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계약 3일째가 되도록 그 문장은 채원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채원은 생각을 떨치듯 귀걸이를 채웠다. 오늘 동행할 갈라는 벤처 투자 업계와 패션계가 공동으로 여는 자선 행사였다. 도현이 말한 세 번의 공식 일정 가운데 첫 번째였다.
드레스룸 문밖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비됐어?”
“잠깐만요.”
채원은 거울 앞에서 옷자락을 한 번 정리했다. 협찬 목록에서 고르지 않고 루네의 미출시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
검은 새틴 위로 비대칭 재단이 어깨선을 드러냈고, 움직일 때마다 안쪽의 짙은 청색이 가늘게 보였다. 위기를 감추려고 화려하게 장식한 옷이 아니라, 남길 선만 정확히 남긴 디자인이었다.
문을 열자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던 손을 내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약 연인에게 미흡한 점이라도?”
도현의 시선이 채원의 어깨에서 허리로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없어.”
“그런 표정으로 말하면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미흡해서 보는 게 아니야.”
짧은 대답이 이상할 만큼 직접적이었다. 채원은 클러치를 집어 들며 시선을 피했다.
“오늘 드레스는 협찬이 아니라 루네 제품이에요. 누가 물으면 다음 시즌 프리뷰라고 해요.”
“샘플 번호 L-27.”
채원이 돌아봤다.
“그것까지 외웠어요?”
“투자 검토 자료에 있었어.”
도현은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 검은 턱시도 위로 반듯하게 놓인 등을 보며 채원은 입술을 다물었다. 계약 상대의 옷을 확인하는 투자자는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샘플 번호까지 외우는 투자자는 드물었다.
차 안에서 도현은 일정만 설명했다. 포토월, 주최 측 인사, 만찬. 필요한 순간에만 연인처럼 보이면 된다고 했다.
“허리에 손을 대거나 팔을 잡아야 할 때는 먼저 신호할게.”
“어떻게요?”
“차에서 내리면 손을 내밀 거야. 로비까지는 사진이 따라붙을 테니까.”
“통보예요?”
“예고야. 놀라서 내 손을 쳐 내면 그것도 기사거리가 될 테고.”
“그건 조금 보고 싶네요.”
“나는 별로.”
도현은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채원은 웃을 뻔한 입술을 눌렀다.
호텔 입구에는 취재진이 몰려 있었다. 아르덴 대표 차도현이 누구와 나타나는지 확인하려는 렌즈가 일제히 차를 향했다.
도현이 먼저 내려 손등을 내밀었다.
채원은 잠깐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손바닥을 포갰다. 차에서 내려서는 순간 플래시 불빛이 시야를 하얗게 덮었다. 본능적으로 도현의 손가락을 세게 쥐자 그가 곧바로 몸을 틀어 카메라와 채원 사이를 반쯤 가렸다.
“로비까지는 잡고 있어요. 넘어지면 차 대표님 탓이니까.”
채원이 먼저 말했다.
도현의 엄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래.”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
행사장에 들어선 지 10분 만에 채원은 자신을 둘러싼 평가의 방향을 읽었다.
한때 윤성그룹의 외동딸로 초대받던 여자. 지금은 망하기 직전의 작은 브랜드 대표. 거기에 투자 업계에서 가장 비싼 독신남의 팔을 잡고 나타났다. 사람들은 자선보다 그 조합에 더 관심이 많았다.
“윤 대표, 정말 오랜만이에요. 루네가 어렵다는 말이 있던데 얼굴은 좋아 보이네요.”
중견 유통사 대표의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제품 만들 체력은 남아 있습니다.”
“차 대표님이 도와주시면 금방 괜찮아지겠죠. 역시 인연은 잘 만들어 두고 봐야 해.”
“아르덴은 인연보다 수익률을 보죠. 저도 그 기준으로 검토받고 있습니다.”
채원은 잔을 들어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갔다. 도움받는 여자라는 자리에 자신을 세워 두려는 말에 일일이 상처받을 여유는 없었다. 사람들은 약점을 냄새 맡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데 굶주려 있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길을 막았다.
“두 사람이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
이태준이었다.
