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88화

Author: 십일
두 사람은 안쪽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정은은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교수님, 지금 교수님의 연구 방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오미선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정은은 서류 하나를 건네주며 계속 말했다.

“주말에 저희 세 사람은 현재 과제의 진도를 정리했어요. 이 외에도 연구 배경, 실험 방법, 구체적인 데이터, 그리고 이전의 결론에 대해 토론을 했고요.”

정은은 고개를 들어 오미선을 직시했다.

“제3기 실험에 아무런 진도가 없었던 것은 실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전 과제가 처음부터 빗나갔기 때문이에요.”

문제는 세 사람이 발견했지만, 민지와 서준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럼 정은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오미선이 침묵에 빠진 것을 보고도 정은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저도 교수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요. 일을 시작하면 꼭 끝을 봐야 하잖아요. 마지막에 틀렸다는 결론이 나오더라도 꼭 충분한 데이터를 통해 이 점을 증명해야죠. 학자로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맞지만, 사람으로서의 시간과 정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잘못을 일찍 바로잡고, 제때에 손실을 막을 수 있는데, 왜 오히려 많은 시간을 들여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죠? 이건 의미가 없지 않나요? 마치 교통사고처럼, 기사는 이미 차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이때 브레이크만 밟으면 비극을 막을 수 있지만, 굳이 사람을 치어서 그 결과를 검증해 볼 필요가 있겠어요?”

오미선은 길게 탄식했다.

“전에 난 너희들이 언제 이 안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어. 한 학기? 1년? 아니면 2년? 그런데 난 너희들이 이렇게 빨리 발견할 줄은 몰랐구나.”

오미선은 감개무량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놀라움 그리고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문제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까지 정리해냈다니.’

그녀는 정은이 건네준 서류를 받았다. 비록 펼치지 않았지만 그 속의 데이터와 결론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미선은 반박할 방법이 없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89화

    다시 고개를 돌리기엔 너무 어려웠다.“그러나 다행히도 이 안의 문제를 발견했잖아요.”다른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까?정은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나 이미 시작한 지금, 혼자의 힘으로 되돌릴 수 없다면 그냥 틀린 대로 놔두며 끝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대부분의 대학원생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과학 연구에 관심이 없었다. 석사 학위를 받는 것도 단지 장래에 더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그러므로 논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학술 성과가 아니라 졸업지표였다.만약 이때 오미선이 갑자기 전반 과제를 뒤엎는다면, 이미 졸업한 학생들은 당연히 상관이 없겠지만 곧 졸업하게 될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이 과제를 바탕으로 이미 각자의 논문을 준비했으니까.오미선이 그만두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고개를 돌리면 안 됐기 때문이다.“이것도 내 탓이야. 몸이 약해서 병원에 그렇게 오래 누워 있었으니까. 문제를 발견했을 때, 그해의 졸업생을 위해 난 뭐라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도 계속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거든.”이제 문제를 바로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었는데, 그들은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하지만 난 여전히 너희들이 자랑스럽구나. 이렇게 빨리 문제를 발견하고 관건을 찾았다니.”정은은 침묵에 잠겼다.이때 오미선이 뜬금없이 물었다.“넌 민지와 서준이를 어떡해 생각하니?”“어느 방면을 말씀하시는 거죠?”“사고방식, 연구 재능, 성격.”정은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종합적으로 보면 모두 훌륭한 것 같아요.”두 사람도 모두 똑똑했기에 이 과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문제를 발견한 후, 그들은 도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검증에 나섰다. 이런 성격은 정은과 똑같았다.검증과정에서 두 사람은 또 각기 각자의 우세를 보여주었다.민지는 사유가 활발하고 기억력이 놀라웠다.서준은 냉정하고 침착해서 일정한 각도에 서서 문제를 분석할 수 있었다.오미선은 이 말을 듣고 흐뭇하게 웃었다.“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나. 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90화

