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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

Auteur: 양순이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2-26 17:54:14

“그냥…, 바빴어. 군대 다녀오고 학교 졸업하고, 일하고 살다 보니. 넌 왜 안 했는데?”

“나도 바빴지 뭐. 순식간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 시작하니까 시간이 더 빠르게 가더라.”

그녀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백화점 일?”

“아니. 처음엔 미용실에서 일하다가, 백화점으로 들어왔어. 내가 손재주가 없나봐 하핫, 지금도 포장 잘 못한다고 혼나거든.”

가벼운 웃음소리가 차 안을 울렸지만, 도윤의 표정은 굳어졌다.

“자격증 같은 건? 고등학교에서 전문 자격증 따서 졸업하는 친구들도 있잖아.”

“자격증은 뭐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나. 그것도 돈이랑 시간이 있어야 학원도 다니고 공부도 하지. 학교 끝나고 고깃집 아르바이트 다녔는데.”

도윤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너희가 진짜 남매도 아니고 네 아버지랑 이혼한 마당에, 가깝게 지내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해인이 남자친구 생겼어. 돈 좀 보내봐, 아비도 없는데 비싸게라도 보여야지 대접을 받지.]

어째서 그 여자가 보내온 말과 사진을 믿었을까.

거짓말이 가득한 메시지를 볼 때마다, 해인이 적어도 자신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 화려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 믿으며 비겁하게 안도했었다.

“……아버지가 살던 집도 줬었고 해서 그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

“안 어려웠어. 내 주변 친구들 다 비슷하게 살아. 그래도 아저씨 덕분에 남들 보기에 좋은 집에서 살았어. 감사하게 생각해.”

감사하다니. 그 말은 도윤에게 독설보다 더 아프게 박혔다.

“남자친구는……, 있어? 20대 초반인데 한창 연애할 나이잖아.”

도윤이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약 올려? 누구 인생 망치려고. 아마 내가 누구만난다고 하면 우리 엄마, 그 남자 찾아가서 돈 뜯어낼 생각부터 할걸?”

“…….”

“오빠 여자친구, 아니 그 약혼녀 이야기나 해줘. 강채영…이라고 했지? 예쁘더라. 성격은 좀 까칠한 것 같지만.”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과에 해인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뭐가 미안해. 그런 고객들 많아. 그 까칠한 성격이 또 오빠랑 진짜 너무 닮았어.”

해인이 작게 키득거리자, 그의 미간이 눈에 띄게 꿈틀거렸다.

“야, 윤해인. 내가 어딜 봐서 진상이야.”

“와, 오빠. 자기객관화 진짜 안 된다. 소스가 적으면 적다, 많으면 많다. 이건 너무 식었네, 저건 너무 뜨겁네. 나 솔직히 오빠랑 외식할 때마다 부끄러웠어.”

“난 예의는 지켜서 말하거든!”

“그것 뿐일까, 기억 나지? 나한테 맨날 ‘내 방에 들어오지 말랬지?’ 내가 안 들어갔다고 하면 ‘거짓말 하지마. 책 순서가 바뀌어 있어.’ 이랬던 거.”

해인이 짐짓 도윤의 예전 말투를 흉내 내며 샐쭉하게 웃었다. 도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으며 핸들을 한 손으로 꺾었다.

“그건 네가 내 방에 들어와서 자꾸 이것저것 건드리니까 그랬던 거고. 그리고 너는 뭐 얌전했냐? 내 가방에 바퀴벌레 모형 넣어놔서 나 기절할 뻔하게 만든 게 누군데.”

“푸하하! 맞다, 오빠 그때 진짜 높게 점프했었는데. 운동선수인 줄 알았다니까?”

잠시 동안 차 안의 공기가 그 옛날 여름날의 온도로 바뀌었다.

“너 진짜…… 하나도 안 변했다, 윤해인.”

도윤이 툭 내뱉은 말에 해인이 웃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도윤은 여전히 정면을 보고 있었지만,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빠도 여전히…, 잘 생겼네.”

“알고 있어.”

“어우, 재수 없어. 진짜.”

해인이 장난스럽게 몸을 으스스 떨며 도윤을 흘겨봤다. 하지만 그 짧은 투닥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차는 거대한 저택의 철문 앞에 멈춰 섰다.

이윽고, 인식 장치가 도윤의 차를 확인하자 육중한 철제 대문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해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이 동그래졌다. 절제된 조명이 비추는 모던한 건축물은 집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갤러리나 요새처럼 보였다.

“……대저택이네.”

“그럴 리가. 그냥 고급 빌라야. 보안이 좋아서.”

단지 안으로 들어서자 외부의 소음은 진공 상태처럼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여기서 아저씨랑 사는 거야?”

“아니. 우리 아버지는 또 다른 분이랑 사시고. 여긴 나 혼자 사는 곳.”

“뭐? 하지만 아까는 아저씨가…….”

“아버지는 내일 뵙기로 했어. 갑자기 들어가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너무 실례잖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의 차가 전용 주차 구역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차에서 내린 해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이 동그래졌다. 지하 주차장임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조명과 대리석 마감이 마치 거대한 현대 미술 갤러리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카드가 인식되는 소리와 함께 최상층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거실과 연결되는 구조였다.

“와…….”

해인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득하게 높은 층고와 전면 통창 너머로 쏟아지는 한강의 야경. 럭셔리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극도로 절제된 미니멀리즘의 정점이었다.

“저쪽이 네가 쓸 방.”

도윤이 거실을 가로질러 복도 끝에 있는 방문을 가리켰다.

“내가 늦게 들어올 때가 있는데, 현관 앞에 있는 방 쓰면 괜히 자다가 깰 것 같아서.”

“에이, 나 그런 거 상관없어. 어차피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

도윤은 앞장서서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은은한 우디 향이 고끝을 살짝 스쳤고, 침대 위에는 마치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정갈하게 접힌 실크 잠옷과 새 화장품들이 놓여 있었다.

“일단 급한 대로 준비해뒀어. 더 필요한 건 내일 같이 나가서 사자.”

도윤은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해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해인은 새하얀 침구 위에 놓인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일은 집에 가서…… 내 물건들 가져와야지.”

“번거롭게 뭐하러.”

“아니. 다른 사람이 내 물건 함부로 손대는 거 싫어.”

“그래, 정 그러면 내일 같이 가든가.”

“혼자 갈 거야.”

해인의 단호한 대답에 도윤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지만, 이내 힘을 뺐다. 저 고집스러운 말투를 한 번도 꺾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알았어. 오늘은 씻고 푹 쉬어.”

도윤이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해인은 한동안 그자리에 서 있다가, 갑갑했던 옷을 번어던지고 욕실로 들어섰다.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 아래서 해인은 눈을 감았다.

‘이상해.’

분명 오래 전에도 이런 날들이 있었다. 부모님이 늦게 들어오는 밤, 넓은 거실에 오빠와 단둘이 남아 숙제를 하거나 TV를 보던 날들. 그때의 정적은 포근하고 안전했다. 하지만 지금, 이 적막을 뚫고 들리는 건 오직 자신의 숨소리와 타일 바닥을 때리는 물소리뿐이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가 있다. 이제는 소년의 냄새가 아닌, 독하고 서늘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남자가 된 권도윤이. 비누 거품을 씻어내며 해인은 문득 깨달았다. 옛날에는 당연했던 둘뿐인 집이, 지금은 왜 이토록 살갗을 간지럽히는 긴장감으로 다가오는지.

수건으로 젖은 몸을 감싸자 거울 속에는 발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이게 단순히 뜨거운 물 때문인지, 아니면 문밖의 존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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