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후, 이순정과 철봉은 수많은 쇼핑백을 들고 백화점에서 나왔다.그러나 이때 이순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아차! 목걸이 하나 사는 거 잊어버렸네! 얼른 돌아가자...”철봉은 두 손에 물건을 가득 들고 있었고, 다리는 거의 부러질 정도였다.“엄마, 오늘은 그만하자. 이미 이렇게 많은 물건을 샀잖아. 힘들어 죽겠어.”“하지만...”이순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손에 가득한 쇼핑백을 보고 있으니 확실히 불편했다.그녀는 눈알을 굴리다 시선이 서영숙의 목에 떨어졌다.“어? 당신 목에 있는 이 목걸이 꽤 괜찮아 보이는데, 그냥 나 줘. 당신은 하나 더 사면 되잖아.”서영숙은 두 눈을 부릅뜨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의 목걸이는 까르띠에 한정판이었다. 4개월 동안 기다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수십억을 써서야 손에 넣을 수 있었다.‘이 여편네 지금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기가 원하면 다냐고?! 대체 얼마나 뻔뻔하길래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이순정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지금 그게 무슨 표정이야? 난 그저 목걸이 하나를 달라고 했을 뿐, 당신 목숨을 달라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나도 당신이 꼈다고 뭐라 하지 않았고. 지금 당신에게 새로 살 기회를 주고 있는데 오히려 그런 표정을 짓다니?”“아이고, 아까우면 그냥 관두자. 원래 당신과 잘 상의해서 가능한 한 빨리 이 일을 해결하고 싶었는데. 지금 보면 당신은 성의가 아예 없는 것 같아. 그래, 그럼 이렇게 질질 끌지 뭐, 어차피 난 하나도 급하지 않으니까.”말을 마치자 이순정은 철봉을 바라보았다.“철봉아, 이따가 돌아가서 그 동영상을 다시 올려보자.”간단한 말 몇 마디였지만, 협박과 공갈이 가득했다.서영숙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그들에게 빨리 꺼지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머릿속에 강구염의 경고가 떠올랐다.그녀는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서야 겨우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목걸이를 벗었다.“그래! 당신은 재벌 집 사모님이니
이순정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이런 문물에 흥미가 없었기에 오히려 짜증이 났다.“아이고, 얼른 나가자...”서영숙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들과 함께 떠나려던 참에 갑자기 익숙한 누군가를 보았다.정은이 수민과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 뒤에는 나이가 좀 많은 중년부부가 따라다녔다.남자는 쇼윈도 앞에 서서 핸드폰으로 안에 있는 전시품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도 가까이서 감상을 하며 무척 집중했다.자세히 보면 여자의 생김새는 정은과 많이 비슷했다.‘이 두 사람이 바로 소정은의 부모님인가?’소진헌은 사진을 찍으면서 감탄했다.“이 청자 어룡 모양 주자는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군... 이 어룡, 이 색깔, 이 양식 좀 봐... 와, 감탄이 절로 나오네.”며칠 전에 정은은 이미 그들을 데리고 구경을 하러 왔는데, 오늘 또다시 찾아왔던 것이다.그러나 소진헌은 여전히 흥미진진했다.이때 한 노인 관광단이 다가왔다. 그들은 소진헌의 소개를 듣고 저마다 웃으면서 더 많이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노인들은 눈이 좋지 않아 글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해설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들의 가이드와 흩어졌다.“우리는 듣는 것을 좋아하니까 계속 설명해 보게!”‘그냥 좋은 일 한 셈 치자.’그렇게 생각한 소진헌은 전시품 옆의 문자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위에 없는 지식까지 보충했다.“이 주자는 단순한 생활 공예품이 아니에요! 이것은 상형청자의 독자적 미감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어서 그야말로 고려인의 자부심이라 할 수 있죠. 상형청자는 인물, 동물, 식물 등 형상을 본떠 만든 청자를 의미하는데, 청자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빼어난 조형성과 고려 특유의 맑고 푸른 유약이 더해져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어요. 실용성과 심미성을 모두 겸비한 보기 드문 도자이기 때문에, 당시의 향, 차, 술을 음미하던 문화, 문인들의 섬세한 취향 등이 어우러졌어요. 