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겸은 보드카 한 병을 주문한 다음, 한 잔, 두 잔 계속 마셨다...선우는 그가 술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렸다.“형, 이 술은 너무 독하니까 좀 적게 마셔!”‘그러다 또 병원에 들어가지 말고...’도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계속 술잔을 들고 있으며 내려놓지 않았다.“너의 핸드폰은? 이리 줘.”“내 핸드폰은 또 왜요?” 선우는 의혹을 느끼며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도겸은 바로 빼앗아오더니 즉시 정은의 번호를 눌렀다.곧 맞은편에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사막에서 떠돌아다니다 마침내 수원을 찾은 사람인 것처럼 절박하게 입을 열었다.“정은아, 보고 싶어...”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아... 앞으로 정은 누나는 내 전화조차 받지 않겠지?’“정은아, 돌아와, 응? 내가 잘못했어... 전에 분명히 함께 백년해로하기로 약속했잖아. 이제 겨우 몇 년이 지났다고 날 버리려는 거야? 지나간 일은 다 지나가게 내버려두지. 네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든, 일하고 싶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너와 함께 할게. 난 무조건 널 응원할 거야... 그리고 우리 작년에 약속했잖아, 같이 터키에 가서 일몰을 보고 별을 세기로. 다 잊은 거야?”도겸은 잠긴 목소리로 한꺼번에 말을 다 했고, 정말 너무나도 비천했다.그러나 맞은편은 시종 침묵하며 대답하지 않았다.도겸은 계속해서 말했다.“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나 이제야 네가 날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알게 되었단 말이야... 정은아, 사랑해, 나 정말 너 없으면 안 돼...”정은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말 다 했어?]그러나 도겸의 예상과 달리, 정은은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아빠가 된다는 소식 들었어, 축하해.]뚜- 뚜- 뚜-정은은 말 한 마디로 도겸을 철저히 지옥으로 몰아넣었다.도겸의 두 눈은 초점을 잃었고, 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도 힘없이 드리워졌다.‘날 축하한대. 하하... 날 축하한다니?! 정은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어! 나
감시 화면에 나타난 시간은 오후 6시였고, 넓은 거실에서 정은은 혼자 소파에 앉아있었다.도겸은 단번에 그녀가 자신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핸드폰도 놀지 않으며 그냥 이렇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시들고 있는 장미와 같았다.원래 도겸이 좋아하던 ‘집의 느낌’은 한 여자가 하루하루 타협하고, 싫증조차 내지 않은 기다림, 심지어 자아를 완전히 포기란 희생으로 바꿔온 것이었다. 그가 언제 돌아오든 거실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다.“어렸을 때 아버지는 일하느라 바쁘셨고, 어머니는 놀러다니느라 바쁘셨어. 그럼 난 혼자 집에 남아 이모님과 함께 했지. 그래서 비록 부모님이 모두 계시고, 집안 형편도 아주 좋지만, 난 지금까지 포근하고 따뜻한 집의 느낌을 느끼지 못했어...”“정은아, 난 가끔 정말 네가 부러워... 간단하고 깨끗한 가족 관계, 한 쌍의 금슬이 좋은 부모님, 그리고 어릴 때부터 사랑으로 널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널 위한 모든 일이라면 직접 나서셨잖아...”“오늘까지도 내 부모님은 돈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셔. 돈을 쓰면 좋은 아들을 키울 수 있고. 만약 이 아이가 좋지 않다면, 틀림없이 돈을 많이 쓰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실 거야.”“정은아, 내가 널 만난 게 너무나도 큰 행운인 것 같아. 네가 나로 하여금 이런 따뜻함을 느끼게 했거든...”“너와 함께 한 후로, 내 머릿속에는 항상 이런 화면이 나타났어. 퇴근하자마자 네가 주방에서 바쁘게 돌아치는 모습, 아이가 거실에서 놀고 있는 모습. 우리 가족은 세 식구 심지어 네 식구 다섯 식구는 함께 모여 저녁을 먹고 있었어...”“식사를 한 후, 아이들은 정원에서 놀고, 넌 그네에 앉아 있었어. 그럼 난 네 뒤에 서서 가볍게 널 밀었고. 그렇게 우리는 아이들이 서로를 쫓아다니며 웃고 떠드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정은아, 날 믿어. 우리는 계속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늙은이가 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도겸은 최근 한 달의 감시 화면을 기록한 파일을 클릭했다.연희는 이미 잠들었다. 