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건이 나타나더니 도겸의 어깨를 두드렸다.“언제 왔어? 왜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온 거야? 위층에 룸 하나 예약했으니까 같이 가서 좀 마실까?”도겸은 관자놀이를 비볐다.“난 안 마실래, 너희들 마셔.”도겸이 떠나는 것을 보고, 동건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전에 도겸은 절대로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았는데. 설마, 정은 씨와 화해한 거야?’‘그래, 금방 화해했다면 당분간 우리와 놀 수가 없겠군.’“동건아, 뭘 봐? 너밖에 안 남았어.”계단 옆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별장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밤 10시였다.왕순자는 이미 도겸의 방과 옷방을 정리했고, 정은의 물건들도 모두 제자리로 복구되었다.그는 발길을 돌려 서재로 갔다.책꽂이 위에는 거의 생물학과 관련된 책들이 널려 있었다.정은은 비록 석사 입학을 준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전공을 줄곧 연구하며 틈만 나면 서재에 하루 동안 앉아 공부를 했다. 이 책들도 모두 그녀가 남긴 것이었다.그녀는 가끔 도겸에게 자랑을 하곤 했다. 어떤 책은 이미 절판되었고, 어떤 책은 그녀가 원판을 찾아 복사한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이 책들을 분류했는지를. 자신의 성과를 언급할 때마다, 정은은 유난히 즐겁게 웃었다...도겸은 그윽한 눈빛으로 책꽂이를 훑어보다가 갑자기 입술을 구부리며 웃었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쓰레기를 들고 떠나려던 왕순자를 불렀다.“이모님 핸드폰 좀 빌려줘요.”왕순자는 즉시 경계에 찬 눈빛으로 도겸을 바라보았다.“저, 도련님, 저번에 제 핸드폰을 바닥에 부쉈잖습니까.”“새 거 사주지 않았어요?”왕순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이리 줘요.”“이, 이건 제가 금방 산 거라서...” ‘망가지면 나도 마음이 아프다고!’“내일 이모님에게 아이폰 16 두 대를 보내라고 할게요.”“네!” 왕순자는 즉시 기뻐하며 핸드폰을 건넸다.핸드폰을 받자, 도겸은 몸을 돌려 정은에게 전
가는 길, 두 사람은 처음에 몇 마디 나누었지만, 후에 각자 침묵을 지켰다.재석은 오늘 자주 운전하던 차를 선택했다. 정은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인지, 그는 천천히 운전하며 같은 속도를 유지했다.별장에 도착하자, 문 앞의 경호원은 심지어 정은에게 인사를 했다.“정은 아가씨,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출장 가셨어요?”정은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재석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별장 문 앞에 도착하자, 재석은 차를 세웠고,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깐만 기다려요. 책 들고 나올게요.” 정은은 곧장 차에서 내렸다.“내가 도와줄 필요가 없는 건가?”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책이 많지 않아서요. 나 혼자도 들 수 있거든요.”말을 마치자, 정은은 별장을 향해 걸어갔다.초인종을 누른 순간, 왕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그리고 문 밖의 사람을 보고, 왕순자는 기쁨에 소리쳤다.“정은 아가씨!”‘마침내 돌아오셨네요!’정은은 웃으며 설명했다.“물건 챙기러 왔는데...”“왔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잠옷을 입은 도겸은 방금 일어난 듯 위층에 나타났다. 그는 가슴을 안고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혼자 온 거야? 옮길 수 있겠어?”그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차가운 눈으로 정은을 내려다보았다.“옮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나머지는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정은은 담담하게 대답한 다음, 바로 서재로 갔다.도겸의 곁을 지날 때, 그도 정은의 뒤를 따라갔다.서재에서 책을 종류별로 정리한 다음, 정은은 미리 준비한 큰 가방을 꺼내 조심스럽게 안에 넣었다.도겸은 옆의 책장에 기대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힘들어서 땀을 흘릴지언정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다니.’10분 뒤, 정은이 가방을 단단히 묶은 다음, 서재를 떠나려 할 때, 한마디도 하지 않던 도겸이 갑자기 발작했다.그는 낮은 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책을 담은 가방
