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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랑이 죄가 될 때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6 07:45:50

이현이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유리는 문득 생각했다.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건 죄일까, 구원일까.

침대 맡에는 여전히 유진의 폰이 놓여 있었다.

화면 속 ‘유리에게’라는 제목의 음성 파일은

재생 버튼을 누르라는 듯, 조용히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그러다 멈췄다.

이현의 팔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자기 뜻과는 다르게, 그는 늘 그녀를 보호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 팔을 느끼며 유리는 자신을 미워했다.

이 팔이 죄를 감추는 무기인지, 아니면 진심인지를 구별할 수 없다는 걸

지금 가장 괴로운 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 아침, 이현이 눈을 뜨자 유리는 식탁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눈빛은 고요했고, 입술은 평소보다 단정히 닫혀 있었다.

“유리 씨.”

그가 다가와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왜 이렇게 말이 없으세요?”

유리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지금 말하면 감정이 샐까 봐요.”

“감정이요?”

“그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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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각, 서인국의 사무실.“정민철을 보호하고 있다.”“서이우가 직접 진술을 검찰에 냈다.”이야기들은 빠르게 회장 귀에 들어왔다.“이우를 막아야 합니다.”“가문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그러나 서인국은 아무 말 없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들춰보았다.그 안에는 '조유진 사망 당시 병원 진료 기록''조유리 상담센터 운영 정보'그리고 '서이우 사적 동선 분석 자료'가 함께 있었다.“제일 무서운 건…”그가 낮게 말했다.“사랑 같은 착각이다.”그는 조용히 펜을 내려놓았다.“서이우를 치는 게 빠를지도 모르지.”그날 밤, 이우는 유리의 방 창문 앞에 서 있었다.유리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다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당신이 나를 지켜주는 게 무서울 때가 있어요.”“왜요.”“내가 그만큼의 사람이 아닐까봐.”이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말했다.“난 당신이 누굴 지키고 있는지도 알아요.”“조유진. 그 이름 하나를 안고, 당신은 지금까지 견디고 있었죠.”“그래서…”“이젠 나도, 당신 이름 하나를 안고 살아보려고요.”유리는 눈을 감았다. 이번엔 눈물이 났다. 어떤 고백도 없이,그냥 그렇게 그녀의 이름이 누군가에게 닿고 있었다.이우에게 날아든 첫 번째 칼날은, 이사회 통보였다.이사직 박탈안. 비공식 의결, 비공식 회의.형식은 없지만 힘은 있는, 그 집안 특유의 방식이었다.이우는 이사실 앞에서 가만히 섰다.손에 쥔 것은 단 한 장의 문서.그 안에는 정민철의 진술 요약,그리고 서인국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이걸 들고 들어가면 가문은 그를 내칠 것이다.하지만,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해요.”유리는 창가에 서서 이우를 바라보며 말했다.“가문이 당신을 밀어내려고 한다는 거, 왜 나한테 숨겨요.”이우는 말없이 웃었다. 지쳐 있는 웃음이었지만, 어딘가 따뜻한 미소였다.“숨긴 게 아니에요. 그냥… 아직까지, 당신 걱정이 먼저였던 거죠.”유리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당신은 내 걱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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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오기 전의 공기였다. 습한 냄새가 코끝을 감싸고,늦은 오후의 도시 위로 낮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이우는 차 안에서 한 장의 메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김태영이 남기고 간, 정민철이라는 이름. 병원장 비서였던 자.그날 폐쇄병동의 출입자 명단에 남아 있던,그러나 입을 다물었던 또 한 명의 증인.‘다음은 이 사람입니다.’유리의 말은 차갑지도, 강요적이지도 않았지만그 안엔 명확한 힘이 있었다.자기 손으로 언니의 복수를 쌓아올리겠다는 조용하지만 흔들림 없는 다짐.그 다짐을 듣는 그의 마음은 늘 복잡했다.“도착했어요.”유리가 조수석에서 말했다.오늘은 조금 화사한 셔츠,단정한 머리,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말투.이우는 대답 대신 시동을 껐다.“정민철은 여기 요양병원 행정실 쪽에 남아 있어요.”“접촉은 제가 먼저 할게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었다.비가 오기 직전, 바람이 유리의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그 순간 이우의 눈이 유리의 옆얼굴을 잠시, 깊이 응시했다.약 30분 후. 그녀는 돌아왔고, 손에는 짧은 대화와 짧은 메모가 담긴 수첩이 있었다.“입을 열 준비는 되어 있진 않아요.”“하지만... 언니가 죽던 날, 병실 안에서 무언가를 봤다고 했어요.”이우는 수첩을 받아들고 넘겼다.글씨는 흔들려 있었고, 말도 끊겨 있었다.‘그녀는 눈을 떴고, 울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죄는 침묵에서 시작된다.’