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이 차를 고를 때, 재석은 말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줄곧 그녀의 곁에 있어줬고, 만약 정은이 어떤 문제를 홀시했다면, 재석은 또 적시에 입을 열어 일깨워주었다.‘일반 친구가 이 정도까지 도울 수 있다고?’게다가 문에 들어서면서부터 남자의 눈빛은 줄곧 정은에게 떨어졌다. 눈에 비친 집중과 애정은 도저히 가짜 같지가 않았다.‘내가 전에 만났던 신혼부부들과 똑같잖아? 신혼이 아니더라도 커플인 게 틀림없어!’그래서 점원이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정은은 이런 오해를 직면한 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재석의 표정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손을 흔들었다.“그런 거 아니에요.”점원은 얼른 사과했다.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고, 정은을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부드러웠다.점원은 영문을 몰랐다.‘이래도 커플이 아니라고?’...길 건너편에서, 이미윤은 쇼핑하러 나왔는데 갑자기 차를 정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차 매장에 들렀다.매장에서 나올 때 뜻밖에도 아는 사람을 보았다니.그녀는 모자를 들더니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역시, 서원이 아들 재석이잖아!’재석의 옆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는데, 이미윤은 그 여자의 옆모습이 아주 낯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에서 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눈알을 굴리며 이미윤은 핸드폰을 꺼내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곧바로 강서원에게 보냈다.[서원아, 이거 재석 맞지?][얘 여자친구 사귀었어?]...미용실에서, 강서원은 이 문자를 보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마스크팩이 몸에 떨어져도 상관하지 않았다.그녀는 즉시 이미윤에게 구체적인 위치를 물었다.상대방은 빠르게 주소를 보냈다.“강 부인, 지금 무슨 일 생겼어요?” 같이 온 몇 명의 귀부인은 강서원 때문에 놀라 잇달아 입을 열어 물었다.“괜찮아요.”강서원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작은 문제가 좀 생겨서요.”만약 그녀가 이 말을 할 때 이를 갈지 않았다면, 귀부인들은 바로 믿었을 것이다.강서원은 담요를
이때 이미윤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핸드폰을 들고 그 몇 장의 사진을 클릭했다.‘방금 재석이와 함께 있던 그 여자애... 얼마 전에 백화점에서 우리 현빈이와 함께 쇼핑하며 신발을 고르던 그 여자애와 많이 닮은 것 같은데?!’이미윤은 고개를 젓더니 이런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느꼈다.‘내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제일 잘 알지. 여태껏 다른 여자를 가지고 놀았으니 어떻게 여자에게 당할 수 있겠어? 말도 안돼... 절대 아닐 거야... 그냥 내가 잘못 본 거야.’...차를 뽑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아파트 지하주차장이 없기 때문에 길 건너편 주차장에 세워야 했다.정은은 차를 샀기 때문에 재석은 그녀에게 주차장에 자리 하나 예약하라고 제안했다.주자장 책임자를 찾아 가격을 협상하고, 또 계약을 체결하니 시간은 이미 한 시간 뒤였다.재석은 정은을 데려다 주고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뜨거운 물을 끓이려고 할 때,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그는 주전자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는데, 그 사람이 뜻밖에도 강서원인 것을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어머니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죠?”“왜? 난 오면 안 되는 거야? 너 집에 다른 사람 숨겼어? 아니면 무슨 비밀이라도 있어?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강서원은 말하면서 재석을 밀치더니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뭐라도 발견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집에 정말 재석 혼자밖에 없을 줄이야.재석은 이런 강서원을 보며 바로 깨달았다.“어머니, 오늘 도대체 뭐 하러 오셨어요?” 그는 말투가 갑자기 무거워지더니 왠지 모를 압박감을 주었다.강서원은 몸이 굳어졌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에헴! 요 며칠 많이 추워졌잖아. 난 네가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할까 봐 걱정이 돼서 찾아온 거야.”말하면서 강서원은 거실 한가운데로 걸어가더니 내색하지 않고 집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거실은 깨끗했고 여자가 남긴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식탁 위의 컵도 모두 하나밖에 없었는데, 립스틱 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욕실 안의 수건조차도
