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02화 · 30일 계약

Penulis: 6jay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8-14 16:20:24

“선택해.”

그 말은 차도현이 떠난 뒤에도 대표실에 남아 있었다.

채원은 밤새 계약서를 읽었다. 채무 양수 계약, 소멸 합의, 투자 검토 부속서까지 조항마다 색색의 메모지가 붙었다. 새벽 2시가 지나자 민지가 편의점 샌드위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먹으면서 해. 네가 쓰러지면 저 남자 집에 입주가 아니라 입원부터 하겠다.”

“내가 입주한다고 했어?”

“안 할 거야?”

채원은 대답 대신 빨간 펜으로 한 문장을 그었다. ‘필요한 범위의 공개적 신체 접촉에 협조한다.’ 필요한 범위를 정하는 주체가 빠져 있었다.

“할 거야.”

채원은 이 거래가 공정하다고 착각하지 않았다. 가장 궁한 날 내민 조건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서명을 미루면 먼저 다치는 사람은 직원과 거래처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존심을 세울 말이 아니라, 불리한 거래 안에서도 빼앗기지 않을 조항이었다.

다만 굴복한 채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대신 차도현이 생각한 계약은 아닐 거야.”

오전 10시, 도현은 정확히 대표실에 나타났다. 어제와 다른 검은 슈트였고, 밤을 새운 흔적은 없었다. 채원의 앞에 쌓인 서류와 빈 커피 잔을 본 뒤 그가 말했다.

“수정할 게 많나 보네.”

“허점이 많더군요.”

“들어 보지.”

채원은 새로 작성한 부속 합의서를 펼쳤다.

“첫째, 방은 층까지 분리합니다. 출입은 각자 허락을 받아야 하고요. 둘째, 연인 역할을 이유로 한 접촉은 매번 사전 동의를 받습니다. ‘필요한 범위’ 같은 편리한 표현은 삭제해요.”

“동의해.”

망설임 없는 답에 채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현은 반박당해 불쾌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순순히 끌려오지 않는 윤채원을 확인한 듯, 오히려 시선이 또렷해졌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루네의 투자 심사는 이 계약과 완전히 분리합니다. 계약을 끝내거나 공개 일정에서 실수했다는 이유로 심사를 중단할 수 없어요. 경영권, 인사권, 디자인 권리에 아르덴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문장도 넣죠.”

“투자 계약이 체결된다면 일반적인 주주 권한은 필요해.”

“재무 감시권까지는 인정해요. 창작과 운영에 대한 거부권은 안 됩니다.”

“좋아.”

도현은 맞은편에 앉아 수정안을 한 줄씩 읽었다. 반박할 부분은 정확히 짚고, 받아들일 부분은 미련 없이 넘겼다. 사람을 몰아붙여 헐값에 얻는 방식과는 달랐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채원은 마지막 장을 꺼냈다.

“중도 해지권은 내게 있습니다. 사유를 증명할 의무도 없고, 통보한 시점부터 동거와 연인 역할은 끝나요. 그 경우에도 이미 소멸시킨 개인 채무를 복원하거나 제3자에게 넘길 수 없습니다.”

한지혁이 처음으로 도현을 바라봤다. 이 조항을 받아들이면 채원이 서명 직후 계약을 끝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도현은 채원만 보았다.

“추가해.”

“내가 오늘 밤 마음을 바꿔도?”

“그래도 네 빚은 다시 생기지 않아.”

“그럼 차 대표님이 얻는 게 없잖아요.”

“그건 내가 감수할 위험이지.”

도현은 그 조항 옆에 직접 동의 표시를 했다.

“대신 한 가지 넣자. 네가 원해서 일정을 취소하는 건 자유지만, 위험이 확인되면 경호는 받아. 경호 인력은 일정을 기록하거나 내게 사생활을 보고하지 않는다.”

“내 안전을 핑계로 감시하면 그 즉시 해지합니다.”

“그렇게 써.”

민지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연애 계약이 아니라 정전 협정 같네.”