    정은이 말했다.“우리 만의 실험실을 하나 신청하자.”민지와 서준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시작부터 이렇게 강한 거야?!’“교수님께서 무슨 의견이라도...”“우리 교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너그러우신데.”정은은 웃음을 터뜨렸다.“이 건의도 원래 교수님께서 먼저 제기하신 거야.”그렇게 서준은 그날 바로 학교 시스템에 관련 신청을 제출했다.페이지의 제시에 따르면, 학교는 이미 신청을 받아들였고, 3일내로 답장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그러나 3일 후, 그들은 신청 실패했다는 답장밖에 받지 못했다.그 이유는 간단했다. 빈 실험실이 없으니까.정은은 이상하다고 느꼈다.“어제 내가 그 실험실을 지날 때, 전과 마찬가지로 잠겨 있었는데. 그곳을 쓰는 과제팀이 전혀 없었단 말이야.”민지는 감자칩을 먹으면서 눈알을 굴렸다.“학교에서 고의로 우리를 괴롭히는 건 아니겠죠?”서준은 침묵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수업이 끝나자, 서준은 곧장 교무처로 향했다.“제가 가서 확인을 해봤는데, 그 실험실을 사용하는 과제팀은 없었어요. 그런데 왜 빈 실험실이 없다는 거죠?”교무처 선생님은 직접 노트북을 그에게 보여줬다.“여기 봐, 신청할 수 없다고 쓰여 있잖아? 얼마 전에 누군가 이 실험실을 빌려간 것 같은데... 잠깐만, 내가 한번 확인해 볼게.”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여깄네! 3일 전에 금방 신청을 했고, 신청인은... 남진일. 아, 학생과 같은 생물과학원의 학생이야. 그럼 서로 알고 있겠지?”서준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진일은 이미 자신의 실험실이 있었는데, 기계와 경비는 모두 학교에서 특별히 비준한 것으로서 실험실을 하나 더 신청할 필요가 없었다.“C112와 B174, 이 실험실이 아직 비어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하나 신청하지 그래?”서준은 동의하지 않았다.그들의 실험은 반드시 CPRT 측정기를 써야 했고, 전교에 딱 두 대밖에 없었다. 그중 한 대는 송지혜의 과제팀이 장기간 점용하고 있었는데, 다른 한 대는 마침 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91화

    정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선배님이 C122 실험실을 빌려간 거예요?”“C122?” 진일은 멈칫하더니 미처 반응을 하지 못했다.“현재 선배님이 진행하고 있는 과제를 알아본 적이 있는데, CPRT 측정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잖아요.”진일은 눈을 드리웠다. 놀라움도 잠시, 그는 이미 진정을 되찾았다.다시 고개를 들자, 진일은 의혹을 감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맞아, 내가 빌린 거야.”정은과 서준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필요해서 빌렸어.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은이 물었다.“그럼 왜 줄곧 그 실험실을 사용하지 않은 거죠?”“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쓸 필요가 있거든.”이 대답에 민지는 즉시 비난을 하려 했지만 꾹 참았다.‘이건 악의적으로 실험실을 강점하는 거잖아!’남이 쓰고 있다면 강점이라고 할 수 없었다.학교의 자원은 모든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었고, 진일이 먼저 그 실험실을 신청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정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언제까지 쓸 건가요?”“아직은 모르겠어.”“그래요, 알겠어요.”정은은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서준과 민지에게 떠나자고 말했다.진일은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승리를 얻은 뿌듯함 대신, 그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실험실로 돌아가서 남은 일을 계속 한 후에 옷을 갈아입고 교수님 사무실로 걸어갔다.송지혜의 사무실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기에, 도착하자마자 진일은 안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이 장학금이 더 높은데, 왜 이걸 신청하지 않으신 거예요?”서지예였다.“국가 장학금은 네가 신청하고 싶으면 바로 신청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이미 수를 써서 너에게 학교 장학금을 신청했어. 비록 금액은 국가 장학금보다 적지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거든. 넌 지금 금장 입학했지만 이미 명성이 자자하잖아. 그러니 이런 방면에서 남들의 주의를 끌지 않는 게 좋을 거야.”지예는 입을 삐죽거렸다.“국가 장학금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나저나, 국가 장학금을 왜 남진일에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92화