강서원은 정은도 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와 재석이 뜻밖에도 이웃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어쩐지 집에 여자가 다녀온 흔적이 없더라니... 이렇게 가까운 이상, 언제 어디서나 동거할 수 있잖아. 심지어 문을 열고 이 여자의 집에 와서 데이트를 할 수 있고. 그러니 또 무슨 단서가 있겠어?’여기까지 생각하자, 강서원은 정은을 살펴보았다.위에서 아래로, 머리부터 발까지.강서원이 마음의 준비가 좀 있었다면, 정은은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재석 집에서 나온 이 여사는 바로 전에 그녀의 다례 수업을 듣고, 심지어 복도에서 우연히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던 귀부인이었다.‘선배님과 무슨 사이이시지?’바로 이때, 재석이 방에서 쫓아나왔다.“어머니, 가방 깜박하셨어요.”‘어! 어머니?!’정은은 의혹을 느꼈다.세 사람 모두 침묵했고, 분위기는 갑자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정은은 강서원의 시선이 까다롭고 경계에 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강서원도 눈앞의 이 여자애가 자신을 그리 존경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이 때문에 강서원은 마음속으로 약간의 불만을 느꼈지만, 표정에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재석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는 강서원과 정은이 이미 아는 사이란 것을 몰랐지만, 이렇게 만난 이상, 주동적으로 두 사람을 소개하기 시작했다.“어머니, 이쪽은 제 이웃이자 친구인 소정은이에요.”“정은아, 이분은 내 어머니셔.”강서원은 아들의 말을 듣고 담담하게 정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더욱 까다로워졌다.정은은 차분하게 웃으며. 태연자약하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그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강서원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내 아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이상, 미래의 시어머니인 나한테 아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인사 한 마디만 하면 다냐고? 예쁜 말 좀 하면 안 돼? 다정한 행동은? 그래, 이것들 다 그렇다 쳐도, 나한테 웃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러나 정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인사할 때 입가가 약
재석은 그게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문을 닫으려 했기 때문이다.“아니... 이게 뭐하는 짓이야?” 강서원은 문고리를 덥석 잡았다.재석은 영문을 몰랐다.“지금 집에 돌아가시려는 거 아니었어요?”“나 아직 안 갔는데 왜 문을 닫아?!”강서원은 아주 큰 목소리로 말했는데, 재석에게 질문하고 있는지, 아니면 정은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지 몰랐다.재석은 어리둥절했다.“이미 밖으로 나오셨잖아요? 문을 닫지 않으면 집안이 싸늘해질 거예요.”강서원은 말문이 막혔다.“돌아가는 길에 기사님에게 좀 천천히 운전하라고 하세요. 최근에 눈이 와서 길이 많이 미끄러우니까요.”말을 마치고 가방을 그녀에게 건네준 다음, 재석은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강서원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두 사람 어쩜 이리도 버릇이 없는 거야! 내 아들은 더 심하잖아! 아이고, 내가 괜히 이 아이를 낳았어!’...정은은 발이 다 나았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으려 했다.가방을 정리하고 문을 나서자마자 재석을 만났다.“어디 가?”“재검사 좀 받으려고요.”두 사람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 길을 건넜고, 정은은 주차장에 가서 차를 운전했다.방금 뽑은 차라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거리를 나올 때 하마터면 옆에 있는 차와 긁힐 뻔했다.다행히 재석이 제때에 일깨워주었다.어제 차를 사고 돌아올 때, 정은은 잠시 운전한 다음, 재석이 운전했다. 주차장에 들어와 차를 세우는 것도 재석이 도와주었다.정은은 운전석에 앉아 어색하게 코를 만졌다.“난 운전면허를 딴 후 별로 운전해 본 적이 없어서요.”재석은 서둘러 자신의 차를 잠그며 돌아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정은은 영문을 몰랐다.“너 지금 운전에 그리 숙련되지 않으니, 혼자 운전하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내가 너와 함께 병원에 가 줄게. 네 코치해줄 겸 말이야.”정은은 정말 마음이 움직였다.혼자서 운전하는 것은 확실히 마음이 든든하지 않았고, 만약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고
