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도겸은 마치 피곤함이 극에 달한 것처럼 눈을 감고 잠을 잤는데, 주위의 모든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와우!” 이때, 잘생긴 외국 남자가 엄청난 감탄을 했다.“너무 예쁜데!”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연희는 검은색 비키니를 입은 정은이 한쪽의 비치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목에 두른 흰색 스카프는 바닷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어머 세상에! 샤넬 그 자체야! 너무 예쁘잖아!”연희는 차갑게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예뻐요?”외국 남자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샤넬 브랜드의 창시자 가브리엘 샤넬 여사를 아세요? 검은 치마에 하얀 베일을 두르며 프랑스의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죠. 그리고 바람이 치맛자락을 날리며, 그 베일도 하늘하늘 바람에 흩날렸죠...”연희는 이를 악물었다.“그럼 당신은 제가 예쁘다고 생각하나요?”“당연히 예쁘죠.” 남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 여자와 비교하면요?“아, 신사로서 이 문제를 대답하기가 많이 어렵네요. 하지만 정말 비교하고 싶다면, 저는 그 아가씨가 더 예쁘다고 생각해요.”연희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사실 그녀는 늘씬한 몸매에 하얀 피부, 그리고 곱슬머리를 뒤로 넘겨 매우 섹시해 보였다.반면 정은은 비교적 노출이 적은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치맛자락은 절반쯤 허벅지를 가렸고, 색깔도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하얀 피부 덕분에 오히려 검은색이 정은을 더욱 반짝이게 만들었다.하얀 스카프 사이로 은근히 드러나는 몸매는 이 외국인조차도 그 함축적이고 우아한 매력에 매료되게 만들었다.흔치 않은 것이 귀한 법이다. 알록달록한 비키니 미녀들 사이에서 정은은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하지만 연희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눈을 감고 잠들어 있던 도겸이 마치 텔레파시라도 받은 듯 벌떡 일어나 앉은 것이다.정은에게 시선이 닿는 순간, 경악, 놀라움, 찬탄, 괴로움, 후회 등 온갖 감정이 도겸의 눈 속에서 소용돌이쳤
그 결과, 장미꽃은 점점 많아졌다.수민은 영문을 몰랐다.“왜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른 거지?”정은도 마찬가지였다.“나 좀 살려줘! 이것도 내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르잖아!”군중 속의 도겸은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연희는 손에 들려 있는 몇 송이의 장미를 보며 화가 나 눈시울이 붉어졌다.‘이 사람들, 눈이 없는 거야 뭐야?’정은은 지금 심지어 방금 전의 그 검은색 비키니도 입지 않았고, 도중에 전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는데, 연희가 보기에 그 모습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그러나 바로 그런 정은의 모습에 도겸은 넋을 잃고 말았다.정은은 넓고 큰 밀짚 모자를 쓰고 있었고, 옅은 색의 리본이 모자를 따라 나비 매듭으로 묶여 있었다. 아주 심플한 스타일이었지만, 정은이 쓰니 오히려 대범하고 존귀한 느낌을 자아냈다.정은이 나타나자 모든 남자들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수민과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끔 미소를 지을 때마다 사람들은 더욱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답답하지?” 현빈은 어느새 도겸의 곁에 나타나더니, 분노로 붉어진 그의 두 눈을 보고 웃으며 먼 곳으로 눈을 돌렸다.“정은 씨는 결코 네가 독차지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도겸은 주먹을 꽉 쥐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은 씨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눈부셔서, 넌 그런 정은 씨를 몰래 숨겨둘 수 없어.”현빈은 감탄과 애모의 눈빛을 거두며 고개를 돌리더니 담담하게 웃었다.“자신의 장미를 잃었으니 지금 후회하는 거야? 그러나 정은 씨는 이미 네 여자가 아니야.”이때 갑자기 무언가가 날아왔다. 현빈은 자신의 코앞에 멈춘 주먹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매번 너에게 만회할 기회가 있는 건 아니잖아.”도겸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네 말이 맞지만, 너 지금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은은 내가 정성껏 키운 장미야. 난 정은이 오늘처럼 눈부시게 변한 것을 줄곧 지켜보았다고. 정은의 아