짙은 남색 턱시도를 입은 그는 대학 시절보다 말끔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태강캐피탈 전무라는 명함은 예전부터 있던 오만에 명분을 더해 줬다.
“윤 대표. 연락을 여러 번 했는데 답이 없어서 걱정했어.”
“상환 협의가 아니라 지분 포기 각서를 들고 온 연락에는 답할 필요가 없었죠.”
“회사를 살릴 현실적인 방법을 제안한 거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지.”
태준의 시선이 도현에게 옮겨 갔다.
“그런데 차 대표가 먼저 채권을 샀더군. 남의 부실 자산을 모으는 취미가 생긴 줄은 몰랐어.”
“가치 판단이 다를 뿐이지.”
도현의 대답은 짧았다.
“가치라.”
태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채원이는 예전부터 사람 눈을 끄는 데 능했지. 다만 지금은 드레스보다 다음 달 원단 대금을 걱정해야 하지 않나? 차 대표 옆에 서면 은행 만기일이 잠깐 잊히는 모양이야.”
주변의 대화가 느려졌다. 대놓고 듣지는 않아도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도현이 한 걸음 움직이려는 순간 채원이 그의 손목을 가볍게 짚었다. 도현은 그 손을 내려다보고 제자리에 멈췄다.
“전무님은 아직도 담보가 없으면 가치를 못 보시네요.”
채원이 태준을 똑바로 보았다.
“미결제 원단 대금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문이 돌아오지 않는 회사였다면 태강이 상표권과 과거 디자인까지 묶어 세 번이나 인수를 제안할 이유가 없겠죠.”
태준의 웃음이 얇아졌다.
“부실 회사를 정리해 주겠다는 호의였지.”
“빚은 싫다면서 브랜드의 이름과 기억은 탐냈군요.”
가까이 있던 패션 유통사 대표가 채원의 드레스 소매를 가리켰다.
“오늘 입으신 것도 루네 제품입니까? 사진으로 본 샘플과 선이 다른데요.”
채원은 소매 안쪽의 작은 단추를 풀어 보였다. 접혀 있던 천이 펴지며 손목선이 달라졌다.
“같은 패턴입니다. 고객이 수선소에 가지 않아도 길이와 실루엣을 바꿀 수 있게 했어요. 많이 만들어 할인하는 대신, 한 벌을 오래 입게 하는 쪽으로 생산 방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대표는 장식보다 봉제선을 먼저 살폈다.
“유통 채널이 줄어든 상태에서 가능한 방식입니까?”
“한꺼번에 물량을 밀어 넣지 않습니다. 핵심 디자인을 나눠 공개하고, 예약과 피팅 신청이 쌓인 만큼만 공장에 넣어요. 매장 수를 늘리는 대신 고객이 어디서 망설였는지 직접 확인할 겁니다.”
태준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 계산도 주거래사가 다음 분기 물량을 받아 줄 때나 맞겠지.”
거래처를 걱정하는 말투였지만, 채원은 태강이 그 유통사의 대출 조건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곳에 목을 맡기는 구조부터 없애고 있습니다. 수도권 배송은 두 업체로 나누고, 반품 검수는 루네가 직접 가져와요. 비용이 조금 더 들어도 어느 한 회사의 통보로 계절 전체가 멈추지는 않게요.”
“말은 좋군.”
“말로 끝낼 생각이었다면 오늘 샘플을 입고 오지 않았겠죠.”
채원은 드레스 허리의 여밈을 바꿨다. 정면의 주름이 사라지고 선이 곧게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채원의 집안 이야기를 엿듣던 사람들이 이제 옷의 구조를 보기 시작했다.
회색 머리의 투자자가 행사 사무국 직원을 불렀다.
“다음 주 실무 미팅을 잡아 주시죠. 숫자보다 생산 과정을 먼저 보고 싶습니다.”
“공장 일정과 함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태준은 더 웃지 않았다. 채원은 그의 시선이 자신의 드레스가 아니라, 옆에 선 도현의 손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돈보다 소유권을 먼저 셈하는 눈이었다.
도현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 다가온 주최 측 회장에게 채원을 소개했다.
“윤채원 대표입니다. 제 동행이기 전에, 아르덴이 정식 심사 중인 루네의 창업자입니다.”
불쌍한 옛 동창도, 보호해야 할 연인도 아니었다.