상형청자가 바로 당시 소유자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는 기물이었죠.”짝짝짝-소진헌이 말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정은 일행은 다음 목적지로 가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몸을 돌리자마자 서영숙과 부딪쳤다.수민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정은은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는데, 잠시 후 침착하게 시선을 돌렸다.그녀와 서영숙은 이제 낯선 사람일 뿐, 기본적인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만나도 그저 모르는 척만 하면 됐다.그럼 누구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서영숙은 귀신에 홀린 듯 앞으로 다가가더니 웃으며 정은에게 인사할 줄이야.“정은아, 너도 박물관 구경하러 왔어?”소진헌과 이미숙은 눈을 마주쳤다.‘정은이와 아는 사람인가? 하지만 정은이는 이런 사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는데.’두 사람은 더욱 궁금해졌다.이를 본 수민은 조용히 그들의 귓가에 대고 무슨 말을 했다.그 순간, 서영숙을 바라보는 이미숙의 눈빛이 달라졌다. 소진헌도 웃음을 거두며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서영숙은 어색해서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이순정이 옆에서 짜증을 내며 재촉했다.“뭘 그렇게 꾸물거리는 거야? 빨리 나가자고. 이 안은 너무 답답하고 덥잖아. 아, 곰팡이 냄새 때문에 죽겠네!”“그러게!” 철봉은 맞장구를 쳤다.“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호텔에서 놀걸. 죽은 사람들의 물건이 뭐가 희한하다는 거야? 엄마, 나 배고파.”이순정은 턱을 들며 서영숙에게 명령했다.“근처에 레스토랑 없어? 가서 우리 철봉이에게 먹을 거 좀 사줘. 비싸고 좋은 음식으로 말이야!”만약 땅굴이 있다면, 서영숙은 이미 창피해서 파고 들어갔을 것이다.정은과 수민은 눈을 마주쳤고, 모두 이 말에 깜짝 놀랐다.‘강씨 집안의 사모님이 이렇게까지 참고 있다니? 찍소리도 못하고 있잖아! 이 두 사람 대체 정체가 뭐야?’수민은 눈을 깜박이더니 웃으며 철봉을 바라보았다.“안녕하세요, 성함이 어떻게...”미녀가 주동적으로 말을 걸자. 철봉은 즉시 미소를 지었다.“저 서철봉이라고 하는데! 아가씨는요?”‘아, 성이 서 씨구나...’서연희와 많이 닮은 그 얼굴을 보며
정은은 재빨리 이미숙의 팔을 안았다.“어렵게 놀러 나오셨으니 저도 당연히 제대로 된 식사를 사드려야죠.”이미숙은 웃으며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소진헌은 담담하게 안으로 들어섰는데, 메뉴를 보자마자 놀라서 입이 쩍 벌어졌다.“이, 이게 뭐야. 제일 싼 스테이크가 50만 원이라니?”정은은 즉시 위로했다.“제가 이 집 회원이라 할인받을 수 있어요.”“아, 그럼 다행이고...”소진헌은 안심을 하며 레몬물을 마시더니 다시 물었다.“얼마 할인받을 수 있지?”“5%요.”“풉...”“아빠! 이미지에 신경 좀 쓰세요!”수민은 이미 옆에서 배를 끌어안고 웃기 시작했다.음식이 올라오자, 소진헌은 비싼 고기가 확실히 맛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다른 한편, 이순정 모자는 밖에서 음식을 좀 먹었지만 맛이 없었기에 전혀 만족을 하지 않았다.한식당에서 나온 후, 그녀는 눈짓을 했고, 철봉은 바로 입을 열었다.“엄마, 나 양식 먹고 싶어! 가장 비싸고 가장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가고 싶단 말이야! 아주머니, 절 속일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다 오늘 집에 돌아갈 수조차 없을 거예요.”서영숙은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인지, 서영숙은 마침 정은 일행이 있는 레스토랑을 골랐는데, 그곳도 그들과 인접한 룸이었다.레스토랑의 룸은 밀폐된 공간이 아니었기에, 인접한 방에서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그러니 대화하는 소리도 더욱 잘 들렸다.종업원은 메뉴판을 들고 와서 주문을 받았다.이순정은 양식을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철봉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철봉은 메뉴도, 자신의 엄마도 보지 않았다. 그는 음탕한 눈빛으로 눈앞의 늘씬하고 섹시한 종업원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종업원은 애써 구역질을 참으며 뒤로 물러서더니 철봉과 거리를 두었다.이순정은 철봉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무슨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철봉은 그저 종업원을 바라보고 있