“근골을 다쳤으니 적어도 3개월 이상 휴양하셔야 돼요. 비록 뼈를 다치지 않았지만, 발목을 삐었잖아요.”“지금은 이미 부기가 가라앉았지만, 안의 근육이며 근막은 여전히 영향을 좀 받았을 거예요. 아주 긴 회복 과정이 필요하니까 오직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어요.”재석은 생각에 잠겼다.“한의학에 의지하는 건요?”“그럴 시간이 있으시면 당연히 좋죠. 그러나 그것도 보조 작용일 뿐이고, 제일 좋기는 휴양을 하셔야 돼요.”병원을 나서자, 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나랑 어디 좀 가자.”“네?”20분 후, 차가 길가에 세워졌다.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길을 건너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두 사람은 이리저리 빙빙 돌다가 결국 고풍스러운 한의원 앞에 멈춰 섰다.“한의원이요?” 정은은 고개를 들어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 모르는 간판을 보았다. 까맣지만 아주 밝은 간판이 높이 걸려 있었다.재석은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섰다.“노 선생님?”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노 선생님, 계세요?”“그래...”커튼을 젖히자, 안방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왔다. 수염이 길고,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으며 앞치마까지 매고 있었다. 티비에서 나오는 한의사와 똑같았다.“이 자식, 왜 이제야 날 보러 온 거야? 들어오자마자 호들갑을 떨다니. 뒤뜰에서 약을 찧고 있었는데도 네 목소리가 들렸어! 어? 오늘은 혼자 온 게 아니네? 여자아이까지 데리고 왔다니?!”어르신은 눈에서 빛을 발했다.재석은 재빨리 두 사람을 소개했다.정은은 그제야 어르신의 성이 노 씨이고, 연세가 이미 90세이며, 제일병원에서 영광스럽게 퇴직한 후, 심심해서 이 작은 골목에 한의원을 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 와서 병을 보려면 돈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었다.어르신은 일주일에 3일만 진료를 하는데, 매일 오전밖에 나오지 않았다.지금 이미 오후 2시였고, 진료를 중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조용했던 것이다.오전에 오면 골목은 사람들로 북적였다.“젊은 아가씨,
침을 놓을 때, 노동일은 큰 손을 휘두르며 천을 폈고, 안에 크기가 다른 은침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정은은 두피가 저렸다.“시, 시작한 거예요?”“음.”“어디를 찔러야 하는 거죠?”노동일은 정은의 머리를 가리켰다.“여기.”정은은 영문을 몰랐다.“발목을 다쳤는데 왜 머리를 찌르는 거죠?”그녀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다.“상처를 누르자마자 아픈 이유는 멍이 흩어지지 않기 때문이야. 그러나 머리에는 몇 군데의 큰 혈자리가 있어 근육을 풀 수 있지. 이렇게 이해하면 돼,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중앙 제어 시스템을 치료하는 거지.”그리고 뇌가 바로 이 중앙 제어 시스템이었다.“준비됐나? 그럼 시작한다...”노동일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늘을 뽑았다.정은은 무서워서 무언가를 잡으려고 했다.마침 이때 재석은 자신의 손을 건네주었고,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번에 잡았다.“긴장 풀어, 겁먹지 마, 금방 다 될 거야.” 노동일의 목소리는 가벼워서 사람의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정은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그녀가 조심스럽게 통증을 기다리고 있을 때, 머리는 마치 개미에게 물린 것처럼 따끔했다. 한순간의 아픔이 지나가자, 다른 이상은 없었다.“좋아, 첫 번째 침을 이미 놓았어.”정은이 눈을 뜨려고 하자 노동일은 얼른 막았다.“급해하지 마. 아직 몇 개 더 남았으니까 지금 움직일 수 없어.”정은은 이 말을 듣고, 이상한 느낌을 꾹 참으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다른 감각이 무척 예민해졌다.정은은 약간 긴장하여 주먹을 쥐고 싶었지만, 남자의 따뜻한 손을 꽉 잡았다. 이어서 귓가에 노동일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긴장하지 마, 그래, 그렇지... 사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섭지 안존하?”어르신의 목소리는 정은의 긴장된 정서를 완화시켰고, 곧 그녀는 마음이 편해졌다.“아직 심하게 움직일 수는 없지만, 천천히 눈을 뜰 수 있어.”정은은 속눈썹을 가볍게 떨었고, 눈