창업자.
채원은 도현을 한 번 바라본 뒤 회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네의 윤채원입니다.”
만찬이 시작되기 전 포토월 추가 촬영 요청이 들어왔다. 도현은 채원의 눈앞에 손을 펼쳐 보였다. 허리를 감아도 되느냐는 신호였다.
채원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바닥이 드레스 위 허리선에 닿았다. 손끝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체온이 얇은 천을 지나 선명하게 번졌다. 채원은 카메라를 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옆얼굴을 올려다봤다.
도현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연기라면 렌즈를 향해 웃었어야 했다. 그러나 둘 다 그러지 못했다. 사진사는 오히려 좋다며 셔터를 더 눌렀다.
“조금 더 가까이 부탁드립니다.”
채원이 먼저 반 걸음 다가섰다. 도현의 손가락이 아주 잠깐 굳었다. 넥타이 아래로 움직인 목울대가 가까이서 보였다.
“불편하면 말해.”
그가 채원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차 대표님 손이 떨리는 게 더 불편하네요.”
“안 떨려.”
“그럼 긴장했나 봐요.”
도현이 카메라를 향한 채 답했다.
“네가 이만큼 가까우면 그래.”
채원은 더는 그를 놀리지 못했다.
***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행사장에서 벗어나자 도현은 약속대로 허리에서 손을 뗐다. 닿아 있던 자리가 차갑게 식는 것이 못마땅해 채원은 팔짱을 꼈다.
“오늘 일은 고마웠어요.”
“뭘.”
“내가 대답할 때 끼어들지 않은 것. 그리고 창업자라고 소개한 것.”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차 대표님은 사실만으로 사람을 돕는군요.”
“널 도운 건 아니야. 네가 이미 끝낸 싸움에 이름을 붙인 거지.”
층수가 느리게 줄었다. 거울 벽에 선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지만, 조금 전까지 닿았던 손 하나를 두고도 거리가 멀었다.
채원이 물었다.
“왜 나예요?”
도현이 그녀를 돌아봤다.
“정략결혼설을 없애는 데 내가 꼭 필요하다는 말, 믿기 어렵거든요. 오늘도 봤겠지만 차 대표님 혼자 충분히 정리할 수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왜 내 채권과 집까지 사서 이런 계약을 만들었어요? 대학 때 내가 당신을 무시했다고 믿는다면 더더욱.”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문이 열렸지만 둘 다 내리지 않았다. 잠시 뒤 문이 다시 닫히자 두 사람의 모습이 검은 거울처럼 겹쳤다.
“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어.”
도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틀렸어.”
그는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답처럼 망설이지 않았다.
“8년 전에도 나는 네 편이었어. 네가 내 편이 아니었던 순간에도.”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유독 넓고 거대한 통유리창은 한강의 잔잔한 밤 풍경과 강변북로를 바쁘게 오가는 차량들의 불빛을 가감 없이 비추고 있었다.반년 전, 윤채원이 이 낯설고 거대한 공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온몸으로 느꼈던 기이하고 서늘한 이질감은 이제 집 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당시에는 먼지 한 점 없이 차갑고 미끈하게 빛나기만 하던 백색 대리석 바닥 위에는 채원이 루네의 가을 시즌 컬렉션 작업실에서 직접 고르고 손수 바느질해 만든 차분한 오트밀 색의 두툼하고 포근한 리넨 러그가 넓게 깔려 있었다.자로 잰 듯이 지나치게 단정하기만 하던 소파 위에는 채원이 퇴근길에 들고 온 의류 유통 서적과 도현이 보던 경영 및 투자 분석 자료, 그리고 자유롭게 갈겨쓴 스케치북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채 놓여 있었다.