    진일이 물었다.“제 명의로 교무처에 실험실 하나는 신청하셨어요?”“어, 그래.”“그 실험실은 누구한테 맡기실 예정이죠? 제가 미리 연락할게요.”송지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누구한테도 안 줄 건데.”“그럼 계속 이렇게 차지하시게요?” 비록 미리 예상했지만, 지금 진일의 마음은 여전히 약간 무거웠다.“그래, 그냥 비워두면 돼.”진일은 자신이 더 이상 묻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전처럼 없었던 일로 받아들이면 된다.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정은이 질문했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 후, 진일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사용하고 싶지 않으신 이상, 왜 신청을 하신 거죠?”송지혜는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키운 개가 갑자기 날 향해 짖다니.’그녀의 미소는 더욱 상냥해졌다.“지금은 쓸 필요가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누가 알겠어? 학술 자원은 항상 빼앗아야 해. 이런 도리까지 내가 가르쳐야 하는 거야?”“그 실험실에 무슨 자원이 있는 거죠?”“당연하지. CPRT 측정기가 있잖아?”진일은 그녀에게 일깨워 주었다.“저희 과제팀에 이미 한 대 있잖아요.”“두 대가 많은 거야?”“저희에게는 남는 자원이겠지만, 다른 과제팀에게는 아주 중요한...”“남진일.” 송지혜는 입을 열어 그의 말을 끊었다.“오늘 너무 한가한 거야? 실험실 쪽의 일은 다 했어?”“아니요.”송지혜는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없으면 가서 네가 해야 할 일부터 해. 다른 일은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비록 넌 천재라서 학술 성적이 뛰어나지만, 누가 오늘의 너를 위해서 기회를 만들어줬는지 잘 생각해!”진일은 이를 악물더니 표정도 갑자기 굳어졌다.송지혜는 차갑게 그를 훑어보았다.그렇게 진일은 마침내 시선을 떨구더니 얌전한 꼭두각시로 돌아왔다.“죄송합니다, 교수님.”송지혜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긴장하지 마. 난 비록 엄격하지만, 너도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실험에 전념해. 모든 정력을 학술에 쏟으면 언젠가는 성과를 거둘 거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93화

    진일은 눈을 드리웠다. 비록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소매 안의 주먹을 꽉 쥐었다.한참 뒤, 진일은 힘이 빠진 듯 주먹에 힘을 풀며 저항을 포기하고 굴복을 선택했다.“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동안 많이 신경 써주셔서요.”“나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넌 내가 가장 자랑스러운 학생이잖아? 그러니 나도 당연히 널 중시하고 관심해야 하지 않겠어?”진일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는 말을 잘 하지 않아 학생들과 선생님에게 과묵한 인상을 남겨주었다.“자, 이제 그만 돌아가. 논문에 신경을 좀 써주고. 꼭 이번 달에 완성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네가 스스로 시간을 안배해. 난 네가 절대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진일은 몸을 돌려 떠났다.송지혜는 의자에 앉아 유유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지예는 히죽거리며 앞으로 다가갔다.“그래도 이모밖에 없네요. 입을 딱 여시니 바로 깨갱한 거 있죠!”...실험실을 빌릴 수도 없고, 진일이 신청을 취소하지도 않은 이상, 정은 그들은 스스로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민지처럼 게걸스러운 아이는 화가 나서 저녁에 밥조차 먹지 않았다.“너무해! 정말 너무해! 학교는 지금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서준이 말했다.“학교는 언제나 더 많은 연구 성과를 내놓을 수 있는 팀에만 신경 쓰잖아. 하물며 남진일 선배가 이미 모든 수속을 끝냈는데, 학교가 무슨 이유로 나서겠어? 어떻게 나서겠냐고?”민지는 한숨을 쉬며 포동포동한 두 손으로 턱을 짚었다.“실험실이 없으면 우리의 과제는 어떡하지?”“빈 실험실이 얼마나 많은데. 문제는 실험실이 아니라 CPRT 측정기야.”측정기가 있으면 어느 실험실이든 상관 없었다.민지는 담담하게 물었다.“그 CPRT 측정기 비싸?”정은은 멈칫했다.서준도 멈칫하더니 잠시 후에야 반응을 했다.“네 말에 일리가 있네!”그러면서 바로 핸드폰을 꺼내 기계를 검색했다.“현재 시중에서 가장 좋은 CPRT는 원산지 D국의 Everysto야. 현미경을 갖춘 고급 기계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94화

