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임신했어요.”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고, 말없이 내민 진료 기록은 현실을 박았다.그는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 한 번도 핸들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 여자는 사고를 당했다.‘내가 죽인 건 아닐 거야.’
‘아무도 나보고 책임지라 하지 않았어.’
‘그냥… 불행한 우연이었잖아.’
그는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아니, 믿고 싶었다.하지만 유리의 말이, 유리의 시선이 그 기억을 다시 꺼내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유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보고 싶네요.]
이현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답장을 보냈다.
[언제든요. 지금도 돼요. 꼭 봐요.]
그날 밤, 두 사람은 다시 마주 앉았다.
이현은 말없이 유리를 바라보다,처음으로 스스로 말을 꺼냈다.“내가… 당신에게 뭘 숨기고 있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냥… 그런 기분이 자꾸 들어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고, 그게 당신한테 곧 들통날 것 같은 이상한 예감 같은 거.”유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건 예감이 아니라, 기억이에요.”
그 말에 이현은 숨을 멈췄다.
그녀는 처음으로 조용히 그의 손등을 덮었다.“그 기억, 언젠간 말하게 될 거예요. 자기 입으로.”
그날 이후, 유리는 자신이 계획한 것보다 빠르게
이현의 안에서 죄의식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지금은 되묻지 않아야 했다.
묻는 순간, 그는 다시 방어적으로 변할 수 있다.지금은 조용히, 더 조용히 조이는 시간이었다.
다이어리에는 단 한 줄만 적었다.
[자백 직전 단계. 그는 과거를 잊지 않았다. 그는 그걸 알고 있다.]
이현은 자신의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는 걸, 늦게서야 자각했다.
그녀와 나눈 짧은 말 한마디, 스친 손끝의 체온,그 모든 게 머리가 아닌 심장과 폐를 먼저 흔들고 있었다.유리가 말없이 떠났던 일주일.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핸드폰을 들었다 놨고,메시지를 보내놓고 다시 지웠고, 보내지 않은 말들을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되뇌었다.그러다 갑자기 그녀에게서 도착한 한 줄의 문장.
[보고 싶네요.]
그 한 줄이 그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는 벽을 등진 채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이제는 말해야 할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유리는 조용히 이현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의 눈빛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거기엔 ‘무언가를 감추는 사람의 눈’이 아니라,‘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사람의 눈’이 있었다.그날 밤, 유리는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전… 아주 예전에, 어떤 여자와 일이 있었어요.”
유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맞췄다.“그녀가… 날 찾아왔죠. 임신했다고. 근데, 나는…”
말끝이 맺혔다. 그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손끝을 꼭 잡았다.
“그때 난, 그 말을 믿기 싫었고… 믿어도, 책임질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요?”
유리는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차분하고 단단한 목소리로.“그래서, 그냥 피했어요. 연락도 안 하고, 그날 이후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는 아주 조용히 그의 말을 덮듯 말했다.
“혹시 그녀를 당신이 죽였나요?”
이현은 눈을 감았다.
말없이, 아주 길게.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게… 내 잘못일까요?”
그는 그 질문을 진심으로 물었다.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감정만 끌어안은 채 물었다.유리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 위에 조용히 손을 얹으며, 그녀는 말 대신,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그날 이후, 유리는 일지를 새로 썼다.
[자백 1단계 돌입]
[사건 개요 – 여자 임신, 회피, 연락 단절, 사고사][심리적 인정은 완료 / 법적 자각은 미비]그녀는 글씨를 또박또박 눌러쓰며 중얼거렸다.
“다음은 ‘그날’이다.”
그날, 언니가 죽던 날.
그날, 전화기 너머로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던 날.그날을 꺼내야, 진실이 보인다.그리고 이현의 입에서 진짜로 ‘유진’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복수는 절반을 넘어선다.
하지만 지금은,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감정이 고개를 들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나는 기필코 검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널 무너뜨리고 말거야..
너의 입으로, 너의 죄를 말하게 만들 거야.”
