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채원이 계약 없이 도현에게 돌아간 지 6개월 뒤, 루네의 새 시즌 프레젠테이션은 한남동의 오래된 미술관에서 열렸다.
반년 전 긴급 공개회에서는 작업대와 실패한 샘플을 내놓았다. 이번 무대에는 그때 선주문한 고객들이 실제로 입고 돌아온 옷도 함께 걸렸다. 소매 끝을 수선한 재킷, 단추를 바꿔 다시 입은 코트, 남은 원단으로 만든 작은 파우치가 새 컬렉션 사이에 놓였다.
마지막 모델이 무대 뒤로 들어가자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채원은 검은 팬츠 슈트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지난 시즌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얼마나 팔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이 옷을 내년에도 입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어요.”
화면에는 매출 그래프 대신 고객이 보낸 수선 전후 사진이 떴다.
“루네는 새 옷을 더 빨리 사게 만드는 대신, 이미 산 옷을 다시 선택할 이유를 만들겠습니다. 수선에서 모인 기록은 다음 패턴에 반영하고, 회수한 원단은
자존심도, 몰락해 가는 가문의 그늘도, 스물한 살의 여린 손가락을 스치던 슬픔도 모두 누른 채 위탁 매장의 영수증을 받아 쥐었던 그날의 기억. 그것은 적선이나 동정이 아니었다.그것은 아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모두가 비웃던 차도현이라는 존재를 향한, 채원만의 가장 투명하고도 유일했던 사랑의 선언이었다.하지만 도현은 그 지독한 진실을 8년 동안 전혀 알지 못했었다. 채원이 자신을 다른 동기들과 함께 비웃고 버린 뒤 비겁하게 돈을 선택해 떠난 줄로만 믿고, 미워하려 애쓰면서도 단 한 순간도 그 손끝을 마음에서 놓지 못했던 그 고독한 순정의 시간들.서로가 상대방에게 버림받았다고 철저히 믿었기에 확인하는 것조차 두려워 외면했던 8년의 공백은, 그만큼 가슴 아프고 시린 겨울이었다.조용한 초인종 소리가 적막한 거실의 감상적인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채원은 들고 있던 기획서를 가만히 소파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단 한 사람의 실루엣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다.문을 열자, 밤사이 더욱 굵어진 늦여름 밤바람의 차가운 냄새와 함께 차도현이 서 있었다. 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각이 잡혀 있던 아르덴의 차가운 투자사 대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회색 슈트 재킷은 한쪽 팔에 대충 걸쳐져 있었고, 단단한 턱밑을 죄고 있던 넥타이는 진작에 풀어 가방에 밀어 넣었는지 단정하던 흰 셔츠 깃이 비틀려 가슴팍까지 흐트러져 있었다. 이마 위로 가볍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에는 차가운 밤이슬과 미세한 빗방울이 하얗게 서려 있었다.도현의 집요한 시선이 문이 열리는 짧은 틈을 타 채원에게로 곧장 와 닿았다. 조금 젖어 목덜미에 착 달라붙은 그녀의 갈색 머리끝, 얇은 셔츠 아래로 비치는 가냘픈 실루엣, 그리고 먼지가 묻어 조금 희끗해진 바지 무릎을 향해 그의 눈빛이 천천히 쓸려 내려갔다.
