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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듣는 일은 견디는 일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6 10:23:35

하루의 온기가 조용히 사라지고,

햇빛이 남긴 빛무리조차 도시에서 밀려나던 붉고 긴 해거름의 시간이었다.

유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걷는다는 행위가 마치 마음속 결정을 한 겹씩 정리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목을 감싼 스카프를 손끝으로 잡아당기며 고요하게 몰려오는 떨림을 다독였다.

주머니 속엔 녹음기와 작은 메모지. 그곳엔 질문이 아니라, 이름만 적혀 있었다.

윤선영. 오늘은 묻지 않는 날이 아니라, 그저 듣는 날이다.

햇살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도시의 표정이 점점 낯빛을 잃어가는 붉고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약속된 장소는 오래된 카페의 뒷자리였다.

마주 앉은 남자는 어제와 같은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유리잔이 들려 있었지만, 입을 대는 일 없이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유리는 그를 마주보며 앉았다.

눈빛에는 경계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오래전 무언가를 다시 꺼내려는 사람의 고요하고 조심스러운 침묵만이 앉아 있었다.

“그날 병원에서, 나는 그녀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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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위험한 여자   131. 누구의 것도 되지 않은 채 오래 머무는 일

    유리는 그 찻잔을 들었다. 온기 있는 물컵 하나가사람을 이렇게까지 버티게 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조금은 늦게 하지만 분명하게 그걸 배우고 있었다.저녁. 가게 불은 켜지지 않았다.이미 어둠은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지만 둘은 굳이 전등을 밝히지 않았다.밖보다 어두운 실내, 그 안에 놓인 두 사람의 그림자.유리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그 손끝은 이우의 손등을 천천히 감싸며 가볍게, 그러나 단단히 그의 손 안으로 닿아들었다.그 접촉은 언제나처럼 작고 조용했지만, 둘 사이에서만큼은 세상의 모든 소음보다 더 큰 울림이었다.그들은 끝내 사랑을 말하지 않았고, 끝내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끝내 과거를 정리하려 들지 않았다.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오직 지금 서로가 사람으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 그것만이 전부였다.밤이 깊었다. 가게 안에는 숨소리와 찻잔에 남은 온기만이 떠돌고 있었다.유리는 마지막으로 일지를 펼치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빛도, 소리도 이젠 그들에게 의미 있는 게 아니었다.남은 건 몸의 무게, 숨의 리듬,그리고 서로의 손 안에 남은 감촉이었다.그녀는 조용히 속으로 한 문장을 떠올렸다.‘끝까지 사람으로 남는다는 건, 이렇게 조용히 누구의 것도 되지 않은 채 한 사람 옆에 오래 머무는 일일지도 몰라.’그 문장은 종이에 쓰이지 않았고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지만그날 밤 그 문장은 둘 사이에 말 없이 남아 있었다.늦은 아침이었다. 눈을 뜨고서도 한참을 더 누워 있어야비로소 하루가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은 날.하늘은 구름으로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햇살은 그 틈새를 찾지 못한 채 마치 세상의 외곽을 맴도는 듯한 기척만 남겼다.유리는 커튼을 걷지 않은 채 주방으로 향했다.말을 꺼내기엔 너무 부드럽고,소리를 내기엔 너무 얇은 공기 속에서 그녀는 조용히 물을 끓였고, 그 조용함은 물이 끓는 소리마저 작게 움츠러들게 했다.그날의 그

  • 너무 위험한 여자   130. 끝까지 사람으로 남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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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위험한 여자   127. 길어졌지만 흔들리지 않아요