    30초가 지나자, 딩동 소리와 함께 문자 알림이 울렸다.민지는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입금을 알려주는 제시음이었다.맞은편의 하정남이 물었다.[민지야, 돈 받았어?]“어, 받았어, 고마워, 아빠.”2억이 아니라 2억 5천만 원이었다.‘앗싸, 우리 아빠가 5천만 원 더 줬네!’[평소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돈 신경 쓰지 말고 실컷 먹어. 돈이 부족하면 이 아빠에게 말하고. 알았지?]“응! 알았어, 아빠!”통화를 마친 후, 민지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뒤를 돌아보니 서준과 정은이 모두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그녀는 의혹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돈 이미 받았어... 왜 날 이렇게 보는 거야?”서준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꼈다.“하민지 학생, 거짓말을 참 잘하는 것 같아.”“뭐?”“집이 시골에 있다고?”“맞아, 우리 마을은 도심 안에 있는데, 주위가 모두 상업지역과 고급 주택이야. 환경이 엄청 좋아서 정말 떠들썩하다니깐!”서준은 말문이 막혔다.정은이 물었다.“부모님에게 직업이 없으시고, 건물을 관리하는 경비원이라고 했잖아?”“맞아요, 제 아빠가 그곳의 건물주이시거든요. 여러 채 빌딩이 다 저희 아빠의 명의로 된 거예요. 월세를 받아야 하지, 세입자가 어떤 돌발 상황에 부딪히면 그걸 다 해결하셔야 하지.”“예를 들면 수도관이 터지거나, 전기가 끊긴 상황이라면 모두 우리 아빠가 처리하셔야 해요.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관리해야 하니까 경비원과 다름이 없잖아요.”‘사장님이 직접 나서신 셈이지.’정은도 말문이 막혔다.서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바다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는 건 또 뭔데?”“헤헤, 우리 엄마는 요트에서 파티를 여는 것을 좋아하시거든. 우리 아빠도 바다낚시를 좋아하셔서 두 분 자주 바다로 나가셨고.”‘요트? 집에 요트가 있다니!’서준은 계속해서 말했다.“그래서, 넌 집안형편이 가난한 게 아니구나?”민지는 깜짝 놀랐고, 서준에게 되물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서준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95화