서래마을의 고요한 밤은 깊었다.윤채원이 마침내 제 손으로 다시 사들인 옛집은 한남동의 모델하우스처럼 매끄러운 펜트하우스와 달리, 벽지 틈새마다 어릴 적 살던 체온과 옛 가구의 눅눅한 나무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공간이었다.아버지의 사업이 완전히 무너지고 사채업자들에게 쫓겨 도망치듯 이 문을 나섰던 그 새벽으로부터 정확히 8년이 흐른 날이었다.감정평가사와 대출 심사 서류에 스스로 서명하고 매매 대금을 모두 송금한 날, 채원은 퇴근하자마자 텅 빈 거실 마룻바닥에 가만히 주저앉아 제 이름 석 자와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등기부등본 원본을 한참 동안 손가락으로 쓸어내렸었다.돌려받은 구원이 아니었다. 온전히 제 실력과 땀으로 버티며 직접 사들인 온전한 제 집이었다.거실 한가운데에는 빛바랜 노란 상자들이 성벽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채원은 얇은 실크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 아직 먼지가 풀풀 날리는 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테이프를 뜯어내고 있었다.피로가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지만 이상할 만큼 잠은 오지 않았다. 손끝에 가볍게 닿는 물건마다 해묵은 기억들이 쏟아져 나와 마음의 빈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상자 깊숙한 곳에서 투명한 수납함 하나가 나왔다. 먼지를 털어내고 뚜껑을 열자, 대학 시절의 전공 책 몇 권과 모서리가 헤진 낡은 크로키북, 그리고 한눈에 보아도 손때가 아주 깊게 묻은 파란색 클리어 파일이 모습을 드러냈다.채원의 숨결이 짧게 멎었다. 그것은 루네(LUNE)의 최초 구상안이 담겨 있던 원본 파일이었다. 파일 첫 페이지에는 8년 전, 대학 도서관 뒤뜰의 어둑한 벤치에 앉아 그녀가 정갈한 검은색 펜으로 꾹꾹 눌러 썼던 문장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기술은 단순히 미래의 숫자를 맞히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로 하는 것
“그건 반년 전에 고쳤어.”“완전히는 아니고.”“남은 건 오래 고칠게.”채원은 물병을 받아 들고 창밖을 봤다. 웃는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했지만 유리에 비친 입술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저녁 약속 장소로 향하는 줄 알았던 차는 대학 정문 앞에 멈췄다.방학 중인 교정은 한산했다. 오래된 창업 동아리 건물은 리모델링돼 있었지만 도서관 뒤뜰로 이어지는 돌계단은 그대로였다.채원은 차에서 내리며 도현을 돌아봤다.“여기 올 거라는 말은 없었잖아.”“싫으면 저녁 먹으러 가도 돼.”“무슨 일인데?”“8년 전에 끝내지 못한 일.”도현은 앞서 가지 않았다. 채원이 계단을 오르자 나란히 걸었다.뒤뜰의 은행나무는 잎이 무성했다. 낡은 벤치 하나가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 옆에는 당시에도 있던 돌담이 이어졌다.돌담 아래에는 창업 동아리 후배들이 붙인 작은 전시 안내판이 있었다. 차도현의 초기 예측 모델과 윤채원의 시장 기획이 공동 프로젝트로 소개돼 있었다. 8년 늦게 나란히 적힌 두 이름을 채원은 한동안 바라봤다.“나는 여기서 네가 안 온다고 생각했어.”도현이 벤치 앞에 섰다.“나는 네가 먼저 떠났다고 생각했고.”“그 시간까지 없앨 수는 없겠지.”채원은 안내판에 나란히 적힌 두 이름을 손끝으로 짚었다.“없애지 마. 당신은 아르덴을 만들었고, 나는 루네를 만들었으니까. 이번에는 이름 순서도 마음에 드네.”“다음 판에는 네 이름부터 넣어 달라고 할게.”“그건 후배들이 정할 일이야.”도현이 안주머니에서 흰색 서류 봉투를 꺼냈다.채원은 그것을 보자마자 눈썹을 들었다.“설마 또 계약서야?”“이번에는 네가 먼저 고칠 수 있게 빈칸을 많
반박은 이어지지 않았다. 채원은 도현이 대신 막아 줄지 확인하지 않았다. 도현도 그녀의 답에 평가를 덧붙이지 않았다.행사가 끝나고 대기실 문이 닫히자 도현은 채원의 구두 굽이 까진 것을 발견했다. 한쪽 무릎을 굽혀 준비해 온 밴드를 내밀었다.“아까부터 아팠지.”“투자자가 대표의 발까지 살피면 이해충돌 아닌가?”“회의 끝났어.”“그래서 이제 애인 차례다?”“응.”도현이 밴드 포장을 뜯자 채원은 그의 굽힌 무릎 위에 발을 올렸다.“회의 끝났으니까 제대로 붙여요. 아까부터 아팠어.”“알아.”그가 구두 뒤축에 쓸린 자리를 밴드로 덮었다.“아까 내 답, 투자위원회에서 반대할 거야?”“필요하면 반대하지. 연인이라서 찬성하진 않을 거야.”“좋아. 그럼 나는 내 계획으로 다시 설득할게.”도현은 웃으며 밴드 끝을 눌렀다.“그게 내가 투자한 대표니까.”대기실 문이 열리고 민지가 다음 바이어가 기다린다고 알렸다. 채원은 밴드가 붙은 발로 다시 구두를 신었다. 도현이 손을 내밀었지만 채원은 그의 손목만 가볍게 짚고 일어났다.“저녁은 늦어.”“기다릴게.”“식당부터 예약하지는 마. 회의가 얼마나 걸릴지 몰라.”“끝나면 네가 정해.”복도 중앙에서 두 사람의 손이 떨어졌다. 채원은 바이어가 기다리는 왼쪽으로, 도현은 투자자 대기실이 있는 오른쪽으로 걸었다.채원이 한 번 돌아봤을 때 도현은 이미 걸음을 멈추고 자료 첫 장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도 수선 샘플을 고쳐 들고 제 갈 길로 향했다.***일주일 뒤, 채원은 자신의 집을 되사는 계약서에 서명했다.가격은 외부 감정평가사가 매긴 금액 그대로였다. 채원은 자기 통장에서 계약금을 보내고
