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68화

Author: 십일
분노로 가득 찼던 서정의 두 눈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아! 그랬구나! 어쩐지 면접시험에서 일등을 했더라니.’

서정은 즉시 핸드폰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사진 여러 장을 찍었다.

다 직은 다음, 서정은 고개를 숙이며 사진속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재석은 정은의 뒤에서 걷고 있었는데, 키가 훤칠해서 가녀린 여자의 그림자를 뒤덮었다.

이 각도에서 보면 마치 남자가 의도적으로 여자를 품에 안은 것처럼 보였다.

‘역시 허탕치지 않았어.’

서정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소정은, 너도 내 마음이 독하다고 탓하지 마. 네가 굳이 나와 빼앗으려 하니까 나도 어쩔 수없이 이러는 거야.’

그녀는 차에 올라가서 컴퓨터를 꺼내며 서비대학교 홈페이지를 클릭했다.

그리고 곧 제보 이메일을 찾아냈다.

서정은 사진을 올린 다음, 또 정의로운 글을 편집했다

[서비대의 기풍이 타락되지 않도록, 많은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학교측에서 소정은의 입학자격을 다시 고려할 것을 간청합니다.]

마지막으로 ‘익명 발송’을 클릭한 다음, 이메일이 성공적으로 발송됐다. 뿐만 아니라 서정은 또 서비대 게시판에 같은 글을 올렸다.

하나는 이번 대학원 시험에서 많은 관심을 받은 수석이고, 하나는 서비대학교 유명한 천재 교수였다. 두 사람은 또 마침 면접시험이 끝난 이 민감한 시기에 만났다니. 이 글이 발송되자마자 바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인터넷에 퍼지기도 했다.

[야, 재벌 집 며느리로 되려는 사람들이 이젠 하다하다 대학원 입학자격까지 빼앗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많은 수험생들이 떨어졌던 거였어.]

[서비대도 이런 상황이 있었으니, 다른 대학교들은 더 심하겠지? 재벌들의 실력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뭘 어쩌겠어.]

[수능과 대학원 입시가 더 이상 공평하지 않을 때, 국가에 더 이상 인재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사진도 밝혀진 이상, 서비대는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거야?]

[서비대 측에서 즉시 소정은의 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69화

    그 줄임말들을 천천히 읽으면서, 정은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난 괜찮아.”[그 사람들은 머리도 쓰지 않나 봐. 남이 뭐라 하면 그런 줄 알고 제멋대로 지껄이다니. 넌 그 댓글들 보지도 말고, 이상한 생각하지도 마. 네가 오늘 이런 성과를 거두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난 절대로 네가 억울하게 당하지 않도록 할 거야. 우리 오빠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수민의 말에 정은은 엄청난 위로를 받았다.“고마워, 수민아.”이쪽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재석의 전화가 들어왔다.[나도 게시판의 일을 알고 있어.]재석은 쓸데없는 말하지 않고 바로 요점을 말했다.[누군가 고의로 사진을 찍어 이 일을 통해 여론을 일으키려고 하는 게 분명해. 그리고 아마도 이번에 네가 수석으로 대학원 시험에 합격된 일과 관련이 있을 거야.]정은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가 침묵을 하자, 재석은 잠시 멈추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학교에서도 제보를 받았는데, 지금 이미 이 일을 조사하고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결과를 조사해낼 거야. 학교측은 좋은 학생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을 것이고, 또한 나쁜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정은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어 물었다.“이 일을 저지른 사람을 알아낼 수 있을까요?”[어렵진 않겠지만 시간이 좀 필요할 거야. 너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학교측도 이 일을 매우 중시하고 있어. 특히 오미선 교수님...]이 일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오미선은 이미 전해들었다.재석과 관련이 되었기에, 학교측이 여전히 망설이고 있을 때, 오미선은 직접 나서서 정은을 위해 담보할 테니 학교측에서 끝까지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재석은 심지어 손을 쓰지도 않았는데, 이 일이 바로 해결되었다.정은은 조용히 듣고 있었고,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오미선이 엄숙한 표정으로 자신을 위해 힘쓰는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담담하게 웃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70화