식사를 마친 후, 수민은 친구의 전화에 불려갔고, 정은은 부모님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무척 힘들었지만, 소진헌은 오늘 찍은 사진들을 보며 여전히 무척 흥분했다.“야, 이 주자 그리고 이 도자기 말이야...”복도에서 소진헌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이미숙은 신이 난 소진헌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정은은 묵묵히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가끔 소리를 내어 맞장구를 쳤다.세 식구는 웃으며 7층으로 올라갔고, 정은은 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고 했다.이때 맞은편 문이 열렸다.“어? 조 교수, 지금 나가는 길인가?” 소진헌이 반갑게 인사했다.정은은 고개를 돌리자 남자의 웃음을 머금은 눈빛과 마주쳤다.재석은 오늘 하얀 반팔 셔츠에 카키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심플하고 깨끗하며 도도하면서도 차분했다.지난번 정은이 술에 취한 이후로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자신이 그때 취했을 뿐만 아니라 재석을 붙잡고 술주정을 한 것을 떠올리니 정은은 마음이 찔려서 시선을 돌렸다.남자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소진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네, 실험실에 가려고요.”“이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하는 건가?”“아직 두 조의 데이터가 남았거든요.”“그래. 그럼 얼른 가서 일봐, 다음에 시간 있으면 같이 바둑을 두자!”“네.”...다른 한편, 서영숙은 간신히 이순정 모자에게서 벗어났다.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지쳐서 호텔로 돌아가 쉬어야 했기에 마침내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집으로 돌아온 서영숙은 녹초가 되어 소파에 누웠다. 온몸에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어지러웠다.“엄마! 나 좋은 소식 하나 있는데”강서정은 위층에서 뛰어내려와 서영숙의 옆에 앉았다.그녀는 오늘 마침내 서비대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전공은 생물정보학이었고 교수님은 송지혜였다.‘그동안 송 교수님에게 인삼과 전복을 드린 보람이 있군!’이것들은 모두 전에 오미선에게 주고 싶었지만 거절을 당한 물건이었다.‘이렇게 되면
말하면서 서영숙은 저도 모르게 정은 일가족을 떠올렸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소정은을 받아들이는 건데...”‘그럼 적어도 이렇게 쪽팔리고 무식한 사람과 접촉할 필요가 없잖아.’서정도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게요...”‘그때 엄마가 소정은을 받아들였다면, 두 사람은 지금 아이까지 낳아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그럼 그 여자도 대학원 입학시험에 참가해서 내 자리를 빼앗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아쉽게도 후회해 봤자지.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으니깐.’...수민은 전화 한 통을 받고 바로 레스토랑을 떠났다.가기 전에 계산까지 했다.그녀는 정은에게 경고했다.“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쏘는 거니까, 넌 그냥 가만있어.”말을 마친 후, 수민은 성큼성큼 레스토랑을 나서며 차를 타고 바로 사라졌다.30분 후, 그녀의 차는 메이플 엔터테인먼트 앞에 세워졌다.한 젊은 남자가 회전문 옆에 서 있었는데, 수민의 차를 보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바로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누나, 왜 이제야 왔어요.”남자는 도민우라고, 웹드라마로 데뷔한 배우였다.민우는 생김새가 괜찮고 피부가 아주 희며 키가 1미터85센티미터 넘어, 외모가 상당히 훌륭했다. 심지어 성격이 좋고 애교까지 넘쳐 수민이 가장 좋아하는 타입이었다.“왜 급하게 날 부른 거야? 무슨 일 있어?”민우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매니저 형이 식사 자리를 하나 마련했는데, 좀 무서워서요. 저와 같이 가주시면 안 돼요?”말을 마치자, 민우의 눈시울도 따라서 빨개졌다. 피부가 하얬기에 더욱 선명했다. 특히 조심스럽고 불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수민은 전혀 당해낼 수가 없었다.“그래, 같이 가줄 테니까 겁먹지 마.”“누나, 정말 누나밖에 없어요...”민우는 바로 웃었고, 참았던 눈물도 따라서 쏟아졌다.수민은 또 마음이 약해지더니 남자의 턱을 어루만졌다.“그만 울어, 넌 왜 그렇게 울기를 좋아하는 거야?”“제
