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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 48시간의 불빛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4 21:42:49
《너를 삼킨 밤의 계약》

014화.

“한마디쯤 보태 줄 수 있었잖아요.”

“그러길 바랐어?”

채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도현의 눈에 아주 얕은 빛이 스쳤다. 그녀가 기대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은 사람의 눈이었다.

“투자자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됩니다.”

채원이 먼저 선을 그었다.

“그래서 빠졌어.”

도현은 빈틈도 주지 않고 답했다.

“심사에서만.”

도현은 곁에 기다리던 한지혁을 돌아봤다.

“8년 전 태강이 내게 보낸 투자 제안과 익명 서버 지원금 경로를 확인해 주세요.”

채원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지혁이 이유를 묻자 도현은 그녀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답했다.

“서로 기억하는 마지막이 다르니까.”

그가 지나간 뒤에도 채원은 한동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

12일째 오후, 세림리테일에서 계약 해지 통보가 왔다.

루네 매출의 38퍼센트를 맡던 온라인 유통사가 다음 시즌 입점을 전면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확정한 물량에 대해서는 위약금을 물겠지만, 메인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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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를 삼킨 밤의 계약   34화. 계약 없는 6개월

    채원이 계약 없이 도현에게 돌아간 지 6개월 뒤, 루네의 새 시즌 프레젠테이션은 한남동의 오래된 미술관에서 열렸다.반년 전 긴급 공개회에서는 작업대와 실패한 샘플을 내놓았다. 이번 무대에는 그때 선주문한 고객들이 실제로 입고 돌아온 옷도 함께 걸렸다. 소매 끝을 수선한 재킷, 단추를 바꿔 다시 입은 코트, 남은 원단으로 만든 작은 파우치가 새 컬렉션 사이에 놓였다.마지막 모델이 무대 뒤로 들어가자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채원은 검은 팬츠 슈트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지난 시즌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얼마나 팔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이 옷을 내년에도 입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어요.”화면에는 매출 그래프 대신 고객이 보낸 수선 전후 사진이 떴다.“루네는 새 옷을 더 빨리 사게 만드는 대신, 이미 산 옷을 다시 선택할 이유를 만들겠습니다. 수선에서 모인 기록은 다음 패턴에 반영하고, 회수한 원단은 소량 주문에 씁니다.”채원의 재킷 안주머니에는 지난달 첫 원금을 갚고 받은 확인서가 접혀 있었다. 무대에서 꺼낼 필요는 없었다. 오늘 보여 줄 것은 숫자가 아니라 다음 계절의 옷이었다.무대에 오르기 전 민지가 건넨 등기 봉투에는 태강 측과의 손해배상 조정 성립서가 들어 있었다.메일 무단 열람 기록과 패턴실 실장의 진술, 자문료 지급 내역이 함께 증거로 인정됐다. 법원은 브리에의 문제 제품 판매를 금지했고, 태강은 폐기 비용과 루네의 손해 일부를 배상하기로 했다.태준은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채원은 그 이름을 론칭 홍보에 쓰지 않았다.“보도 자료는 정말 안 내?”민지가 물었다.“문의가 오면 판결과 조정 내용만 답해. 새 시즌 첫 문장을 이태준 이름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아.”“배상금은 예정대로?”“야근 수당하고 협력 공장 손실분부터 지급해. 남는

  • 너를 삼킨 밤의 계약   33화. 계약 없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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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트하우스를 나온 지 2주가 됐다.아르덴에서 온 메일은 투자관리팀 공용 계정으로 도착했다. 매출 정산 양식과 다음 분기 이사회 일정, 그뿐이었다. 차도현이 덧붙인 문장도, 개인 번호로 온 안부도 없었다.채원은 회신에 필요한 파일을 첨부하고 서민지를 참조에 넣었다.「확인했습니다. 요청 자료는 월요일까지 전달하겠습니다.」보내기 버튼을 누른 뒤 채원은 빈 화면을 잠시 보고 있었다. 차 대표에게도 공유해 달라는 쓸데없는 문장을 붙이지 않은 자신이 우스웠다.도현은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비싼 선물도, 문 앞에 놓인 꽃도 없었다. 집의 임대차 문제는 법무 대리인을 통해 처리했고, 루네 투자 건은 한지혁과 투자관리팀이 맡았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조차 만들지 않았다.그렇게 해 달라고 한 사람은 채원이었다.그런데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켤 때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펜트하우스보다 훨씬 작은 집인데도 비어 있는 자리가 더 넓었다.비가 오면 젖은 머리를 대충 묶지 말라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커피를 두 잔째 내릴 때는 도현이 말없이 디카페인 원두를 내밀던 손이 떠올랐다. 잠들지 못해 거실을 서성이다가도, 자신보다 먼저 불 켜진 서재가 없다는 사실에 걸음을 멈췄다.채무 소멸 확인서는 서랍 안에 있었고 투자 승인서는 회사 금고에 있었다. 어느 쪽도 밤마다 켜지던 서재의 불이나, 식탁 건너편에서 서류를 읽던 남자의 자리를 채워 주지는 못했다.도현이 잘못한 일은 선명했다. 그렇다고 그가 건넨 모든 순간까지 거짓으로 돌리면, 펜트하우스에서 먼저 넥타이를 당긴 자신의 마음도 함께 거짓이 됐다.오후에 한지혁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번에도 공식 일정이었다. 아르덴의 이해충돌 관리와 자료 폐기 확인을 위한 면담이었다.“아르덴이 루네 투자 검토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 목록입니다. 공개 공시, 보도 자료, 유료