    이우는 커피 머신 앞에서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분주함 없이, 느릿하게, 물의 온도를 확인하고찻잎이 풀어지는 속도를 기다리며 오늘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그의 시간은 늘 일정했고, 그 일정함 속에서 그는 말보다 더 강하게 하루를 지탱했다.사람들이 남긴 소문과 멀지 않은 과거의 잔재들이 아직 이 작은 골목 끝에 머물고 있다는 걸그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밀어내지 않았다.그냥, 시간이 흘러가도록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을 더 얇게, 더 조용하게 스며들게 했다.그렇게 이제 그들은 사람들 틈에서 말 없는 사람으로 흘러가고 있었다.정오 시간, 오랜만에 가게에는 몇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낯익은 얼굴들이었지만 그들의 대화 속에는 더 이상 호기심도, 노골적인 경계도 남지 않았다.남아 있는 건 그들이 던지는 무색무취의 일상적인 질문들뿐이었다.“이 커피는 어디 원두인가요?”“책 추천 좀 해주실래요?”그런 질문들이 둘에겐 가장 편안하고 가장 무해한 대화였다.그들은 그런 대화 속에서 더 깊게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고 있었다.유리는 차를 내려주며 짧게 대답했다.“여기선 시간이 천천히 흐르니까 따뜻하게 천천히 드셔보세요.”그 말에 사람들은 아무 대답 없이 조용히 웃었다.그 미소는 그들이 그들에게 더 이상조유진의 동생, 복수의 주인공으로 기억되지 않고 있음을 조용히 알려주는 신호였다.오후 시간. 해는 느리게 기울고 거리의 빛은 하루의 끝을 준비하고 있었다.둘은 말 없이 찻잔을 닦고 책장을 정리하며 흘러가는 시간을 그저 같이 걷고 있었다.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로를 향해 확신 없는 말들을 쏟아내지 않아도충분히 서로의 마음 안에 서로를 담을 수 있다는 걸 그들은 이제 알고 있었다.저녁 무렵. 이우가 가게의 작은 전구를 교체하며 말했다.“이렇게… 하루가 아무 일도 없이 끝나는 게 이젠 더 어렵게 느껴져요.”유리는 웃었다.“어렵고 좋은 일이죠.”그 웃음 안에는 이전의 그들에겐 없던 가벼움이 담겨 있었다.무겁지 않은 웃음. 계산 없는 미소

  • 너무 위험한 여자   126. 불편한 세상 속에서도 편안하게

    아침이 천천히 스며들었다.하늘은 흐릿했고, 바람은 건조했다.구름의 경계는 불분명했고, 하늘과 땅 사이의 색조차어디쯤에서 흐려졌는지 모를 만큼 무채색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유리는 창가에 앉아 커튼을 걷지도 않은 채 가게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사람들은 무심하게 자신의 하루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조금 더 무겁고, 조금 더 불편한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그녀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이젠 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설명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고스스로에게 수없이 반복해서 들려주었으니까.가게 안에는 이우가 조용히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책의 먼지를 털어내고, 찻잔을 닦고,주방의 물기를 닦아내는 일상이 그의 몸에는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고,그 작은 루틴 안에서 그는 세상과 거리를 두는 법을 익숙하게 배워왔다.그들의 공간은 이름도 없고, 간판도 없고,누구의 것도 아닌 그냥 그들만의 시간과 리듬으로 느리게 살아가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사람들이 뭐라 부르든 그건 상관없었다.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기억하든 그것 역시 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정오 무렵. 동네 주민 몇몇이 가게에 들어섰다.그들의 얼굴에는 미소와 불편함이 섞여 있었고, 그 섞임 속에 익숙한 조심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그… 오늘도 책 읽으러 온 거예요.”그 말에 유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우는 찻잔을 내오며 짧게 웃었다.“환영합니다.”그 말은 의미 없는 환대가 아니었다.그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불편함조차자신들의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법을 배워가는 사람들이었다.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다는 걸그들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그 시선을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온도를흔들리지 않게 유지하는 법을 조용히 익히고 있었다.오후 시간. 사람들이 떠나고 가게는 다시 조용해졌다.유리는 책상에 앉아 따뜻한 물을 마시며 오늘 하루를 복기하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멍하니 창가 너머 텅 빈 거리로 향해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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