차가운 박제처럼 온기 한 조각 없던 거대한 거실에 마침내 서서히 사람의 손때와 살아가는 아늑한 내음, 그리고 두 남녀의 온전한 체온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채원은 소파 끝에 무릎을 모으고 편안하게 걸터앉아 유리 탁자 위에 놓인 투명한 그릇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투명한 그릇 안에는 껍질이 말끔하고 부드럽게 벗겨진 분홍빛 복숭아 조각들이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정갈하게 손질되어 담겨 있었다. 채원은 과즙이 손가락에 조금이라도 끈적하게 묻는 것을 유독 싫어했다.대학 시절 동아리방 구석에서 과일 샐러드를 대충 집어먹다 알레르기 소동으로 응급실까지 가야 했던 해프닝 이후로 생긴 나름의 트라우마이자 고질적인 버릇이었다.차도현은 복숭아가 나는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언제나 한결같이 부엌에서 과도를 찾아 쥐고 하얀 손가락 끝으로 껍질을 정성스레 깎아 채원의 접시를 가득 채워두곤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또 긴장해서 손가락 아프게 손톱 누르고 있지 말고.”어느새 샤워를 마쳤는지, 가벼운 네이비색 가운 차림으로 다가온 도현이 소파 뒤편에서 자연스럽게 상체를 숙여 채원의 가냘픈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에서 방
낮, 아르덴파트너스 본사 17층 대회의실.유리창 너머로 눈이 시릴 만큼 정제된 한낮의 햇살이 길쭉한 대리석 테이블 위로 부서져 내렸다. 에어컨이 조용히 돌아가는 회의실 내부의 공기는 한여름의 열기보다 더 차갑고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루네의 서유럽 유통망 확장 및 파리 수선 거점(Atelier) 건립 안건을 두고 벌써 세 시간째 이어지는 마라톤 회의였다.“윤 대표님, 제안하신 프랑스 파리 현지 수선 및 물류 통합 센터 건립 계획은 아르덴의 위험 관리 가이드라인을 명백히 초과합니다. 현지 아웃소싱 파트너십 대신 직영 공간을 짓겠다는 고집은, 초기 고정비 투자 대비 예상 회수 기간을 과도하게 늘릴 뿐입니다.”테이블 상석에 앉은 차도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도로 루네의 제안서를 넘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적인 온기가 단 한 조각도 섞여 있지 않았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각 잡힌 다크 네이비 슈트, 그리고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매듭지어진 타이가 완벽한 투자사 대표로서의 냉철함을 대변했다.맞은편에 앉은 윤채원은 턱을 약간 든 채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녀 역시 루네의 미출시 라인인 차분한 차콜 그레이 린넨 재킷 소매를 단정하게 걷어붙인 차림이었다. 채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펜을 한 번 돌려 로고가 아래로 향하게 놓았다. 예전의 불안을 감추기 위한 무의식적인 버릇이 아니었다. 상대를 완전히 분석하고 다음 수를 놓기 전의 프로페셔널한 호흡이었다.“차 대표님, 단순한 물류비 산출 공식으로만 접근하면 그렇게 보이겠죠. 하지만 서유럽 바이어들이 루네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속 가능한 수선 보장’이라는 신뢰에 있습니다. 현지 파트너십에 위탁할 경우, 당사 특유의 초승달 자수 복원과 비대칭 패턴의 정밀 수선 퀄리티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브랜드 가치가 훼손되어 발생하는 장기적 반품률 상승과 고객 이탈 비용은 아르덴의 그 똑똑한 수식에 반영되어 있습니까?”양보 없는 공방에 회의실 배석자들은 일제히 마른침을 삼켰다. 루네의 운영총괄 서민
서래마을의 고요한 밤은 깊었다. 윤채원이 마침내 제 손으로 다시 사들인 옛집은 한남동의 모델하우스처럼 매끄러운 펜트하우스와 달리, 벽지 틈새마다 어릴 적 살던 체온과 옛 가구의 눅눅한 나무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공간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완전히 무너지고 사채업자들에게 쫓겨 도망치듯 이 문을 나섰던 그 새벽으로부터 정확히 8년이 흐른 날이었다. 감정평가사와 대출 심사 서류에 스스로 서명하고 매매 대금을 모두 송금한 날, 채원은 퇴근하자마자 텅 빈 거실 마룻바닥에 가만히 주저앉아 제 이름 석 자와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등기부등본 원본을 한참 동안 손가락으로 쓸어내렸었다. 