정은의 쉰 목소리는 떨림과 공포를 띠고 있었고, 마치 놀란 토끼처럼 절망적이면서도 연약했다.도겸은 더욱 다급해지더니, 그녀의 상의를 벗는 것을 포기하고 직접 치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정은은 더욱 당황해졌다.“강도겸, 당신 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전 여자친구인 날 강요하는 거냐고?!”“정말 하고 싶다면, 내가 지금 바로 서연희에게 연락할게.”“아, 이러지 마!”정은이 자신을 피하는 동시에, 붉어진 두 눈에 고집과 거부감을 드러낸 것을 보며, 도겸은 더욱 자극을 받았다.“왜? 헤어진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 나와 같이 침대를 뒹군 적이 수백 번도 더 넘었을 텐데, 어디서 청순한 척이야?”정은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나쁜 자식!”도겸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턱을 들었다.“날 떠나면 무슨 좋은 남자라도 만날 것 같아? 누가 다른 남자와 잔 여자를 받아들이겠어?”눈물은 끊어진 구슬처럼 전혀 쏟아져 나왔고, 정은은 자신이 6년 동안 사랑한 남자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가 무척 낯설다고 느꼈다.“뭘 그렇게 보는 거야?” 도겸은 나지막이 웃으며 정은의 떨리는 입술을 쳐다보았다.“날 원하는 거야?”말을 마치자, 그는 그녀의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정은의 손을 조금씩 떼어내며, 악랄하게 그녀의 상의를 찢었다.정은은 울고 있었고, 도겸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이때의 정은은 그제야 여자와 남자의 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다.‘됐어, 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자...’절망에 처한 순간, 그녀를 압박하고 있던 존재가 갑자기 사라졌다. 누군가 포악하게 정은을 억누르고 있던 도겸을 떼어낸 것이었다.미처 방비를 하지 않은 도겸은 그 힘에 뒤로 후퇴했고, 등이 책장에 부딪혀서야 똑바로 설 수 있었다.재석은 정은이 한참 지나도 나오지 않자, 책이 너무 무거워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차에서 내려와 그녀를 도와주려 했다.왕순자가 문을 연 후, 재석은 위층에서 들려오는 다툼을 똑똑히 들었고, 망설이지 않고
도겸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주먹을 쥐며 재석에게 돌려주었다.“날 때려? 네가 뭔데?” 그는 주먹을 날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소정은과 알콩달콩 침대를 뒹굴 때, 넌 어디에 있었지...”재석은 도겸이 휘두르는 주먹을 가로막았다. 도겸의 허술한 공격보다 그의 주먹은 더욱 냉정하고 이성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재석의 눈에 맺힌 차가운 기운을 보면, 또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그럼 넌? 넌 또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헤어지고도 남에게 매달리는 전 남자친구? 아니면 성추행범?”재석의 말은 날카로운 칼처럼 도겸의 정곡을 찔렀다.“이게 죽으려고.”도겸은 힘을 주며 주먹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재석은 그의 손을 잡으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강도겸, 그만해!” 정은은 지금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재석의 외투를 당기며 더 이상 도겸을 바라보지 않았다.그녀는 재석을 향해 고개를 돌린 다음, 시선을 드리웠다.“조 교수님,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미안해요.”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경찰에 신고할래?”정은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됐어요. 그냥 가요.”“음.” 재석은 정은의 뜻을 존중했고, 또한 남의 갈등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이거 다 내 책인데, 지금 힘이 좀 없어서요. 교수님이 대신 옮겨주면 안 될까요? 고마워요.”재석은 허리를 굽혀 한 손으로 바닥에 있는 가방을 든 다음, 정은을 부축하여 이곳을 떠났다.도겸은 제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보았고, 화가 나서 옆에 있는 식물을 걷어찼다.차에 탄 정은은 백미러를 통해 갈수록 멀어지는 별장을 바라보았다. 6년이라는 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처음 이사 왔을 때, 그녀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고, 도겸과 함께 별장을 장식하면서 또 함께 화원을 꾸몄다... 그러나 지금, 오히려 이런 결말을 맞이하다니.‘이제 난 더 이상 이 별장에 올 일이 없을 거야. 안에 있는 사람들도 나와 아무런