상자를 여는 순간, 뱀 한 마리가 안에서 튀어나왔다.그 뱀은 하얀색과 검은색이 엇갈려 있었고, 꼬리까지 가늘고 길어 딱 봐도 독사였다.정은은 반사적으로 상자를 던져버렸지만, 그 뱀은 이미 날아오르며 독니를 드러내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옆에 있던 사회자는 이미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마이크를 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순간,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사람들은 즉시 뒤로 물러나며 본능적으로 뱀과 거리를 두려 했다.하지만 정은은 피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의 손목을 물어뜯으려는 그 순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도겸이 더 가까웠기에 현빈보다 먼저 정은을 잡아당겼다.그러나 그 순간, 도겸의 뒤통수가 독사 앞에 완전히 노출되었다.“위험해!”“조심해요!”정은과 연희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정은은 이미 도겸의 품에 안겼고, 연희는 얼른 앞으로 돌진하더니 자신의 몸으로 뱀의 공격을 막았다.그래서 뱀은 연희의 종아리를 세게 깨물었다.“으악.” 연희는 아파서 천천히 쓰러졌다.도겸은 흠칫 놀라며 정은을 밀어내고 얼른 연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종아리를 살펴보았다.그의 예상대로 그것은 독사였다!“도겸 오빠...” 소녀는 눈물을 글썽였다.“저 너무 아파요...”도겸은 이를 악물며 연희를 품에 안았다.“왜 그렇게 멍청한 거야?”연희는 아파서 땀을 뻘뻘 흘렸지만, 그래도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오빠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도겸은 감동을 받으며 연희의 손을 잡았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의사가 곧 올 거야. 너에게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연희는 이미 초점을 잃기 시작했고, 목소리도 점점 약해졌다.“알아요, 저는 줄곧 도겸 오빠를 믿었잖아요. 그러니까 저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를 위해서라도, 저는 무사히...”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희는 기절했다.도겸은 자신의 품에 쓰러진 연희를 보며 당황해지더니 얼른 소리쳤다.“의사, 의사는? 빨리 구급차
‘이 순간부터 도겸은 정식으로 아웃되었군.’...연희는 체질이 나쁘지 않았고, 제때에 혈청을 주사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안전을 위해 도겸은 한 의사를 동행시켜 연희를 돌보게 했다.방 안에서 연희는 허약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고, 의사는 그녀를 위해 검사를 하고 있었다.도겸은 침대 옆에서 연희를 지키고 있었지만, 몇 번이나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연희는 입을 열며 말했다.“오빠, 너무 무서워요...”“저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네?”“만약 또 독사가 저를 물면 어떡하죠? 흑흑...”연희가 스스로 다칠지언정 자신을 구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도겸은 마음이 약해졌다.“그래, 가지 않을 테니까 너도 의사 선생님 말 잘 들어.”“네.”연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의사는 검사를 마친 다음, 링거를 뽑고 몸을 돌려 떠났다.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는데, 이때 연희는 일어나고 싶었다.도겸이 그녀를 부축하자, 연희는 일부러 힘없이 남자의 가슴에 기대었다.“저 종아리가 너무 아픈데. 흉터 남는 건 아니겠죠?”“그럴 리 없어,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고.”“그런데 정말 아프단 말이에요...”“금방 약을 발랐으니까 좀 참아.”말하는 사이, 도겸은 딴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그는 대학 시절 운동회에 참가한 정은을 떠올렸다. 그녀는 스타트하자마자 발목을 삐었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달렸다.종점에 도착할 때, 정은의 복사뼈는 이미 말이 안 될 정도로 부었다.도겸은 얼른 정은을 병원에 데려다주었고, 의사는 책상을 두드리며 하마터면 뼈를 다칠 뻔했다고 그녀를 나무랐지만, 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시울만 약간 붉혔다.도겸도 정은을 바보라고 욕했다. “처음부터 멈췄어야지. 왜 굳이 달린 거야?”“그래도 이건 시합이잖아... 이를 악물고 버티면 돼! 너도 참, 내가 이렇게 아픈데 왜 계속 나한
