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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일세종환
간만에 강나래가 연구와 남편을 제외한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본 이세희는 흥미진진하게 암암리에 퍼져 있는 명품관의 비밀 수칙을 늘어놓았다.

강나래는 그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온통 밤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아침 갑자기 가방에서 아무런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스카프를 꺼내주던 남편의 모습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임서연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임서연 씨의 가방 말이야. 새것 같은데."

"당연하죠, 어제 산 거니까요."

이세희가 얼른 대답했다.

강나래는 이세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 교수 역시 물었다.

"그걸 세희 씨가 어떻게 알아?"

"점심에 마침 듣게 되었거든요. 김 교수님도 그 가방이 눈에 띄었는지 이미지 관리에 신경 써야 했대요. 임서연 씨는 어제 친구가 선물해 준 거라면서 선물을 해준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대답했고요."

이세희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수억 원이 넘어가는 가방이잖아요. 왜 저에겐 그런 친구가 없는 걸까요!"

강나래는 나지막이 '친구'라는 단어를 읊조렸다. 오늘 아침 심인혁 역시 그런 말을 했다.

그녀는 질문을 이었다.

"저 가방을 살 때 스카프도 실적에 포함돼?"

이세희가 말했다.

"당연하죠. 더 많은 걸 사야 하거든요. 스카프는 그저 그중 하나일 뿐. 근데 그런 스카프도 단독으로 팔기는 하죠."

강나래의 마음은 이세희의 말과 함께 오르락내리락 파동을 쳤다.

"성 교수님, 오늘 회식은 못 가겠네요.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

성 교수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며 물었다.

"큰 일이에요?"

강나래가 대답했다.

"네."

곧 하늘이 무너질 만큼.

성 교수가 그녀를 위로했다.

"그렇다면 임서연 씨에겐 내가 전달할게요. 나래 씨 오롯이 집안일에만 신경 써요. 이제 프로젝트도 막바지라 예전처럼 바쁘지도 않으니 매일 연구소에 나오지 않아도 돼요. 중요한 일이 생기면 연락할 테니까."

"그래요."

강나래는 마스크를 낀 뒤 홀로 연구소를 떠났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택시를 타고 성우테크로 향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심인혁과 마주쳤다.

하지만 심인혁은 강나래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마스크 때문일 지도 몰랐다. 어쩌면 마침 퇴근 시간대라 사람이 많은 데다가 심인혁이 통화를 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무려 4년을 함께 산 부부였는데...

심인혁이 강나래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강나래는 뒤돌아 그를 쫓아갔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자 통화 내용이 들렸다.

"회식이라고? 그럼 데리러 가지 않아도 돼?"

심인혁은 걸음을 멈췄다.

강나래 역시 따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회식 끝나면 문자 보내. 데리러 갈게."

뒤돌아선 심인혁은 다시 한번 강나래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거의 엘리베이터에 도착할 즈음, 심인혁이 걸음을 멈추었다. 불현듯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뭘 찾으십니까?"

비서가 물었다.

심인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잘못 본 듯했다. 지금쯤 강나래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을 테니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오늘은 집에서 밥을 먹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강나래에게 문자를 보내 그의 몫의 저녁은 만들지 말라 얘기해 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띵동.

문자를 받은 강나래는 짧디짧은 한 줄의 문자를 읽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강나래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심인혁이 다시 회사를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강나래는 길 건너편에서 회전문을 밀고 나오는 임서연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남편의 팔짱을 끼더니 웃고 대화하며 차에 올랐다.

남편은 다른 여자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고 상대방이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다. 행동은 그토록 조심스러웠고 눈빛은 그토록 다정하고 사랑이 넘쳤다.

강나래에게도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랑으로 끓어 넘치는 그 눈빛만큼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 눈빛은 마치 녹아버린 솜사탕처럼 여자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차는 강나래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차에 앉아 있던 심인혁은 다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임서연이 물었다.

"인혁아, 뭐 봐?"

"아무것도 아니야."

심인혁은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몇 번씩이나 강나래의 허상을 볼 리가 없을 테니까.

강나래 혼자 밥은 잘 챙겨 먹었을까. 남자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길가에 서 있던 강나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가방에서 백만 원짜리 스카프를 꺼냈다.

결혼 생활 동안, 이건 심인혁이 주었던 선물 중 가장 값비싼 것이었다.

하지만 실적 채우기용이라니.

임서연에게 몇억짜리 명품 가방을 위해 끼워 산 수많은 실적템 중 하나였을 뿐이다.

강나래는 스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스카프 너머로 손바닥을 아프게 찔렀다. 손바닥이 아프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았다.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전화벨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시동생 심희연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오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언니, 엉엉엉엉엉..."

