 사람의 숨소리만 작게 울리는 밀폐된 공간.그 안을 감도는 묘한 공기 속에서,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을 향해 부드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태겸의 차량이 주차된 VIP 전용 구역으로 향했다.넓고 한적한 주차 공
태겸의 낮은 중얼거림이 VIP룸 안에 아주 짧게 떨어졌다.“환장하겠네.”“네?”“아, 아닙니다. 아무것도.”분명 ‘환장하겠다’고 하신 것 같은데……?바쁘실 텐데 나 때문에 괜히 시간을 뺏기고 계시는 건가 싶어, 지원은 혼자 생각하며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였다.그 순간,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똑똑. 이사님, 지점장입니다. 의무실에서 오셨습니다.”“들어오세요.”태겸의 대답과 함께 백화점 의료 스태프가 들어왔다.중년의 간호사가 지원 쪽으로 다가왔다.“어디 다치셨어요?”“아, 발목이 좀…… 접질린 것 같아요.”지원이 말하자, 간호사가 무릎 앞에 쪼그려 앉아 발목을 살폈다.“많이 붓진 않았네요. 다행히 심하진 않아요.”그 말에 지원이 팽팽하게 굳어 있던 어깨를 살짝 내렸다.“휴…… 다행이다.”그 순간이었다.지원의 발목이 살짝 들려 있는 상태에서, 태겸의 시선이 그쪽으로 굳건히 고정됐다.아까부터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은, 무거울 정도로 깊은 시선이었다.간호사가 발목을 가볍게 돌려보는 순간,“아.”지원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아프죠?”“아, 네…… 조금요.”태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 변화는 거의 표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지만,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간호사는 테이핑을 준비하며 말했다.“다행히 심한 염좌는 아닌데, 당분간 무리하면 안 돼요. 오래 걷지 마시고요.”“네네. 알겠습니다.”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이 정도면 뭐…… 그냥 좀 불편한 정도지.’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아까부터 태겸의 존재감이 너무 선명해서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태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분위기 자체가 VIP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간호사가 테이핑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일단 한번 걸어보실게요.”지원이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한 발.테이핑이 단단하게 받쳐주니 아까보다 훨씬 나았다.욱신거리는 느낌은
1층 명품관, 밸루아 매장.유리로 된 매장 입구가 열리자, 안쪽 공기가 바깥과 확연히 달라졌다.조용하고 정돈된 공간.직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이사님!”순간 공기가 바뀌었다.그런데 바로 그 뒤, 직원들의 시선이 태겸의 옆으로 이동했다.지원이었다.한쪽 팔을 가볍게 받쳐 든 채 들어오는 낯선 여성.그 순간 직원들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누구지?’짧은 정적.한 직원이 당황한 듯 시선을 돌렸다.“이사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태겸은 멈추지 않고 바로 말했다.“VIP룸이요.”“네?”“안에 누구 있습니까.”질문은 단순했다.직원은 잠깐 망설였다.“지금은 비어 있습니다.”“그럼 씁니다.”즉시 결론이었다.지점장이 그제야 급히 앞장서 움직였다.매장 안쪽, 비공개 공간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리고 태겸은 지원을 부축한 채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짧고 정확했다.설명은 없었다.VIP룸 안.조용하고 조도가 낮은 공간이었다.고급스러운 소파와 테이블이 자아내는 분위기.‘평생 내가 이런 곳에 들어올 일이 있을까’ 싶은 공간이었고, 밸루아답게 묵직한 고급스러움으로 실내가 갖춰져 있었다.태겸은 지원이 소파에 조심히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그리고 바로 이어서 매장 바깥쪽으로 시선을 던졌다.“지점장님.”지점장이 빠르게 태겸 쪽으로 다가왔다.“네, 이사님.”태겸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의무실 직원 호출 부탁합니다.”“아, 네!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지점장이 급히 나가려는 순간, 태겸이 한 번 더 붙였다.“그리고.”잠깐 멈췄다가.“물 한 잔만요.”그 한마디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부탁이라기보다 이미 정리된 절차 같았다.지점장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문이 닫히고 지점장이 나가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지원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태겸을 올려다봤다.“……이사님, 저 진짜 여기까지 올 정도는 아닌데요.”태겸은 시선을 잠깐 내렸다.“
그제야 확신이 들었다.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알아봤다.사복을 입은 모습은 너무 낯설었다.아니, 정확히는, 너무 잘 어울렸다.수트를 입었을 때는 잡지 표지에 나올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달랐다.꾸민 티도 거의 없는데 이상하게 더 눈에 들어왔다.편안한 차림인데도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있었다.이런 게 꾸안꾸의 정석인가.왠지 더 어려 보이기도 하고, 조금 더 부드러워 보이기도 했다.같은 얼굴인데 느낌이 전혀 달랐다.마치 휴일 남친룩 화보를 그대로 걸어 나온 사람 같달까.지원은 자신도 모르게 몇 초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아.”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고 나서야, 백화점 중앙 홀에는 다시 조금씩 평소의 소음이 돌아오기 시작했다.지원은 정리된 물건들을 마지막으로 가방에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아, 감사합니다, 이사님.”어색하게 웃음이 먼저 나왔다.이런 상황에서 회사 사람을, 그것도 이사님을 만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괜히 말끝이 흐려졌다.태겸은 잠깐 지원을 바라봤다.시선이 흔들리지도 않았다.그리고 짧게 말했다.“안 다쳤습니까?”대답은 그것뿐이었다.“아, 네. 뭐…… 다치진 않았어요.”지원은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아하하, 괜찮습니다. 진짜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괜히 민망해서 말이 길어졌다.“저는 그럼 이제 이만…… 하하.”지원은 급하게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다음 회의 때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말을 끝내고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괜찮다. 이 정도면 티 안 났다.’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 두 걸음.그런데.“……읏.”작게 새어 나온 신음이었다.발목이 찌르듯 욱신거렸다.아까 넘어질 때 살짝 접질린 쪽이었다.무릎도 같이 묵직하게 올라오는 통증이 있었다.참을 수는 있었지만, 걸을 때마다 신경이 확실히 쓰였다.‘엇? 들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