“저는 도겸 오빠가 정은 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오빠를 사랑하고 있어요. 오빠는 정은 언니 때문에 애가 타겠지만, 저도 그런 오빠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단 말이에요. 방금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죠? 저는 단지 도겸 오빠의 곁에 있을 기회만 원할 뿐이에요.”소녀는 목소리가 가볍고 부드러우며, 진지하면서도 또 비천했다.도겸은 자신의 마음이 은근히 흔들린 것만 같았다.“안심해, 앞으로 난 널 잘 챙겨줄 테니까. 다시는 너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맹세해.”연희는 웃으며 도겸의 품에 엎드렸고, 손으로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그리고 꿀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요, 사실 저도 줄곧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도겸은 연희를 더욱 세게 안았지만, 마음은 자꾸만 답답해졌다.‘왜 이러지? 정말 이유를 모르겠네.’...행사장에서 이렇게 큰 사고가 발생하자, 호텔 직원은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 뒷수습을 했다.이 일은 손님들의 안전과 관련이 되었기에 책임자는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그날 밤, 경찰이 와서 모든 관련자들을 찾아가 사건의 경과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물론 그들의 예상대로 아무런 수상함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경찰들도 이번 사건을 뜻밖의 사고라고 결정지을 수밖에 없었다.이곳은 열대 지역이었고, 호텔 뒤쪽에 원시림까지 있어 뱀이 나타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그런데 독사는 그렇게 흔하지 않을 텐데요?” 수민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건...”“그리고 해변에 사람도 많았으니, 그런 곳에 나타나는 건 더 흔치 않은 일이겠죠?”경찰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호텔 책임자도 말문이 막혔다.수민은 냉소를 지었다.“이번이 두 번째예요. 제 친구는 이 섬에서 두 번이나 위험에 부딪쳤으니, 딱 기다려요. 이 일은 절대로 쉽게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정은아, 가자!”말이 끝나자, 수민은 정은을 끌고 성큼성큼 떠났다.“됐어, 화 풀어. 그 사람들 때문에 화낼 필요가 없잖아.” 사람들 속에서 빠져나간 후, 정
사장님은 단번에 정은이 H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외국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자, 그 태도도 무척 열정적이었다.“아가씨 안목이 좋네. 이 조각상은 모두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선물로 줘도 문제가 없다고.”정은은 웃으며 가격을 물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포장해주세요.”“오케이!” 사장님은 포장을 하면서 엽서 한 장을 안에 넣었다.“만약 하고 싶지만 하기가 쑥스러운 말이 있다면, 이 엽서에 쓰면 돼.”정은은 입술을 오므리며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막상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장님이 열정적으로 포장을 해준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호텔로 돌아온 정은은 샤워를 하러 갔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 책상 위에 놓인 그 선물 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다가가 엽서를 꺼냈다.엽서에는 몰디브의 가장 아름다운 바다 경치가 그려져 있었다. 정은은 그것을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어차피 쓸모가 없잖아.’...이튿날 아침, 심현빈은 시간이 다 됐다 싶어 레스토랑에 갔지만, 한 바퀴 돌아보아도 정은을 보지 못했고, 오직 수민 혼자만 아침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테이블 위에는 컵 하나와 샐러드 하나가 놓여 있었다.“좋은 아침이에요!”수민은 먼저 웃으며 인사를 했다.“세 바퀴나 돌면서 줄곧 날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와 함께 아침을 먹고 싶은 거예요?”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정말 의자를 가져와서 수민의 맞은편에 앉았다.“좋은 아침.”“네.”현빈은 수민의 컵을 힐끗 보았다.“우유가 참 맛있어 보이네.”“이거 두유예요.”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수민은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예요?”현빈도 연기를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정은 씨는? 왜 여기에 오지 않은 거지?”“무슨 일로 정은을 찾는 거죠?”“심심해서 찾으면 안 되는 거야?”수민은 어이가 없어서 되려 웃었다.“금융