돌려받은 구원이 아니었다. 온전히 제 실력과 땀으로 버티며 직접 사들인 온전한 제 집이었다.거실 한가운데에는 빛바랜 노란 상자들이 성벽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채원은 얇은 실크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 아직 먼지가 풀풀 날리는 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테이프를 뜯어내고 있었다. 피로가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지만 이상할 만큼 잠은 오지 않았다. 손끝에 가볍게 닿는 물건마다 해묵은 기억들이 쏟아져 나와 마음의 빈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상자 깊숙한 곳에서 투명한 수납함 하나가 나왔다. 먼지를 털어내고 뚜껑을 열자, 대학 시절의 전공 책 몇 권과 모서리가 헤진 낡은 크로키북, 그리고 한눈에 보아도 손때가 아주 깊게 묻은 파란색 클리어 파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채원의 숨결이 짧게 멎었다. 그것은 루네(LUNE)의 최초 구상안이 담겨 있던 원본 파일이었다. 파일 첫 페이지에는 8년 전, 대학 도서관 뒤뜰의 어둑한 벤치에 앉아 그녀가 정갈한 검은색 펜으로 꾹꾹 눌러 썼던 문장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기술은 단순히 미래의 숫자를 맞히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제때, 가장 알맞은 온도로 만들게 해야 한다. 차도현의 수요 예측 모델은 그 아름다운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그리고 그 아래에는 도현의 단정하면서도 묵직한
채원이 계약 없이 도현에게 돌아간 지 6개월 뒤, 루네의 새 시즌 프레젠테이션은 한남동의 오래된 미술관에서 열렸다.반년 전 긴급 공개회에서는 작업대와 실패한 샘플을 내놓았다. 이번 무대에는 그때 선주문한 고객들이 실제로 입고 돌아온 옷도 함께 걸렸다. 소매 끝을 수선한 재킷, 단추를 바꿔 다시 입은 코트, 남은 원단으로 만든 작은 파우치가 새 컬렉션 사이에 놓였다.마지막 모델이 무대 뒤로 들어가자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채원은 검은 팬츠 슈트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지난 시즌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얼마나 팔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이 옷을 내년에도 입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어요.”화면에는 매출 그래프 대신 고객이 보낸 수선 전후 사진이 떴다.“루네는 새 옷을 더 빨리 사게 만드는 대신, 이미 산 옷을 다시 선택할 이유를 만들겠습니다. 수선에서 모인 기록은 다음 패턴에 반영하고, 회수한 원단은 소량 주문에 씁니다.”채원의 재킷 안주머니에는 지난달 첫 원금을 갚고 받은 확인서가 접혀 있었다. 무대에서 꺼낼 필요는 없었다. 오늘 보여 줄 것은 숫자가 아니라 다음 계절의 옷이었다.무대에 오르기 전 민지가 건넨 등기 봉투에는 태강 측과의 손해배상 조정 성립서가 들어 있었다.메일 무단 열람 기록과 패턴실 실장의 진술, 자문료 지급 내역이 함께 증거로 인정됐다. 법원은 브리에의 문제 제품 판매를 금지했고, 태강은 폐기 비용과 루네의 손해 일부를 배상하기로 했다.태준은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채원은 그 이름을 론칭 홍보에 쓰지 않았다.“보도 자료는 정말 안 내?”민지가 물었다.“문의가 오면 판결과 조정 내용만 답해. 새 시즌 첫 문장을 이태준 이름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아.”“배상금은 예정대로?”“야근 수당하고 협력 공장 손실분부터 지급해. 남는 건 부채 상환 계정에 넣고.”8년 전의 거짓말은 돈으로 보상받을 수 없었다. 대신 동문회에는 공개에 합의한 사실확인서와 관련자 진술 요약본이 전달됐다. ‘윤채원이 장학생의 고백을 조롱했다’