    세심한 네티즌들은 이 영상을 올린 계정이 바로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그들은 나름 정은을 위해 해명한 셈이었다.영상 속에서, 재석은 정은에게 마지막으로 질문한 면접관이었다. [어머! 영어로 질문을 한 거였어?!][이게 봐주는 거라고? 난이도가 헬인 것 같은데.][와, 나 솔직히 그 영어 단어들을 들었을 때, 전신이 마비된 거 있지?][면접시험 현장에서 학생에게 문제를 풀라고 하는 건 정말 처음 보네요.][조 교수님 정말 다정하셔. 화이트보드까지 준비하라고 하다니, 너무 멋있잖아!][조 교수님 정말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ㅠㅠ][저도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 마음속 과학연구학자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엎은 것 같아요.][금테 안경까지 끼니 정말 취향 저격이에요. 소설에서 나오는 점잖지만 야심이 많은 남자 주인공 같아요!]물론 계속 악플을 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 영상이 조작된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 학교측에서 일부러 그런 댓글을 달게 한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그러나 악플은 곧 긍정적인 댓글에 눌렸다.진실을 안 네티즌들은 심지어 즉시 서정을 겨냥하기 시작했다.[우리가 바보인 줄 아나 봐?][대체 누구야, 감히 우리를 이용하다니?][내 댓글 공격을 받아랏!]수민운 줄곧 댓글을 살피고 있었는데, 여론에 반전이 생긴 것을 보고 재빨리 정은에게 문자를 보냈다.날씨가 따뜻해지자 화분에 연녹색의 작은 싹이 돋아났다. 정은은 심란하여 책을 보고 싶지 않아 아예 화분의 마른 잎들을 하나하나 다듬기 시작했다.문자 제시음을 듣자, 정은은 고개를 돌렸는데, 수민이 보낸 문자를 보았다.그녀는 장갑을 벗고 손을 깨끗이 씻은 후에야 문자를 확인했다.수민이 보낸 링크를 클릭하니,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것은 정은이 처음으로 영상을 통해 자신의 면접시험을 본 것이지만, 주의력은 온통 재석에게 떨어졌다.질문을 할 때, 또 그녀에게 포기할 것인가를 물어볼 때, 마지막 대답이 끝날 때까지 남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71화

    [잠깐, 내가 오늘 정말 다른 일 있어서 너에게 전화한 거야.]“무슨 일이죠?”현빈의 말투가 엄숙해졌다.[몰디브에 있었던 일 말이야, 이미 결과를 알아냈어.]정은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았다.“누가 그런 거죠?”[오늘 시간 있어? 같이 밥 먹자. 너한테 줄게 좀 있거든.]정은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이튿날 오후 3시에 현빈과 만나기로 약속했다....다음 날, 레스토랑에서.“이 서류는 내 변호사가 받은 건데, 한 번 확인해 봐.”자리에 앉자마자 현빈은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서류 봉투를 꺼내 정은의 앞으로 밀었다.“작년부터 이 다국적 기소 사건은 계속 추진되어 왔어. 그동안 호텔은 압박을 견디지 못해 결국 모든 감시 카메라 화면을 제공했고. 게다가 목격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단서를 따라 계속 조사하다가 마침내 진실을 밝혀낼 수 있었던 거야.”현빈은 가장 먼저 이 일을 알았고, 자신의 변호사를 무척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알았을 때도 전혀 놀라움을 느끼지 않았다.‘내가 그때 추측한 것과 거의 차이가 없으니까...’현빈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그윽한 눈빛이 정은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은근히 웃으며 말했다.“피해자는 정은 씨니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정은 씨가 결정하면 돼.”정은은 손을 살짝 움켜쥐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그 서류를 열었고...안에는 서연희가 그 당시 잠수 코치를 매수해 산소통을 교체한 장면, 선물함에 독사를 넣은 장면을 아주 상세하게 찍었다.그 외에도 영상이 있었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 앞에서 발뺌하고 싶어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정은은 여러 번 상처를 입었고, 심지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장본인을 봤을 때, 그녀는 마땅히 분노를 느껴야 했지만, 지금 정은은 무척 침착했고 평온했다. 마치 이 결과를 진작에 안 것처럼.한참 뒤, 정은은 고개를 들어 또박또박 물었다.“이 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72화