현빈은 떠날 때 마침 아침을 먹으러 내려온 도겸과 어깨를 스쳤다.도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담담하게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정은을 보지 못했다.“자기야, 뭘 그렇게 찾고 있는 거예요?” 연희는 도겸이 사방을 둘러보는 것을 보고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도겸은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넌 다리를 다쳤으니 굳이 날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룸서비스를 부를 수는 있지만, 너무 오래 누워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단 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온몸에 곰팡이가 낄 것 같아요...”말하면서 연희는 혀를 내밀었다.도겸은 가볍게 응답했다.“뭘 먹고 싶어?”“샌드위치랑 우유요. 고마워요, 도겸 오빠.”점심에 도겸은 섬에 있는 4개의 레스토랑을 두루 찾았지만 여전히 정은을 보지 못했다. 오후에 그는 또 해변가를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정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밤이 되자, 도겸은 도리여 섬의 한식당에서 수민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는 정은이 없었다.더 이상한 것은 아침 때 현빈을 잠깐 만난 이후,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설마... 정은이 심현빈과 데이트를 하러 간 건 아니겠지?’이 생각에 도겸은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연희가 의자에 걸쳐둔 숄을 보고 잠시 생각했다.이것은 섬에서 산 것인데, 거의 모든 사람들 손에 하나씩 있었다. 물론 정은도 마찬가지였다.도겸은 걸어가서 수민에게 말했다.“점심때 정은이가 날 찾아왔었는데, 이 숄을 남겨두고 갔어. 네가 대신 돌려줘.”수민은 한창 잘생긴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기에, 이 말을 듣고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점심에요? 그럴 리가요? 정은은 이미 돌아-”‘앗!’이때 수민은 이상함을 감지했다.“강도겸,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도겸은 예리한 눈빛으로 물었다.“정은이 어디로 돌아갔는데? 귀국한 거야?”수민은 눈을 부라렸다.“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에요?”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확실히 귀국했구나.”원하는 답
두 나라의 온도 차가 큰 걸 알았던 정은은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 미리 롱패딩을 꺼내 자신을 꽁꽁 감쌌다.하지만 이렇게 추울 줄은 몰랐다.며칠 전 비가 쏟아진 탓에 나무와 전봇대마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지금은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고, 비록 눈에 보이기엔 가벼워 보였지만 옷에 닿는 순간 바로 얼음으로 변해버렸다.공항은 언제나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지만, 지금은 한겨울의 한밤중이라 그런지 택시 한 대 잡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은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예약한 차량을 확인했다. 3분 전까지만 해도 5분 내 도착 예정이던 차가 이제는 30분 후에나 도착할 수 있다는 알림이 떴다.그녀는 지도 어플을 확인해 보니 공항으로 오는 길이 온통 막혀 있었다. 취소할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 차 한 대가 천천히 정은의 곁에 멈춰 섰다.차창이 내려오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 짙은 회색의 터틀넥 스웨터가 목을 반쯤 감싸고 있었다. 정은의 각도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마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의 차가운 분위기에 따뜻함을 더하는 듯했다.“이 시간에 택시를 잡기가 많이 어려울 것 같은데. 마침 나도 집으로 가는 길이니까 얼른 타.”차 안에서, 정은이 추위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조재석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었다.차 안의 서랍에 핫팩이 있는 것을 떠올리며 재석은 또 얼른 그것을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이걸로 손 좀 따뜻하게 해.”정은은 자신의 손이 아이스바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핫팩과 차 안의 에어컨 덕분에 그녀는 그제야 좀 살 것 같다고 느꼈다.“고마워요. 방금 공항에서 얼어 죽을 뻔했거든요.”정은은 코를 훌쩍였다. 수민이 기사를 불러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수민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바로 거절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공항에서 택시를 잡지 못할 줄이야.재석은 정은을 바라보았다.“요 며칠 우리나라에서 국제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서 그래. 최근에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