채원이 펜을 들었다. 서명란 바로 위, 30일이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이 종이에 이름을 쓰는 순간 개인 고금리 차입채무 7억 4천만 원이 사라진다. 회사는 투자 심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버틸 시간을 얻는다.

도현이 산 것은 시간이었다. 누구의 시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채무 소멸은 서명과 동시에 효력이 발생하는 거죠?”

“응.”

“확인서부터 주세요.”

한지혁이 준비해 온 공증 서류를 건넸다. 채원은 법률대리인과 세무대리인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빚이 없어지면서 새로 내야 할 세금과, 그것을 나눠 낼 때 매달 감당할 금액까지 확인한 뒤에야 이름을 썼다.

윤채원.

도현도 개인 계약 당사자로 그 아래 서명했다. 채무 소멸 부속서에는 채권자인 디에이치브리지의 법인 인감과 ‘대표이사 차도현’이라는 자격 표시가 따로 찍혀 있었다. 차도현이라는 세 글자가 채원의 이름과 나란히 놓이자 기묘하게 오래된 약속처럼 보였다.

“오늘이 1일째입니다. 30일째 24시에 자동 종료.”

“알아.”

“잊지 말라고 확인한 거예요.”

도현은 막 닫으려던 펜을 멈췄다.

“내가 날짜를 잊을 것 같아?”

그 시선 앞에서 채원이 먼저 서류를 거두었다.

***

짐은 여행용 가방 하나면 충분했다.

채원은 집을 빼는 게 아니라 30일 동안 자리를 옮기는 것뿐이라고 스스로에게 확인했다. 옷 몇 벌과 노트북, 스케치북을 담았다. 민지는 현관에 기대어 그 모습을 지켜봤다.

“불편하면 바로 나와. 회사 회의실에 간이침대 놔 줄 테니까.”

“내가 그 사람한테 잡아먹히기라도 하겠어?”

“차도현이 잡아먹을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야. 넌 버티겠다고 결심하면 네 마음부터 굶기잖아.”

채원이 가방 지퍼를 닫았다.

“30일뿐이야.”

“그래. 그런데 그 남자는 30일짜리 얼굴이 아니던데.”

무슨 얼굴이냐고 묻기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도현이 보낸 기사가 와 있었다. 채원은 마지막으로 거실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회사가 무너지고 남은 것들을 정리한 뒤 간신히 지켜 낸 집이었다. 그것마저 이제 도현의 소유였다.

“반드시 다시 올 거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선언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한남동 펜트하우스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통유리와 낮은 가구, 흠집 하나 없는 밝은 돌 바닥. 모델하우스처럼 완벽했지만 누군가 오래 살아온 집의 체온은 없었다.

도현은 현관에서 직접 채원을 맞았다. 넥타이는 풀지 않았고 셔츠 소매만 한 번 접혀 있었다.

“기사에게 맡겨도 됐을 텐데요.”

“처음 들어오는 사람한테 방은 보여 줘야지.”

그가 가방 손잡이를 잡기 전에 채원이 먼저 들어 올렸다.

“이 정도는 들어요.”

“알아.”

도현은 빼앗지 않았다. 대신 앞장서서 복도를 건넜다. 채원의 방은 동쪽 끝, 도현의 침실은 계단 위 반대편이었다. 욕실과 작은 서재가 딸린 방에는 새 침구 외에 장식이 없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없는 게 편해요.”

“키위 들어간 간식은 전부 치웠어.”

채원은 욕실 문을 열려다 그를 돌아봤다.

“내 알레르기까지 실사했어요?”

“동아리 엠티 때 네가 과일 샐러드 한 입 먹고 응급실 갔잖아.”

채원은 그 일을 잊고 있었다. 술 취한 선배들이 우왕좌왕하던 사이 누군가 택시 문을 붙잡아 줬던 흐릿한 기억만 남았다.

“그때 같이 갔던 게 차 대표님이었나?”

“아니. 너는 내가 따라간 것도 몰랐어.”

