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하하하! 우리 지원 씨 귀엽죠? 고등학교 때부터 같은 향수를 쓴 거예요? 아니,
내가 몇 번을 말했잖아요. 그 향 진짜 지원 씨한테 딱이라고.”지원이 민망한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도 이제 내일모레 서른인데 귀여운 건 좀…….”
“내 앞에서 그런 말 하면 못써.
그나저나 다 썼다며? 내가 밸루아 사옥에 온 김에 하나 사줄게.”그 순간,
태겸의 시선이 번쩍 들렸다. 조금 다급하고 살짝 커진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아니!”
갑작스러운 외침에 다들 태겸에게 시선이 멈췄다.
박석민이 눈을 깜빡였다.“네?”
태겸은 잠시 헛기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넥타이를 한번 고쳐 맸다.“오,
그…… 앞으로 모먼트 팀에는 원하는 향수를 전폭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네?”
다들 놀란 얼굴이었다.
태겸은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여태까지 맡아주셨던 라인의 론칭 성과도 좋았고,
제가 이번에 아시아 본부 총괄로 발령받기도 했으니까요.”옆에서 도하가 조용히 미간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태겸은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동안 변변하게 챙겨드리지 못했던 주최 측의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혹시 다른 브랜드 쓰시는 분 계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비슷한 향으로라도 맞춰드리겠습니다.”마지막 시선은 결국 지원에게 가 닿아 있었다.
팀원들이 대박이라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와,
진짜요?”“대박……”
“감사합니다!”
지원도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결국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사님.”그때였다.
지잉~ 지잉~
지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
죄송합니다.”지원이 화면을 확인하며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전화 잠깐만 받고 와도 될까요?”
“편하게 받으십시오.
불편한 자리가 아니라면요.”태겸이 바로 대답했다.
지원은 작게 웃고는 빈 자리 쪽으로 몸을 돌려 작게 전화를 받았다.
“어,
오빠.”그 순간,
태겸의 눈동자가 딱 멈췄다.'오빠?'
태겸의 눈썹 한쪽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지원은 그것도 모른 채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이어갔다.
“어어,
나 지금 밥 먹어. 응, 회의 잘 끝났어. 응, 잘했어~ 아, 알겠어. 맞다, 오빠 감기약은 챙겨 먹었지? 응, 잘했네. 내가 이따 다시 전화할게.”다른 사람들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태겸은 다정하고 익숙한 목소리로 응대하는 지원의 통화 소리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태겸은 멍하니 젓가락으로 초생강만 뒤적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오빠? 친오빠? 사촌 오빠? 아니면…… 남자친구?'
생각이 거기에 도달하자 입술까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 속으로 비웃었다.그러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뭐 남자친구면 어때서? 남자친구 있을 수도 있지. 있으면 있는 거지 뭔 상관이야?'남들 눈에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사촌 동생인 도하는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저 이사님이 오늘 진짜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러실까.’
두 남자가 서로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때,
옆에서 도하가 슬쩍 미소를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이사님.”
“……어.”
“식사 다 하셨으면 저희 슬슬 이동하시죠.
다음 일정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 출발하셔야 여유 있게 도착하실 겁니다.”딱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왠지 '지금'이라는 단어에 엑센트가 살짝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태겸은 아주 천천히 정신을 끌어올렸다.
“아.”
태겸이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팀원들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저희가 진짜 잘 먹었습니다!”“잘 먹었습니다!”
태겸은 마지막으로 지원 쪽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궁금한 부분이 조금 있어서요.
모먼트 팀과 미팅을 한번 더 진행하겠습니다.”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다음엔 제가 모먼트로 찾아가는 걸로 하죠.”
지원이 눈을 깜빡였다.
태겸은 정확히 지원을 보며 이야기했고,
지원은 자신이 밸루아의 브리핑 담당이었으니 그런가 보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자료 준비해서 일정 맞추겠습니다.”“서지원 차장님,
오늘도 브리핑 정말 좋았습니다.”도하가 훈훈한 목소리로 젠틀하게 뒤이어 말했다.
태겸은 옆에서 같이 입꼬리를 올리며 비즈니스용 꽃미소를 장착하고 듣고 있다가,
도하의 말 중 '오늘도'라는 그 '도'가 거슬렸다.'본 적이 있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장님.”지원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식사 후에 디저트까지 꼭 챙겨 드시고 즐거운 식사 하시기 바랍니다.