  • 너를 삼킨 밤의 계약   30화. 텅 빈 복도

    브리에의 판매 페이지가 중단된 뒤 루네 검색량은 이전 시즌 최고치를 훌쩍 넘었다. 관심을 매출로 바꾸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채원은 무대에서 표절 사건을 되풀이하는 대신, 루네가 다음 계절에 무엇을 만들 것인지 이야기했다.“우리는 위기 때문에 투명해진 브랜드가 아닙니다. 만드는 사람과 입는 사람이 같은 정보를 가져야 오래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부터 모든 제품 페이지에 생산 공장과 주요 수정 이력, 예상 수선 비용을 공개하겠습니다.”대형 유통망을 잃은 약점을 고객과 직접 연결되는 구조로 바꿨다. 베스타리테일과의 신규 계약, 수선 회수 프로그램, 남은 원단을 활용한 소량 주문 제작 계획이 차례로 발표됐다.행사가 절반쯤 지났을 때 채원은 객석 뒤편에서 도현을 발견했다.검은 슈트 차림의 그는 카메라도 귀빈석도 피한 채 기둥 옆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축하한다는 뜻을 그것으로 끝냈다.최종 선주문 수량은 준비한 목표치를 한참 넘어섰다. 직원들이 서로를 끌어안았고 민지는 채원의 손에 탄산수 잔을 쥐여 줬다.“이제 좀 웃어. 오늘은 네가 이겼어.”채원은 화면의 숫자를 확인한 뒤에야 웃었다.“우리가 이긴 거야.”그 순간 기둥 옆이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채원은 잔을 내려놓고 행사장 뒤편으로 나갔다.도현은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 있었다. 채원의 구두 소리를 듣고 돌아섰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축하해.”“그 말만 하려고 왔어요?”“응.”“그리고 또 내 눈앞에서 사라지려고요?”도현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사라지는 게 네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했어.”“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에요. 왜 8년 전에도, 이번에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어요?”복도 건너편에서 행사 음

  • 너를 삼킨 밤의 계약   29화. 예정 시각의 론칭

    민지는 협상실을 나온 뒤 길게 어깨를 폈다.“나 방금 20분 동안 대표님이 투자금 걷어차는 상상 세 번 했어.”“대신 빼앗기는 계약을 맺으면 그게 더 비싸.”“알아. 그래서 안 말렸지.”채원은 수정 계약서에 자신의 펜으로 서명했다. 도현이 벌어 준 시간 위에 어떤 조건을 적을지는 자신이 정했다.곧이어 열린 채권단 협의에서도 채원은 신규 투자 계약과 선주문금 보관 내역을 직접 펼쳤다. 채권단은 18개월 안에 갚는 안을 먼저 내놓았다.“그 기간이면 내년 생산비와 원금 상환이 다시 겹칩니다. 첫 6개월은 이자만 내고, 이후 월 매출의 일정 비율로 원금을 갚겠습니다. 대신 재고와 현금흐름을 매달 공개하죠.”“3년은 너무 깁니다.”“그래서 베스타리테일 확정 발주와 선주문 계좌를 상환 근거로 가져왔습니다. 상표권 담보를 요구하시면 협의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다음 날 새벽까지 계산표가 오갔다. 채권단은 3년에 걸쳐 나눠 갚겠다는 안을 받아들였다. 첫 반년에는 생산비를 지키고, 그다음부터 옷이 팔린 만큼 원금을 줄이는 방식이었다.채원은 새 상환표의 첫 납입일에 붉은 동그라미를 쳤다. 다음 시즌을 만들 만큼 멀었고, 빚을 잊지 않을 만큼 가까운 날짜였다.그 돈은 직원들이 만든 옷을 팔아 갚을 것이다. 채원은 동그라미 옆에 짧게 적었다.첫 번째 상환.“대표님.”직원이 샘플 행거를 밀고 왔다.채원은 재킷 안쪽 봉제선을 확인했다. 긴급 생산으로 바뀐 공장이 초승달 자수를 2mm 아래에 달아 놓았다.“이대로 출고하면 움직일 때 자수가 접혀요. 오늘 물량은 전부 수정해 주세요. 납기보다 제품이 먼저예요. 고객들에게는 1일 지연 안내하고 보상 포인트를 넣죠.”“네.”판단해야 할 일이 이어졌다. 광고 문구, 플랫폼 배너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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