그는 담담하게 말하고 방문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저녁은 7시. 같이 먹기 싫으면 방으로 보내 줄게.”

“계약서에 식사 의무는 없어요.”

“그래서 묻는 거야.”

채원은 닫으려던 문을 잠시 붙들었다.

“먹을게요. 첫날부터 위반 사항을 만들고 싶진 않으니까.”

“식사는 위반 사항이 아니야.”

“차 대표님한텐 그럴지 몰라도, 나한텐 협상 상대를 파악하는 일정이에요.”

아주 희미하게 도현의 눈매가 풀렸다.

“마음대로 파악해.”

저녁 식탁에는 지나치게 맵거나 단 음식이 없었다. 담백한 흰살생선과 구운 채소, 소스가 따로 놓인 샐러드. 채원은 음식보다 맞은편 남자를 관찰했다. 도현은 식사 속도가 빨랐고, 휴대전화가 몇 번 울려도 뒤집어 둔 채 확인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렇게 차려 먹어요?”

“아니.”

“그럼 요리사에게 내 취향도 알려 줬겠네요.”

“맵고 단 소스를 싫어하고, 드레싱은 따로. 틀렸어?”

“맞아서 불쾌하다고 하면 이상하겠죠.”

“이상하지 않아.”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네가 기억하지 않는 일을 내가 기억한다고 해서, 반가워할 의무는 없으니까.”

채원은 포크 끝으로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잘랐다. 예전의 도현은 이런 문장을 한 번에 말하지 못했다. 입술만 달싹이다 노트북 화면으로 도망가곤 했다.

“많이 달라졌네요.”

“너도.”

“실망했어요?”

“왜?”

“차 대표님 기억 속 윤채원은 빚 독촉 받으면서 남의 집에 들어오는 여자는 아니었을 테니까.”

도현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 기억 속 윤채원은 서버가 세 번 끊긴 발표에서도 끝까지 투자자를 설득했어. 지금도 똑같아.”

채원의 목 안쪽이 따끔해졌다. 동정은 아니었다. 그보다 오래되고 정확한 평가였다.

“그때 일은 잘도 기억하네요.”

“잊을 이유가 없었어.”

도현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는 머신 오른쪽 두 번째 칸. 산미 없는 원두로 바꿔 뒀어. 하지만 밤 8시 이후엔 디카페인 마셔.”

“그것도 기억해요?”

“밤에 카페인 마시면 새벽까지 패션쇼 영상을 돌려 보잖아. 잠이 안 온다고 하면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무심했다. 그러나 채원은 한동안 식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8년 전 자신은 그와 많은 말을 나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필요한 기획을 설명했고, 발표를 함께 준비했고, 가끔 늦은 시간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셨다. 채원에게는 바닥까지 무너진 인생 앞에서 희미해진 한 계절이었다.

도현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

새벽 1시가 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채원은 물을 찾으러 나왔다가 복도 끝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았다. 서재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도현이 안에 있는 줄 알고 지나치려 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문을 닫아 주려던 손이 멈췄다.

벽면 책장 가운데 작은 액자가 놓여 있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빛바랜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8년 전 창업 동아리 단체사진이었다. 구석에는 큰 안경을 쓴 도현이 서 있었고, 가운데에는 흰 셔츠 차림의 채원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웃고 있었다.

사진 전체는 세월을 먹어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랬다. 그런데 채원의 얼굴 위만큼은 먼지 한 점 없었다. 액자 안쪽에 별도의 투명 필름까지 덧대어져 손때도 빛도 닿지 않게 보관되어 있었다.

“남의 서재 구경이 취미였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채원은 놀란 기색을 감추며 돌아섰다. 넥타이를 풀어 손에 든 도현이 문가에 서 있었다.

“문이 열려 있었어요.”

“봐도 상관없어.”

“다른 사람 얼굴은 다 바랬는데.”

채원은 액자를 가리켰다.

“왜 나만 이래요?”