심씨 가문의 사람들은 고아인 강나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특히 심인혁이 사업적으로 성공을 이루어낸 뒤에는 더 심했다. 심인혁이 강나래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시동생인 심희연은 호칭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불러대며 이리저리 부려 먹었다.

사고를 치고 감히 오빠에게 말 못 할 때가 되어야만 억지로 새언니라 부르곤 했다.

"또 무슨 일인가요?"

강나래는 덤덤하게 물었다.

심희연은 교통사고를 냈고 상대방은 그녀에게 수술비와 배상금을 요구했다. 심희연 역시 다쳐서 병상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심희연은 절대 가족에겐 알리면 안 된다 신신당부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강나래는 얼른 병원으로 달려갔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예요! 아파 죽을 뻔했는데 꼭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말이야."

도와주려고 달려왔지만 벼락같이 원망이 쏟아졌다. 순간 감정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던 강나래는 어두운 눈빛으로 시누이를 쳐다보았다.

심희연은 움찔 놀라고 말았다.

시댁의 말이라면 거스르는 법이 없던 강나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감히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다니.

"지금 노려보는 거예요? 오빠에게 언니가 나 괴롭혔다고 말할까요?"

자신의 뒤엔 오빠가 있다는 생각에 심희연은 다시 의기양양해졌다.

강나래가 오빠를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강나래는 오빠를 위해서라면 못 하는 일이 없었고 모든 것을 인내했다.

"오빠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게 싫다면..."

심희연은 두 눈을 깜빡이더니 갑자기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언니, 배고파 죽겠어요. 무늬바리 죽 먹고 싶은데. 사다 주면 안 돼요?"

한 그릇에 50만 원씩 하는 죽이었다. 게다가 사전 예약은 필수다.

지금까지는 심희연을 위해 돈을 썼지만 이번엔 그러기 싫었다.

그 동안 심인혁을 위해 아껴 쓰며 모아온 돈은 결국 임서연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녀의 마음이 다시 차갑게 식어버렸다.

"오빠에게 일러도 돼요."

강나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뒤돌아 병실을 떠났다. 강나래는 간호사에게 부탁해 이 사실을 심인혁에게 전했다.

피해자의 가족들도 난리를 피워대고 있었다. 예전의 강나래였다면 당장 달려가 피해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사태를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방관자처럼 냉랭하게 지켜만 볼 뿐이었다. 그 상황은 시부모님이 달려올 때까지 이어졌다.

피해자 가족들은 그들이 가해자의 부모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얼른 달려들어 배상금과 사과를 요구했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심인혁의 부모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에 질색했다. 딸을 찾기에 급급했던 그들은 발뒤꿈치를 들어가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며느리인 강나래를 발견한 두 사람은 먼저 그녀를 노려보고는 피해자 가족들을 강나래가 있는 쪽으로 보내버릴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의도를 눈치챈 강나래는 그제야 인파를 비집고 들어갔다.

"어머님, 아버님.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안내할게요."

그리고 뒤돌아 피해자 가족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심희연 씨의 오빠는 성우테크의 심인혁 대표입니다. 대외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이니 절대로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책임져야 할 건 책임질 거예요."

강나래가 성근하게 얘기하자 그제야 상대방의 화가 누그러졌다.

피해자의 오빠가 중요한 얘기를 끄집어냈다.

"성우테크라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곳으로 찾아가 난동을 부릴 거야!"

시부모는 강나래가 아들의 회사와 직책을 말해버린 것에 몹시 큰 불만을 가지고 강나래가 입을 열자마자 제지하려 했다. 저 촌뜨기들이 아들을 찾아가 귀찮게 굴겠다는 말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강나래를 노려보았다.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이 떠난 뒤 심인혁의 아버지인 심현수가 쌀쌀맞게 말했다.

"그렇게 말을 잘하는 줄은 몰랐는데?"

심인혁의 어머니인 김인숙은 숄을 고쳐 쓰며 강나래를 나무랐다.

"강나래, 너 참 잘하는 짓이다. 돈을 벌어오지도 못하면서 아이도 낳지 못하고. 그 주제에 시누이까지 제대로 돌보지 못하다니. 그 아이의 얼굴이 망가지거나 다리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말이야? 결혼은 또 어떻게 하고? 게다가 네 남편까지 이 일에 끌어들이다니. 네가 그러고도 인혁이 안사람이니? 아둔하고 악독한 것!"

"악독이요?"

심인혁과 결혼한 뒤 심희연을 돌보는 건 자연스럽게 강나래의 몫이 되었다. 심희연이 조금이라도 다치는 날엔 시부모에게 된통 혼이 났다.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4년 동안 열심히 헌신했지만 돌아오는 건 존중이 아닌 폭언이었다.

강나래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저 냉소만 나올 뿐이었다.