계산은 저희 이사님이 하실 테니까요.”“아우,
네! 감사합니다, 정말.”“안녕히 가세요!”
모먼트 팀의 배웅을 받으며 태겸과 도하는 인사를 마무리하고 룸 밖으로 걸어 나왔다.
계산을 마치고 식당 문을 나서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태겸의 표정은 다시 냉랭한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쿵.
보조석 문이 닫히고 태겸이 차에 올라탔다.
그는 안전벨트를 멨고, 이내 곧은 팔뚝을 단단히 교차해 팔짱을 꼈다.정면의 어두운 벽면을 뚫어질 듯 응시하는 얼굴에는 대놓고 불만이 가득했다.
무심한 척 턱을 치켜들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까지 숨기진 못했다.이윽고 운전석 문이 열리고 도하가 탑승했다.
도하가 한 손으로 안전벨트를 딱 잡아당겨 가슴 위로 가로지르는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태겸은 정면을 응시하던 시선을 고정한 채,
마음에 안 드는 속내를 필사적으로 감추려 짐짓 낮고 덤덤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만 아주 잠깐 옆으로 움직였다.운전석에 앉은 도하를 향해.
“서지원 차장이랑 아는 사이야? 본 적이 있어?”
마치 지나가는 길에 날씨라도 묻는 듯한 어조였지만,
그 안엔 팽팽하게당겨진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 )
지원은 무심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어?” 지원의 눈이 살짝 커졌다. 벌써 오후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이사님.”“네.”“벌써 3시 다 되어 가는데 일정 없으세요?” 태겸은 물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답했다.“네, 없습니다.” 지원이 눈을 깜빡였다.“정말요?”“네.” 그 순간 지원의 어깨가 눈에 띄게 풀어졌다.“휴우~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는 모습에 태겸의 눈가가 살짝 휘었다.“차장님은요? 일정 없으세요?”“저요?” 지원은 활짝 웃었다.“네!” 그러더니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을 질끈 감았다.“저 진짜 몇 달 만에 쉬는 주말이에요~” 투덜거리듯 늘어진 목소리. 그 순간만큼은 기획사 AE도 아니고 차장도 아니었다. 딱 스물일곱 살의 서지원이었다.“몇 달이요?”“네.”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진짜예요.” 그러다 순간, 지원의 표정이 굳었다.“…어.” 뭔가 잘못 말했다는 얼굴이었다. 지원의 시선이 천천히 태겸에게 향했다.“…”“…” 짧은 정적. 지원이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아! 그게!” 태겸은 눈꺼풀과 턱을 조금 위로 올리며 ‘오호라’ 하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미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본 지원은 눈을 크게 뜨며 억울하다는 듯 황급히 말을 이었다.“밸루아 신상 론칭 때문이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그… 제가 하는 일이 원래 어떤 프로젝트든 하나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는 좀… 그런 거라는 말인데……” 지원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내렸다. 태겸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입꼬리가 한쪽으로 슬쩍 올라갔다.“네.” 그리고 아주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밸루아 때문에 몇 달 동안 주말도 없이 일했다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지원의 표정이 굳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미간도 찡그려졌다. 정확히 ‘아, 망했다’라고 얼굴에 써 있는 표정이었다. 태겸은 그런 지원을 바라보다가 결국 나직하게 불렀다.“차장님.”“네…”“표정이
윤태겸은 말없이 제육볶음을 조금 덜어 지원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해물파전까지 한 조각 옮겨 놓았다. 지원은 눈을 깜빡였다.“앗, 감사합니다.” 지원은 곧바로 제육볶음을 집어 들었다. 한 입. 그리고.‘…!’ 또다시 지원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확 구겨졌다. 방금 전 수제비를 먹었을 때와 똑같은 ‘진실의 미간’이었다. 지원은 열심히 씹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해물파전으로 손을 뻗었다. 바삭한 가장자리와 오징어가 함께 들어간 한 조각. 한 입 베어 문 순간, 이번에는 눈까지 감겼다. 지원은 입을 꾹 다문 채 몇 번 씹더니 작게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마치 너무 만족스러운 무언가를 만났을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반응 같았다.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까지 번져 있었다. 태겸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신기한 사람이었다. 좋으면 좋은 티가 났고, 맛있으면 맛있는 티가 났다.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맛있습니까?” 지원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큰일 났어요.” 태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뭐가요?” 지원은 제육볶음을 한 점 더 집으며 말했다.“저 여기 자꾸 생각날 것 같아요.” 순간, 지원의 그 말에 태겸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지원에게 향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한 사람의 얼굴, 그 자체였다. 눈은 반쯤 접혀 있었고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태겸은 몇 초간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다행이네요. 마음에 들어서.” 담담한 목소리였다. 태겸도 앞접시에 덜어 놓은 음식을 한 번 집어 먹고는 이내 덧붙였다.“형한테 전해 두겠습니다.” 지원이 눈을 깜빡였다.“사장님이랑 진짜 친하신가 봐요.”“네. 학교 선배거든요.”“아.” 지원의 눈이 커졌다.“그럼 같이 파리에서 공부하신 거예요?”“네.”“우와.” 순간 감탄이 흘러나왔다. 태겸