도현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이 액자를 집어 드는 동안 둘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다. 채원은 물러서지 않았지만 어깨가 굳었다.

“보관할 때 필름을 새로 댔어.”

“그러니까, 왜?”

도현은 사진 속 채원이 아니라 눈앞의 채원을 보았다.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말은 보호보다 고백에 가까웠다. 채원은 액자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그의 옆을 지나쳤다. 질문을 더하면 30일짜리 거래가 견디지 못할 답을 듣게 될 것 같았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다만 방으로 돌아가는 채원의 발끝까지 오래 시선이 따라왔다.

그날 밤, 채원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 자신만 선명하던 이유를 끝내 잠 밖으로 밀어내지 못했다.

Lanjutkan membaca buku ini secara gratis
Pindai kode untuk mengunduh Aplikasi

Bab terbaru

  • 너를 삼킨 밤의 계약   외전 3화 · 모델하우스를 채운 무가당 복숭아 향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유독 넓고 거대한 통유리창은 한강의 잔잔한 밤 풍경과 강변북로를 바쁘게 오가는 차량들의 불빛을 가감 없이 비추고 있었다.반년 전, 윤채원이 이 낯설고 거대한 공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온몸으로 느꼈던 기이하고 서늘한 이질감은 이제 집 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당시에는 먼지 한 점 없이 차갑고 미끈하게 빛나기만 하던 백색 대리석 바닥 위에는 채원이 루네의 가을 시즌 컬렉션 작업실에서 직접 고르고 손수 바느질해 만든 차분한 오트밀 색의 두툼하고 포근한 리넨 러그가 넓게 깔려 있었다.자로 잰 듯이 지나치게 단정하기만 하던 소파 위에는 채원이 퇴근길에 들고 온 의류 유통 서적과 도현이 보던 경영 및 투자 분석 자료, 그리고 자유롭게 갈겨쓴 스케치북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채 놓여 있었다.차가운 박제처럼 온기 한 조각 없던 거대한 거실에 마침내 서서히 사람의 손때와 살아가는 아늑한 내음, 그리고 두 남녀의 온전한 체온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채원은 소파 끝에 무릎을 모으고 편안하게 걸터앉아 유리 탁자 위에 놓인 투명한 그릇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투명한 그릇 안에는 껍질이 말끔하고 부드럽게 벗겨진 분홍빛 복숭아 조각들이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정갈하게 손질되어 담겨 있었다. 채원은 과즙이 손가락에 조금이라도 끈적하게 묻는 것을 유독 싫어했다.대학 시절 동아리방 구석에서 과일 샐러드를 대충 집어먹다 알레르기 소동으로 응급실까지 가야 했던 해프닝 이후로 생긴 나름의 트라우마이자 고질적인 버릇이었다.차도현은 복숭아가 나는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언제나 한결같이 부엌에서 과도를 찾아 쥐고 하얀 손가락 끝으로 껍질을 정성스레 깎아 채원의 접시를 가득 채워두곤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또 긴장해서 손가락 아프게 손톱 누르고 있지 말고.”어느새 샤워를 마쳤는지, 가벼운 네이비색 가운 차림으로 다가온 도현이 소파 뒤편에서 자연스럽게 상체를 숙여 채원의 가냘픈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에서 방