정은은 학교 다닐 때, 2층의 한식을 가장 좋아했다. 밥을 떠 주는 아주머니는 동그란 얼굴에 웃으면 무척 상냥해 보였고, 매번 그녀를 볼 때마다 관심을 가지며 간단하게 인사를 한 다음, 고기 한가득 담아주었다.멀리 있어도 정은은 단번에 그 아주머니를 발견했다.‘여전히 예전과 다름이 없으시네. 졸업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 아주머니는 아직도 날 기억하고 계실까?’정은은 뒤에서 줄을 섰다. 아주머니는 밥을 떠주느라 바빴기에 그녀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식판의 무게를 느끼자, 정은은 활짝 웃었다.“아주머니, 감사합니다.”재석이 돈을 낸 다음, 두 사람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오랜만에 먹는 거지만, 맛은 예전과 똑같네요.”셰프의 솜씨는 3년 전보다 못하긴커녕 심지어 많이 진보했다.정은은 예전을 떠올렸다.“대학 때, 난 늘 실험을 하느라 점심을 깜박했거든요. 실험실에서 나오면 시간은 거의 2시가 다 되어 갔기에, 음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아주머니는 매번 나에게 닭다리를 하나 남겨주시더라고요.”재석은 방금 정은의 뒤에서 줄을 섰는데, 그 아주머니가 그녀를 본 순간, 짜증 대신 웃음을 지은 것을 발견했다.정은은 식판에 있는 밥을 보면서 갑자기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사실 나와 룸메이트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거든요. 수민과 오미선 교수님 외에, 식당 아주머니는 가장 친절하신 분이셨어요. 이젠 선배님도 내게 있어 무척 고마운 사람이에요.”재석은 멈칫했다.정은은 계속 말했다.“그래도 학교가 좋네요. 환경이 조용하고 인간관계도 단순해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죠. 어쩌면 석사 입학을 준비하는 일이 내가 한 결정 중 가장 옳은 선택이었을지도 몰라요.”...밥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즉시 돌아가지 않고, 학교 안에서 돌아다녔다.자갈길을 따라 포도나무를 지나니, 한바탕 맑은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서 호수의 물결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정은은 그들이 어느새 학교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인 미름 호수에 도착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방에 들어서자, 정은은 가장 먼저 그 책들을 정리했다. 한 권 한 권 책꽂이에 끼워 넣은 후, 그녀는 땀투성이로 되었다.목욕을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탁자 위에 놓인 연고를 보고, 정은은 전신 거울을 바라보며 면봉으로 가슴과 허리 등 멍든 곳에 꼼꼼히 발랐다.차가운 연고에 박하향이 있어 바로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시간이 아직 이르기에, 정은은 원래 책을 좀 더 보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 너무 피곤한 데다 그녀는 머리까지 심하게 아파서 힘없이 침대에 누웠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한밤중에 정은은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꿈속에서 도겸은 마치 악마처럼 정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도저히 그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 두려움과 공포는 너무나 생생해서, 정은은 옷깃을 꽉 움켜쥔 채 눈을 번쩍 뜨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밤이 깊었지만, 정은은 다시 잘 엄두가 나지 않았다.핸드폰을 들고 가장 먼저 수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은 줄곧 받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을 꽉 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때, 옆집 베란다의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정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재석에게 톡을 보냈다.[자요?]상대방은 줄곧 답장을 하지 않았다. 정은은 기다리다가 다시 잠이 들려 할 때,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했다.[아직.]정은은 천천히 문자를 확인했다. 이때 상대방은 또 다른 문자를 보내왔다.[창밖을 내다봐.]정은은 고개를 들었다. 고요하고 깊은 밤,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 널려 있었고, 얼룩덜룩한 동시에 밝고 찬란했다.[뿔 같은 모양으로 된 별자리 봤어? 그건 쌍둥이자리야.]핸드폰은 계속 진동했다.[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쌍둥이 형제는 황금알에서 나왔어. 형은 태어나자마자 왕국에 전쟁과 수해를 가져왔기에, 재앙의 존재로 불렸어. 동생은 사랑의 신의 입맞춤을 받은 아이였기에 인류의 수호자였지.][형은 동생을 질투해서 몇 번이나 동생을 죽이려 했지만, 동생은 형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자신의 희생이 필요할 때 스