정은은 멍해졌다.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심지어 거절할 겨를이 없었고, 남자는 이미 신발을 벗겨줬다.그 다음은 양말...정은은 눈을 드리우며 재석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마치 중요한 실험을 완성하고 있는 듯 표정이 진지했다.이 순간, 정은은 호흡이 멎더니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녀는 왜 재석이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주는지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재석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잘 대해주는 것일까?그러나 지금, 정은은 재석이 자신을 대할 때 확실히 남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재석이 아무리 좋고, 아무리 성실해도, 낯선 사람에게 이 지경까지 할 수는 없다.신발과 양말을 벗자, 재석은 노동일의 요구에 따라 조심스럽게 정은의 발목을 잡았다.남자의 손바닥은 약간 차가웠기에, 손끝이 정은의 발등에 닿았을 때 피부가 닿는 곳에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두 사람은 가슴이 두근거렸다.정은의 피부는 섬세하고 매끄러워, 재석은 침을 삼키더니 들끓는 감정을 극력 억제했다.정은은 이게 어떤 느낌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간지럽고 뜨거워서, 마치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지나치게 뜨거운 온도가 도대체 재석의 온도인지, 아니면 자신의 온도인지 몰랐다.그녀는 발을 움츠리고 싶었지만, 노동일의 말에 또 억지로 참았다.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 이상해서 한쪽에서 약재를 체크하던 아주머니조차도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오늘은 정말 희한하네. 재석이가 주사를 무서워하지 않다니?”전에 재석이 강서원을 데리고 왔을 때, 침을 보기만 하면 멀리 떨어져 나갔다.보면 볼수록 괴로워, 심지어 쓰러질 수도 있었다.‘그런데 오늘은...’“역시! 여자친구랑 같이 오니 다르긴 다르구나! 하하...”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웃었다.정은은 움직일 수도, 입을 열 수도 없어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어색하게 기침을 하며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노동일은 눈치를 살피다가 두
침묵하며 집에 돌아온 재석은 정은을 문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방금 그 이상한 분위기를 떠올리며 그래도 입을 열어 설명했다.“아주머니도 나쁜 분이 아니셔. 그냥 수다 떨기를 좋아하셔서 그래.”‘차라리 설명하지 않는 게 더 낫겠네.’정은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 일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날 저녁, 정은은 노동일이 말한대로 연고를 붙이며 발에 물을 조금도 묻히지 않았다. 잠자기 전에 또 노동일이 가르친 대로 허벅지의 관건적인 혈자리를 누르며 안마했다.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연고를 뜯은 후, 정은은 발목을 몇 번 눌렀는데, 뜻밖에도 통증이 정말 사라졌다.그녀는 즉시 뛰쳐나가 옆집 문을 두드렸고, 재석이 나온 순간, 정은은 흥분해하며 말했다.“어르신의 연고가 너무 대단한데요!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부기가 사라졌고, 깡충깡충 뛰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말하면서 재석이 믿지 못할까 봐 정은은 정말 깡충깡충 뛰려고 했다.재석은 한숨을 쉬며 정은의 어깨를 잡았다.“응, 난 믿으니까 증명할 필요 없어. 어르신이 말씀하셨잖아, 한동안 오래 서 있을 수 없다고. 발목에 너무 힘 주지 마.”정은은 응답한 다음, 남자의 웃음을 머금은 눈빛을 마주했다. 방금 유치한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며 정은은 갑자기 쑥스러워하더니 코끝을 만졌다.재석은 그녀의 유치한 동작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1월 중순, 학생들은 기말고사를 맞이했다.전교학생들은 7일 동안 시험을 봐야 했는데, 정은과 같은 경우, 매일 시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시험이 없을 때 그녀는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드디어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됐다.그러나 휴가는 정은에게 있어서 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전히 전과 마찬가지로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왔기 때문이다.가장 큰 차이점은 방학한 후에 다시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은의 일상은 집과 실험실만 드나드는 것으로 바뀌었다.“정은 언니, 기말고사가 끝나면 이틀 정도 쉬지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