아래층에서 어렴풋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바로 정신을 차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떠날 때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이제 겨우 몇 시간 지났다고. 결국 이렇게 다시 돌아왔잖아? 흥, 재벌 집안 사모님도 별거 아니네! 아니면 정말 나 혼자 여기에 내버려두든가. 어차피 내 뱃속의 아이로 천 억을 바꿀 수 있으니까. 누가 누굴 무서워한다는 거야?’서영숙이 돌아오면 왕미자와 임강주 그들도 함께 돌아올 것이다. ‘마침 배도 고프니 이모님에게 보신탕 좀 끓여 달라고 해야지.’연희는 거실과 주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의혹을 느끼며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이때 연희는 현관에 남자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도겸 씨가 돌아온 거야?’생각을 하다가 연희는 얼른 침실로 돌아가서 섹시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서재로 걸어갔다.똑똑-“도겸 오빠, 돌아왔어요?”그녀는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서재의 불이 켜져 있었으니 도겸 말고 또 누가 안에 있겠는가?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연희는 흥분한 심정을 꾹 누르며 웃으며 문을 밀었다.“도겸 오빠...”도겸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빨간색 레이스로 된 잠옷 치마를 입고 있었다. 가슴이 푹 파인 스타일에 가느다란 끈 두 개가 새하얀 어깨에 걸려 있었다.경망스럽고 저속한 모습이었다.남자가 자신을 쫓아내지 않자, 연희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언제 돌아오셨어요? 또 야근하신 거예요? 이주 동안 계속 힘들게 일하셨으니 많이 피곤하시겠죠? 자, 제가 안마해드릴게요...”연희는 남자가 그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은 일에 적당한 핑계를 찾았다. 그리고 마치 전에 다투지 않았던 것처럼 활짝 웃었다.연희가 비위를 맞추며 가식적으로 웃는 것을 보면서 도겸은 화
화면 속의 연희는 몰래 서재에 잠입한 후, 두 서류를 바꾸고 있었다.이 외에 또 평소 거들먹거리며 서영숙을 지시하고 모욕하는 장면도 있었다.갑작스러운 증거 앞에서 연희는 멍해졌다.이 영상 때문인지 아니면 남자의 매정한 따귀 때문인지, 연희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네가 단지 허영심이 있고 천박한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버릇처럼 거짓말을 하고, 각박하고 신랄하며 또 시비를 일으키고 나와 우리 어머니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 네가 자신의 주제를 똑똑히 파악했으면 해서 널 때린 거야. 있어서는 안 될 망상을 하지 말고. 그리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해. 그렇지 않으면...”도겸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투가 음침했다.“넌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연희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극심한 공포에 따가운 양쪽 볼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도, 도겸 오빠, 저 정말 잘못했어요...”도겸은 말을 하지 않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제가 내일 본가에 찾아가서 아주머니에게 사과할게요. 절 때리든 욕하든 절대로 말대꾸를 하지 않을 거예요! 아주머니께서 화를 푸실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남자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연희는 당황해지더니 콧물과 눈물을 줄줄 흘렸다.“저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임신해서 호르몬에 이상이 생겼나 봐요. 그래서 아주머니를 그렇게 대한 거예요...”도겸은 차가운 눈빛으로 연희가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질질 짜며 불쌍하게 울고 있었다.“말 다 했어?”연희는 멈칫했다.“다 울었냐고?”“오빠...”“다 울었으면 얼른 가서 네 짐이나 싸.”“뭐, 뭐라고요?”도겸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그날 너에게 꺼지라고 한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한 거야? 이주 넘게 이 집에 남겨뒀으니 나도 널 봐줄 만큼 봐줬어.”“아니요! 그건 안 돼요! 저한테 이러면 안 되죠!” 연희는 울며 고개를