"심희연은 어머님, 아버님과 심인혁이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동안 온갖 책망도 순순히 받아들이던 강나래가 갑자기 말대꾸를 하자 심인혁의 부모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곧 더욱 커다란 분노가 그들을 휘감았다.

감히 웃어른에게 대들다니!

"내 아들과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면 우리 집안일을 네 일처럼 생각해야 할 거야!"

심현수가 그녀에게 호통을 쳤다.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야! 당장 저 사람들에게 배상금을 주지 않고. 일이 커진다면 인혁이의 앞길을 망칠 거야!"

"돈 없어요."

강나래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돈이 없다고?"

그 말에 김인숙은 화가 치밀었다.

"우리 아들의 그 숱한 자산이 전부 너에게 있는데 감히 돈이 없단 소리를 해?"

아들은 사업에 성공한 뒤 그들에게 집을 사주고 도우미를 붙여주었다. 그 뒤로 그들은 온통 세계 여행을 다닐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아들에게 돈을 달라고 할 때마다 아들은 돈이 없으니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돈이 다 어디로 갔느냐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하여 두 사람은 분명 강나래가 돈을 움켜쥐고 내주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그동안 아들은 얼마나 빠듯하게 살아왔던가?

그럴싸한 옷도 얼마 없으니 실로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돈이 저에게 있다고 그이가 그러던가요?"

강나래의 마음은 더없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이가 매달 저에게 주는 돈은 70만 원밖에 안 돼요. 믿지 못하겠다면 기록을 보여줄 수도 있어요."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거야. 네가 사진을 조작한 건지 누가 알겠어."

김인숙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심현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강나래를 훑어보았다.

"설마 인혁이의 돈으로 주식을 하다가 다 날린 건 아니겠지?"

강나래는 화가 난 나머지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전 돈 없어요. 인혁 씨의 돈도 가지고 있지 않고요."

말을 마친 강나래가 그곳을 떠나려던 그때, 고개를 돌리자마자 심인혁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임서연과 함께였다.

놀라 멈칫하던 강나래와 심인혁의 시선이 마주쳤다.

심인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곧 그들에게 다가온 그는 여기 모여서 뭘 하느냐며 쌀쌀맞게 물었다.

한눈에 임서연을 알아본 김인숙은 사납기 그지없던 표정을 순식간에 갈무리한 뒤 자애롭고 다정한 모습으로 임서연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안부를 물었다.

"서연아, 너무 오랜만이네. 외국에서 잘 지냈어?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았던 거야? 봐봐, 너무 말랐잖아. 하지만 여전히 너무 예쁘네."

"아줌마, 여전히 젊고 활력이 넘치시네요. 피부도 아주 탱탱하세요."

칭찬을 마친 임서연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희연이가 사고를 당했다는 말에 급히 달려오느라 선물을 챙겨오지 못했어요. 다음에 다시 집으로 찾아가 두 분을 봬도 될까요?"

"당연히 되지!"

김인숙이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미소를 지은 임서연은 갑자기 그들에게 다가왔다.

"인혁아, 이분이 누군지 소개해 주지 않을 거야?"

심인혁은 다정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서연아, 이 사람은 나의... 아내인 강나래야. 이쪽은 내 대학 동기 임서연이야. 서연 씨라 부르면 돼. 능력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지."

"부인 성함도 강나래 씨야?"

임서연은 붉은 입술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여자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미처 숨기지 못한 가소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연치곤 신기하네요. 제가 담당하는 팀에도 강나래라는 분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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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늦은 후회   제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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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임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너 취했었어. 나에겐 널 밀쳐낼 힘도 없었고." 침대에서 내려온 심인혁은 마른세수를 했다. 마치 지금 상황이 곤란한 사람처럼 말이다. 심인혁과 임서연은 그와 강나래의 침대에서 몸을 섞었다. "씻고 올게."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임서연은 이미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 키스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다. 임서연은 그를 쳐다보며 볼을 붉혔다. "인혁아, 너 어젯밤에 너무... 마치 오랫동안 하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어." 말을 마친 임서연은 다가와 그를 안았다. 심인혁은 고개를 숙이고 임서연을 쳐다보았다. 수많은 나날동안 그리워했던 여자였다. 그는 그녀를 가볍게 품에 안았다. "나래와는 잠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어." "알아." 임서연은 심인혁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인혁아, 네 마음속엔 항상 내가 있다는 사실 알고 있었어. 내 마음속에도 온통 너뿐이야." 임서연은 고개를 들어 심인혁의 입술에 입 맞췄다. 심인혁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곧 뭔가 떠오른 듯이 미소는 다시 사라져 버렸다. "어젯밤 나래가 집으로 왔었어?" 임서연은 그 이름을 듣기가 싫었다. 그녀는 심인혁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심인혁이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어. 뭐 하러 갔는지 누가 알겠어." 심인혁은 갑자기 임서연의 손을 풀더니 거실로 가 휴대폰을 찾았다. 문자도 전화도 와 있지 않았다. 하. 잘하는 짓이야. 그는 화가 난 나머지 휴대폰을 쥔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인혁아, 나래 씨를 걱정하는 거야?" "걱정하냐고?" 심인혁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딜 가든 마음대로 하라지. 광명시에는 딱히 나래가 갈 데도 없어. 보육원 아니면 오연홍에게 찾아갔을 거야." "인혁아, 너 나래 씨를 좋아하게 된 거야?" 그에게 다가간 임서연의 표정은 무척 서글펐다. 순간 멈칫하던 심인혁이 대답했다. "허튼 생각 하지 마. 그저 내