    연희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끌려갔다. 그녀는 당황해하더니, 가장 먼저 자신이 외국에서 한 일들을 떠올렸다.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놀라운 눈빛을 보며, 연희는 웃으며 침착하게 말했다.“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난 경찰서에 가서 한 번 확인해 볼게.”연희의 세 룸메이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결국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지금 연희가 경찰에게 잡혀간 것 같은데...”“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그럼 이제 어떡해? 연희 부모님에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넌 연희 부모님의 번호를 알고 있어?”룸메이트가 고개를 흔들었다.이때, 그녀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다. 한 번은 도겸이 연희를 학교로 데려다줄 때, 마침 그들과 마주쳤는데, 그들에게 명함을 건넨 적이 있었다.‘그 명함 위에 전화번호가 있을 거야.’이렇게 생각하니, 그 여자아이는 얼른 기숙사로 달려가 명함을 찾은 다음, 위의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도겸이 마침 회의를 마치고 퇴근하려던 참에 개인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핸드폰 두 대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개인 번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 번호는 비록 낯설었지만, 도겸은 여전히 받았다.[혹시 강도겸 대표님이신가요? 저는 연희의 룸메이트인데, 연희가 방금 학교에서 경찰에게 끌려갔거든요! 지금 너무 걱정이 되네요. 저희 대신 경찰서에 가 보시면 안 될까요?]도겸은 눈썹을 찌푸리며 상대방이 다급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알았어, 내가 해결할게.”그는 외투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기사가 차문을 열자 도겸은 허리를 굽혀 앉으면서 분부했다.“경찰서로 가.”‘어떻게 아무 이유 없이 경찰에게 끌려갈 수가 있겠어? 경찰들이 서연희를 잡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도겸은 핸드폰을 매만지더니 어두운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 그는 비서에게 전화를 했다.“서연희가 경찰서로 끌려갔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알아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73화

    ”도겸 오빠, 제가 그런 짓을 한 것도 다 오빠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정말 오빠의 곁에 있고 싶어요.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줄래요? 앞으로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도겸은 무뚝뚝하게 입술을 벌렸다. 연희가 당황해하며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며,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넌 이미 범죄를 저질렀어?! 날 사랑한다는 핑계 따윈 집어치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다니. 이게 바로 네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인 거야? 넌 다 너 자신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한 거잖아! 헤어지자, 이제부터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난 더 이상 너와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연희는 도겸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지만,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경고했다.“난 똑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아. 네가 날 구해준 것을 봐서, 이번에 이 일은 이대로 넘어가겠어. 그러나 매번 이렇게 운이 좋진 않을 거야.”말이 끝나자, 도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연희는 쫓아가려고 했지만 얼마 걷지 못하고 배가 은근히 아프기 시작했다.그녀는 몸이 건강해서 생리통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인지, 한 달이 되어갔지만 여전히 생리가 오지 않았다.다리 사이로 전해오는 축축한 느낌, 그리고 점차 멀어지는 남자의 차를 보면서 연희는 먼저 병원에 갈 수밖에 없었다.진료실 의사는 몇 가지 질문을 한 후에 연희에게 일반적인 검사를 해 주었다.30분 후, 연희는 검사 보고서를 들며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제가... 제가 임신을 했다고요?”“HCG 수치가 양성으로 나왔으니 임신한 게 맞습니다. 아직은 임신 초기라서, 출혈량이 많지 않다면 잘 휴양하면 돼요.”연희는 의사가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았고, 유독 '임신'이라는 두 글자만 머릿속에서 메아리를 치고 있었다.시간을 계산해 보면, 아마도 설날 그쯤에 임신한 것 같았다.연희는 보고서를 꽉 쥐더니, 망연하던 표정은 순식간에 확고해졌다. 그녀는 마치 방향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74화

    연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남자의 말은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다.‘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지? 나에게 만회할 기회조차 주지 않다니. 난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야!’“도겸 오빠, 제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잖아요! 이것 봐요, 우리 아이의 초음파 사진이에요. 정말 이 아이를 버릴 거예요?”도겸은 시선을 아래로 움직이더니 연희의 약간 떨리는 손에 있는 그 초음파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검고 모호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냉담하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아이를 지우라고.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는 게 더 낫잖아.”게다가 도겸은 이것이 자신의 아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치자, 연희가 귀찮은 도겸은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연희는 남자가 매몰차게 돌아서는 것을 보고 두 손을 주먹으로 꽉 쥐었다. 분노와 질투심이 밀려왔다.‘지금 내가 그런 일을 했다고 날 버리려는 거야? 난 단지 나 자신의 남자를 지켰을 뿐인데,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지? 다 그 소정은 때문이야. 일부러 도겸 오빠를 꼬셨기에 오빠가 지금까지도 단념하지 못한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나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여기까지 생각하자 연희는 이를 우두둑 갈았고, 아름답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안 돼, 난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이때 연희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이렇게 하면 어쩜 일이 해결될지도 몰라...’토요일, 정은은 경찰서의 전화를 받았다. 맞은편의 사과를 들으면서 그녀는 오히려 무척 평온했다.결과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정은은 이미 예상했다. 그리고 여전히 신고를 한 이유도 단지 자신을 위해서였다.‘나머지는 하늘에 맡기자고.’전화를 끊은 후, 정은의 핸드폰에 영상 하나가 들어왔다.게시판에 올라온 루머는 이 일이 점차 커질 때 학교측에서 삭제했다.학교에서도 그 IP주소를 조사해 봤는데 외지에 있는 IP였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75화