펜트하우스를 나온 지 2주가 됐다.아르덴에서 온 메일은 투자관리팀 공용 계정으로 도착했다. 매출 정산 양식과 다음 분기 이사회 일정, 그뿐이었다. 차도현이 덧붙인 문장도, 개인 번호로 온 안부도 없었다.채원은 회신에 필요한 파일을 첨부하고 서민지를 참조에 넣었다.「확인했습니다. 요청 자료는 월요일까지 전달하겠습니다.」보내기 버튼을 누른 뒤 채원은 빈 화면을 잠시 보고 있었다. 차 대표에게도 공유해 달라는 쓸데없는 문장을 붙이지 않은 자신이 우스웠다.도현은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비싼 선물도, 문 앞에 놓인 꽃도 없었다. 집의 임대차 문제는 법무 대리인을 통해 처리했고, 루네 투자 건은 한지혁과 투자관리팀이 맡았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조차 만들지 않았다.그렇게 해 달라고 한 사람은 채원이었다.그런데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켤 때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펜트하우스보다 훨씬 작은 집인데도 비어 있는 자리가 더 넓었다.비가 오면 젖은 머리를 대충 묶지 말라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커피를 두 잔째 내릴 때는 도현이 말없이 디카페인 원두를 내밀던 손이 떠올랐다. 잠들지 못해 거실을 서성이다가도, 자신보다 먼저 불 켜진 서재가 없다는 사실에 걸음을 멈췄다.채무 소멸 확인서는 서랍 안에 있었고 투자 승인서는 회사 금고에 있었다. 어느 쪽도 밤마다 켜지던 서재의 불이나, 식탁 건너편에서 서류를 읽던 남자의 자리를 채워 주지는 못했다.도현이 잘못한 일은 선명했다. 그렇다고 그가 건넨 모든 순간까지 거짓으로 돌리면, 펜트하우스에서 먼저 넥타이를 당긴 자신의 마음도 함께 거짓이 됐다.오후에 한지혁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번에도 공식 일정이었다. 아르덴의 이해충돌 관리와 자료 폐기 확인을 위한 면담이었다.“아르덴이 루네 투자 검토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 목록입니다. 공개 공시, 보도 자료, 유료 시장 데이터, 루네가 직접 제공한 실사 자료가 전부입니다.”한지혁이 목록을 넘겼다.“윤 대표의 개인 정보는 채권 양도와 임대차에 필요한 범위를 제외하고 수집한 적
펜트하우스를 나온 지 열흘째 되는 아침, 채원은 오래 살던 집의 창문을 열었다.집주인은 여전히 도현의 개인 법인이었다. 그러나 채원이 돌아온 날 받은 것은 퇴거 통지가 아니라 주변 집들과 비슷한 보증금과 월세가 적힌 계약서였다. 1년 안에 직접 되살 수 있다는 문장도 한쪽에 붙어 있었다.채원은 계약서를 법무사에게 검토받은 뒤 서명했다. 월세 첫 회분도 자신의 계좌에서 보냈다.집 안에는 예전 가구가 그대로였지만 생활은 달라져 있었다. 새벽마다 울리던 채권자의 전화가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자신이 고르지 않은 무가당 요구르트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아무도 아침을 거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채원은 식탁에 앉아 토스트 한 조각을 끝까지 먹었다. 굳이 그 남자의 말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오후의 론칭을 버티려면 필요한 일이었다.“대표님, 베스타리테일 최종 계약서 왔습니다.”전화기 너머로 민지의 목소리가 들렸다.“수수료는?”“우리가 제시한 수수료로 받았어. 대신 첫 달 목표 수량은 조금 올렸고.”“받아. 해외몰은 반품 물류비 상한 조항 넣었는지 확인하고.”“넣었지. 그리고 아르덴 투자위원회 결과도 왔는데, 내가 읽어 줄까?”채원의 손이 컵 손잡이에서 멈췄다.“사무실에서 볼게.”민지가 짧게 웃었다.“사람하고 계약은 끝났어도 투자 심사는 끝까지 공적으로 보시겠다?”“공적인 걸 공적으로 보는 게 왜 흠이야.”“그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단정한 것도 흠은 아니지.”채원은 전화를 끊었지만 토스트가 전처럼 잘 넘어가지는 않았다.루네 사무실에 도착하자 책상 절반이 계약서로 덮여 있었다.베스타리테일은 온라인과 편집숍 유통을 맡고, 소형 공장 연합은 생산 물량을 보장했다. 외부 투자사인 서클벤처스는 공개 프레젠테이션 이후 먼저 연락해 왔다.서클벤처스에는 투자금을 먼저 회수할 권리와 약속한 지분을 내줬다. 대신 루네의 경영권과 디자인은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는 선을 그었다.아르덴의 투자도 승인됐다. 심사 의견서에는 루네의 강점뿐 아니라 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