  • 너를 삼킨 밤의 계약   외전 2화 · 공과 사의 아슬아슬한 정전 협정

    낮, 아르덴파트너스 본사 17층 대회의실.유리창 너머로 눈이 시릴 만큼 정제된 한낮의 햇살이 길쭉한 대리석 테이블 위로 부서져 내렸다. 에어컨이 조용히 돌아가는 회의실 내부의 공기는 한여름의 열기보다 더 차갑고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루네의 서유럽 유통망 확장 및 파리 수선 거점(Atelier) 건립 안건을 두고 벌써 세 시간째 이어지는 마라톤 회의였다.“윤 대표님, 제안하신 프랑스 파리 현지 수선 및 물류 통합 센터 건립 계획은 아르덴의 위험 관리 가이드라인을 명백히 초과합니다. 현지 아웃소싱 파트너십 대신 직영 공간을 짓겠다는 고집은, 초기 고정비 투자 대비 예상 회수 기간을 과도하게 늘릴 뿐입니다.”테이블 상석에 앉은 차도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도로 루네의 제안서를 넘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적인 온기가 단 한 조각도 섞여 있지 않았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각 잡힌 다크 네이비 슈트, 그리고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매듭지어진 타이가 완벽한 투자사 대표로서의 냉철함을 대변했다.맞은편에 앉은 윤채원은 턱을 약간 든 채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녀 역시 루네의 미출시 라인인 차분한 차콜 그레이 린넨 재킷 소매를 단정하게 걷어붙인 차림이었다. 채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펜을 한 번 돌려 로고가 아래로 향하게 놓았다. 예전의 불안을 감추기 위한 무의식적인 버릇이 아니었다. 상대를 완전히 분석하고 다음 수를 놓기 전의 프로페셔널한 호흡이었다.“차 대표님, 단순한 물류비 산출 공식으로만 접근하면 그렇게 보이겠죠. 하지만 서유럽 바이어들이 루네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속 가능한 수선 보장’이라는 신뢰에 있습니다. 현지 파트너십에 위탁할 경우, 당사 특유의 초승달 자수 복원과 비대칭 패턴의 정밀 수선 퀄리티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브랜드 가치가 훼손되어 발생하는 장기적 반품률 상승과 고객 이탈 비용은 아르덴의 그 똑똑한 수식에 반영되어 있습니까?”양보 없는 공방에 회의실 배석자들은 일제히 마른침을 삼켰다. 루네의 운영총괄 서민

  • 너를 삼킨 밤의 계약   외전1 · 되찾은 스무 살의 조각

    서래마을의 고요한 밤은 깊었다. 윤채원이 마침내 제 손으로 다시 사들인 옛집은 한남동의 모델하우스처럼 매끄러운 펜트하우스와 달리, 벽지 틈새마다 어릴 적 살던 체온과 옛 가구의 눅눅한 나무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공간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완전히 무너지고 사채업자들에게 쫓겨 도망치듯 이 문을 나섰던 그 새벽으로부터 정확히 8년이 흐른 날이었다. 감정평가사와 대출 심사 서류에 스스로 서명하고 매매 대금을 모두 송금한 날, 채원은 퇴근하자마자 텅 빈 거실 마룻바닥에 가만히 주저앉아 제 이름 석 자와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등기부등본 원본을 한참 동안 손가락으로 쓸어내렸었다. 돌려받은 구원이 아니었다. 온전히 제 실력과 땀으로 버티며 직접 사들인 온전한 제 집이었다.거실 한가운데에는 빛바랜 노란 상자들이 성벽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채원은 얇은 실크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 아직 먼지가 풀풀 날리는 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테이프를 뜯어내고 있었다. 피로가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지만 이상할 만큼 잠은 오지 않았다. 손끝에 가볍게 닿는 물건마다 해묵은 기억들이 쏟아져 나와 마음의 빈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상자 깊숙한 곳에서 투명한 수납함 하나가 나왔다. 먼지를 털어내고 뚜껑을 열자, 대학 시절의 전공 책 몇 권과 모서리가 헤진 낡은 크로키북, 그리고 한눈에 보아도 손때가 아주 깊게 묻은 파란색 클리어 파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채원의 숨결이 짧게 멎었다. 그것은 루네(LUNE)의 최초 구상안이 담겨 있던 원본 파일이었다. 파일 첫 페이지에는 8년 전, 대학 도서관 뒤뜰의 어둑한 벤치에 앉아 그녀가 정갈한 검은색 펜으로 꾹꾹 눌러 썼던 문장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기술은 단순히 미래의 숫자를 맞히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제때, 가장 알맞은 온도로 만들게 해야 한다. 차도현의 수요 예측 모델은 그 아름다운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그리고 그 아래에는 도현의 단정하면서도 묵직한