    하지만 지금은 의미가 없었다.도겸이 잘못을 깨달았어도 너무 늦었던 것이다.정은은 무뚝뚝하게 도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손은 문손잡이를 꽉 잡으며 방어하는 자세를 보였다.그녀는 또박또박 대답했다.“미안하지만 네 마음 거절할게.”정은은 용서하고 싶지도, 화해하고 싶지도 않았다.도겸은 욱해지기 시작했다.“왜?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전에 나와 화해하기 싫은 이유가 서연희 때문이었잖아? 지금 난 이미 그 여자와 헤어졌는데, 넌 왜 여전히 날 거절하는 거지?!”‘난 이미 그렇게 많이 양보했는데, 정은이는 도대체 언제까지 욕심을 부리고 싶은 거지?’버럭 화를 내고 있는 도겸에 비해, 정은은 훨씬 평온했다.“예전에 난 너밖에 없었으니, 나에게 있어 넌 나의 전부였어.”도겸을 위해서 정은은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것을 포기했다.두 사람이 가장 뜨겁게 사랑할 때, 도겸은 정은의 전부였고, 정은은 도겸에게 자신의 남은 인생을 맡기고 싶었다!도겸의 눈빛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는 절박하고 거의 열광에 가까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지금도 똑같잖아? 네가 원한다면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정은은 시선을 드리우며 고개를 저었다.“영원히 제자리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너와 헤어진 후, 난 너 말고도 이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많고, 내가 추구할 만한 일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어.”도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추구할 가치가 있는 일이 뭔데? 대학원에 진학하는 거? 아니면 공부하는 거? 그러나 석사 과정을 마치더라도 넌 결국 일자리를 찾아야 하잖아. 돈을 벌어야 하니까. 난 네가 원하는 만큼 줄 수 있는데.”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야.”도겸은 코웃음을 쳤다.“그 50억짜리 수표 이미 가져갔잖아? 그런데 지금은 돈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다니? 내가 믿을 것 같아? 아니면 처음부터 돈 때문에 나에게 접근한 거였어?!”분노가 극에 달한 남자는 말을 가리지 않기 시작했다.정은은 도겸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76화

    ”가져가서 읽어 봐. 9월에 정식으로 입학할 텐데, 그 전에 연구 방향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실험팀에 가입할 때, 갈피를 잡지 못할 거야.”정은은 그 자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안심하세요. 저는 가능한 한 빨리 이 자료들을 외울 테니 절대로 교수님의 발목을 붙잡지 않을 거예요!”오미선은 정은이 맹세를 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널 못 믿을까 봐 그래? 네가 면접 시험을 본 영상, 나도 다 봤어. 그동안 나도 네가 현재의 연구 작업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한 적이 있어.”그녀는 정은의 어깨를 두드렸다.“그러나 그 영상을 보고 나니, 난 네가 전에 배운 것을 하나도 잊지 않았단 것을 발견했어.”그리고 조재석이 물어본 그 문제는 오미선에게 놀라움을 가져다 주었다.대학원 3학년의 학생이라도 정은보다 더 잘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좋고 나쁨은 답안 자체에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정은이 해답 과정에서 보여준 사고성과 논리 능력이었다.“넌 내 학생이니, 나보다 네 재능과 우수함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넌 그런 실력이 있단 말이야. 알았어?”...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오미선은 전화를 받으러 갔다.정은은 그 자료를 안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오미선이 한 말을 생각하니 저도 몰게 넋을 잃었다.그동안 정은은 줄곧 확고하게 걸어온 것은 아니다. 그녀도 자신이 잘하지 못하고 일을 망칠까 봐 두려워했고 망설이기까지 했다.특히 오미선이 요 몇 년 동안 줄곧 한 과제에 전념해 왔지만,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은은 자신의 가입이 새로운 성과를 가져오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논문을 열자, 정은은 이 자료들의 코드 순서가 뜻밖에도 연월에 따라 배열된 것을 발견했다.아래로 내려갈수록 연대는 점점 더 오래되었다.어떤 것은 심지어 지난 세기 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생물이 금방 하나의 학과로 독립되었을 때였다.전에 정은은 독자의 각도로 책을 보았기에, 생물학의 발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6화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5화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4화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3화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2화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1화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0화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9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8화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