    민지가 말했다.“그럼 저는 뭐 하면 되는데요?”“넌 돈을 관리하면 돼.”이날 정은과 서준은 각각 1억을 민지에게 입금했다.‘아, 돈 받으니까 정말 기분이 좋네!’민지는 과자를 먹으면서 은행의 문자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집엔 돈이 많았지만, 민지는 여전히 돈을 사랑했다.‘영원히 돈의 매력에서 헤어져 나올 수 없다니깐. 이 점은 우리 아빠랑 똑같아, 헤헤!’...정은은 CPRT의 국내 딜러가 ‘천양 테크놀로지'라는 스타트업이라는 것을 알아냈다.이 회사를 따라 그녀는 또 대주주가 류문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류문일의 이름으로 된 기업을 다시 검색해 보니, 복잡다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정은은 익숙한 이름 하나를 찾아볼 수 있었다.[전선우.][여보세요, 정은 누나, 잘 지내고 있었어요?]“그럭저럭. 넌?”[에이, 말도 마세요. 얼마 전에 넘어져서 종아리가 부러졌는데, 지금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이나 됐어요.]“그렇게 심각한 거야?” 정은은 깜짝 놀랐다.[사실 심각한 편은 아니에요. 그냥 오래 휴양을 해야 하거든요. 정은 누나도 제 성격 잘 알잖아요. 저는 움직이기 좋아해서 매일 가만히 누워 있질 못해요.]‘뭐야!’“뼈를 다치면 푹 쉬어야 해. 그래도 의사 말 듣고 편하게 쉬어.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말이야.”[네. 알았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한테 전화를 하신 거죠?]정은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CPRT가 뭐예요? 저는 CPR밖에 몰라요.]정은은 인내심을 가지며 설명했다.“일종의 동적 측정기인데, 일반적으로 생물연구에 쓰여.”[누나가 말한 그 회사는...]“천양 테크놀로지.”[맞아요. 저도 테크 기업, 특히 스타트업에 투자한 적이 있긴 해요. 하지만 솔직히 이 분야는 제가 전문적으로 잘 아는 영역이 아니라서, 대부분 남들이 투자하는 걸 따라갔고, 오래 투자한 적도 없어요. 천양 테크놀로지도 아마 동건 형을 따라 투자했던 걸 거예요. 저는 단순히 돈만 투자했을 뿐, 회사의 결정이나 운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96화

    “네?”동건이 말했다.[현빈이가 그 회사 사장이란 말이야.]빙빙 돌다가 그 사람이 자신의 지인이라니.통화를 마치고 정은은 한숨을 쉬며 현빈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그날 현빈과 적게 만나고 싶다고 한 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여우는 너무 교활해서 자칫하면 그의 함정에 빠질 수 있었다.그래서 정은이 생각해낸 가장 좋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현빈을 멀리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이 말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주동적으로 찾아갔다니.‘이건 너무 뻘쭘한데...’...동건은 핸드폰을 내려놓은 다음, 아직도 침대에 누워 쿨쿨 자고 있는 수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누가 나더러 제시간에 오라고 했는데? 1분도 늦으면 안 된다며?! 그런데 내가 도착했지만 아직 이렇게 자고 있다니! 나 여기서 널 꼬박 40분이나 기다렸어. 조수민, 넌 양심도 없니?!”침대 위의 여자는 몸을 뒤척이더니 계속 잤다.동건은 씩씩거리며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어젯밤에 또 남자 만나러 간 거야?”질문하는 동시에 그는 레이더처럼 방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다행히 남자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이때, 동건의 눈빛은 침대 머리맡의 서랍에 떨어졌다.‘물컵이 왜 두 개지?!’동건은 알 수도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소리를 질렀다.“조, 수, 민!”펑.베개 하나가 날아와 동건의 머리를 찧었다.수민은 몸을 돌려 앉았는데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넌 끝도 없니? 왜 계속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거야?! 기다릴 거면, 기다리고 싶지 않으면 그냥 꺼져!”‘누구도 내 수면을 방해할 수 없다고!’동건은 어이가 없었다.‘어,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나한테 화를 낼 수가 있지?!’“야...”“꺼져!”동건은 하마터면 화가 나서 숨이 넘어갈 뻔했다.‘그래! 꺼지라면 꺼져야지! 내가 널 무서워할 것 같아?!’멋지게 몸을 돌려 수민에게 도도한 뒷모습을 보여주려고 할 때, 동건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더니 발걸음을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8화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7화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6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5화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4화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3화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2화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1화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0화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