  • 너를 삼킨 밤의 계약   12화 · 계약이 끝난 자리

    채원이 계약 없이 도현에게 돌아간 지 6개월 뒤, 루네의 새 시즌 프레젠테이션은 한남동의 오래된 미술관에서 열렸다.반년 전 긴급 공개회에서는 작업대와 실패한 샘플을 내놓았다. 이번 무대에는 그때 선주문한 고객들이 실제로 입고 돌아온 옷도 함께 걸렸다. 소매 끝을 수선한 재킷, 단추를 바꿔 다시 입은 코트, 남은 원단으로 만든 작은 파우치가 새 컬렉션 사이에 놓였다.마지막 모델이 무대 뒤로 들어가자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채원은 검은 팬츠 슈트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지난 시즌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얼마나 팔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이 옷을 내년에도 입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어요.”화면에는 매출 그래프 대신 고객이 보낸 수선 전후 사진이 떴다.“루네는 새 옷을 더 빨리 사게 만드는 대신, 이미 산 옷을 다시 선택할 이유를 만들겠습니다. 수선에서 모인 기록은 다음 패턴에 반영하고, 회수한 원단은 소량 주문에 씁니다.”채원의 재킷 안주머니에는 지난달 첫 원금을 갚고 받은 확인서가 접혀 있었다. 무대에서 꺼낼 필요는 없었다. 오늘 보여 줄 것은 숫자가 아니라 다음 계절의 옷이었다.무대에 오르기 전 민지가 건넨 등기 봉투에는 태강 측과의 손해배상 조정 성립서가 들어 있었다.메일 무단 열람 기록과 패턴실 실장의 진술, 자문료 지급 내역이 함께 증거로 인정됐다. 법원은 브리에의 문제 제품 판매를 금지했고, 태강은 폐기 비용과 루네의 손해 일부를 배상하기로 했다.태준은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채원은 그 이름을 론칭 홍보에 쓰지 않았다.“보도 자료는 정말 안 내?”민지가 물었다.“문의가 오면 판결과 조정 내용만 답해. 새 시즌 첫 문장을 이태준 이름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아.”“배상금은 예정대로?”“야근 수당하고 협력 공장 손실분부터 지급해. 남는 건 부채 상환 계정에 넣고.”8년 전의 거짓말은 돈으로 보상받을 수 없었다. 대신 동문회에는 공개에 합의한 사실확인서와 관련자 진술 요약본이 전달됐다. ‘윤채원이 장학생의 고백을 조롱했다’

  • 너를 삼킨 밤의 계약   11화 · 너를 삼킨 밤

    펜트하우스를 나온 지 2주가 됐다.아르덴에서 온 메일은 투자관리팀 공용 계정으로 도착했다. 매출 정산 양식과 다음 분기 이사회 일정, 그뿐이었다. 차도현이 덧붙인 문장도, 개인 번호로 온 안부도 없었다.채원은 회신에 필요한 파일을 첨부하고 서민지를 참조에 넣었다.「확인했습니다. 요청 자료는 월요일까지 전달하겠습니다.」보내기 버튼을 누른 뒤 채원은 빈 화면을 잠시 보고 있었다. 차 대표에게도 공유해 달라는 쓸데없는 문장을 붙이지 않은 자신이 우스웠다.도현은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비싼 선물도, 문 앞에 놓인 꽃도 없었다. 집의 임대차 문제는 법무 대리인을 통해 처리했고, 루네 투자 건은 한지혁과 투자관리팀이 맡았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조차 만들지 않았다.그렇게 해 달라고 한 사람은 채원이었다.그런데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켤 때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펜트하우스보다 훨씬 작은 집인데도 비어 있는 자리가 더 넓었다.비가 오면 젖은 머리를 대충 묶지 말라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커피를 두 잔째 내릴 때는 도현이 말없이 디카페인 원두를 내밀던 손이 떠올랐다. 잠들지 못해 거실을 서성이다가도, 자신보다 먼저 불 켜진 서재가 없다는 사실에 걸음을 멈췄다.채무 소멸 확인서는 서랍 안에 있었고 투자 승인서는 회사 금고에 있었다. 어느 쪽도 밤마다 켜지던 서재의 불이나, 식탁 건너편에서 서류를 읽던 남자의 자리를 채워 주지는 못했다.도현이 잘못한 일은 선명했다. 그렇다고 그가 건넨 모든 순간까지 거짓으로 돌리면, 펜트하우스에서 먼저 넥타이를 당긴 자신의 마음도 함께 거짓이 됐다.오후에 한지혁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번에도 공식 일정이었다. 아르덴의 이해충돌 관리와 자료 폐기 확인을 위한 면담이었다.“아르덴이 루네 투자 검토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 목록입니다. 공개 공시, 보도 자료, 유료 시장 데이터, 루네가 직접 제공한 실사 자료가 전부입니다.”한지혁이 목록을 넘겼다.“윤 대표의 개인 정보는 채권 양도와 임대차에 필요한 범위를 제외하고 수집한 적

