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바람이 잦아든 오후, 묘하게 가라앉은 도시의 숨결이 창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한낮의 볕이 살짝 비껴간 자리에 놓인 커튼이, 말없이 흔들렸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고, 누군가의 기척조차 사라진 지 오래인 방 안에는,
적막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온기를 머금은 채 퍼져 있었다.
유리는 손끝으로 찻잔을 굴리며 앉아 있었다.
비워지지 않은 차,
늦겨울의 아침은 여느 계절보다 조용하고,그 고요함은 무언가를 숨기기엔 오히려 더 적막했다.해는 아직 창문을 넘지 않았고,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세상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유리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밤새 덮어두었던 사건 파일을 다시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종이 위를 천천히 훑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눈동자는 어딘가 멀리 닿아 있었다.그 눈빛은 잊힌 이름들을, 버려진 시간들을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유진의 마지막 통화 기록. 그 페이지를 다시 들여다보며,유리는 숫자 하나, 초 하나까지 마치 생명의 리듬처럼 새겨 넣듯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무심히 넘겼던 다음 장. 한쪽 귀퉁이에 작게 메모된 통화 연결 지연 시간.
새벽이었다. 밤과 아침의 경계에서 잠시 머무는 그 짧은 틈.세상은 여전히 조용했고, 창문 너머의 어둠은 채 가시지 않은 채 조용히 유리의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불은 켜지지 않았다. 유리는 침대 머리맡에 앉은 채,두 무릎 위에 손을 모은 채로 긴 시간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어젯밤의 메일. 그리고 ‘강도훈’이라는 이름.그 이름 하나가 유리의 가슴 안에 다시 오래전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마지막 전화.”그 단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조유진이 사라지기 직전,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하지만, 그 통화를 ‘강도훈’이 끝냈다는 말은
늦은 오후의 빛이 유리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가늘고 긴 햇살이 커튼 사이를 스며들 듯 방 안을 적셨고,그 빛은 마치 손끝으로 닿을 수 있는 온기처럼 책상 위를 스치고, 바닥에 낮게 내려앉았다.유리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말없이 커피잔을 바라보며,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그 잔 안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조용히 마주하고 있었다.오전부터 이어진 상담 일정을 끝내고 이제 막 자신만의 호흡을 되찾은 순간이었다.그러나 그 조용함은 오래가지 않았다.노트북 화면에 떠오른 익숙한 이름 하나.‘강도훈.’그 이름은 이전에도, 그리고 그날 이후에도계속해서 유리의 기억 속 어딘가를 맴돌고 있었다.
한낮의 열기가 잦아들고, 햇살이 서서히 창 너머의 커튼을 밀어내며 하루의 그림자를 조용히 그려넣는 시간.도시는 분주했지만, 그 분주함조차 유리와 이우가 머문 공간 안에서는 거짓말처럼 조용히 멈춰 있었다.심리상담센터 안, 두 사람은 창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말없이, 그저 같이 숨을 쉬며 긴 호흡으로 하루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테이블 위엔 식지 않은 커피 두 잔과 유리의 손길이 자주 닿은 노트북 한 대,그리고 작은 노트가 놓여 있었다.무언가를 정리하려던 흔적들이 그녀의 손끝을 타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가끔은요,”유리가 입을 열었다.
새벽으로 넘어가는 도시의 숨결은 느리고 조용했다.가끔 스치는 바람이 가로수 가지를 흔들며 잎을 떨구었고,그 잎이 땅에 닿는 소리마저도 누군가의 한숨처럼 느껴지는 고요한 거리.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기 속을 유리는 이우와 함께 천천히 걷고 있었다.긴 말을 하지 않았다. 말보다 감정이 먼저였고, 감정보다 앞선 건 눈빛이었다.그녀의 걸음은 조금 느렸고, 그 느림은 결코 불안도, 두려움도 아닌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의 호흡처럼 묵직하고 조심스러웠다.이우는 그녀의 옆에서 말없이 걷고 있었다.그는 자주 그런 방식으로 그녀를 이해했다.말을 묻지 않고, 대신 호흡을 맞추는 방식.
늦은 밤의 공기는 말수가 적었다.차가운 바람이 지하철 출입구 근처를 스치고 지나갈 때,사람들의 걸음은 바쁘지만 서로를 보지 않았고, 모두가 무언가를 향해 걷고 있었지만정작 어디로 가는지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 시간.유리는 그 한복판에 조용히 서 있었다.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고, 긴 코트 자락이 허공을 가르듯 미세하게 펄럭였다.손은 두 주머니 안에 감춰져 있었고,가슴 깊은 곳에서 느릿하게 올라오는 긴장이 목구멍 아래 어디쯤을 조용히 조이고 있었다.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낯익지 않은 얼굴, 그러나 사진으로만 보아온 실루엣.강도훈은 짧은 눈인사를 건넨 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근처의 작은 공원이었을까.가로등이 간헐적으로 불을 비추는 벤치에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사람의 그림자가 적은 그 공간에, 두 인물의 기척만이 조용히 눌어붙어 있었다.“당신이 왜 날 찾아왔는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습니다.”강도훈의 첫 마디는 피하지도, 그렇다고 맞서지도 않는 묘한 중립의 톤이었다. 무책임할 수도 있고, 혹은 책임을 감당할 각오일 수도 있는 애매한 거리.“유진 언니와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사람이 당신이었다는 것, 알고 있어요.”유리의 말은 담담했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침잠한 울림이 있었다.그 울림은 한때 언니를 사랑했을지도 모를 이 남자를 조용히 베어내는 날 선 물결 같았다.강도훈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그리고 천천히 고백처럼 말하기 시작했다.“그날… 난 그녀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하지만, 그 무너짐의 원인이 내가 될 줄은… 몰랐어요.”그 말의 끝에는 자신조차 끝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감돌고 있었다.“그녀가… 임신한 걸 알게 됐을 때,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그녀는 말하지 않았고, 난… 묻지 않았어요.”유리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그녀의 눈동자는 어두운 밤 안에서도 또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왜요. 그렇게 사랑했다면, 왜 묻지 않았죠?”“그게,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