창밖으로 느리게 아침이 흘러왔다.그리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도시는 조용히 일상을 준비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아침은 유리에게 어떤 평범함으로도 다가오지 않았다.긴 계절을 견뎌온 마음처럼, 그녀의 가슴속엔 여전히 한 사람이조용히 살고 있었고, 그 이름은 결코 잊히지 않는 방식으로, 그녀의 심장을 천천히 눌러오고 있었다.유진. 그 이름은 언제부터였을까,하루를 여는 입술보다 먼저 떠오르는 문장이 되었고,눈을 감는 밤마다 바닥에 스며든 물처럼 유리의 꿈을 적시곤 했다.이우는 유리의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내렸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오늘은, 말이 필요 없는 날이라는 것을.말보다 먼저
아침이라고 부르기엔 빛이 너무 흐렸고, 밤이라고 말하기엔 공기 속에 묘한 기척이 스며 있었다.창밖에서는 희뿌연 운무가 도시의 윤곽을 덮고 있었고, 그 위로는 말갛게 식은 하늘이 부서지듯 펼쳐져 있었다.그 시간, 유리는 아무 말 없이 영상 속 그 장면을 반복해서 되감고 있었다.프레임이 전환될 때마다 유진의 뒷모습이 다시 태어났고,그 안에서 유리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숨을 멈추곤 했다.그녀는 더 이상 영상 속 언니를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녀는 이제, 유진의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다.그날의 공기, 그날의 마음, 그리고 그날의 고요한 침묵.그녀는 알 수 있었다. 유진이 결심했던 마지막 말들.끝내 남기지 못한 문장들.그 말들 안에 담긴 두려움과 애착과 절망.
짙은 어둠의 끝에서 새벽이 고개를 들 무렵,방 안의 공기는 유리하게 식어 있었다. 창밖으로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았고,도시는 잠시, 무엇도 움직이지 않는 정적 속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그 조용한 새벽의 맥박을 따라, 유리는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책상 위 조명을 낮게 틀어놓은 채,그녀는 이우가 건넨 복구된 파일을 응시하고 있었다.파일 이름은 숫자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127_final’.유진이 사라지기 하루 전날.그 마지막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지 모를,결정적인 진실의 조각이었다.손끝이 마우스를 눌렀다. 영상이 재생되었다.흑백의 흐릿한 영상. 심리상담소의 내부.
조용한 저녁이었다.하늘은 흐렸고,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에는 축축한 기운이 감돌았다.햇살이 지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기 전의 그 어정쩡한 회색빛.세상의 색채들이 점점 흐릿해지고, 경계가 무너지는 시간.그 사이에 유리는 앉아 있었다.고요한 방 안, 창문은 닫혀 있었고 커튼은 젖혀져 있었다.그녀의 눈은 오래된 녹음 파일의 자막을 따라가고 있었지만,마음은 이미 그날, 그 순간의 숨결 속으로 깊이 잠겨 있었다.“조유진 씨, 그만두세요. 이 이상은”그 목소리는 분명 도훈이었다.하지만 말의 끝은 흐려졌고,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급하게 숨을 눌러 삼킨 것처럼 어딘가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문장이었다.유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늦겨울의 아침은 여느 계절보다 조용하고,그 고요함은 무언가를 숨기기엔 오히려 더 적막했다.해는 아직 창문을 넘지 않았고,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세상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유리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밤새 덮어두었던 사건 파일을 다시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종이 위를 천천히 훑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눈동자는 어딘가 멀리 닿아 있었다.그 눈빛은 잊힌 이름들을, 버려진 시간들을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유진의 마지막 통화 기록. 그 페이지를 다시 들여다보며,유리는 숫자 하나, 초 하나까지 마치 생명의 리듬처럼 새겨 넣듯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무심히 넘겼던 다음 장. 한쪽 귀퉁이에 작게 메모된 통화 연결 지연 시간.
새벽이었다. 밤과 아침의 경계에서 잠시 머무는 그 짧은 틈.세상은 여전히 조용했고, 창문 너머의 어둠은 채 가시지 않은 채 조용히 유리의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불은 켜지지 않았다. 유리는 침대 머리맡에 앉은 채,두 무릎 위에 손을 모은 채로 긴 시간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어젯밤의 메일. 그리고 ‘강도훈’이라는 이름.그 이름 하나가 유리의 가슴 안에 다시 오래전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마지막 전화.”그 단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조유진이 사라지기 직전,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하지만, 그 통화를 ‘강도훈’이 끝냈다는 말은