  • 너를 삼킨 밤의 계약   10화 · 사랑으로 살 수 없는 것

    펜트하우스를 나온 지 열흘째 되는 아침, 채원은 오래 살던 집의 창문을 열었다.집주인은 여전히 도현의 개인 법인이었다. 그러나 채원이 돌아온 날 받은 것은 퇴거 통지가 아니라 주변 집들과 비슷한 보증금과 월세가 적힌 계약서였다. 1년 안에 직접 되살 수 있다는 문장도 한쪽에 붙어 있었다.채원은 계약서를 법무사에게 검토받은 뒤 서명했다. 월세 첫 회분도 자신의 계좌에서 보냈다.집 안에는 예전 가구가 그대로였지만 생활은 달라져 있었다. 새벽마다 울리던 채권자의 전화가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자신이 고르지 않은 무가당 요구르트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아무도 아침을 거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채원은 식탁에 앉아 토스트 한 조각을 끝까지 먹었다. 굳이 그 남자의 말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오후의 론칭을 버티려면 필요한 일이었다.“대표님, 베스타리테일 최종 계약서 왔습니다.”전화기 너머로 민지의 목소리가 들렸다.“수수료는?”“우리가 제시한 수수료로 받았어. 대신 첫 달 목표 수량은 조금 올렸고.”“받아. 해외몰은 반품 물류비 상한 조항 넣었는지 확인하고.”“넣었지. 그리고 아르덴 투자위원회 결과도 왔는데, 내가 읽어 줄까?”채원의 손이 컵 손잡이에서 멈췄다.“사무실에서 볼게.”민지가 짧게 웃었다.“사람하고 계약은 끝났어도 투자 심사는 끝까지 공적으로 보시겠다?”“공적인 걸 공적으로 보는 게 왜 흠이야.”“그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단정한 것도 흠은 아니지.”채원은 전화를 끊었지만 토스트가 전처럼 잘 넘어가지는 않았다.루네 사무실에 도착하자 책상 절반이 계약서로 덮여 있었다.베스타리테일은 온라인과 편집숍 유통을 맡고, 소형 공장 연합은 생산 물량을 보장했다. 외부 투자사인 서클벤처스는 공개 프레젠테이션 이후 먼저 연락해 왔다.서클벤처스에는 투자금을 먼저 회수할 권리와 약속한 지분을 내줬다. 대신 루네의 경영권과 디자인은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는 선을 그었다.아르덴의 투자도 승인됐다. 심사 의견서에는 루네의 강점뿐 아니라 분산

Bab Lainnya
Jelajahi dan baca novel bagus secara gratis
Akses gratis ke berbagai novel bagus di aplikasi GoodNovel. Unduh buku yang kamu suka dan baca di mana saja & kapan saja.
Baca buku gratis di Aplikasi
Pindai kode untuk membaca di Aplikasi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