민우는 고분고분 수민 옆에 앉은 뒤, 술잔을 들고 입을 열었다.“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마시겠습니다.”세 잔을 마신 다음, 민우는 웃으며 계속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오늘의 주인공은 중간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판타지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자 연예계의 유명한 스폰서인 성택준이었다.성택준은 수민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수민아, 넌 언제부터 연예계의 비즈니스에 관심을 돌린 거야?”“관심은 없고, 그저 막 놀고 있을 뿐이에요.”“젊으니까 노는 것도 나쁠 건 없지. 내 도움이 필요한가?” 성택준은 민우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수민과 말만 했다.“관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촌. 저는 이 분야에 대해 잘 모르니 이제 저 좀 그만 놀리세요.”성택준과 수민의 아버지 소기동은 좋은 친구였기에 수민은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다.그들의 대화를 듣고, 민우의 눈빛이 변했지만, 놀라움도 잠시일 뿐이었다.‘어쩐지 형이 오늘 밤 꼭 누나를 데리고 가라고 신신당부하셨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성 대표님, 수민 누나는 확실히 연예계의 일에 관심이 없으세요. 전에 이런 일들은 멀리서 바라보면 재밌지만, 접촉하면 오히려 재미가 없다고 하셨거든요.”“하하... 확실히 수민이의 성격답군. 그런데 넌 누구지?”성택준은 그제야 민우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웃으며 허리를 푹 숙였다.“저는 도민우라고, 메이플 엔터테인먼트의 배우로 데뷔한지 2년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대표작이 없습니다.”“음, 참 성실한 젊은이군. 이런 장소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주 많거든.”민우는 얼른 손을 흔들었다.“대표님 앞에서 어떻게 감히 거짓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수민은 갑자기 지루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잘 참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요. 먼저 가볼게요.”성택준은 기분 나쁘긴커녕 오히려 수민을 관심했다.“죄송하긴, 얼른 가서 일봐. 돌아가서 네 아버지에게 전해, 나중에 차
민우는 당황해졌다.“누나,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다 매니저 형이 시키신 거예요. 누나가...”“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네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는 거야. 그리고 넌 날 이용해 택준 삼촌의 주의를 끌었어. 이건 사실이잖아? 설마 이것도 다 네 매니저가 가르쳤다고 할 거야? 그럼 그 사람도 너무 대단하네!”“누나, 제 설명 좀 들어보세요... 저는 누나를 속인 적도, 이용한 적도 없어요. 저는 정말 이런 자리가 부담돼서 누나를 부른 거라고요.”“부담돼? 방금 여유롭게 사람들과 잔을 부딪치며 아주 즐기고 있는 것 같던데, 지금 부담이라고 했어?”“저는...”민우는 할 말이 없었다.“우리 사이는 여기까지야. 나중에 만나면 그냥 모르는 척하자.” 수민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그러나 이때, 남자의 차갑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날 차버리려고요? 내가 쉽게 동의할 것 같아요?”수민은 고개를 돌렸다. 줄곧 해맑고 솔직했던 민우가 지금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눈빛은 탐욕으로 가득 넘쳤다.“2억 원, 그리고 이 인기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자리를 나에게 줘요. 그럼 나도 더 이상 누나에게 매달리지 않을 거예요.”수민은 웃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민우에게 다가갔다.“너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민우는 이를 악물었다.“그렇다고 할 수 있죠.”“네가 뭔데? 날 협박할 자격이 있는 거야?”“나한테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잔 사진이 있어요. 이래도 내가 자격이 없는 거예요?”수민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환하게 웃었다.“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건데? 그 사진을 공개할 거야?”“맞아요.”“그래, 그럼 공개해.”“뭐라고요?” 민우는 깜짝 놀랐다.“난 얼굴도 예쁘지, 몸매도 나쁘지 않지. 아무튼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부족한 곳이 없잖아. 그런데 너는? 그 사진이 공개되면 네가 여자와 자서 유명해졌다는 소문이 쫙 퍼질 텐데. 나야 상관없지. 난 연예계에 진출하고 싶지도 않고,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