그 글을 읽는 그의 손끝에 기묘한 미열이 올라왔다.‘죄는 침묵에서 시작된다.’그날 밤, 상담센터 옥상.비가 드디어 내리고 있었다.유리는 우산도 없이 서 있었고, 이우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다가갔다.“왜 여기 있어요.”“숨 좀 쉬고 싶어서요.”“비를 맞으면서 숨 쉬고 싶을 만큼, 오늘이 버거웠습니까?”“아니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미소 지었다.“당신이 보고 싶어서요.”그 한 마디에, 이우는 말이 막혔다.유리는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예전처럼 서늘한 분석가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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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영은 정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자려고 누우면, 어떤 말이 계속 들리는 것 같아요. 내가 했던 말인데… 이상하게, 남의 입으로 되풀이되더라고요.”“기억은 음성이 남는 방식으로 가장 오래 지속된다고 해요.”유리는 조용히 메모를 하며 말했다.“그게 자책이든, 망설임이든. 결국은 자신이 가장 지우고 싶은 한 문장이 오래 남죠.”“저는…”그가 입을 열었다.“그 말을 너무 쉽게 했던 것 같아요.”유리는 멈칫했다. 태영의 말은 짧았지만, 진심이었다.“알겠습니다. 그 말이요.”“그 말 때문에 누군가가 죽었다고 느끼세요?”“……네.”대답은 너무도 빠르고, 낮았다.유리는 펜을 놓고,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지금이라도, 말할 수 있다면요. 그때와는 다른 문장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땐, 어딘가 울컥한 표정이었다.“…그 사람은 정말, 죽지 않아도 됐던 사람이에요.”상담실 문이 닫히고, 유리는 창밖을 바라봤다.점점 짙어지는 오후의 그림자 속에 아까 김태영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죽지 않아도 됐던 사람.”그 한 문장이, 조유진이라는 이름을 이 세상에 다시 한 번 떠오르게 만들었다.그건 고백이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만이 할 수 있는.한밤중. 이우와 유리는 상담소 뒤쪽 작은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불을 끄고, 허공을 바라보는 둘 사이엔 말이 없었다.하지만 침묵은 익숙한 약속처럼 느껴졌다.“그 사람, 무너졌어요.”유리가 말했다.“한 문장으로.”“무너뜨린 겁니다.”이우가 조용히 말했다.“그 문장을, 그가 스스로 꺼내게 만든 건 당신이에요.”유리는 잠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밤공기가 선선했고, 서로의 얼굴을 밝히는 건 달빛뿐이었다.“오늘 같은 날엔요.”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당신이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대신, 그녀의 손등 위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가볍게 겹쳐진 두 손. 마치 복수도, 기억도, 고통도 이 순간만큼은 잠시 멈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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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을 켜지 않은 방. 잿빛 밤의 기운이 창문을 타고 들이쳤다.세상은 조용했고, 유리는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책상 위, USB 하나. 장상우가 건넨 조각.가볍고 차가운 금속에 불안이 내려앉아 있었다.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숨을 고르고 그것을 꽂았다.‘VOICE_1007’그 이름조차 의도적인 듯 단순했다.재생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아주 살짝 떨렸다.[녹음 시작][남자 1 – 서인국]“정리하세요.”[남자 2 – 김태영]“언론은 어떻게”[서인국]“우리 이름은 절대 언급되지 않아야 해.가족 접촉은 없었던 걸로 처리하고, 기록도 남기지 마.”유리는 숨을 들이마셨다.심장이, 아주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정리하세요.’그 말이 귓속을 때렸다.그는 사람을 없애는 일을 사람을 치우듯 말하고 있었다.그 사람이 언니였다.‘유진 언니.’유리는 손끝으로 노트북 가장자리를 꼭 쥐었다.손바닥이 저릿하게 저려왔다.문이 조용히 열렸다. 이우였다.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온 그는 한동안 유리 옆에 서서 화면을 바라보았다.“들었어요.”유리가 먼저 말했다.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알고 있던 목소리가,”“이렇게 차가운 줄 몰랐네요.”“처음엔 다 그렇게 듣습니다.”“나중엔, 기억이 말보다 더 차갑죠.”그의 말엔 어떤 판단도 없었다.그는 유리의 분노도, 감정도, 침묵도그저 함께 머물러 주는 방식으로 받아주고 있었다.유리는 노트북을 덮었다.책상 위 커피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고, 방 안 공기는 밤의 온도처럼 건조했다.이우는 조용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의자는 아주 작게 삐걱 소리를 냈다.“오늘은 무언가 무너진 날이에요.”유리가 말했다.“회장이란 사람의 겉모습?”“아니요. 나예요.”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분노를 오래 쥐고 있으면, 그게 자기 자신을 잠식해버리나 봐요.”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유리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차가운 손등. 그 위에 놓인 그의 손은 말보다 따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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