“가족분 이미 떠나셨어요...”“뭐라고요?! 떠났다뇨, 그게 무슨 뜻이죠?”“이, 이 임산부는 저희 병원의 SVIP인데, 전에 갖은 이유로 여러 차례 입원하신 적이 있거든요.”의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늘 마침 당직을 섰는데, 전에 연희를 본 적이 없어서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그러나 간호사는 달랐다, 연희를 아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까칠한 임산부 때문에 엄청난 괴롭힘을 받았다.매번 연희가 입원할 때마다 간호사들은 근심을 하기 시작했다.“이게 통지서에 사인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죠? 얼른 가족에게 연락해요! 사인을 해야 수술을 할 수 있으니까요. 태아의 심장은 이미 뛰지 않고, 임산부는 출혈이 심하기 때문에 시간을 계속 끈다면 생명에 위험이 생길 수도 있어요.”“하, 하지만 임산부를 데려다주신 그 남자분은 이미 떠나셨어요...”의사는 화가 났다.‘세상에 이런 남편이 있다니! 돈이 많으면 다야? SVIP 병실에 입원시킬 돈은 있고, 출혈이 심한 아내 곁에 있을 시간이 없다 이거야? 이 호족들은 정말 사람도 아니군!’“전에 이 임산부가 몇 번 입원하신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그런 다른 방문객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가서 방문객 기록을 찾고 아무에게나 연락하면 돼요.”“네, 교수님!”...전화가 왔을 때, 서영숙은 한창 꿀잠을 자고 있었다.그녀는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설정했기에 벨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꺼졌다, 꺼졌다 켜졌다 하다가 결국 조용해졌다.강서정도 간호사의 전화를 받았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술집에서 한창 신나게 놀고 있었다.“서정아, 네 핸드폰이 울리고 있어.”“어디 보자...”그녀는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그것이 전용기 번호인 것을 발견했다.‘스팸 전화겠지...’서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은 또 전화를 했다.이번에 서정은 전화를 받았다.그러나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서정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했다.“네?
병실에. 연희는 깨어나서 아이가 유산된 것을 발견하고,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었다.‘이 아이는 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희망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의사 선생님, 제 아이 아직 살아 있죠? 방금 말씀하신 건 저를 속인 거죠? 이 장난은 전혀 웃기지 않아요, 제 아이는 분명히 살아 있어요!”“아이를 잃은 마음은 저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말고 푹 쉬세요. 아직 젊으시니까, 앞으로...”여기까지 말하자, 의사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계속 말하지 않았다.“왜 제 아이를 지운 거죠? 최선을 다해 제 아이를 구하지 않았죠?! 그리고 왜 본인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수술을 진행했어요?! 당신들에게 그럴 권리가 없어요!”연희가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는지, 의사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설명했다.“당시 아가씨는 출혈이 심했고 양수도 터졌습니다. 수술실로 옮겼을 때, 태아의 심장 박동은 이미 멈춰 있었습니다. 즉시 임신중절수술을 하지 않으면 환자분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아가씨의 가족에게 연락을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으셨습니다.”“결국 병원 측에 긴급 상황을 알린 후, 원장님의 비준을 거쳐 수술을 진행했던 것입니다. 병원 이사들과 보건소 직원이 수술 현장에 있었고, CCTV도 수시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저희의 실력에 의문을 가지신다면, CCTV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병원 측도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입니다.”환자들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병원은 이미 완벽한 처리 방법을 생각해냈다.연희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눈물을 쏟았다.의사는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려 떠났다....“대표님, 병원 쪽에서 엄청 많은 전화가 왔습니다.”도겸이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비서는 핸드폰을 들고 가서 보고했다.“병원?”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네.”서영숙은 이미 퇴원했기 때문에 그녀일 리가 없었다.설령 정말 무슨 일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먼저 도겸