채원이 계약 없이 도현에게 돌아간 지 6개월 뒤, 루네의 새 시즌 프레젠테이션은 한남동의 오래된 미술관에서 열렸다.반년 전 긴급 공개회에서는 작업대와 실패한 샘플을 내놓았다. 이번 무대에는 그때 선주문한 고객들이 실제로 입고 돌아온 옷도 함께 걸렸다. 소매 끝을 수선한 재킷, 단추를 바꿔 다시 입은 코트, 남은 원단으로 만든 작은 파우치가 새 컬렉션 사이에 놓였다.마지막 모델이 무대 뒤로 들어가자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채원은 검은 팬츠 슈트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지난 시즌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얼마나 팔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이 옷을 내년에도 입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어요.”화면에는 매출 그래프 대신 고객이 보낸 수선 전후 사진이 떴다.“루네는 새 옷을 더 빨리 사게 만드는 대신, 이미 산 옷을 다시 선택할 이유를 만들겠습니다. 수선에서 모인 기록은 다음 패턴에 반영하고, 회수한 원단은 소량 주문에 씁니다.”채원의 재킷 안주머니에는 지난달 첫 원금을 갚고 받은 확인서가 접혀 있었다. 무대에서 꺼낼 필요는 없었다. 오늘 보여 줄 것은 숫자가 아니라 다음 계절의 옷이었다.무대에 오르기 전 민지가 건넨 등기 봉투에는 태강 측과의 손해배상 조정 성립서가 들어 있었다.메일 무단 열람 기록과 패턴실 실장의 진술, 자문료 지급 내역이 함께 증거로 인정됐다. 법원은 브리에의 문제 제품 판매를 금지했고, 태강은 폐기 비용과 루네의 손해 일부를 배상하기로 했다.태준은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채원은 그 이름을 론칭 홍보에 쓰지 않았다.“보도 자료는 정말 안 내?”민지가 물었다.“문의가 오면 판결과 조정 내용만 답해. 새 시즌 첫 문장을 이태준 이름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아.”“배상금은 예정대로?”“야근 수당하고 협력 공장 손실분부터 지급해. 남는
도현은 한순간 굳었다. 곧 셔츠를 움켜쥔 채원의 손등을 덮고, 다른 팔로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채원아.”겨우 되찾은 이름이 입술 사이에서 뜨겁게 흩어졌다. 채원은 대답 대신 다시 키스했다. 첫 키스 때는 자신의 선택을 증명하려 했다. 지금은 그저 갖고 싶었다.도현의 입맞춤은 오래 눌러 둔 열을 감추지 못했다. 입술이 느리게 각도를 바꾸고, 손바닥이 젖은 머리카락 아래 목덜미를 받쳤다. 숨이 짧아져 채원이 고개를 돌리자 팔의 힘이 느슨해졌다.채원은 멀어진 그의 넥타이 없는 목을 끌어안아 다시 입술을 맞췄다. 그제야 도현의 손이 허리선을 깊게 감쌌다. 얇은 옷감 위로 손가락이 지나갈 때마다 뜨거운 자국이 남는 듯했다.침실 문 앞에서 도현이 입술을 떼고 이마를 맞댔다. 거칠어진 숨이 채원의 뺨을 스쳤다.“채원아, 나를 원해?”채원은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너를 원하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안 왔어.”두 번째 단추를 풀자 목선 아래의 뜨거운 체온이 손끝에 닿았다. 채원은 그의 손을 잡아 문고리 위에 올렸다.“열어, 도현아.”도현은 수건을 가져와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 주다가 채원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목덜미로 내려오자 채원은 고개를 기울이고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채원은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의 팔을 쓸고, 단정하게 버티던 어깨를 끌어안았다. 도현이 자신을 삼킬 듯 입 맞출 때마다 더 가까이 당겼다. 오랫동안 참은 남자의 다정함은 느렸고, 그 아래 감춘 욕망은 전혀 느리지 않았다.채원은 뒤로 손을 뻗어 아직 열려 있던 침실 문을 직접 닫았다. 작은 잠금 소리가 나자 도현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채원은 놀란 웃음을 그의 입술에 흘리고 두 팔로 목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