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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2-26 17:55:47

타이트하게 조여오던 넥타이를 풀어 내리고, 자켓을 침대 위로 던지듯 벗어던졌다.

도윤은 마스터 룸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 조명 하나만이 비좁은 빛의 영토를 만들고 있었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가만히 떠올려 보면 아직도 중학생 꼬맹이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자신을 보고 엄마 뒤로 숨던 6살 아이의 눈빛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렸다. 그 투명한 눈동자에 담긴 고단함을 읽어버린 순간, 도윤은 제 심장이 뜯겨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가볼 걸.’

중학교 졸업식 때 갈게.

고등학교 입학하면 보러 갈게.

고등학교 졸업하면 보러 갈게.

.

.

자꾸 늘어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반복될 때쯤, 해인에게 오던 이메일도 끊어졌다.

용기를 내볼까 했을 땐 남자친구가 생겼단다.

복잡한 가정사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연락처를 바꾸어었다. 그게 해인을 위한 길이라 믿었던 자신의 오만함이, 결국 해인을 그 시궁창 속에 홀로 버려두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다시 해주면 돼. 대학도 보내고…….”

텅 빈 서재에 그의 다짐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부럽지 않게 결혼도…… 시켜줘야지.”

그래, 그거면 됐다. 해인이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해주고, 가장 좋은 것만 입히고 먹여서 가장 좋은 놈에게 보내주는 것. 그것이 오빠로서,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린 공범의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내린 결론은 명쾌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정체 모를 답답함이 응어리져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노트북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해인이 편안히 기댈 수 있는 완벽한 울타리를 더 견고하게 다지는 것뿐이었다.

노트북 화면 너머로 내일의 스케줄을 확인하던 도윤의 귀에 둔탁한 소리가 꽂혔다.

텅!

플라스틱 통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였다. 서둘러 서재를 나가보니 주방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그 한가운데 해인이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다쳤어?”

“아, 아니…… 그게, 배고파서 라면이나 좀 있을까 하고 뒤지다가…… 하하, 없네.”

해인이 멋쩍은 듯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집에 라면 없어. 지금 먹을 만 한 게…….”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넘었다.

“치킨 시켜줄까?”

“치킨? 좋지! ”

“아직도 양념만 먹어?”

“응. 반반 시켜. 요즘은 반반 메뉴 많잖아.”

잠시 후, 현관 벨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치킨 박스가 도착했다. 도윤이 식탁에 세팅을 하려 하자, 해인이 박스를 뺏어 들며 거실로 향했다.

“오빠, 저기 거실 탁자에서 먹자. TV 보면서. 우리 옛날에 아저씨랑 엄마 없을 때 맨날 그랬잖아.”

“그럴까?”

바닥에 주저앉아 TV를 틀고 치킨 박스를 여는 해인의 모습은 10년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도윤은 그녀의 옆에 앉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잠옷이 왜 이래.’

제 손으로 직접 산 잠옷이었다. 분명 긴팔 실크 파자마 세트였는데, 해인이 입으니 어딘가 이상했다. 윗도리는 사이즈가 너무 커서 그녀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하얀 가슴골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반면 하의는 짧아도 너무 짧았다. 안 그래도 짧은 반바지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자 허벅지 끝까지 말려 올라가,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속살이 도윤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는 달콤한 샴푸 향이 풍겼고, 치킨을 오물거리는 해인의 입술은 기름기 때문에 번들거리며 야한 광택을 냈다.

‘분명히 긴팔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팔은 기네. 그런데 팔이 길면 바지도 길어야지, 하의는 대체 왜 이 모양이야.’

도윤은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에 맥주를 들이켰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치킨무만 씹어댔다.

“오빠, 왜 그래? 맛이 없어? 왜 인상을 쓰고 있어.”

해인이 닭다리를 입에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과 촉촉한 눈망울. 도윤은 제 안의 짐승이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그가 엉겁결에 내뱉은 말은 제 진심과는 정반대의 독설이었다.

“……너, 살 좀 빼야겠다.”

“어?”

치킨을 씹던 해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 나 지금 1kg이라도 더 빠지면 기절할 판이거든? 오빠 눈엔 내가 돼지로 보여?”

“……무슨. 백화점에서 네가 제일 튼튼해 보이던데.”

도윤은 시선을 회피하며 맥주 캔을 찌그러뜨렸다.

“치사해서 안 먹어!”

억울함에 입술을 삐죽 내민 해인이 씩씩거리며 일어섰다.

“처음부터 사주지 말던가, 왜 사람 무안하게 만들고 그래?”

시선을 위로 들자, 짧은 바지 아래로 하얀 엉덩이 밑살이 아슬아슬하게 시야에 걸렸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해인의 손목을 낚아채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혔다.

“또, 뭐!”

도윤은 홧홧해진 손바닥을 숨기려는 듯 손목을 놓아주며, 일부러 더 무심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 먹고 가.”

“안 먹어. 살 빼라며. 입맛 다 떨어졌단 말이야.”

“넌 닭이 불쌍하지도 않냐? 먹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야 닭도 덜 억울하지.”

도윤은 맥주 캔을 거칠게 구겨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일할 게 남아서 먼저 들어간다.”

“벌써?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누구랑 달라서 난 내일 아침부터 회의거든.”

도윤은 뒤돌아보지 않고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을 열기 직전, 그는 멈춰 서서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다 먹은 건 네가 치워라. 이제 그 정도는 할 줄 알지?”

“……치사해 진짜. 알았어, 내가 치우면 되잖아!”

홀로 남겨진 거실에서 해인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자기가 사줘 놓고 먹으라 마라, 치워라 마라…….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아나 보지.”

해인은 신경질적으로 TV 채널을 돌렸다. 화면 속에서는 화려한 연예인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해인의 신경은 자꾸만 도윤이 들어간 방 문에 머물렀다.

“뭐야, 진짜. 싫다는 사람 데리고 와서는 일이나 하고.”

남은 닭다리를 거칠게 씹었다. 그 옛날 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뒷바라지해주던 다정한 오빠가 까칠하고 재수 없는 놈으로 변한 것 같아 왠지 모를 섭섭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해인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차라리 그편이 훨씬 편했다. 도윤의 눈에 자신을 향한 연민이나 눅눅한 동정심이 섞여 있었다면, 해인은 이 집에 하루 이상 머물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바닥을 들킨 상대가 저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고문은 없으니까.

저렇게 막 대해주니, 도리어 마음이 놓였다. 저 까칠한 태도가 해인에게는 도윤이 자신을 여전히 예전처럼 대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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