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심장을 때리는 감각적인 비트.밀라노 패션위크의 메인 스테이지를 장식한 피날레 워킹이 끝난 직후, 백스테이지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완벽했어요, 서우! 당신은 오늘 밀라노 전체를 완벽하게 압도했어!”수석 디자이너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 찬사를 쏟아냈다. 한국계 최초로 글로벌 하이엔드 브랜드의 메인 뮤즈 자리를 꿰찬 강서우. 그를 향해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와 외신들의 취재 열기는 이제 너무도 익숙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어머니인 한 여사의 그늘과 그룹의 후계 구도라는 족쇄를 벗어던진 서우는, 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 꽤나 노골적으로 뱉어낸 음성이었다.하지만 샴페인 잔을 들고 지나가던 해인의 걸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사모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로 우아하게 방향을 틀었다.“상도덕이라는 단어는, 지금 같은 상황에 쓰는 게 아니죠.”갑작스러운 해인의 등장에 사모들의 입이 헙, 하고 다물어졌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을 향해 해인이 맑은 샴페인 잔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서우 씨는 본인 커리어를 위해 더 넓은 세상으로 훌륭한 도약을 했고, 저는 제 가치를 완벽하게 알아봐 주는 최고
“권도윤…….”오빠라는 호칭조차 잊을 만큼, 날것의 감정이 섞인 젖은 이름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도윤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평소의 흐트러짐 없이 서늘했던 완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거칠게 풀어 헤쳐진 넥타이와 가쁘게 몰아쉬는 숨결이, 그가 얼마나 미친 듯이 이 먼 거리를 달려왔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왜 말 안 했어.”해인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그의 단단한 가슴을 퍽 쳤다.“바보같이 왜 혼자서 회장님을 상대한다고 지분을 다 매입해 놓고…… 왜 나한테 다 숨겼어!”툭. 마
눈물이 핑 돌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하지만 해인은 애써 붉어지는 눈시울을 꾹 누르며, 끝까지 사장님과의 실무적인 대화를 갈무리했다.완성된 다기의 퀄리티는 완벽했고, 론칭 준비는 이견 없이 순조로웠다.“그럼, 다음 주 론칭 파티 때 뵙겠습니다, 사장님.”“예, 조심히 올라가세요, 디렉터님!”사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공방을 나선 해인은 곧장 자신의 차로 향했다.철컥, 하고 차 문이 닫히며 완벽하게 혼자만의 공간이 확보된 순간.“하아…….”억눌러왔던 뜨거운 숨이 단숨에 터져 나왔다. 해인은 핸들에 이마를 댄 채 한참 동안
시간은 누군가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정신없이 흘러갔다.“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해인 씨. 민 여사님 브랜드라니, 우리 이그니스 출신이라는 게 다 자랑스럽네.”“다 팀장님께서 이끌어주신 덕분입니다. 저한테 첫 기회를 주신 곳이잖아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이그니스 사무실을 나서는 해인의 양손에는 가벼운 짐 상자가, 얼굴에는 홀가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동료들의 진심 어린 축복 속에서 치른 아름다운 이별이었다.서우와의 인연을 끊어낸 그날 이후, 해인의 삶은 완전히 다른 궤도에 올라탔다.‘가장 먼저 한 일은 그
해인은 마른침을 삼켰다.[그래서, 다기는 잘 완성해서 바쳤어?][민 여사가 퍽이나 마음에 들어 했어?]제 작업물과 민 여사에게 얽힌 상황을 못마땅해하며 쏟아낼 가시 돋친 히스테리를 예상했다.하지만 서우의 쩍쩍 갈라진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우리 그만 만나. 헤어지자고.”“……뭐?”예상치 못한 이별 통보에 해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서우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시선을 삐딱하게 내리깔았다.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입가에는 한껏 비틀린 조소가 걸려 있었다.“막상 내 옆에 둬 보니까…
그와 동시에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해인의 스마트폰 화면이 밝아졌다.[강서우: 왼쪽 여자애, 거의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는 애야. 여자친구라고 하면 좀 떨어질 것 같아서. 미안.]짧은 메시지를 확인한 해인의 시선이 다시 앞을 향했다. 과연, 왼쪽의 여자는 서우의 여자친구 발언에 눈에 띄게 안면 근육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해인에게 물이라도 끼얹을 기세였다.‘……하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해인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테이블 아래로 제 옷깃을 생명줄처럼 쥐고 있는 서우의 손등을 토닥이듯 가볍게 덮어 쥐었다.그
“약속 안 지키면, 네가 죽여주면 되잖아. 안 그래?”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섬뜩한 말.하지만 민영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짙고 뜨겁게 태건을 옭아매고 있었다.태건의 크고 거친 손이 헤드레스트에 걸쳐진 민영의 하얀 손목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절대 도망칠 수 없도록 단단하게 쥐었다.“……명심하겠습니다.”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민영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넓은 어깨에 턱을 기댔다.“무식하게 진짜 목이라도 딸 생각인 건 아니지? 나 살인자 애인 만들 일 있어?”“아가씨가 원하신다면, 기꺼이.”조금의 망설
같은 시각, 서울 도심을 매끄럽게 가로지르던 태성그룹의 엠블럼이 새겨진 검은 그림자가 민영의 레지던스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한 층에 오직 한 세대만이 거주하며, 전용 엘리베이터가 집 안까지 연결되는 이 수직의 요새는 그녀의 은밀한 사생활을 숨기기에 더없이 완벽한 장소였다. 일반적인 세단보다 한 뼘은 더 길게 빠진 휠베이스 덕에 주차 칸을 꽉 채우고도 남는 그 거대한 부피감은, 차체가 뿜어내는 정적만큼이나 위압적이었다.엔진 소리가 완전히 멎었지만, 차 안의 누구도 섣불리 문을 열지 않았다.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프
덜컥 겁이 났다. 트렌드는 눈 코 뜰 새 없이 변하고, 세상에는 날고 기는 감각적인 현역 디자이너들이 차고 넘쳤다. 어설픈 도피처로 꺼내 든 카드가 뼈아픈 실패와 절망만 안겨줄까 봐 두려웠다.불안감에 핏기 가신 입술을 꾹 깨물던 찰나였다.불현듯 해인의 뇌리에 예전부터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디자인의 본질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클래식은 영원해. 변하지 않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에 실용성을 더하면, 그게 바로 가장 완벽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이 되는 거야.’억지로 꾸며낸 얄팍한 트렌드를 좇기보다, 변하지 않는 본질에 집중하면 승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