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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틈이 생기는 자리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5 10:14:35

이현은 요즘 잠드는 데 두 시간이 걸리고, 잠든 뒤엔 두 시간마다 깬다.

밤은 너무 길고, 낮은 너무 짧았다.

그가 느끼는 유리는, 정확히 손에 닿지 않는 거리만큼의 여인이다.

너무 가까우면 놓칠까 두렵고, 너무 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운.

오늘도 그는 다섯 번째로 휴대폰 화면을 켰다.

그녀의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는 답장을 받지 못하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익숙함이 아니라, 체념처럼.

[오늘은 좀 많이 생각났어요. 당신.]

그는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천천히 엎어두었다.

답장은, 내일쯤이면 올 것이다.

그는 그것조차 알고 있었다.

유리는 메시지를 읽고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화면만 켜서 확인하고, 손끝으로 화면을 천천히 내렸다.

그가 보낸 이전 메시지들도 차례차례 다시 읽었다.

그는 이제 거의 다 무너졌다.

말끝마다 감정을 흘리고, 보내는 말마다 해답을 바라고 있었다.

유리는 노트북을 열어 ‘사건 일지’를 새로 정리했다.

[단계 3 – 과거 유도 / 사건 언급]

[이현 심리: 애정 → 의존 → 두려움 → 죄책감 흐름 유도]

그녀는 커서를 깜빡이는 메모 위에 조용히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가 불안해지기 시작한 시점은 나의 침묵 이후. 그는 대답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고백을 통해 통제권을 되찾으려 할 가능성 높음. 그 순간을 역으로 사용한다.]

며칠 뒤, 유리는 다시 그를 만났다.

이번에는 그가 아니라 그녀가 먼저 제안한 약속이었다.

카페는 한산했고, 창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현은 머리카락이 다 젖은 채로 도착했다.

“왜 우산 안 써요?”

유리가 물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뛰어오느라.”

그는 웃으면서도,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눈빛이었다.

피곤해 보였고, 초조해 보였다.

그녀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 말했다.

“요즘 무슨 생각해요?”

“당신 생각이죠. 뭐, 달라질 게 있나요.”

“그 전엔요. 나 만나기 전에는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건 왜 물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당신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나 때문에 어떤 사람이 된 건지.”

이현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는 인간이었어요.

하기 싫은 일도, 책임지는 것도 싫어서 그냥 대충 살았죠.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엔 더 그랬고.”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너무 생각이 많아요. 당신이 말 한마디 하면 그걸 하루 종일 곱씹고, 답장 하나에 숨이 멎을 것 같고.”

그의 말은 절절했지만, 유리는 입꼬리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거 알아요?”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그런 감정이 오래가진 않아요.”

“그럼, 사라질 거란 말이에요?”

“아니요. 다른 감정으로 바뀌겠죠.

사랑이든, 집착이든, 아니면— 죄책감이든.”

이현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지막 문장을 일부러 또렷하게 말했다.

“언젠간 당신이 나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스스로 입에 담게 될지도 모르죠.”

순간, 이현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는 말없이 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냥요. 요즘 이런 생각도 하게 되더라고요.

당신이 날 만나기 전에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몰랐잖아요.”

그녀는 빙긋 웃었다.

이번엔 정말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이현의 마음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그날 밤, 유리는 다이어리를 열어 이렇게 적었다.

[이현 반응: 과거 언급 시 회피 / 아버지 사망 이후 감정차단성 생활]

[다음 유도 주제: 유진과 시점 겹치는 연애 / 익명 관계 / 책임 회피 유형 분석]

그녀는 펜을 놓으며,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마음속으로 새겼다.

조. 유. 리.

나는 누군가의 여자가 되기 위해 돌아온 게 아니다. 

나는 그날의 진실을 묻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의 죄를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자백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현은 그날 밤, 처음으로 자기도 모르게 한 여자 이름을 떠올렸다.

조유진. 그 이름은 그의 입 안에서 소리 내지 못한 채 맴돌았고,

어딘가 오래전 덮어둔 서랍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왜 갑자기 그 이름이…’

그는 침대에 앉은 채 머리를 감싸쥐었다.

유리의 말. 그녀가 건넨 질문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된 기억들을 두드리는 망치처럼 느껴졌다.

‘그때,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 질문이 가볍게 던져진 것이 아니라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유리는 그날 이후, 이현과의 연락을 일주일 넘게 끊었다.

답장은 하지 않았고, 전화는 받지 않았다. 그는 매일 메시지를 남겼다.

[무슨 일 있어요?]

[괜찮아요?]

[혹시 내가 무슨 말 실수했나요?]

하지만 그녀는 고요했다.

이제 이 고요함은 그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너지게 만드는 도구였다.

그리고 그 조용한 폭풍 속에서, 이현은 자꾸만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한 여자가 그를 찾아왔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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