[별장으로 와.]맞은편의 연희는 이불 속에서 이 문자를 보고 좋아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그녀는 전에 은근히 도겸을 떠본 적이 있었고, 심지어 유혹까지 했지만, 그는 한 번도 넘어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동의할 줄이야.연희는 바로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으며 외출할 준비를 했다.아직 자지 않은 룸메이트는 연희다 한밤중에 나가려는 것을 보고 약간 궁금해했다.“연희야, 이 늦은 밤에 어디 가려고?”“에이, 넌 몰라도 너무 몰라. 우리 퀸카가 이렇게 적극적이게 나오는 이유는 틀림없이 그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친구 때문일 거야.”게임을 하고 있던 룸메이트가 농담을 하자, 연희는 즉시 수줍음에 얼굴을 붉혔다.전에 도겸은 줄곧 연희와 스킨십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늘 이 남자가 수시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의 안정감도 없었다.‘이번에 정말 도겸 오빠와 잘 수 있다면...’‘그럼 난 명실상부한 오빠의 여자로 되는 거지.’그래서 옷을 갈아입을 때, 연희는 특별히 세트로 된 속옷과 팬티를 골랐다.택시를 타고 별장에 도착하자, 연희가 문을 열기도 전에 문이 안에서 자동으로 열리더니, 힘 있는 두 손이 포악하게 그녀를 잡아당겼다.다음 순간, 연희는 남자에 의해 벽에 기대며 격렬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놀라움도 잠시, 그녀는 용기를 내어 풋풋하면서도 서툴게 도겸의 키스에 응답했다.두 사람은 키스하면서 거실까지 걸어갔고, 도겸은 연희를 소파에 눕힌 다음, 자신도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절박한 애정행위에, 연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입술이 목에 떨어졌고, 그 기세를 따라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도겸은 따뜻한 손바닥으로 능숙하게 연희의 상의를 젖히며 그녀의 몸을 매만졌다.연희는 심장이 두근거리더니 호흡까지 가빠졌고, 도겸의 진일보한 스킨십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검은 속옷을 만진 순간, 도겸은 갑자기 멈추었다.“왜, 왜 그러세요?” 연희는
[드디어 납득을 한 거야?]동건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계속 한 여자만 바라보는 척하지 않을 거냐고?]친구의 비웃음에 도겸은 여전히 무뚝뚝했고, 눈조차 들지 않았다.“그것도 다 연기일 뿐이잖아. 전에 그런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동건은 박수를 쳤고, 자신의 친구가 마침내 ‘정신을 차려서’ 무척 기뻤다.[그래, 내가 바로 안배할게. 깨끗할 뿐만 아니라 너에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거야.]전화를 끊고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동건이 주소를 보내왔다.[골든 파라다이스 1080.][내가 오래전부터 이 여자를 찜해뒀는데, 심지어 아직 처녀야. 너 줄게.]도겸은 입가를 실룩거리며 외투를 들고 외출했다.밤은 깊어 갔고, 남자와 여자는 침대에서 사랑을 속삭였다.이튿날 아침, 동건은 목욕가운을 입고 옆방에서 나왔다.어제 술을 많이 마셨기에, 자고 일어나니 벌써 점심이 되었다.골든 파라다이스는 고씨 가문의 산업이었고, 동건이 지낸 곳은 호텔이 특별히 그를 위해 특별히 남겨 둔 고급 스위트룸이었다. 이 룸은 면적이 웬만한 세 칸짜리 방보다 훨씬 더 넓었다.하품을 하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동건은 목이 말라서 아예 와인 한 잔을 따른 다음 다시 거실로 향했다.나오자마자 한 여자의 섹시한 모습이 보였고, 밖으로 노출된 어깨에는 수많은 키스 자국이 있었다.도겸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은 애틋하고 불쌍했지만, 남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고, 돈을 준 다음 바로 사람을 보냈다. 동건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마주하며 도겸은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애정 어린 그 눈빛 좀 봐. 보는 내가 다 설레는데. 넌 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거지? 너 정말 남자 맞아?”도겸은 싸늘하게 웃었다.“돈만 주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여자가 뭐가 불쌍한 거지?”“하긴.” 동건은 술잔을 흔들었다.“좀 마실래?”“아니.”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은 아마 동건 이 술꾼밖에 없을 것이다.불빛이 손가락 사이에서 번쩍이자, 도겸은 가볍게 한 모금 빤 후, 또 천천히 연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