주문을 마친 뒤 태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잠시 실례하겠습니다.”“아, 네.”태겸이 화장실 쪽으로 향하고, 지원은 혼자 창가 자리에 남았다.창밖 풍경은 여전히 좋았다.흐린 하늘 아래로 펼쳐진 초여름의 녹음. 과하게 꾸미지 않았는데도 묘하게 기분이 편안해지는 풍경이었다.지원은 무심코 휴대폰을 꺼냈다.찰칵.창밖 풍경도 찍고.찰칵.정겨운 메뉴판도 찍었다.‘여기 진짜 괜찮다.’나중에 친구들이랑 한 번 더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사진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마음에 듭니까?”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들자 어느새 태겸이 돌아와 있었다.“아, 네.”지원이 활짝 웃었다.“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좋아요.”태겸은 자리에 앉으며 손에 남은 물기를 가볍게 털었다.그 순간이었다.지원의 시선이 그의 소매 끝에 멈췄다.화사한 민트색 니트의 잔털 위로 작은 물방울 몇 개가 맺혀 있었다.“어?”지원이 무심코 말했다.태겸이 시선을 내렸다.“네?”지원은 별생각 없이 테이블 위의 냅킨을 한 장 뽑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이사님, 잠시만요.”“……”태겸이 반응하기도 전에 지원의 손이 그의 소매 끝으로 향했다.꾹. 꾹.냅킨이 니트 위의 물방울을 조심스럽게 흡수했다.“니트에 물 튀었어요.”지원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이런 거 자국 남으면 은근히 신경 쓰이잖아요.”태겸은 순간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던 오랜 습관이었다.누군가가 이렇게 거리낌 없이 자기 몸이나 옷에 손을 대는 일 자체가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하지만 몸을 물리려던 움직임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지원에게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 정말 순수하게, 그냥 물이 묻어 있으니 닦아준 것뿐이었다.태겸은 결국 그대로 굳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물방울을 닦아주는 지원의 얼굴에 꽂혔다.잠시 후, 지원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됐네요.”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의자
검은 세단은 도심을 벗어나 조금 한적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지원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했던 방향과 달랐다.솔직히 말하면 호텔 레스토랑이나 회원제 다이닝 같은 곳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차는 번화가를 지나 조금 더 조용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태겸의 차가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지원은 창밖을 바라봤다.“…어?”예상과 전혀 달랐다.크지 않은 건물, 1층 전체를 사용하는 식당이었다.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나무와 돌이 적절히 섞인 인테리어가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무엇보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이 좋았다. 과하게 꾸미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예쁘다…”지원의 솔직한 감탄에 태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마음에 듭니까?”“네.”지원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했던 곳이랑 달라서 더 좋은 것 같아요.”태겸은 대답 대신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시 지원의 팔꿈치 아래를 받쳤다.“조심.”“아, 네. 감사합니다.”두 사람은 나란히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맑게 울렸다.딸랑.카운터 쪽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순간 환하게 웃는 얼굴.“오랜만이네요, 이사님.”태겸이 피식 웃었다.“형. 또.”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이사님을 이사님이라 부르는데 뭐가.”“듣기 싫습니다.”“그럼 자주 와.”지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처음 보는 태겸의 표정이었다. 딱딱한 비즈니스 미소가 아니라 정말 편안한 얼굴.그 모습을 보며 지원도 괜히 따라 웃었다.그때 남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향했다.“안녕하세요.”지원이 먼저 꾸벅 인사했다.“서지원이라고 합니다.”남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반갑습니다.”시원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부드러운 인상인데 이상하게 눈에 띄는 분위기가 있었다.“구자언입니다. 여기 주인입니다.”“아, 네 안녕하세요~.”지원은 순
