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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

Auteur: 양순이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2-26 17:53:18

마감 시간을 알리는 부드러운 음악이 매장에 깔리기 시작했다. 지친 다리를 두드리며 매대를 정리하던 해인의 귀에, 결코 들려서는 안 될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꽂혔다.

“어, 그래! 나 지금 에비뉴 백화점에 옷 사러 왔다니까? 내가 말했잖아, 우리 딸이 여기서 일한다고.”

불안한 예감은 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을까.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저 멀리서 화려하다 못해 천박한 원색 원피스를 입은 명희가 전화를 귀에 댄 채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 해인아! 아직 마감 아니지?”

명희는 사색이 된 딸의 안색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급하게 안으로 들어와 마구잡이로 행거에 걸린 고가의 코트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한 벌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신상들이 명희의 거친 손길에 힘없이 흔들렸다.

“엄마…… 여기 왜 왔어. 지금 영업 끝나가. 일단 나가서 얘기해.”

“왜 이래? 나 오늘은 여기 고객으로 온 거야. 어머, 이거 색깔 예쁘다. 이것도 꺼내봐.”

명희는 보란 듯이 고가의 실크 블라우스를 집어 들었다. 해인은 떨리는 손으로 명희의 팔을 붙잡았다.

“제발…… 왜 이래, 돈 없잖아. 이거 엄마가 살 수 있는 옷 아니야.”

“왜 못 사? 여기 직원 할인되잖아. 딸 덕 좀 보자는데 뭐가 문제야? 그래야 내 배 찢고 너 낳은 게 안 억울하지 않겠니?”

명희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변 동료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명희는 보란 듯이 코트와 원피스 서너 벌을 계산대 위에 툭 던져 올렸다.

“자, 이거 네 사원 카드로 긁어. 직원가로 하면 얼마 안 하겠네.”

“절대 안 돼. 이거 내 몇 달치 월급으로도 못 갚아. 당장 내려놔.”

해인이 강하게 거부하며 옷을 다시 가져가려 하자, 명희의 눈독이 잔인하게 번뜩였다. 명희는 집어 들었던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를 제 화장기 가득한 얼굴에 대고 막무가내로 문질러버렸다.

“어머, 어쩌니? 파운데이션이 다 묻어버렸네?”

새하얀 실크 위에 진득하게 묻어난 살색 파운데이션과 붉은 립스틱 자국. 해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건 단순한 얼룩이 아니라, 해인이 지켜온 마지막 자존심에 난 상처였다.

“윤해인 씨,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어느새 다가온 매니저의 서늘한 목소리가 해인의 등 뒤를 찔렀다. 명희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매니저를 향해 생긋 웃었다.

“아유, 죄송해요. 우리 딸이 너무 반가워서 실수했네. 이거 우리가 살 거니까 걱정 마세요.”

“……해인 씨, 매장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해결하세요.”

매니저의 눈빛은 차가웠다. 해결하라는 말은 곧 해인이 책임을 지라는 뜻이었다. 해인은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유니폼 주머니 속 사원 카드를 꺼냈다.

삑, 소리와 함께 잔인한 할부 결제 문자가 휴대폰을 울렸다.

“엄마, 제발 나 좀 살자…….”

해인의 목소리는 이미 젖어 있었다. 하지만 명희는 만족스러운 듯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죽상 할 것 없어. 마지막으로 이 정도면 너한테도 괜찮지 않니?”

“……마지막?”

“그래, 내가 언제까지 다 큰 딸년 뒷바라지 해야 하니? 나도 이제 새 출발해야지. 오늘부터 집에 안 들어와도 돼.”

청천벽력 같은 말에 해인의 사고가 멈췄다.

“내가 왜? 새 출발하고 싶으면 엄마가 나가야지. 그 집은 아저씨가 나 살라고 주고 가신 거잖아.”

“웃기고 있네. 애당초 그 양반도 나한테 안 빠졌으면 너한테 눈길이나 줬겠니? 너도 내 덕에 10년간 호의호식 한거야.”

명희가 비죽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해인의 창백한 볼을 가볍게 톡톡 쳤다. 딸을 향한 다독임이 아니라, 잘 팔릴 상품을 확인하는 듯한 모욕적인 손길이었다.

“넌, 내 얼굴 물려받은 것만 해도 평생을 갚아야 해. 알겠니?”

“……아무튼 난 못 나가. 갈 데도 없어.”

“그래? 그럼 셋이 살든가. 우리 강아지가 청소 좀 예쁘게 해놨으려나 모르겠네.”

“……벌써 남자를 들였어? 미쳤어, 진짜?”

“너도 네 오빠한테 가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내가 오빠가 어디 있…….”

순간, 해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도윤 오빠한테 연락했어? 미쳤어, 엄마?”

“아, 난 몰라. 우리 앞으로 편하게 좀 살자 해인아. 걔한테 떨어지는거 있으면 연락 자주 하고.”

명희는 생글거리며 쇼핑백을 챙겨 들고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명희의 뒷모습은 지독하게 가벼웠다.

**

직원용 출구를 빠져나온 해인의 앞에는 시린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다.

‘집으로 가야 할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엄마가 들였다는 그 낯선 남자의 존재, 그리고 제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을 그 비좁은 방. 친구에게 연락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을 설명할 용기가 없었다.

그때, 매끄러운 엔진음과 함께 육중한 검은색 세단 한 대가 해인의 발치에 멈춰 섰다.

뒷좌석의 창문이 소리 없이 내려가고, 그 너머로 낮보다 더 서늘한 눈동자가 해인을 향했다. 도윤이었다.

“……오빠.”

해인이 멍하니 입술을 뗐다.

금방이라도 차에서 내려 그녀를 낚아챌 것 같던 그의 기세는, 해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묘하게 가라앉았다.

“가자.”

“어 어디를?”

“아버지가 너 데려오래.”

도윤의 목소리는 의외로 평온했다. 마치 10년 전, 학원을 마치고 나온 동생을 데리러 온 다정한 오빠처럼.

“아저씨가…… 왜?”

“일단 타. 길바닥에서 이러고 서 있을 거야?”

도윤의 시선이 해인의 가늘게 떨리는 다리에 머물렀다. 해인은 망설였지만 당장 갈 곳 없는 처량한 신세와, 도윤이 내민 아버지라는 명분은 거절하기엔 너무도 달콤한 덫이었다.

그 사이, 그는 직접 차 문을 열어 해인이 앉을 자리를 내어주었다.

“타, 해인아.”

그 다정한 부름에 해인은 결국 자석에 이끌리듯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히고, 외부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된 정적 속에서 도윤의 짙은 향수 냄새가 해인의 감각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그동안……, 왜 연락 안 했어?”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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