  • 너무 늦은 후회   제26화

    자기 위해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웠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임서연은 심인혁을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 강나래와 심인혁의 집? 아니면 임서연이 묵고 있는 곳? 임서연 역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마 출퇴근 시간에 편하게 임서연을 데려다주기 위한 심인혁의 뜻이었을 것이다. 다정하게 대하는 심인혁의 태도가 바로 사랑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심인혁은 임서연에게 다정함은 물론 돈도 주었고 그녀를 지지해 주었으며 지켜 주었다. 임서연에게는 숱한 것들을 주었다... 아내인 강나래는 영영 가져보지 못했던 것들을 말이다. 강나래는 명분을 얻기는 했다. 하지만 오늘 밤 술자리에서 심인혁은 결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것 때문에 강나래에게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까지 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속인 걸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던 강나래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감정을 억눌렀다. 어차피 이혼 협의서에 사인을 마쳤다. 이제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기다리면 이혼 접수가 완료될 것이다. 이 늪을 벗어나기만 하면 괜찮아질 것이다. … 임서연은 심인혁을 데리고 그녀의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곳에서는 무엇을 하든 편할 테니까. 갑작스럽게 돌아온 강나래의 방해를 받을 일도 없었다. 임서연이 심인혁을 데리고 차에서 내린 뒤, 심인혁은 곧바로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아무리 소리를 쳐도 소용이 없었다. "인혁아, 이쪽이야." 심인혁은 휘청거리며 끝내 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임서연은 알고 있었다. 심인혁이 강나래와 살고 있는 그 집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마치 임서연을 안고 여보를 외치던 것처럼 말이다. 임서연은 그 사실이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술에 취한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심인혁과 강나래의 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심인혁을 소파에 눕히자마자 심인혁이 임서연의 손목을 잡았다. "서연아." "임서연." 이번에는 그녀의 이름을

  • 너무 늦은 후회   제25화

    "호텔에서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었어요. 제가 층수를 누르는 걸 깜빡해서 대표님께서 귀띔해 주셨고요." 사실 강나래는 이 일을 잊고 있었다. 하준혁이 귀띔하고 나서야 생각이 났던 것이다. 하지현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언니였군요! 우 매니저가 말한 사람이 바로 언니였어요! 예쁜 언니, 우리 오빠, 우리 오빠가... 세상에! 우리 오빠가 드디어 눈을 떴군요!" "뭐라고요?" 강나래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현은 고개를 힘껏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날 언니가 묵었던 호텔이 우리 가문 소유예요. 오빠가 특별히 호텔 매니저에게 언니를 잘 보살펴주라고 당부한 다음에..." 그리고 우 매니저는 당장 그 사실을 두 사람의 부모님에게 알렸다. 오빠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은지 꽤 오래 되었고 결혼을 재촉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던 오빠가 갑자기 웬 여자를 걱정하고 있으니 누구라도 호기심이 동했을 것이다. 강나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날 낯선 이로부터 받았던 호의가 하준혁이 베푼 것이었다니. 강나래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우리 오빠는요, 그러니까..." '됐다, 꾸며내지도 못하겠네.' 하지현은 변명을 포기했다. 하지현은 깨끗한 수건과 칫솔을 가져다주며 유쾌하게 말했다. "예쁜 언니, 일찍 자요~" 하지현은 문을 닫자마자 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이렇게 좋은 기회에 왜 언니를 우리 집으로 보낸 거야? 두 사람 다 성인이잖아. 성인 둘이 서로 가까이 지내다 보면 사랑이 얼마나 활활 타오르는데. 도대체 알기는 아는 거야?] 하준혁이 답장을 보냈다. [너희 집으로 보내지 않으면. 내일 강나래 씨는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하지현이 말했다. "음? 언니의 부모님은 엄한 분이시구나?" 타자를 하려던 그때 하준혁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어린애는 쓸데없는 신경 쓰지 마라. 네가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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