지원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게 말려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그때, 태겸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갑시다.”“아…….”“배고픕니다.”그 덤덤하고도 인간적인 한마디에, 지원은 멍하던 표정을 갈무리했다.그리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보였다.“아, 배고프셨구나.”“네.”“그럼 빨리 가야겠네요.”태겸은 별말 없이 지원의 보폭을 맞췄다.지원이 조금 느려지면 같이 속도를 줄였고, 지원의 발목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팔꿈치를 받쳐 준 손에 은근한 힘이 더해졌다.강하게 잡지도, 억지로 끌지도 않았다.그저 그녀가 절대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든든하게.VIP룸 문을 열고 나오는 두 사람에게 멀찍이 대기하고 있던 지점장과 백화점 직원들이 서둘러 다가왔다.태겸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향해 담백하게 고개를 숙였다.“가보겠습니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저도 너무 감사했습니다.”지원이 옆에서 함께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지점장과 직원들이 일제히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안녕히 가십시오, 이사님.”인사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일반 고객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VIP 전용 통로로 이동했다.두 사람만을 태운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사방이 고요해지며 다시금 밀도 높은 정적이 찾아왔다.태겸은 엘리베이터에 탄 후에도 여전히 지원의 팔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다.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뭉근한 감각이 전해져 오자, 지원은 귓가가 조금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괜히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정작 태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덤덤하고 고요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층수 표시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두 사람의 숨소리만 작게 울리는 밀폐된 공간.그 안을 감도는 묘한 공기 속에서,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을 향해 부드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태겸의 차량이 주차된 VIP 전용 구역으로 향했다.넓고 한적한 주차 공
태겸의 낮은 중얼거림이 VIP룸 안에 아주 짧게 떨어졌다.“환장하겠네.”“네?”“아, 아닙니다. 아무것도.”분명 ‘환장하겠다’고 하신 것 같은데……?바쁘실 텐데 나 때문에 괜히 시간을 뺏기고 계시는 건가 싶어, 지원은 혼자 생각하며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였다.그 순간,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똑똑. 이사님, 지점장입니다. 의무실에서 오셨습니다.”“들어오세요.”태겸의 대답과 함께 백화점 의료 스태프가 들어왔다.중년의 간호사가 지원 쪽으로 다가왔다.“어디 다치셨어요?”“아, 발목이 좀…… 접질린 것 같아요.”지원이 말하자, 간호사가 무릎 앞에 쪼그려 앉아 발목을 살폈다.“많이 붓진 않았네요. 다행히 심하진 않아요.”그 말에 지원이 팽팽하게 굳어 있던 어깨를 살짝 내렸다.“휴…… 다행이다.”그 순간이었다.지원의 발목이 살짝 들려 있는 상태에서, 태겸의 시선이 그쪽으로 굳건히 고정됐다.아까부터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은, 무거울 정도로 깊은 시선이었다.간호사가 발목을 가볍게 돌려보는 순간,“아.”지원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아프죠?”“아, 네…… 조금요.”태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 변화는 거의 표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지만,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간호사는 테이핑을 준비하며 말했다.“다행히 심한 염좌는 아닌데, 당분간 무리하면 안 돼요. 오래 걷지 마시고요.”“네네. 알겠습니다.”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이 정도면 뭐…… 그냥 좀 불편한 정도지.’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아까부터 태겸의 존재감이 너무 선명해서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태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분위기 자체가 VIP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간호사가 테이핑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일단 한번 걸어보실게요.”지원이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한 발.테이핑이 단단하게 받쳐주니 아까보다 훨씬 나았다.욱신거리는 느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