“여보세요, 누구세요?”[안녕하세요, 서연희 씨의 가족분이 맞으시죠? 여긴 성종병원 산부인과입니다. 서연희 씨가...]서영숙은 이 말을 듣자마자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그 여자가 또 발광을 하고 있겠지.’그녀는 직접 간호사의 말을 끊었다.“또 몸이 안 좋은 거야? 죽겠다며 난리를 피우고 있는 거지? 이제 너희들도 나에게 전화할 필요가 없어. 서연희 그 여자가 죽겠다면 썩 떨어진 곳에 가서 죽으라고 해. 날 귀찮게 하지 말고!”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허! 매번 이 수작이네, 귀찮지도 않나 봐?’서영숙은 연희가 뱃속의 아이를 믿고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니 아무리 배짱이 좋아도 연희는 감히 그 아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이렇게 생각하니 서영숙은 자신이 전에 괜히 연희에게 당했다고 느꼈다.그리고 고의로 왕미자, 임강주와 기사 등을 데려간 것도 연희에게 교훈을 주고 싶어서였다.‘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혼자 실컷 고생을 해봐야지!’여기까지 생각하자 서영숙은 마스크팩을 두드리며 흐뭇하게 노래를 흥얼거렸다.병원에서, 두 간호사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모두 어이가 없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어휴, 이것이 바로 남의 가정을 파괴한 내연녀가 받아야 할 벌이구나.”...연희는 병실에 이틀째 누워 있었다.그기간 피가 멈추지 않아 또 한 번 수술실에 들어갔다.밀려나왔을 때, 연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비록 정신이 있었지만 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출혈과 함께 심각한 감염이 발생하여 그녀는 엄청난 고생을 했다.하지만 곁에는 간병인 한 명밖에 없었다.그동안 연희는 도겸과 서영숙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부탁을 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날 버린 거야!’아픈 몸과 우울한 감정 때문에 연희는 갈수록 욱하고 각박해졌다.간호사들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울며 겨자 먹기로 병실에 들어가야 했다.‘SVIP이니 우리도 방법이 없잖아?’...서영숙은 3
연희의 룸메이트였다.“연희야,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진 거야?” 장나미는 연희의 얼음처럼 차가운 손을 잡았다.“유산을 했어도 산후조리를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무슨 고질병이...”연희는 ‘유산’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마자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누가 유산을 했다는 거야?”장나미는 멍해졌다.“허튼소리나 하다니! 난 멀쩡해! 아무 일도 없다고!”“연희야, 너...”“넌 날 비웃으러 온 거지? 어림도 없어!”연희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초라해진 줄 알고 와서 날 짓밟고 싶었나 봐? 장나미, 네 동정심 집어치워.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전에 기숙사에 있을 때, 넌 내가 돈 많은 남자친구 사귀었다고 줄곧 질투했잖아?” “흥, 난 지금 비록 병원에 있지만, 내가 가졌던 것은 네가 평생 얻을 수조차 없는 거라고! 네가 뭔데 감히 날 무시하는 거야?”장나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지금 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연희는 냉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날 병문안 하러 온 것은 그냥 핑계일 뿐. 넌 날 통해 다른 재벌들과 접촉하고 싶은 거지? 다 같은 여자들끼리 무슨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거야? 네가 들어올 때부터 난 네가 여우란 것을 알아차렸단 말이야!”“너...” 장나미는 화가 나서 얼굴까지 붉혔다.“정말 어이가 없네! 넌 아주 미쳤어! 난 네가 혼자 입원했다고 해서 보러 온 것일 뿐인데,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원래 장나미는 연희를 설득하러 왔다. 지금 빨리 학교에 가서 복학 신청을 하라고.비록 명문가에 시집가는 것은 물거품이 됐지만, 적어도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다. 그럼 졸업 후에 일자리를 찾아 자신을 먹여 살리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그러나 지금,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허, 서연희는 이미 돈 때문에 눈이 멀었고, 깊은 구덩이에 빠져 더 이상 나오지 못하고 있어. 아니, 얘는 나올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안에서 죽고 싶은 모양이야.’장나미는 자리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